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 개정판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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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책은 읽기가 망설여진다. 무언가 통찰력이 있는 듯한데, 막상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아니다.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가 아니라, 고민을 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잘 안 올 때가 많다. 그래서 몇 장을 못 읽고, 책을 덮고, 쉬게 된다.

 

쉬다가 또 읽어야지 하고 책을 편다. 정말로 아렌트의 책은 자세를 경건하게 만든다. 그냥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읽어서는 금세 졸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깊은 철학적 지식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우리에게 그의 책을 읽기 힘들게 하고 있다.

 

어쩌면 철학적 사유에 대한 연습이 부족한 나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 연습할 시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면 이러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근대 초기에 태어나서, 근대를 온몸으로 살아간 사람들 이야기라서, 전기문이겠거니 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단순한 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전기를 통한 철학적 사유, 정치적 사유라고 해야 할 듯한 책이다.

 

더군다나 처음 들어본 사람은, 그 사람의 전기를 간략하게 소개해도 잘 읽힐까 말까 한데, 이거는 그 사람을 그 사회에 집어넣고, 그 의미를 추적하고 있으니 더더욱 읽기에 힘들다.

 

여기에 나온 사람들 이름을 나열해 보면, 레싱, 로자 룩셈부르크,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벤야민, 베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랜달 자렐이다.

 

이 중에 적어도 내가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레싱, 룩셈부르크, 야스퍼스, 벤야민, 브레히트가 다니 이 책 읽기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지식의 얕음이 이런 데서 장애로 작용을 하고, 도전 욕구를 부추기고 있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어둠의 시대는 이 때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어둠의 시대라는 사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전기를 읽는 이유는, 이 책처럼 전기를 빙자한 철학적, 정치적 책을 읽는 이유는 내 삶을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이들의 삶, 즉 이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았는가를 참조하여, 이 시대에 나는 사회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찾는 목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적어도 이들은 어둠의 시대에 그 시대에서도 빛을 발하는 등불 역할을 했으므로, 이 등불들이 있었으므로, 어둠의 시대는 단지 어둠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지금 이 새로운 어둠의 시대에서 어떤 삶, 어떤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적어도 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속으로 고립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 우정 또는 인간애라고 하는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런 무기를 지니기 위해서는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통찰력을 갖출 수 있는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은 명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이 준 긍정적인 힘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어둠 속에 묻힌 삶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는 철학자는 철학으로, 문학자는 문학으로,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간애에 바탕을 둔 우정으로 돌파해나가야 한다는 사실.

 

브레히트 부분에서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결국 시로써 물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렇담 어둠의 시대를 살아간 우리 시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를 적용시키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란 천상으로 날아오르려는 존재이기에 현실의 중력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적용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그들의 시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잣대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가 현실에 어떻게 대응을 해서 현실을 넘어선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느냐 하는 잣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면, 결국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을 때 사회의 변혁을 이끌 수 있으면, 이럴 때 어둠의 시대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고 본다.

 

이 책.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다 읽을 필요도 없다. 사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인물을 가지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선, 뒷부분에 있는 헤제논문을 읽어라. 그러면 조금 틀이 잡힐 수 있다. 그 다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읽어라. 그 인물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과 중첩시키며 된다. 

 

어둠의 시대, 해제논문에서 우리나라도 이러한 책을 쓰는 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못지 않은 어둠의 시대를 겪었다. 많은 인물들이 그러한 시대 등불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 번 시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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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 - 어떤 ‘삶’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김진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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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 하면 4대강 사업을 반대한 국회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논리적으로 4대강 사업의 허구성을 알린 국회의원.

 

아니 그 전에 건축가로서 알려져 있다.

 

나역시 김진애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오래 전에 읽은 "이 집은 누구인가"의 지은이로 건축가로 알고 있었다. 상당히 인문학적인 지식이 풍부한 건축가로.

 

만만한 건축가가 아니구나 싶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역시나 했다.

 

그는 한나 아렌트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 우리나라에서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꽤 있다고 하는데... 김진애도 그 중 한 명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을 빌려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만큼 이 책은 아렌트에게 헌정된 책이라고 봐도 된다.

 

이 책은 아렌트의 책에 나온 '활동적인 삶이란 노동, 작업, 행위'다라는 말에서 촉발되어 시작된다. 즉 인간의 삶이란 노동, 작업, 행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이러한 세 가지 편제에 맞게 이 책도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노동과 작업이 이 책의 전반부, 즉 김진애란 인간을 만들어내는 초기라면, 행위는 김진애란 인간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를 노동과 작업은 나를 완성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고, 행위는 나에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즉 공적인 삶에서의 나를 완성시키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김진애가 건축가가 되고, 도시 계획가가 되는 장면까지가 바로 '나'를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면, 이는 사적인 인간 완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사적인 완성과정에서 자신의 선택들이 결국은 자신의 운명이 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까지는 김진애의 개인사로 읽으면 된다. 물론, 여기에 계속 나타나는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있지만 말이다.

 

다음부터가 바로, 행위가 나오는 순간부터가 사적인 삶에서 공적인 삶으로, 사적인 인간 김진애에서 공적인 인간 김진애로 나아가게 된다.

 

행위를 소통이라고 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위한 노력이라고 한다면, 이 행위에 해당하는 가장 큰 개념이 바로 정치이리라. 그래서 그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아니, 우연인 듯하지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고자 했다면 필연적으로 밟게 될 과정이었다.

 

정치란 바로 공적인 삶의 대표 아니겠는가?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가기까지, 들어가서 어떤 자세로 어떤 활동을 했는가 하는 이야기들이 죽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하여 정말로 김진애가 쓴 "인간의 조건"에서 핵심부는 바로 뒷부분이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도, 사적인 삶의 완성에서 공적인 삶의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치를 비껴갈 수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눈 감고 피하려 피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김진애처럼 국회로 들어가 정치와 즉 인간의 공적인 행위가 직접 맞닥뜨리지 못한다 해도, 우리 역시 너무나 많은 정치적인 행위들을 할수가 있다.

 

그러한 정치적인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공적 인간으로서의 우리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

 

그래 우리도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말처럼 "어떠한 '삶'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에 관심을 가지고, "가치"를 추구한다면, 우리 삶은 사적인 삶의 완성인 나의 완성에서 공적인 삶의 완성인 '우리'의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인간이게 만드는 인간의 조건이 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생계를 위한 노동, 자신의 완성을 위한 작업, 그리고 인간의 완성을 위한 행위. 우리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행위에, 공적인 삶에, 자기 성찰에 힘쓰는 사람이 되자.

 

국회의원 김진애, 건축가 김진애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인간됨을 위해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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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자서전 - 하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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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에 관한 길고 긴 여정을 끝냈다. 

러셀이 90이 넘어서도 사회 활동을 왕성히 했듯이 이 자서전도 길고 긴 글이었다. 

그렇다고 지루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지금 우리 시대와 긴밀히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친숙한 이름들도 많이 나오기도 하고. 

그가 자신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노망이 든 것 아니냐는 비난까지 감수하면서도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한 이유는 바로 이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해지고 있다.

"우리의 세상에서 희망을 지키려면 지혜와 정력이 필요하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부족한 것이 바로 정력이다." (560쪽)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자신이 할 바를 찾아 해나간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쥬(그의 공식 직함은 러셀 경, 즉 러셀 백작이다)를 실천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킨 참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한 말을 다시 인용하면.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전을 좇아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을 좋아했고, 더욱더 세속화된 시대에 지햬를 줄 수 있는 통찰의 순간들을 두고자 했다. 사회적으로는, 개인들이 거리낌없이 성장하는 사회, 증오와 탐욕과 질시가 자랄 통양이 없어 죽어버린 사회의 탄생을 그렸다. 이런 것들이 내가 믿는 것이며, 비록 끔찍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세상이 나를 흔들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563쪽) 

이런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평화를 위해서 러셀 평화재단을 건립하고, 핵전쟁을 반대하며, 베트남 전쟁 등 비도덕적인 전쟁에 대한 반대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의 태도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지금 시대에 살았더라면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도 반대했을 것이고, 무분별한 개발에 대해서도 반대했을 것이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 그들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가 지식인이게끔 만든 사회에 대한 빚을 갚는 일은, 사회를 조금더 희망적인 사회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자세를 지니고 행동하는 일이다. 

행동하는 지식인, 그런 사람에게는 모 광고에 나오는 말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오로지 자신이 할 일이 있다면 해야지 하고 하는 사람일 뿐이다. 

어지러운 시대, 러셀과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 세계에 희망을 주고자 애쓰는 지식인이 그립다.

삶의 자세를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 이 세상이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 세상을 조금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이 러셀의 자서전을 읽어보자.  

앞선 세대에 비슷한 고민을 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면 우리의 행동에 좋은 참고가 될테니 말이다. 

이른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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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자서전 - 상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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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란드 러셀.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철학자. 

그는 내게 수학자이자 철학자일 뿐이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넘어가는. 

촘스키를 만나기 전까지는. 

촘스키가 왜 러셀을 존경했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러셀은 말년까지도 진실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쳤다는 이야기에 러셀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 

자신의 분야에서 세운 탁월한 업적도 업적이지만, 그가 세상을 향해 한 발언들이 세상을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가 러셀을 읽어야 하는 이유. 

1872년에 태어났으면 우리나라가 개화니 마니 한참 갈등을 하고 있던 시대. 그는 이미 개화된 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가 근대화의 열병을 앓을 때 그는 근대화를 넘어선 사유를 하고 있었으니... 

부럽기도 하지만, 그것은 환경의 차이일 뿐이고... 

우리도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상당히 근대적인 사고가 싹트고 있었으니... 

서양 중심의 근대냐 아니냐는 논의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고. 다만 그가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출판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다면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는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나라는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싸움들이 일어나고... 

러셀은 이 과정에서 평화주의자가 되어, 1차 세계대전을 반대하고, 그로 인해 감옥 생활까지 한다. 물론 저명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특별감방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고 하지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감옥행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념을 계속 글로 발표하고, 연설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참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상)권이 1924년의 편지로 끝난다. 러셀이 52세가 되었을 때라고 해야 하나. 그 때 그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도 가보고, 중국에도 가본다. 그가 중국에서 돌아와 두 번째 결혼을 한 장면까지가 바로 상권이다.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아직은 러셀의 진면목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진실하게 사는가를 고민하고 실천한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상)권에서도  러셀의 삶의 자세는 잘 드러나 있다. 이 점이 우리가 러셀의 자서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서전의 편제가 자신을 합리화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실수했던 점, 고민했던 점, 자신의 생각을 바꾼 점 등이 잘 나타나 있기에 위대한 철학자이자 지식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어렸을 적 양친을 모두 여의고, 할머니 품에서 자랐기에 그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강했으리라 짐작이 되고, 지식에 대한 탐구욕으로 인해 수학과 철학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겼으며,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바로 그를 사회 참여 지식인이 되게 하였으리라. 

이제 그는 더 많은 분야에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한다. 참고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발표하는 것만 못 하다는 생각. 이는 자신의 책임을 저버린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바로 지식인의 자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나라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진실, 진리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발표하는 지식인이 몇이나 되는가. 우리는 러셀과 같은 지식인을 갖고 있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지식인의 전통이 있다. 아주 많다. 지금도.

부러워만 할 일은 아니다. 

이제 (하)권으로 가야 한다. 우리와 가까운 시대, 과연 러셀은 그 시대에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어떠한 실천을 했던가? 이 점이 촘스키가 러셀을 존경하는 이유가 되겠지. 

 

덧말 

자서전이라 러셀이 난 이렇게 살았다라고만 써도 될텐데... 러셀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한 내용보다는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더 많다. 그래서 가끔은 읽기가 끊기기도 한다. 전기문은 시간 순서로 주욱 읽어가는 맛이 있지 않은가? 주요 사건을 다룬 일들을 러셀이 정리하고, 그 말미에 그 시간 대에 해당하는 편지들이 주욱 붙어 있다. 

그러나 처음엔 읽기가 힘들었는데, 뒤로 갈수록 러셀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게되니, 이런 편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러셀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더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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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담는 시선, 최민식 - 우리시대 마이스터 3
최민식 지음 / 예문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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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사진]이라는 책이 최근에 발간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변화를 이끈 사진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또 퓰리처상 사진전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들을 보면 사진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서 폭탄을 피해(?) 달리는 어느 소녀의 모습이 찍힌 사진과, 1987년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을 친구가 안고 있는 모습, 그리고 걸프만에서 기름에 흠뻑 젖어 있는 새의 모습인데... 

하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해 냈고, 이한열의 사진은 우리나라가 민주화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새의 모습은 석유로 인한 전쟁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인지를 알려주는역할을 했다. 

여기에 50년이 넘게 사람을 찍어온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최민식이다. 

최민식은 "나는 사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다. 사진으로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화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을 담기를 원한다. 그것이 내 삶이고, 내 사진에 담긴 구호다(142쪽)"라고  말한다. 

이런 철학으로 사진을 찍어왔기에 그는 독재정권시대에 사진으로 인해 엄청난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지닌 철학을 지키고 굳건하게 사진으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의 사진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고, "인간 중에서도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렌즈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사진의 램브란트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작품은 베토벤의 심포니에 비겨 "휴먼 심포니" 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어렸을 때 영향을 받은 밀레의 그림을 그는 사진 속에서 구현했다고 볼 수 있어서, 그의 사진은 사진으로 보는 밀레의 그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은 이유는 "사진을 찍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 평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서(77쪽)"이고, 그럼에 "그 안에 담긴 철학은 리얼리즘이(77쪽)"라고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찍은 이유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없는, 그들이 활기차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추구하기에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고 그들을 촬영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 꿈이 있었기에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런 활동이 지금의 최민식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최민식의 사상과 활동을 담은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의 출생에서부터 사진작가가 되기까지, 그리고 자신작가가 되어서 활동한 내용과 그의 사진에 담긴 사진철학, 인생관까지 모두가 담겨 있다. 

꼭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격동기에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감동을 준다. 

특히 사진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사진은 기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말, 그리고 꾸준한 노력만이 좋은 사진을 만든다는 그의 말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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