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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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를 꽂은 것은 남편이었다. 지난달 시아버지의 장례식 때 있었던 일이다.

큰일인데.”

남편은 자꾸 그 소리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뭐가 큰일이야?”

오늘 회사 사람들이 많이 조문 온대.”

그러면 감사하지. 다들 바쁜데 일부러 장례식에 와주시는 거잖아.”

회사에서 내 아내는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야. 내 동기나 상사도 우리 결혼식 때 말고는 당신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러고도 남지. 미안한데 노리코, 잠깐만 어디 좀 숨어 있으면 안 될까?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남편의 눈은 진지했다. 충격이다 못해 쓰러질 뻔했다. (19페이지)


역시 가키야 미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색이 그대로 녹아 있고, 뭔가 꾸미고 포장하려고 애쓰지 않은 적나라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런 거, ‘대변이 아니라 이라고 말하는 듯한. 언어의 순화 따위는 모른다는 듯 직설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게, 때로는 개운하고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 그대로 전달되니까. 작가의 이런 표현이 좋아서 계속 읽게 되곤 했다. 이 작품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고민하고 비난하는 시선을 가진 주제였다. 비만. 살이 찐다는 게 어떤 증상인지 그 면면을 들여다보고, 더 깊게는 비만의 원인을 찾아가면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49세의 노리코, 18세의 대학생 고기쿠, 대기업 사원 도모야, 10세 초등학생 유타. 네 명의 이야기가 차례로 들려오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다이어트 전문가 오바 고마리. 이들은 오바 고마리에게 상담을 의뢰하고, 믿고 따른다. 목적은 단 하나, 살을 빼기 위해. 평범함이나 보통의 체격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해서든 빼야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서, 인생의 제 길을 가기 위해서, 현재의 환경을 돌파하기 위해서. 어떤 이유로든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인생은 바뀌었다. 그들의 뚱뚱한 외모는 다른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사람 사이가 원만해지지 못하고, 불안감을 팽창시키고 자존감 하락을 불러온다. 주눅 들어 있고, 자기 인생에 관해 자기 의지로 보지 못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단순히 실수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 인생, 미래라는 커다란 삶을 파괴하는 일을 이대로 놔두고 볼 수는 없다.


오바 고마리는 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당연히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다이어트 전문가가 되었다. 누구라도 그녀에게 의뢰하면 다이어트 지도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선택받지 못한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가 정하는 순서대로 다이어트 지도를 해준다. 그녀는 어떻게 다이어트를 지도해주기에 이렇게 유명한 전문가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소설 속 네 가지 경우의 인물들은 너무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 49세의 노리코는 갑자기 찐 살 때문에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우울하다. 오랜 세월 예쁘다고 부러움만 받으며 살아왔던 그녀가 갑자기 살이 찌고 자신감 없이 살아간다. 18세의 고기쿠는 또 어떻고. 어렸을 적부터 그녀는 뚱뚱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좋은 가문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현대에는 맞지 않는 삶의 태도를 강요한다. 고기쿠는 파티시에가 되고 싶은데, 아버지는 여성스러운 삶만 강요하면서 그녀의 인생을 재단한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먹는 것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녀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면서 점점 더 자기 인생을 잃어버린 채로 먹기만 하고 살만 찐다. 도모야는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채로 병원에 누워있다가 깨어난다.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란다. 자기의 뚱뚱한 몸이 적응되지 않는다. 그는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기억을 잃었다. 그동안 그는 뚱뚱한 사람을 혐오하면서 자기 관리를 못 한다고, 누구라도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고급 학벌, 돈이 많은 사람, 외모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있는 삶을 아버지에게 배우고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어떤 모습인가? 자기 절제를 못 하고 먹어대는 것 말고는 그의 현재에 아무것도 없다. 10세의 유타는 뚱뚱하다고, 아버지가 없다고, 가난하다고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학교 폭력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버려진 오바 고마리의 책을 읽고 그녀에게 다이어트를 의뢰하기에 이른다.


다이어트를 이야기하기 전에, 왜 우리는 날씬한 몸에 시선을 가둘 수밖에 없는지 묻고 싶을 거다. 미모가 힘이 되는 세상에서 누구라도 갖고 싶은 날씬한 외모. 그러니 날씬하고 예쁜 외모를 갖고 싶은 건 당연하다. 일인자의 권력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경쟁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건강을 위해서 뚱뚱한 몸을 갖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외모는 무시할 수 없었다. 나부터도 이들의 고민과 상황에 빠져들면서 다이어트의 절실함에 저절로 공감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누군가는 가족 구성원의 뚱뚱한 몸이 부끄러웠고, 뚱뚱한 몸을 가진 여자가 두 배 이상의 나이 차이 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뚱뚱한 몸을 비웃는 것으로 별명이라고 부르고. 어느 상황 하나 상처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언어폭력은 물론이고, 신체적 폭력을 당하거나 보면서 자라온 시간은 누가 보상해주고 달래줄 수 있을까. 마음의 고통을 달래려고 애쓰는 방법이 먹는 거였다. 하루가 다르게 몸무게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위로였다. 식구들 몰래 방에서 먹고, 저녁 늦게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며 부실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들. 마음의 허기를 지울 수 없어서 폭식과 조절이 안 되는 먹는 행위가 계속된다.


그럼 이들의 고민과 다이어트를 오바 고마리는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었을까. 그녀가 의뢰를 받는다면서 홍보한 문구에 이런 게 있다. ‘마음의 살도 빼 드립니다.’ 마음의 살? 도대체 이게 뭘까 싶었다. 마음에 찐 살이란 무엇이란 말이냐. 물리적으로 먹어대니까 찐 살도 문제겠지만, 그들의 마음에 쌓이고 쌓인 슬픔과 고민이 마음의 살이 된 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정작 문제는 숫자로 보여주는 몸무게가 아니라 마음에 쌓인 무게였다. 고마리는 각각의 상황과 마음에 딱 맞는 처방전으로 그들의 다이어트(?)를 돕는다. 적당한 식사 조절과 운동 같은 누구나 다 아는 방식이 아니면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그들이 새로운 마음과 절제력으로 현실을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간절함을 불어넣는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대적인 이유로 몰아친다.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다. 마치 거침없는 인생 멘토 만난 것처럼, 누구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들의 삶을 솔직하게 마주하며 들춰낸다. 그렇게 지금 상태를 민낯으로 마주했을 때 보이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러니 안 볼 수가 없지. 그렇게 보고 나면 더는 외면하던 가슴 속 진실을, 인생의 변화를 일으킬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절대.


누구라도 비슷하게, 이렇게 다이어트 책을 내놓고,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믿을만한 다이어트 방법을 전파하는 그녀의 외모를 상상했을 것이다. 날씬하고 예쁜 얼굴에, 누가 봐도 당당한 여성일 거로 여겼다. 실제로 이들이 오바 고마리를 만났을 때의 충격은 컸다. 그녀는 평범한 아줌마처럼 하고 나왔다. 펑퍼짐한 몸은 의뢰인이 아니라 그녀가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사람을 믿고 다이어트를 하라고? 그런 불신은 고마리와 몇 차례 다이어트 수업을 진행하다가 보면 다 사라진다. 말 그대로 전문가였다. 그녀 자신이 어떤 이유로 살을 빼준다는 책을 내고, 이들에게 다이어트 수업을 진행해주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고 그 누구보다 더 진실한 다이어트 수업을 진행해주었다.


단순하게 음식 조절과 운동을 말하는 다이어트가 아니어서 좋았다. 그들이 살이 찔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이유를 찾아내어 마음을 다잡아주는 것으로 다이어트를 완성하게 했다. 정상적인 식습관을 되찾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이어트였다는 것을.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상황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면서, 살면서 부딪힐 그 문제들을 고마리의 다이어트 수업으로 치유하게 한다. 살이 쪘는데 마음이 어수선해지는 이유, 그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이어트가 될 것이다. 마음이 아프니 몸도 아파지는, 사람의 슬픔을 달아나게 하는 마음 다이어트 처방을 내리는 오바 고마리야말로 진정한 전문가였다.




#당신의살을빼드립니다 #가키야미우 #지금이책 #다이어트 #비만

#소설 #문학 ##책추천 #물만먹어도살쪄요 #마음의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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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0-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문제가 있으면 먹는 걸로 풀기도 하겠지요 몸보다 마음을 먼저 돌보고 운동도 하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 알아도 하기 쉽지 않은... 마음의 살 먼저 빼기...


희선

구단씨 2021-10-11 21:56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런 편인 것 같아요.
마음에 문제가 생기니 막 먹다가 거의 안 먹다가...
소설 속에서 처방하는 마음의 살 빼기가 정답이 아닐까 싶네요.
 
에피타프 도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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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식을 다 담아놓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소설로 시작해서 희곡, 논픽션, 에세이가 혼재한다. 책 소개 글의 설명 그대로 말하자면 크로스오버 장르라고. 이런 방식의 책을 처음 접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익숙하지도 않다. 한참을 읽다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페이지를 넘기다가, 도쿄의 시간을 본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도쿄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한다.


화자인 작가 K에피타프 도쿄라는 집필 중이다. 자기 자신을 흡혈귀라고 말하는 요시야를 만나서 도쿄의 곳곳을 누빈다. 이유는 도쿄의 묘비명을 찾기 위해. 묘비명이라는 뜻의 에피타프는 이 소설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야기 방식도 특이하다. 작가 K가 집필 중인 희곡 에피타프 도쿄는 여성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이고, K와 함께 도쿄의 묘비명을 찾아다니는 요시야는 스스로 흡혈귀라고 말한다. 소설은 그 이야기를 각각의 다른 시선으로 서술하면서 도쿄의 시간을 퍼즐처럼 맞추게 하는 듯하다. 작가 K가 일상을 지내면서 B와 요시야와의 시간을 보여주는 Piece는 과거 회상과 기억 속 이야기들을 펼쳐놓는다. 요시야의 시선으로 도쿄의 시간을 풀어내는 drawing은 추억 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다. 작가 K가 집필하는 희곡 <에피타프 도쿄>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는 기분으로 읽게 된다.


이야기들은 서로 교차하면서 들려오는데, 서로 다른 내용, 장르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만큼 종이 색을 다르게 구성한 방식은 이들의 이야기가 입은 색과 잘 어울린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듯한 K 종이 색 이야기, 과거 기억 속의 온도를 꺼내오는 듯한 요시야의 청색, 작가 K가 완성해가는 희곡의 복잡한 느낌이 드는 보랏빛. 세 가지 색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도 역시 다 알지 못할 도쿄의 면면을 마주한다. 때로는 익숙하고 때로는 낯선 지역을 여행하듯 돌아다니는 K의 이야기는 도쿄의 다양한 시간을 불러오지만, 그 시간 속의 모든 것이 다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슬픔과 고통으로 남아 있을 그 순간 역시 도쿄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보고 들어왔던 순간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나는 것만 같다.


도시의 과거를 떠올리다가도, 그 변화에 놀라기도 한다. 미래의 도시는 또 어떤 모습일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도시는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그 변화의 흐름 역시 점점 빨라진다.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는 도시의 변화에 가속도를 붙인다. 하지만 이뤄내야만 했던 올림픽은 개최되었고, 성공적이라기보다는 경기 그 자체를 보게 하는 올림픽이었다. 관중 없이 치러지는, 코로나로 참가 자체를 못 했던 선수들까지 생긴 대회였다. 평소 지진의 위험에도 대비해야 하는 도시 도쿄에서 많은 어려움을 안고 역사를 이어왔다. 거기에 이 책에서 마주하는 도시의 비밀 같은 분위기는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등장인물들 역시 캐릭터가 다양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다른 장르를 한 권의 책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가는 인물이 요시야였는데, 도쿄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를 바라보는 느낌은 참 묘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흡혈귀라고 말하며 도쿄 곳곳을 누볐을 그의 시간을 같이 생각한다. 과거의 그가 살았던 곳에서 느끼는 그리움은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몇 번을 죽었으나 이전 생의 기억을 다 안고 살아가는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흡혈귀인데 다른 사람의 피를 탐내지도 않고, 자기가 죽은 장소에 가면 그때의 시간을 느낀다. 그는 왜 지나쳐왔던 그의 생을 다 기억하는 걸까. 도시의 변화를 그대로 새기면서 놀라기도 하겠지만, 그 변화를 도시의 것으로 인정하고 다 받아들이는 듯하다. 요시야의 말대로 도쿄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와 함께한 도쿄의 여정은 흐릿하면서도 씁쓸했고, 변화가 안타까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미래의 어느 날 우리가 기억할 오늘도 그러하겠지...


도쿄의 묘비명으로 어떨까?

'그때가 좋았다,'

도시는 언제나 과거가 더 나았다. 헤이세이 시대에는 쇼와가, 쇼와에는 고도성장기가, 다이쇼의 데카당스가, 메이지의 청운의 뜻이, 가장 독창성이 풍부했고 세련된 문화가 정점을 이루었던 에도 시대가.

하지만 필자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실제의 묘비명이 아니라 <에피타프 도쿄> 쪽이다. 단서가, 힌트가 어디 없을까. (35페이지)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이 모호한 게 거슬릴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한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도시의 모습에 많은 생각을 불러오는 이야기다. 빠르게 과거가 될 오늘, 지금이 얼마나 진실한 모습으로 남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미래의 임무라면, 기억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 건 과거의 노력이다. 지우려고 하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속에서 현재와 미래가 공존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도시의 진짜 모습은 바로 이것일 테다. 시간은 흐르겠지만, 끊어지지 않을 기억 속에 머무는 곳. 비밀 같은 도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 여행을 마친 기분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로 한 발 더 들여놓고 싶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펼쳐보고 싶은 이야기다.


#에피타프도쿄 #온다리쿠 ##책추천 #비채

#소설 #미스터리 #도시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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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수집노트 - a bodyboarder’s notebook
이우일 지음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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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곧 태양에 이끌리듯 파도가 함께 올라온다. 내 앞으로 다가온 높게 솟구친 파도가 해를 가린다. 그 파도의 그림자 속에 내가 있다. 나는 파도 그늘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간다. 파도를 뚫고 나오면 여지없이 눈이 부시다. (65페이지)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간절한 뭔가를 행동에 옮기고 이어갈 때, 미칠 정도가 아니라면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말이다. 작가의 도전이 보여주는 것은, 중독도 즐기면 행복하다는 거였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어도, 아직은 서툰 초보여도 즐거우면 된다. 작가의 전작에서 이미 부기보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그 부기보드에 온전히 몰입한 시간을 들려준다. 얼마나 재밌게 열정적으로 부기보드를 대하는지, 웃음도 나고 부럽기도 하다. 얼마나 좋아해야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중독이라도 말해도 좋을 만큼, 온몸으로 부딪히는 즐거움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작가가 몸 쓰는 일을 얼마나 해봤을까 싶을 정도로, 본인도 인정할 것 같지만, 언제나 책상 앞에서 머문 시간이 많았을 거다. 그런 그가 하와이에서부터 부기보드에 빠져 한국의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파도타기. 나도 작가의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부기보드를 알게 되었는데, 말로만 들어서는 잘 몰라서 초록창에 검색해봤다. 그동안 봤던 서핑보드보다는 짧은, 작가의 부기보드 타는 법으로 보면 오리발까지 착용해야 하는 서핑. 원래 이름은 보디보드, 작가가 선호하는 별칭 부기보드로 부른다. 엎드려서 보드에 몸을 밀착한 자세로 파도를 즐기는 스포츠라고, 안전하다는 게 장점이기도 하단다. 그걸 배워서 즐기는 작가의 표정을 상상해봤는데, 좋아하는 장난감 하나 발견하고 종일 그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않는 집념을 보여주는 듯했다.


파도타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파도를 기다리는 끈기와 체력을 길러야 했다. 어떤 파도가 좋은지 알아채는 능력도 필요했다. 그 넓은 바다에서 혼자만 파도를 타는 게 아니니, 주변의 다른 서퍼들과의 소통하고, 바다 밑의 상태도 살필 줄 알아야 했다. 뭐든 쉽지 않겠지만, 특히나 바다는 보이는 그대로 다는 아닐 듯하다. 무엇보다 내 눈에는 위험해 보이는 요소가 많았다. 그런데도 작가는 그 짜릿함에 바다를 즐기고 파도를 탄다. 어느 정도인가 하며, 장롱면허를 밖으로 꺼내주기까지 했단다. 30년을 운전하는 아내의 옆자리에 탔던 그가 파도를 타기 위해 운전을 한다! 꿈에서까지 파도가 나온다고 한다. 노년의 삶을 바닷가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고 싶다니, 이 정도면 미치게 좋아하는 거 아닌가? ^^


파도를 탄다는 건 자연과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양과 색이 끊임없이 바뀌는 하늘, 그 하늘에 아름다운 선을 그으며 날고 있는 물새들을 물 위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는 것. 마침내 도착한 파도에 오르면 다른 하찮은 욕심들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 물을 가를 땐 자신이 바다에 살고 있는 작은 생명체처럼 느껴진다는 것. 파도를 읽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 파도타기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165페이지)


그가 파도를 따라다니던 시간 그대로 느껴진다. 어떻게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는지 들려줄 때면 그의 흥분이 그대로 전달된다. 파도타기는 즐기면서 할 수도 있고, 시합처럼 경쟁할 수도 있다. 어떻게 즐기느냐는 그 파도를 타는 사람 마음대로. 배우면서 마음이 급할 수도 있지만, 목적은 파도 타는 것이니 서툰 것도 괜찮고, 능숙하게 타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니겠나. 천천히 배우는 마음으로 파도를 타고 싶다는 여유로운 마음은 어딜 가고, 파도를 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는 경쟁하는 자세로 파도를 타는 자신을 발견한다. , 이 마음 알 것 같다. 마음은 느긋하게, 잘 타게 되기까지 천천히 완벽하게 파도를 대하고 싶은데, 어느 순간 마음보다 몸이 앞서 파도를 대하고 있는 걸 또 어쩌겠나. 옆에서 그런 남편을 보는 아내의 표정이 어떨지.


여름에 실컷 즐기면 될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날씨 좋고 파도가 괜찮을 때 실컷 타면, 겨울의 추운 바다에서는 좀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의 바다에 빠진다. 그의 서핑 이야기로 알게 되었는데, 겨울의 바다가 추울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모든 취미가 장비빨인지는 모르겠으나, 부기보드 역시 장비가 중요했다. 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게 두툼한 슈트도 필요했다. 손이 시리니 장갑도 필요하겠지. 마치 육지 위에서와 똑같이 바다에서도 서 있는 느낌이다. 물이 무서워서 여름에도 물 근처가 아니라 차라리 나무 그늘로 피신하는 걸 선호하는 내가,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성으로 부기보드를 배운 것만 같다. 부기보드를 시작하고 즐기면서 차곡차곡 쌓은 작가의 시행착오가 파도를 즐기려는 이들에게 실전 교과서가 될지도 모르지. ‘이렇게만 배우면 파도타기 기본은 합니다.’ 뭐 이런 진심 어린 조언 같은? 읽는 순간마다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3초짜리 다짐을 할 정도였다.


난 여전히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즐겁고 행복하지만, 이젠 거기에 다른 행복이 추가되었다. 온통 파도타기에 관한 것들이다. 후회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인생의 후회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183페이지)




그동안 작가의 그림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손그림이 아니라 아이패드의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가 그림의 변화를 도전한 것처럼, 그의 부기보드 사랑도 도전이었겠지. 이만큼 나이를 먹고 가능할까 싶은 것을 시도하면서 보여줬고, 좋아하는 것을 시도하고 즐기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증명했다. 파도타기는 그의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도전으로만 머물지도 않았다.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바다 위에서 숨을 고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말한다. 바다에서 상어만큼이나 위협적인 존재는 해파리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즐기고 공유해야 하는 바다를 오염의 장소로 만들기도 하는 사람을 원망한다. 바다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지구를 살아가는 모든 생물이 함께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망각하는 이들에게 잔잔히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아내와 함께 즐기는 부기보드라고 했다. 그의 아내가 즐기는 방식이 작가와 똑같지는 않지만, 상관없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면 되니까. 즐긴다는 게 뭔지, 도전이 삶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필요한 많은 용기를 배우는 순간이었다. 누구보다도 파도를 사랑하고 즐기는, 지금보다 더 능숙하게 파도를 타는 부기보더 작가의 다음 이야기도 들려오기를. ^^




#파도수집노트 #이우일 #서핑 #부기보드 #보디보드 #파도타기

#에세이 ##책추천 #비채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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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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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이 할머니에게 듣는 이야기를, 그저 흘러간 과거를 소환하는 정도로 여겼다. 나이 든 사람이 습관처럼 하는 말, 나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왔네 하는 고릿적 이야기 말이다. 이십 년 동안 못 만나고 살아온 사이에서 등장하는 과거는 할머니의 일방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것으로 들렸다. 할머니와 엄마의 끊어진 관계를 핑계 삼아 들려주려는 것은 아닌가 했다. 이혼하고 시골로 내려간 지연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고, 혼자였지만 나름대로 상처를 극복하려는 지연만의 방식은 누가 봐주지 않았다. 그때 만난 할머니, 오랜 세월 속 짧은 기억에 머문 할머니가 지연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깊었다. 더는 슬픔으로 머물러 있지 않게 하는 힘. 누구 탓도 아니라는, 그러니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는 위로였다.


백정의 딸이어서 외면당하고,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혼인하고,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못했다. 남자가 있는 여자의 인생만이 인정받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부딪히고 겪어내는 것만이 답을 찾는 방법이었다. 충분히 사랑을 주지 못한 딸은 엄마와 데면데면해지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그 사이에 있는 지연 역시 엄마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 모녀의 관계가 유전처럼 흘러온 것 같지만, 사실 덜 고통스럽기 위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었다. 지연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연히 할머니에게 그 집안 여자들의 역사를 들으면서 그녀의 마음도 변한다. 만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프지 않으려고 피하기만 했던 시간이 삶을 회복시키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처음에 자기 삶이 나아지고 있는지 스스로 묻던 지연은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지연은 변화한 삶을 찾는다. 엄마의 말처럼 하나하나 맞서지 않고 그냥 피하며 사는 게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님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는다.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여자이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녀들 때문이라며 비난받았다. 그럴 때마다 자책은 쌓이며, 자기 탓으로 돌리고 판단한다. 이번 생은 틀렸다고,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면서, 이럴 바에는 왜 태어난 거냐고. (지연의 엄마 미선이 할머니에게 했던 말처럼, 자기가 없었으면 할머니 인생 더 편하지 않았겠느냐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살아가는 동안 쌓일 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전하는 이야기로, 듣는 지연이가 있기에 과거와 지금이 이어지면서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가난과 고통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여자여서 핍박받는 인생을 건네주고 싶지 않았던 노력이었다. 보고 싶고 그리운, 아프지만 용기 있게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밝음이었다고 증명한다. 과거로부터 흘러와 오늘의 인생에 뿌리내린 삶의 방향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과거를 들으면서 현재를 본다. 세상의 폭력과 무시에 넘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녀들은 서로를 지탱하며 슬픔을 넘는다. 여자로 살아가는 게 한없이 어두웠던 시대에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건 어떤 건지 그대로 보여주는 이들이다. 삶을 놓고 싶을 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는 이가 옆에 있다는 건 기쁨이다. 가족에게도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꺼내놓을 수 있는 상대,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 할머니와 희자, 엄마와 멕시코 아줌마, 지연과 지우의 관계는 그래서 값지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 살아가는 용기가 된다는 걸 증명한 이들이었으니.


모계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100여 년 역사는 슬픔을 넘어서 빛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픔을 겪고 나서 내 것이 된 삶의 흔적들은 이제 어둡지 않았다.


#밝은밤 #최은영 #문학동네 #소설 #한국소설 #문학 ##책추천 #여성4#100년의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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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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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거예요. 요리를 하지 않는 당신도 그 정도는 하겠죠. 버터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음식이에요.”

(중략)

버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차가운 채로 넣어요. 정말로 맛있는 버터는 차갑고 단단한 상태에서 식감과 향을 맛보아야 해요. 밥의 열기로 바로 녹으니까 반드시 녹기 전에 입으로 가져가야 해요. 차가운 버터와 따뜻한 밥. 일단 그 차이를 즐겨요. 그리고 당신 입속에서 두 가지가 녹아서 섞이며 황금색 샘이 될 거예요. , 보이지 않아도 황금색이란 걸 아는, 그런 맛이죠. 버터가 엉킨 밥 한 알 한 알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마치 볶은 듯한 향기로움이 목에서 코로 빠져나가죠. 진한 우유의 달콤함이 혀에 감기고…….” (39~40페이지)


아직 밤 10시다. 집 근처 마트 문이 열려 있다면 좋겠다. 처음 이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으라는 문장은 무슨 주문 같았다. 신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만 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안 되겠다. 주방 수납장을 여니 즉석밥이 있긴 하다. 잠깐 고민했다. 갓 지은 밥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나. 밥 한 공기 분량의 쌀을 넣고 급속 취사를 누른 후에,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동네 마트에 갔다. 브랜드도 모르겠는데 버터가 있긴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와서 계산하고, 집으로 오는 시간 동안 밥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전기밥통 근처를 서성이며 취사가 끝났다는 알림음이 울리자마자 밥을 덜고, 김이 나는 밥 위에 버터를 얹고 간장을 한 숟가락 정도 넣어주었다. 살인 용의자 가지이의 말처럼 일단 차가운 버터와 뜨거운 밥을 바로 입속에 넣고 그 두 가지가 따로 놀다가 하나로 합해지며 황금색 샘이 솟는 느낌을 맛보고, 그다음에는 잘 비벼서 먹어보는 시간의 경건함. 밥이 뜨거워서 그런지 버터와 간장과 밥은 아주 잘 비벼진다. 버터를 밥 위에 얹은 그 순간부터 풍기는 고소하고 부들부들한 버터 냄새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코에서부터 고문을 일으키던 순간을 이겨내고 드디어 한 숟가락 입으로 밀어 넣은 그 느낌은, , 이래서 밤에 뭘 먹으면 안 되는데, 하는 후회를 남김과 동시에, 향기를 먹는다는 게 뭔지 새삼 놀라면서, 다 먹지 않아도 채워지는 이 포만감은...


수도권 연쇄 의문사의 가해자로 알려진 가지이 마나코를 취재하려던 주간지 기자 리카는 벽에 부딪힌다. 아무리 해도 그녀가 만나주지 않는 것. 친구 레이코와 얘기하던 중 가지이가 관심 가질만한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더니, 가지이는 관심을 보인다. 바로 음식 이야기와 레시피. 한물 간 것 같은 이 사건에 리카가 왜 흥미를 보일까 싶어 독자인 나도 궁금했다. 가지이는 30대 여성으로 무직이고 주거도 불분명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던 이유가 그녀의 외모였다. 100이 넘는 몸에 아름답거나 젊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 몇 명의 남성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고, ‘꽃뱀이라고 여겼던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가지이의 블로그에는 맛있는 음식과 사치스러운 것들로 넘쳐났고, 보이는 것 뒤에서 있던 그녀의 이미지를 사람들은 마구 상상했겠지. 리카는 이 사건을 다른 방향에서 다루고자 했다. 가지이가 꽃뱀처럼 남자들을 대했던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과 가지이를 둘러싸고 계속되는 여성 혐오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가지이의 이야기를 듣는 게 먼저인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접근하면서 가지이와 만나고 이야기를 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리카는 처음 의도와 다른 방향의 변화를 맞이한다.


일본을 뒤흔든 꽃뱀 살인사건이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꽃뱀이란 단어에서 가해자의 이미지를 연상했을 것이고, 막상 마주한 가해자의 외모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로 공격(?)당한 듯한 충격에 한동안 멍했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미끼로 남자들에게 10억 원이 넘는 돈을 갈취했다고, 그중 3명은 자살로 위장하여 교묘하게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우리가 가진 꽃뱀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름다운 외모, 예쁜 얼굴, 남자를 존중하고 위하는 듯한 말솜씨와 태도 등. 상대가 빠져들지 않고는 안 될 정도의 매력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가지이의 외모 묘사도 그렇지만, 실제 사건에서 사람들은 이 여자가 사기 칠 정도가 아니라고, 아니, 이 여자의 외모에 사기를 당할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도대체 그녀의 매력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형선고를 받고 구치소에 수감 중이면서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결혼도 했다는 게 더 화제였다. 그러니 작가가 다시 독자에게 던져주는 이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건 독자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리카는 가지이의 환심을 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편지를 쓰고, 사생활도 들려준다. 나는 너와 이렇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바람을 보내면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지이와 남자들의 관계를 알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리카는 가지이가 부리는 마법에 빠져든다. 그녀가 말하는 레시피를 따라서 해보고, 그녀가 말하는 곳에 가서 그녀의 기억 속 음식을 먹고, 그녀의 고향에까지 가게 된다. 평소 식사를 잘 챙기지도 않고 음식은 더더욱 하지 않은 리카가, 어느 순간 손수 밥을 해 먹고 직접 해서 먹는 음식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한다. 마른 체형이었던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건 당연했다. 그 중심에 버터가 있다. 가지이의 말대로 에쉬레 버터를 넣은 버터간장밥으로 시작된 리카의 식사는 한없이 발전하고 늘어난다. 몸이 불어나니 점점 불안해진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옷이 좀 안 맞나? 예쁜 옷을 입을 수 없어지나? 그러면서도 편안해지고 당당해지는 마음이 생기는 건 무슨 일인지.


어느 시선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할까 고민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대충의 내용은 알고 있기에 그 이야기 곳곳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나 싶었다. 마치 가지이에게 조종당하듯 따라서 하는 리카의 행동을 보는 게 불안하기도 했지만, 리카에게 찾아오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흥미롭기도 했다. 가지이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리카는 변한다.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실제 가지이 사건의 피해자들이 무엇을 바라고 가지이를 만났는지, 가지이가 어떤 매력으로 피해자들을 사로잡았는지 듣게 되었을 때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녀가 집밥으로 피해자들을 사로잡았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남자들이 바라던 어떤 여성상을 떠올리게 된다. 외롭게 살다 보니 자기 노후를 같이 봐줄 사람이면 외모가 무슨 상관인가 싶은 남자들, 집밥을 해줄 가정적인 여자라면 그 누구라도 괜찮다는 남자들의 바람은 그녀를 무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자와 여자가 나뉘어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지이는 자기 몸을 사랑했다. 타인의 시선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행복이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질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 순간에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면 돼. 귀를 잘 기울이고, 내 마음과 몸에 물어보는 거야. 먹고 싶지 않은 건 절대 먹지 마. 그렇게 결심한 순간부터 몸도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할걸.” (141~142페이지)


정말 가지이가 그 남성들을 살해했을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게 되지만, 어느 순간 가지이가 살해를 했는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게 됐다. 그녀가 먹는 음식, 그녀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 그녀가 성장하던 시간 속의 진실들을 마주하면서, 그녀가 왜 음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 찾게 된다. 음식으로 시작된 이야기 같지만, 음식으로 교묘하게 감춰진 살인사건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랜 세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묻는다. 리카가 몸무게가 늘어나는 걸 무서워하고 먹는 걸 주저하면서 관리하던 몸, 리카의 애인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살이 찌자 팬을 거부하던 태도나 리카가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했던 말들, 살이 쪘다고 이지메 당하던 어린 소녀의 슬픔, 그런데도 남자들은 집안에서 여자가 정성 들여 차려낸 집밥의 환상을 가지고 사는 시간의 모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바라보는 여성은, 그들에게 돌봄을 행해줄 대상이었을 뿐이라는 게 이 사건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누구를 위해 요리하는가. 가지이가 상대를 위해 끊임없이 요리하고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했던 마음이 어떤 날 사라졌던 것처럼, 그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던가. 내가 먹고 싶으면 요리하고 맛있게 먹고, 맛있게 먹은 대가로 살이 쪘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 좋다면 그래도 괜찮은 일이지 않은가. 가지이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그것 때문에 찐 살을 사랑스러워하는 게 너무 강렬해서 이 소설의 내용이 아무려면 어떤가 싶을 정도였다. 가지이가 음식을 향해 품은 욕망의 결과물이 자기 몸이었으니, 그 몸을 사랑하는 가지이의 태도를 보면서 그녀가 가진 욕망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강한지 새삼 확인했다. 타인의 시선 따위 그녀의 욕망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향해 계속 가는 그녀의 마인드가 이렇게 부러울 수가... 리카의 변화와 성장이 가지이로 비롯된 것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발견한 정의는 이 책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드나들 수 있는, 언제나 열려 있는, 그런 집. 우리 몸도 그러하다.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원래 집이란 게 지붕이 있고 비바람만 피하는 장소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사는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방법을 정하면 되죠. 규칙에 얽매이면 오히려 만족스러운 물건을 찾을 수 없게 돼요.” (494페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버터 향이 머물러 있는, 그 부드럽고 향이 진한 고소함에 빠져서 나오고 싶지 않은 소설이었다. 온몸에 머물렀던 버터간장밥의 마법은 이 책을 다 읽고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버터 향처럼, 당신은, 나는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된다. 혹여라도 그렇게 먹은 것 때문에 내 몸의 변화가 신경 쓰인다면, 그건 건강을 염려하는 이유 때문이지 타인의 시선이나 고정관념 때문일 필요는 없다. 점심을 거른 내 허기에 버터간장밥 한 그릇 더 채워줘야겠다. 벌써 코끝이 고소하다.


#버터 #유즈키아사코 #이봄출판사 #소설 ##책추천

#연쇄살인사건 #요리 #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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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27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간장 버터 뜨끈한 밥이 !ㅎㅎ 이책은 아껴두고 읽으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방탄 커피를 마신후에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ㅅ^

구단씨 2021-09-27 23:0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사실 간장버터밥을 계속 먹을 수는 없었어요. 밥을 아주 조금만 덜어서 먹어봤거든요.
평소 먹는 양이면 절대 못 먹을 듯.
근데 이게 은근 계속 먹어지더라는... ㅠㅠ
느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중독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ㅎㅎ

희선 2021-09-28 0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 눈보다 자신이 좋은대로 살면 좋기는 할 테지만, 그게 잘 안 되기도 하지요 이런 생각해도 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버터 간장밥 안 먹어봤어요 이 책을 보면 한번 먹어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9-29 21:41   좋아요 1 | URL
그래서 힘든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잘 안 되는 마음이...
저는 이번에 버터간장밥을 처음 먹어봤습니다. 문장으로 드셔보시는 것도 괜찮아요. ^^

scott 2021-10-0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주말 메뉴로
간장 버터 밥 찜!👆^^

구단씨 2021-10-11 2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주말에는 김치볶음밥에 느끼하게 치즈를 얹어서 먹었습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1-10-0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0-11 2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날씨가 쌀쌀해졌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서니데이 2021-10-0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10-11 21: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이 책 추천합니다. ^^

희선 2021-10-0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 님 축하합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구단씨 2021-10-11 21:58   좋아요 0 | URL
연휴 잘 지내셨나요? ^^
비가 와서 그런지 쌀쌀해져서 금방 겨울 올 것 같은 날씨였어요...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1-10-0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축하드려요 ^^

구단씨 2021-10-11 21: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연휴 동안 책 많이 읽으셨나요?
책 읽기 좋은 날이었는데, 저는 한권도 못 읽었어요... ^^

thkang1001 2021-10-09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 님! 이 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연휴 보내세요!

구단씨 2021-10-11 21: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먹기만 하느라 살이 계속 찌는 연휴 보냈거든요.
계절이 바뀌려고 하는 듯해요. 건강 유의하세요. ^^

thkang1001 2021-10-1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제 건강을 걱정 해주신 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