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봄봄 ㅣ 한빛문고 3
김유정 글, 한병호 그림 / 다림 / 1999년 4월
평점 :
작년에 이곳 시에서 고전 100권을 선정했다. 그리고 올해부터 도서관에서 고전 같이 읽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참여자를 모집했다. 일단 전문가에 의해 선정된 고전이라고 하여 목록을 살펴보니, 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이 가득 있구나 싶었다. 익숙한 책 제목에 나도 모르게 필독서처럼 여겨졌으나, 선정된 목록을 보고 있자니 숨 턱 막히는 거다. 어려워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책도 있었고, 평소 한번은 읽고 싶었는데 의지가 약해서 시작도 못 하거나 완독하지 못한 책도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읽은 책이 몇 권 있긴 있더라. 100권 중의 열권도 안 되었기에 괜히 더 쪼그라드는 이 마음은 뭔지... 어쨌든 죽기 전에 읽어는 봐야지 하는 이상한 다짐 같은 게 생기긴 했는데,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어서 엄두가 안 나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고전 같이 읽기 수업이 진행된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 달에 한 권이면 해볼 만하지 않나 싶어서 신청했다. 신청자가 많았나 보다. 생각보다 일찍 마감되었고, 다행히 1월부터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김유정의 작품 『봄봄』은 선정된 100권 중 한권이다. 올해의 고전 수업에는 없는 목록이지만, 나는 그 유명한 점순이와 그녀의 아버지가 너무 궁금했다. 이미 알겠지만, 이 책은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다. 중고등학교 문학 수업에서 종종 들어왔지만,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게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자세히 기억이 안 남). 내용은 간단하다. 장인이 자기 딸 점순이와 혼인시켜 주겠다면서 들였지만, 실상은 장인이 머슴처럼 부리던 ‘나’의 신세가 처량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장인이 꼼수를 쓰면서 계속 혼인을 시켜주지 않았기에, 그 집의 데릴사위 되기만 기다리던 ‘나’의 답답한 속내 쏟아지는 것을 독자가 들어주는 거다.
‘나’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나’의 속만 터지는 게 아니라 읽는 내 속도 터져 죽을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실수도 하고 시작을 잘 못 할 수도 있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장인의 꼼수에 반기를 드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싶어서 ‘나’의 푸념을 파헤치며 분석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 녀석은 왜 장인의 농간에 반격하지 못하는가. 위로 클 줄 알았던 점순이가 옆으로 퍼지기만 할 때 왜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가. 불합리한 이 상황에서도 못 된 장인 옆에 있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어서였나? 이유가 무엇이든 현재의 ‘나’는 여전히 희망 고문을 당하며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거다. 소심하게 반항을 하면서 말이다. 이미 진즉에 깨달았는데, 왜 그 부녀의 그물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가. 이미 상황 파악 끝났으니, 단호하게 결판을 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나’의 깨달음은 이미 이 작품의 초반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현재 상황을 다 아는 것일 텐데, 왜 이렇게 머뭇거리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나는 애초에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박이 키에 모로(옆으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10쪽)”
그랬다. ‘나’는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장인과 계약을 잘못한 것을 시작으로 인생 꼬인 거다. 계약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물론 그건 알면서도 실수할 수 있고 사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런 것까지 알아채지 못한 ‘나’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적어도 구체적인 기간 같은, 명확한 숫자가 계약서 안에 등장해야 하는 것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했기에, ‘나’가 장인과 맺은 허술한 계약 내용에 화가 날듯 말듯, 이 녀석이 너무 착해서 이렇게 된 건지 아닌 건지 싶은 애매함. 누군가는 그의 푸념을 계속 듣고 있다가 화병이 나서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자꾸만 ‘나’가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 게 나뿐만은 아닐 터. 내 아들이 회사 상사의 딸과 결혼하고 싶은데, 상사가 한 가지 조건을 걸어놓고 그것만 갖추면 결혼이 만사 오케이 된다고 여기게 하는 상황인 거다. 여기서 함정은, ‘나’의 말처럼 구체적인 기한을 명시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점순이의 키를 정하지 못한 것도 있다. 사실 인간의 키가 정해진 대로 시간 맞춰 자라는 게 아니어서 이 부분도 계약서 안에 들어갈 것도 못 되지만, 하도 답답해서 한 마디 보태어봤다. 게다가, 점순이의 키는 잘 자라지도 않고 모로 벌어지는 몸만 되어가니 ‘나’도 읽는 나도 답답하기만 한 게 이 작품의 큰 문제다.
소심하게나마 계속 반항하던 ‘나’는 최종 선포를 하고 파업에 돌입하였으나, 그 파업의 현장에서조차 ‘나’의 편은 없다. 점순이가 새참을 가져다주면서 보여준 플러팅으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기세등등 파업하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점순이는 아버지의 뻔한 사기 행각에 ‘나’를 모른 척한다. 점순이에게는 내 남편이 될 사람 등에 빨대 꽂고 피 빨아먹고 있는 아버지의 염치없는 행동보다, 아버지의 수염이 뽑히는 게 더 큰 일인가 보다. 새참 차려다 주면서 아버지에게 왜 혼인 시켜주지 않느냐고 따지라고 말하라던 점순이는 어딜 갔단 말이냐. 이제 믿을 게 없다. 바보처럼 희망 고문 당하면서 그 자리에 찌그러져 있거나, 애매한 계약 따위 털어버리고 그 집은 나가거나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나. 점순이라도 확실하게 ‘나’의 편이 되어준다면 미친 척하고 장인을 한번 들이받고 본때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비빌 언덕이 없다, 없어.
열린 결말처럼 이야기가 끝났는데, 그래도 확실한 결말이 듣고 싶긴 하다. ‘나’는 점순이와 혼인할 수 있었을까 정말 궁금한데,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외전이 필요한 건가 싶다. 로맨스 소설에만 외전이 있으란 법이 어디 있나. 고전도 이런 결말이라면 외전으로 독자의 속을 좀 시원하게 해주시라~
#김유정 #봄봄 #동백꽃 #다림출판사 #문학 #한국문학 #고전
#고전100권읽기 #책 #책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