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소설Q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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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마음이 자꾸 생기는 거다. 겉으로 보이는 호의나 미소 말고, 상대의 진심을 제대로 알고 마음. 지금 나에게 보이는 저 표정이 진심일 거로 믿었다가 뒤통수 맞고,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한 가부장제에 내가 스며들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당황. 아니, 그건 배신감이었을 거다. 딸로 여긴다는 시부의 말에, 간질거리는 표현도 서슴지 않게 하던 사랑스러운 말들에 내주었던 마음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 진심에 사그라진다. 그 사이에 있는 남편 역시 내 편은 아니고, 여전히 가부장제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여성이란, 아내란, 며느리란 어떤 존재인가.


화자인 는 지금 고요한 일상을 지낸다. 번역 일을 하고, 남편과 사이도 좋다. 남편이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시부는 남편을 정성 들여 키웠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 전부인 시부는 짧은 학력과는 상관없이 열심히 살았다. 아들을 박사까지 만들어놓고,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시부였다. ‘로맨스 그레이의 현신이라고 불릴 만큼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프기 전까지 말이다. 시부는 담도암에 걸렸고 병세가 심해지자 섬망 증세까지 보인다. 며느리와 아들이 주야 교대하면서 병간호하지만 한계에 다다랐고, 곧 간병인을 고용한다. 시부는 간병인에게까지 욕을 퍼붓고, 옛날에 몰래 따먹던 자두를 먹고 싶다고 한다. 그러다가 꺼내어진 시부의 진심은 섬망을 겪는 환자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상처였다.


이제야 진심이 나오는 건가 싶게, 시부의 외침은 절망적이었다. 화자에게 화를 내듯 쏟아낸 그 말, 우리 집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한 게 뭐냐, 박사랑 결혼하는데 열쇠 세 개를 해왔냐, 애도 안 낳아서 대가 끊겼다는 등, 딸이라고 부르며 다정하고 다정했던 시부는 어디로 갔나 싶었다. 그렇다. 시부의 진심은 내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를 딸로 여긴다는 게 아니라, 태양 같은 내 아들을 훔친 도둑년이고 대를 이어줄 도구로 여겼다는 거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에 화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이 구성하는 공간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시부의 고통스러운 병 앞에서 한없이 미안해지고 죄송스러워지는, 잘못한 것도 없이 언제나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있었다는 게 억울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남편은 언제나 눈을 감고 있다. 도대체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왜 자기를 봐주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로 있는 것인가. 외로워지는 건 당연했다.


타인이 불쑥 내비친 날것의 감정을 마주쳤을 때만큼 당혹스러운 순간이 또 있을까요? 그렇지만 왜 울었냐고 한 번쯤은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살다 보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모든 말을 다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요. 어쩌면 영옥 씨는 그때 뭔가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1페이지)


화자의 외로움에 손을 내민 건 그 누구도 아닌 간병인 황영옥 씨다. 처음 영옥의 등장은 전문가 포스였다. 시부의 침상을 둘러보며 필요한 것을 금방 정리하고, 환자에게 닥치는 거의 모든 문제를 거뜬히 해결한다. 마치 간병인이 아니더라도 꽤 오래 해왔던 일처럼, 영옥이 아니라면 누구도 해결하지 못할 일을 감당했다. 하루에 8만 원이라는 비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옥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을 시간을 가늠하게 한다. 죽어야지 하면서 읊조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를 불러왔고, 많지 않은 말 속에서 걱정을 숨겨둔다. 결정적인 순간에 화자를 위로하는 단 한 사람은 영옥이었다. 여성으로 살아온 시간만이 아는 감정, 민낯을 드러내는 잔인한 사람들 속에서 버텨온 시간이 만든 초연함이었으리라. 사랑도 구원해주지 못한 잔인함에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영옥이 구원해줬다. 한마디 말이 없이도, 담배 연기뿐이었어도.


글쎄, 말로 다 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 화자와 같은 상황이 너무 많았다. 내가 겪었고 우리 엄마가 겪었을 일을 생각하면, 나는 더 독해지고 독설을 뿜어냈다. 덕분에 싸가지 없는 년소리도 많이 들었다. 어른도 몰라본다고, 저래서 딸년 낳을 필요 없다는 말까지 들어봤다. 웃긴 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먹고사는 일에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존재들이었다는 거다. 미친년처럼 산발하고 욕을 쏟아냈다. 화가 나는 건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던 아버지였다. 우리 가족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화자의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아버린 것처럼, 마치 그 순간의 일이 자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침묵으로 아내의 죄를 묻던 것처럼 말이다. 여성이 가족을 돌보고 환자를 수발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도 폭력이 아닐는지.


결국,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한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만남은 소설 속 화자와 간병인 영옥 씨의 만남과 닮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싶고, 그 말을 들어주며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줄 사람은 여성뿐이었다. 지금을 사는 여성에게 필요한 건 이 같은 여성 연대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부장제 안에서 고통스러운 그녀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 희망을 염원하면서. 상실의 순간을 앞에 두고도 이해를 바라야 하는 감정을 다독여야 한다는 게 힘들지만, 어쩌면 상실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진심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그 진심을 확인하는 계기로 나아가게 될, 가부장제가 극복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맨발에 슬리퍼 상복 차림으로 장례식장을 나와 본관을 서성이며 영옥 씨를 찾던 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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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천재 엉덩이 탐정 10 - 사랑의 포로 사건 추리 천재 엉덩이 탐정 10
트롤 글.그림, 김정화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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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귀여움과 댄디한 모습의 엉덩이 탐정. 이번에도 날카로움과 섬세함으로 사건 해결에 분주하다. 사랑이 주제가 되어 일어나는 사건이다 보니 은근한 설렘은 덤이다. 아이의 시선으로 책을 읽는 즐거움과 추리소설의 재미까지 더해져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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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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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혹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무언가를 상상해본 적 많지 않은가. 실제로 로봇은 우리 일상에서 많은 것을 대신하기도 한다. 계속 개발과 연구가 이어지고, 인간 생활을 좀 더 편하게 과학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바람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일상에 스며든 로봇의 역할은 장점이 많겠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비중이 높아질수록 위기감도 느낀다. 이 소설의 어느 장면에서 외치던 여자의 목소리처럼, AF(Artificial Friend)가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다며 화를 낸다. 낯설지 않다. 지금도 기계화된 시스템이 점점 노동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걸 보면, 우리는 양가감정의 싸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발전하고 편리해진 세상을 바라면서도, 인간의 역할을 빼앗기는 마음에 슬프고 괴롭다. 그렇다고 변화하는 세상을 붙잡을 수는 없겠지. 그래서 이런 마음도 갖는다. 인간에게는 로봇과 다른, 인간만의 고유한 게 있다고. 로봇이 절대 넘볼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 사람만이 가진 어떤 것,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대체할 로봇을 만들면서도 완전히 복제할 수 없다는 절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낀다. 인간과 로봇, 인간과 로봇의 감정은 정말 어떤 것일까.


새로운 세상이 그려진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우리는 향상하지 않으면 보통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 유전자 편집으로 향상된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다. 집에서 원격으로 교육받고, 서로가 어울릴 기회가 없다. 학교에 가지 않으니까. (어쩌면 이 부분은 우리가 1년 넘게 겪는 코로나19 상황과 너무 닮아서 놀랐다. 작가가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모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형식적이겠지만 일부러 모임을 만들고 무슨 숙제 하듯 아이들과 어울린다. 그런 일상에서 친구를 대신하는 자리에 에이에프가 존재한다. 누구나 에이에프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상은 변했어도 여전한 건 인간의 계급이었다. 어느 수준 이상이 되어야만 향상도 가능하고 에이에프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그들만의 모임 역시 시쳇말로 점수관리, 인맥 관리의 일환이 되시겠다. 현실적인 문제로 그 향상과 모임이 불가능한 아이가 존재한다는 게 동시에 보여서 절망스럽지만, 어쩌겠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한 것을.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인간의 복잡한 감정까지 아는 로봇 클라라. 매장의 진열대에 앉아서 밖을 보는 게 그녀의 즐거움이다. 유독 관찰력이 뛰어난 클라라는 매장 밖의 모습에 눈길을 주고 보이는 것들에 감정을 준다. 생각과 감정이 동시에 가능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게 뭔지 아는 로봇이다. 조시는 그런 클라라를 선택한다. 조시는 향상되었지만 무슨 문제인지 점점 시들어가는 아이다. 친구가 필요했고, 마음이 끌려서 선택한 클라라를 옆에 두고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래봤자 원격 수업에 내키지 않는 모임을 하는 게 전부이다. 조시는 아픈 아이니까. 그런 조시에게 클라라는 일상의 또 다른 의미가 되고 친구인 릭은 유일하게 조시가 솔직하게 마음을 여는 대상이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릭에게 하게 된다. 모임의 사람들이 내켜 하지 않는 대상, 릭은 향상되지 못한 아이이고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조시와 릭은 친구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 영원을 약속했으니까. 내 자식이 나아가기를, 누구보다 앞서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으로는 조시와 닉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유전자 편집을 해서라도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뭔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시와 닉은 그들만이 나눌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으로, 말풍선으로 마음을 읽는 일을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채는 일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묻고 싶은 장면이었다. 아무리 연습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로봇이 사람의 마음을 완벽하게 읽을 수 있느냐고.


말했듯이 나에게는 무척 유용한 교훈을 준 일이었다. 나는 조시에게 달라지는면이 있다는 것, 내가 그것에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 특성이 조시에게만 있는 게 아님도 알게 되었다. 매장 쇼윈도에 디스플레이 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면을 마련해 놓으려 한다는 것, 또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 그런 일시적인 모습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130~131페이지)


전기차 배터리를 충전하듯 클라라에게도 에너지가 필요할 텐데, 에이에프는 태양에게서 자양분을 얻고 활동한다. 태양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에너지를 주지만, 그 정도뿐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클라라에게 태양은 자양분 그 이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클라라가 보통의 에이에프와의 차이를 가진 존재라는 것도 느낀다. 유독 관찰력이 뛰어난 아이였기에, 매장의 유리문 너머의 장면들을 세심하게 보고 느끼고 있던 거다. 레인코트 할아버지와 커피 할머니의 만남에서, 거지 아저씨와 개의 부활 같은 장면에서 클라라는 태양의 힘을 믿는다. 어둡고 컴컴해질 때마다, 마음의 슬픔을 확인해야 할 때마다 태양이 나타나서 희망을 노래한다. 오래전 헤어진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것을 지켜보던 태양, 죽은 줄 알았던 존재가 태양 빛을 받아서 일어난 것을 믿는다. 태양은 클라라에게도 자양분이 되고 있으니까. 그 힘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많은 것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이해할 때마다 태양은 클라라의 마음속에서 그 존재감을 뽐냈다. 그러니 간절한 기도마저 하게 될 수밖에. 이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로봇이 어디까지 읽고 있다는 건지, 답을 듣고 싶어진다.


소설은 인간 소녀 조시와 로봇 클라라의 우정과 사랑을 그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만들기도 한다. 필요하기에 클라라를 옆에 두었지만, 조시나 조시의 엄마, 아빠, 릭은 이 로봇의 존재와 태도로 많은 생각을 한다. 첫 번째 아이가 떠난 것처럼 조시가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에 엄마는 대체를 생각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기에 그 후를 준비해야 한다. 조시가 없는 세상, 조시가 그리운 시간을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클라라의 존재는 조시의 엄마가 만들려는 시간을 위해 꼭 필요하다. 클라라의 그 관찰력으로 내 딸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는, 내 딸의 몸과 마음이 되어 위로되는 존재로 탈바꿈할 대상이어야 했다. 불가능할까? 인간의 모든 것을 대신할 로봇이 정말 인간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까? 조시의 아빠가 화가 난 이유는 엄마의 계획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특별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걸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다. 로봇이 완벽해봤자 인간의 마음까지 따라오겠느냐, 인간과 닮았다고 해서 인간이 되겠느냐는 고민에 클라라에게 묻는다. 인간의 마음을 믿느냐고, 인간에게 마음이란 게 있긴 한 거냐고, 그 마음이 인간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게 맞느냐고. 이 질문을 했던 그 순간에, 조시의 아버지도 클라라도, 우리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경험과 노력으로 판단 능력이나 기억, 인지 능력까지 완벽해질 수는 있어도 한 사람 고유의 마음과 특징을 복제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갈구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넘쳤다.


이 모습 이대로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이라고 인정하지 못해서 생기는 욕망에, 미래와 연결된 현재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꿈꾸는가 보다. 오늘을 잘 살아야 하지만 내일을 준비하는 게 인간의 자세일 테니까. 오늘 죽지 않는다면 내일 또 살아가야 하니까 미래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유전자 편집으로 향상되어 더 업그레이드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욕망이었겠지만, 조시는 향상의 과정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아프고 곧 소멸할지도 모를 시간을 산다. ‘향상되지 못한 릭과 그의 엄마는 향상된 이들의 무리에 끼지도 못하고 세상을 겉돈다. 하지만 항상 향상된 삶을 아들에게 주고 싶어서 애쓴다. 아들의 능력을 버릴 수 없고 대학에도 가야 한다는 간절함에 오래전에 헤어진 애인에게 매달리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다. 바뀌고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는 부모의 자세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내 아이 고유의 감정을 먼저 읽지 못하는 불찰에서 시작된 시도일 수도 있겠다. 마음을 먼저 읽는 일이 우리가 준비하는 미래에서 빠져있다는 게, 상실의 회복을 위해 대체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든다는 게 잘못된 것만은 아닐 테지만, 우리가 인간이기에 고민하는 것들을 간과하기에 보이는 문제들이 아니었나 싶다. 인공지능로봇 제작자 카팔디가 놓친 그것,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의 무언가가 있다는 미음 말이다.


저는 조시를 배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야만 했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잘되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정확하게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 , 가정부 멜라니아, 아버지. 그 사람들이 가슴속에서 조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다가갈 수가 없었을 거예요. 지금은 그걸 확실하게 알아요.” (441~442페이지)


자연스러운 것, 인간의 마음이 흐르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클라라를 통해 보여준 작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로봇 클라라가 이 감정을 보여줬다는 게 아이러니일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이 클라라의 시선으로 전개되면서도 인간의 마음으로 읽힌다는 거였다. 누군가가 자기를 선택해주길 바라면서 매장의 진열대에 놓인 클라라. 신형 에이에프가 들어오면서 선택받고 싶은 갈망은 커진다. 이미 구형인 자신이 낙오되는, 신형 모델이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의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인간과 비슷한 흐름으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클라라의 생이 인간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태어났고 존재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갔고 존재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시의 안정과 성장을 돕기 위해 존재했던 클라라. 그 역할을 다한 클라라가 어떻게 생을 마무리하는지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당연했다. 인간의 생과 다르지 않아서, 우리가 겪는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떨렸다.


로봇에게 인간의 생을 봤다는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냉정하게 보자면 로봇이 인간의 모든 마음을 읽을 수도 없고 복제할 수도 없다는 게 정답이지만, 클라라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든 것을 본 느낌에 여운이 짙다. 원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면서, 간절해지는 순간에 기도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듯 살아가는, 마지막에는 삶을 복기하듯 기억을 추리는 모습까지. 조금 과장되지만 완벽하게 인간의 생을 재현한 듯했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인간을 보고 인간관계나 감정을 배우는 클라라였지만, 읽다 보면 클라라에게 전해져오는 인간다움에 뭉클해지곤 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마음에 담아야 하는지, 우리 안의 특별함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비록 마지막에 마주할 감정이 슬픔이라고 할지라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마저 감당해야 한다. 마치 슬픔에 대처하는 자세를 배우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사는 동안 힘껏 사랑하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처럼, 슬픔도 우리가 마주해야 할 몫이라고. 인간의 특별함은 그 마음에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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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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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170페이지)


1년 후에 도착할 편지를 쓰는 일.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이벤트를 모른 척할 수가 없는 건,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었다는 거 아닐까. 말하고 싶지만 선뜻 꺼내지 못 하는 말,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담아두기만 했던 말, 계속 담아두자니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 순간에, 마치 기적처럼 나타난 편지쓰기라니.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마주한 편지라는 대화는 태희의 현재에 과거의 기억을 불러와 오늘의 서러움과 모욕감을 새긴다. 이 감정의 이름을 몰라서 당황하고 대응하지 못했던 순간을 후회한다. 이 편지는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닿을 것인가. 태희의 오늘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소설 속 두 명의 태희는 각자의 시간을 산다. 삼십 대의 태희는 현재의 모든 것을 미루며 사는 중이다. 엉망인 집안을 치우는 일, 친구의 생일을 그냥 지나친 일, 애인과 헤어지는 일 등을 미루던 중에 할머니의 죽음을 듣는다. 어린 시절 태희의 모든 시간을 지켜봤던 할머니의 죽음은 태희에게 남다를 것 같은데, 지금 태희는 할머니의 애도마저 미루고 있다. 어떤 것도 현재의 태희에게 와 닿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꺾이는 중이고 부러지기 직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머니에 대한 애도까지 미룰 수 있는 걸까 싶지만, 태희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그녀의 미루기를 마냥 욕할 수가 없다. 이도 저도 못 하고, 가슴은 터질 것처럼 부풀어가는 이때 태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태희를 보면서 십 대의 태희를 동시에 본다.


삼십 대의 태희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쓴 편지는 십 대의 태희에게 보내진다. 그 편지를 누구에게 보낼까 하는 고민은 그 편지를 쓸까 말까 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문제였다. 그녀 말마따나 지금 쓰게 될 이 편지를 1년 뒤에 받아도 괜찮은 사람, 그때까지 사이가 틀어지지도 않고, 나의 부끄러움도 보여줄 수 있는, 이 이벤트를 비밀로 해줄 사람이 누구일까 싶었을 때 가장 안정적인 사람이 과거의 태희였던 것. 무슨 판타지 소설의 한 장면처럼, 삼십 대의 태희가 쓴 편지는 십 대의 태희에게 배달된다.


십 대의 태희를 보여준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팍팍한데, 아직 철부지로 있을 십 대의 태희를 소환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태희의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부모님은 각자의 삶을 위해 떠났고, 태희는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어린 시절은 상처뿐이었다고 여겼다. 부모에게 버려진 느낌이었고, 이모와 같이 방을 쓰면서 어린 태희에게도 필요했을 사생활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상처뿐이라고 여기던 그 시절은 태희도 모르게 성장하던 시간이었을 거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담임의 차 위에 똥을 쌌고, 오래된 친구와는 이별했다. 어린아이들을 성추행하면서 권위를 내세우기만 했던 담임에게 보여준 태희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와 아빠가 말하지 않은 진실에 상처받고, 어떤 일은 겪고 나서야 배우는 감정이었다. 부끄러움과 자책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느꼈던 건 모욕감이라고. 이런 감정은 또 어떻게 알게 되는 걸까. 누구인지 모르지만 태희와 이름이 같은 이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에서 그녀는 버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답장을 쓴다. 누구에게 온 건지도 모른 채로 읽은 편지, 제대로 배달될지도 모를 편지를 쓰는 마음. 아마 그때의 태희는 그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태희가 과거의 태희에게 쓸 수밖에 없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그들은 젊었다. 어린 내게 젊음은 완벽한 어른이었다. 지금 내게 젊음은 얼어붙은 호수 같은 것. 언제 갈라지고 깨질지 알 수 없는 것. 미끄러지지 않으면 얼어붙는다. 서로에게 적당한 속도로 다가갈 수도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다. 아래의 것이 위로 올라오면 죽고 위의 것이 아래로 떨어지면 죽는다. 내게 어울리는 곳이 아래인지 위인지 판단할 수 없고 빙판에서 우리는 영원할 수 없다. 어릴 적 내게 빙판은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이었다. 어른들은 빙판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나는 빙판을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언 것은 녹는다. 인식은 변한다. 시간은 쌓인다. (190페이지)


아마도 오늘의 태희는 어린 시절의 나와 화해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이 모습이 맞는지 묻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할머니를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불평등과 부조리로 웅크리고 있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애인의 배신에 끝을 내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 같은 느낌이다. 그 시절 이해할 수 없던 어른들의 행동에 상처받은 아이는 자라서 그때의 어른과 다르지 않은 어른이 된 것만 같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중얼거리면서, 남들에게 드러내지 못한 마음을 꾹 눌러 담으면서,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 하면서 자라는 태희의 모습에 섬뜩해지는 건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다. 어릴 때 바라봤던 어른들의 모습이,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건 절망적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다를 거라는, 어린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었던 것. 과연 그럴까. 마치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는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는 것만 같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중략) 난데없는 곳에 뚝 떨어진 나는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여기가 어디지, 난 왜 여기 있지, 원래 난 어디에 있었더라, 당황하는 것이다. 나는 늘 어딘가로 가는 도중 같았고, 어디에도 나만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124페이지)


지나고 나니 기억도 나지 않는 상처들 때문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린 태희가 내린 결론도 그런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어른이 되면 해결될 일이라고 믿고 그 시간은 건너왔을 테지. 하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었다는 게 함정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었고, 그러니 어른이 된다는 게 해결은 아니라는 것. 시간은 흐르고 우리가 물리적인 나이를 먹어가는 건 당연한 흐름이겠지만, 어린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 또한 당연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어른이 아니라 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른 태희가 어린 태희에게 보낸 편지로, 어린 태희가 어른 태희에게 보낸 편지로 달라질 두 사람의 모습이 기대되는 건, 서로의 진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 부끄러움을 당당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서 괜찮아질 오늘을 만나고 싶어서다.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편지로, 어른 태희는 엄마의 집에 찾아갈 수 있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애도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지 않았나.


기꺼이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와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동시에 그 상처와 마주해야만 오늘의 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어느 심리 치료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일의 시작점을 찾아서,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현재의 상처가 치유될 거라고.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과거의 나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우리의 어린 시절에서 이어져 온 삶을 되짚어볼 필요도 있다는 것을. 그 문제가 무엇이든, 상처가 무엇이든, 펼쳐놓고 다시 읽고 화해하면서 진정한 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어린 태희가, 어른 태희가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되는 과정을 걷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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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1-04-2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되는 과정을 걷는다라... 정말 가슴에 와닿는 표현이에요. 인생의 끝자락에 섰을 때 너무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ㅠㅠ

구단씨 2021-05-04 14:00   좋아요 1 | URL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결국 그거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내가 되어가는 그 과정의 일부이지 않을까 하고요.
그 끝에는 내가 있겠죠. 물론 지금도 내가 있긴 하지만요. ^^
 
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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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든 완벽하지는 않다. 미루고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서두른다고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491페이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변화가 필요하고 다른 환경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선뜻 지금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들. 너무 익숙하고, 때로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한다고 하는데도 나아지지 않는 듯한 불안까지 더해져 마음은 혼란스럽다. 뭔가 더 이뤄내야 하는데 환상 같은 현실 속에서 머물러 있기만 하는 때. 남들은 저기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나는 지금 이 자리가 맞는 걸까? 끝도 없이 고민과 질문이 이어지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로즈에게 지금 이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2017, 서른다섯 살의 로즈. 그녀 옆에는 9년을 함께한 남자 조가 있다. 그가 몇 년 동안 준비한 부리토스 사업은 녹슬어가는 트럭처럼 부식되고 정체되어 있다. 정말 그는 부리토스 사업을 하긴 할는지 알 수도 없다. 로즈가 아는 거라고는 그저 조의 옆에서 그의 꿈을 지지해주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르다. 그가 빨리 현실의 무능력에서 벗어나기를, 되지도 않는 꿈을 찾는 게 아니라 그녀와 함께 현실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로즈라고 다를까. 카페에서 일하는 그녀에게도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한 현실이 없다. 분명 현재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조의 꿈을 계속 지지해주면서 하루를 버터야 하는지, 그녀의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엄마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가 어렸을 적에 사라진 엄마, 그동안 아버지는 한 번도 엄마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는데... 엄마가 가진 책 두 권의 작가인 콘스턴스 홀든과 아는 사이라고, 로즈는 콘스턴스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어한다.


1980년의 엘리스. 카페에서 일하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델 일을 하는 그녀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고 인연이 시작된다. 같이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엘리스보다 나이가 많은 그녀, 콘스턴스 홀든. 엘리스와 코니(콘스턴스 홀든)는 연인이 된다. 삼십 대의 유명한 작가와 스무 살의 어린 연인. 아직 자기 일을 제대로 찾지도 못했던 엘리스와 작가이면서 이제 더 유명해지려는 코니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 연인의 사랑이 무사히 진행될까 궁금해지면서 계속 읽던 무렵...


소설은 2017년의 로즈와 1980년의 엘리스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되는데, 읽으면서 계속 이상한 느낌에 속이 답답해지곤 했다. 거의 40년의 긴 시간을 두고 흐르는 두 여자의 인생이 너무 비슷하게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했던 로즈의 엄마 찾기가 어떻게 될지 걱정부터 앞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현실의 상황이 그 사랑을 어디로 끌고 갈지 보여서 위태로웠다고 말한다면 내가 오지랖인 걸까. 내 옆의 연인이 나의 현재와 미래에 계속 함께할 사람이라는 확신도 없이, 계속 옆에 머물러도 괜찮을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장 찾아야 할 것을 찾지 못한 괴로움이 컸을 테다. 연인이 있어도 내가 갖추어야 할 나 자신의 모습 말이다. 누구의 아내, 애인, 엄마가 아니라, ‘누구라는 존재 자체가 되어야 하는 일. 로즈와 엘리스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것이다.


누구에게 의지해야 했을까. 아빠는 엄마의 실종 이후를 알지 못한다. 로즈 스스로 찾아내야 했다. 엄마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사람이 코니라는 걸 알고 로즈는 코니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던 코니에게 가는 길은 약간의 거짓이 필요했다. 로즈는 로라가 되어 코니의 보조가 되고, 코니는 현실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로라에게 의지한다. 서로의 내면을 완벽하게 내보이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그 마음의 바닥을 꺼내 보이려는 두 사람 사이가 무사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로즈와 같은 모험 혹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간절하게 바라던 것을 앞에 두고 하나의 선택만이 있었다면, 그 선택을 향해 가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엄마의 흔적을 알려줄 유일한 사람에게, 로즈는 그렇게 다가갔다.


교차로 진행되는 두 편의 이야기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고백들. 코니는 어느 날의 선택을 후회한다. 그 후회를 감당하면서 살아왔다.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 선택을 했던 그녀는 그 이후의 삶을 책임졌다. 슬픔도 고통도, 외로움도 받아들였다. 언제나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는 개운하지 못한 찌꺼기들이 거슬렸지만, 그것마저도 자기 몫이라 여겼을 것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이야기와 감정을 꺼낼 일은 없을 거로 여겼겠지. 언젠가 로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엄마의 흔적을 찾겠다는 로즈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을 두고 코니에게 접근했지만, 내내 불안했다. 코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궁금했다. 어떤 세월을 걸어왔을까. 성공과 명예를 지키면서 잃은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이룬 삶에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녀가 숨겨둔 이야기 뒤에 엄마는 어디쯤 있을까.


여러 사람의 관계와 사랑이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사랑의 흔적은 희미하다. 사랑했기 때문에 만났고 관계를 이어왔으며, 서로의 인생에 마음을 담글 수 있는 사이가 되었건만. 사랑이라고 믿으며 유지했던 관계의 정면을 어느 날 마주하게 된 로즈와 엘리스는 알게 된다. 그 무엇보다 자기를 찾아내야 인생의 나머지가 채워지리라는 것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의지하고, 내 삶을 뒤로한 채로 상대방의 삶을 먼저 보게 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는 과정이 절벽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왜 어떤 일은 아주 큰 상심 이후에, 시간과 감정의 피폐를 견딘 후에 알게 되는 것일까. 꼭 그렇게 겪어야만 알아지는 것이 있다고 가르쳐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완성해가는 그 걸음이 무거웠다. 부딪히고 깨지고, 선택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반복된 경험으로 내 안에 쌓이게 되는 것들로.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이게 아닐까 싶다. 나아가려고. 조금 편하게 산책하듯 걸어갈 수도 있는 길이지만, 굳이 살펴보고 단단하게 힘주어 걸어가야 하는 이유. 나를 만들고, 나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처음 읽을 때는 이 소설이 로즈를 위해 써진 줄 알았다. 2018년의 현재, 서른다섯을 넘어가는 그녀의 삶에 큰 변화가 찾아왔을 때 보여주기 위한 답처럼 보였다. 오래된 연인과 결혼이 아닌 이별을 선택할 때 그녀에게 찾아올 슬픔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가 지금 똑같이 겪을지도 모를 로즈와 같은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한 이야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소설은 위로가 아니었다. 일흔이 넘는 세월을 감당해온 코니가 로즈에게 하는 말 중에 반복되었던 그 말, 선택에는 슬픔이 따른다고. 어떤 선택을 해도 슬플 거라고 말했던 부분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걸 알아서일까. 코니는 당당하게 말하고 본인 위주의 삶을 지내왔지만, 분명 슬펐을 것이다. 엘리스를 사랑했을 때, 엘리스가 떠났을 때, 엘리스에게 모진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후회했을 때, 모두. 그녀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 선택을 후회했을 것이다. 동시에 이것도 알았겠지. 다른 선택을 했어도 후회했을 거라고, 슬펐을 거라고. 코니가 그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감당했던 것처럼, 우리가 배울 인생의 자세처럼.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내가 불쑥 말했다.

내 집에 온 거 말이에요?”

제 인생요. 전 곧 서른다섯 살이거든요.” 이름 모를 슬픔이 목구멍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게 될 줄 알았어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는 데는 참 오래 걸려요, 로라. 삼십오 년보다 더 오래.” (275페이지)


로즈의 엄마, 엘리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라도 독자는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알게 된다. 엘리스를 찾는 여정에 로즈와 같이 걷고 있지만, 정작 엘리스를 찾아내서 마주하기 위한 걸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겪는 모든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삶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보여준다. 누군가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오직 내가 되어 살아가기 위한 인생이어야 한다고. 삶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또 수많은 선택을 하겠지만, 그 선택 앞에서 슬프고 후회하겠지만,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마냥 따뜻하지 않아서 좋았던 이야기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마음을 읽어준 소설이다. 제시 버튼의 전작들을 옆에 두고 다 읽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 책으로 먼저 달래본다. 사랑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부드러워졌다면, 그 상처와 후회로 난도질당한 마음이 바스러졌다면, 이제 그 마음을 치유하고 나를 돌보는 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우리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엘리스의 절망과 코니의 후회와 로즈의 선택으로 보여줬다. 누가 됐든 무엇이 됐든, 온전한 내가 되었을 때 보이는 것들로 인생은 채워진다. 삶의 의미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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