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수집노트 - a bodyboarder’s notebook
이우일 지음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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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곧 태양에 이끌리듯 파도가 함께 올라온다. 내 앞으로 다가온 높게 솟구친 파도가 해를 가린다. 그 파도의 그림자 속에 내가 있다. 나는 파도 그늘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간다. 파도를 뚫고 나오면 여지없이 눈이 부시다. (65페이지)


미쳐야 미친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간절한 뭔가를 행동에 옮기고 이어갈 때, 미칠 정도가 아니라면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말이다. 작가의 도전이 보여주는 것은, 중독도 즐기면 행복하다는 거였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어도, 아직은 서툰 초보여도 즐거우면 된다. 작가의 전작에서 이미 부기보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그 부기보드에 온전히 몰입한 시간을 들려준다. 얼마나 재밌게 열정적으로 부기보드를 대하는지, 웃음도 나고 부럽기도 하다. 얼마나 좋아해야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중독이라도 말해도 좋을 만큼, 온몸으로 부딪히는 즐거움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작가가 몸 쓰는 일을 얼마나 해봤을까 싶을 정도로, 본인도 인정할 것 같지만, 언제나 책상 앞에서 머문 시간이 많았을 거다. 그런 그가 하와이에서부터 부기보드에 빠져 한국의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파도타기. 나도 작가의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부기보드를 알게 되었는데, 말로만 들어서는 잘 몰라서 초록창에 검색해봤다. 그동안 봤던 서핑보드보다는 짧은, 작가의 부기보드 타는 법으로 보면 오리발까지 착용해야 하는 서핑. 원래 이름은 보디보드, 작가가 선호하는 별칭 부기보드로 부른다. 엎드려서 보드에 몸을 밀착한 자세로 파도를 즐기는 스포츠라고, 안전하다는 게 장점이기도 하단다. 그걸 배워서 즐기는 작가의 표정을 상상해봤는데, 좋아하는 장난감 하나 발견하고 종일 그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않는 집념을 보여주는 듯했다.


파도타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파도를 기다리는 끈기와 체력을 길러야 했다. 어떤 파도가 좋은지 알아채는 능력도 필요했다. 그 넓은 바다에서 혼자만 파도를 타는 게 아니니, 주변의 다른 서퍼들과의 소통하고, 바다 밑의 상태도 살필 줄 알아야 했다. 뭐든 쉽지 않겠지만, 특히나 바다는 보이는 그대로 다는 아닐 듯하다. 무엇보다 내 눈에는 위험해 보이는 요소가 많았다. 그런데도 작가는 그 짜릿함에 바다를 즐기고 파도를 탄다. 어느 정도인가 하며, 장롱면허를 밖으로 꺼내주기까지 했단다. 30년을 운전하는 아내의 옆자리에 탔던 그가 파도를 타기 위해 운전을 한다! 꿈에서까지 파도가 나온다고 한다. 노년의 삶을 바닷가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고 싶다니, 이 정도면 미치게 좋아하는 거 아닌가? ^^


파도를 탄다는 건 자연과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양과 색이 끊임없이 바뀌는 하늘, 그 하늘에 아름다운 선을 그으며 날고 있는 물새들을 물 위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는 것. 마침내 도착한 파도에 오르면 다른 하찮은 욕심들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 물을 가를 땐 자신이 바다에 살고 있는 작은 생명체처럼 느껴진다는 것. 파도를 읽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 파도타기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165페이지)


그가 파도를 따라다니던 시간 그대로 느껴진다. 어떻게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는지 들려줄 때면 그의 흥분이 그대로 전달된다. 파도타기는 즐기면서 할 수도 있고, 시합처럼 경쟁할 수도 있다. 어떻게 즐기느냐는 그 파도를 타는 사람 마음대로. 배우면서 마음이 급할 수도 있지만, 목적은 파도 타는 것이니 서툰 것도 괜찮고, 능숙하게 타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니겠나. 천천히 배우는 마음으로 파도를 타고 싶다는 여유로운 마음은 어딜 가고, 파도를 타다 보면 어느 순간 그는 경쟁하는 자세로 파도를 타는 자신을 발견한다. , 이 마음 알 것 같다. 마음은 느긋하게, 잘 타게 되기까지 천천히 완벽하게 파도를 대하고 싶은데, 어느 순간 마음보다 몸이 앞서 파도를 대하고 있는 걸 또 어쩌겠나. 옆에서 그런 남편을 보는 아내의 표정이 어떨지.


여름에 실컷 즐기면 될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날씨 좋고 파도가 괜찮을 때 실컷 타면, 겨울의 추운 바다에서는 좀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의 바다에 빠진다. 그의 서핑 이야기로 알게 되었는데, 겨울의 바다가 추울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모든 취미가 장비빨인지는 모르겠으나, 부기보드 역시 장비가 중요했다. 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게 두툼한 슈트도 필요했다. 손이 시리니 장갑도 필요하겠지. 마치 육지 위에서와 똑같이 바다에서도 서 있는 느낌이다. 물이 무서워서 여름에도 물 근처가 아니라 차라리 나무 그늘로 피신하는 걸 선호하는 내가,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성으로 부기보드를 배운 것만 같다. 부기보드를 시작하고 즐기면서 차곡차곡 쌓은 작가의 시행착오가 파도를 즐기려는 이들에게 실전 교과서가 될지도 모르지. ‘이렇게만 배우면 파도타기 기본은 합니다.’ 뭐 이런 진심 어린 조언 같은? 읽는 순간마다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3초짜리 다짐을 할 정도였다.


난 여전히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즐겁고 행복하지만, 이젠 거기에 다른 행복이 추가되었다. 온통 파도타기에 관한 것들이다. 후회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인생의 후회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183페이지)




그동안 작가의 그림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손그림이 아니라 아이패드의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가 그림의 변화를 도전한 것처럼, 그의 부기보드 사랑도 도전이었겠지. 이만큼 나이를 먹고 가능할까 싶은 것을 시도하면서 보여줬고, 좋아하는 것을 시도하고 즐기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증명했다. 파도타기는 그의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도전으로만 머물지도 않았다.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바다 위에서 숨을 고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말한다. 바다에서 상어만큼이나 위협적인 존재는 해파리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즐기고 공유해야 하는 바다를 오염의 장소로 만들기도 하는 사람을 원망한다. 바다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지구를 살아가는 모든 생물이 함께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망각하는 이들에게 잔잔히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아내와 함께 즐기는 부기보드라고 했다. 그의 아내가 즐기는 방식이 작가와 똑같지는 않지만, 상관없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면 되니까. 즐긴다는 게 뭔지, 도전이 삶에 어떤 변화를 만드는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필요한 많은 용기를 배우는 순간이었다. 누구보다도 파도를 사랑하고 즐기는, 지금보다 더 능숙하게 파도를 타는 부기보더 작가의 다음 이야기도 들려오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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