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눈부셔서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르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여름 다음의 계절이 아닌, 곧 시작될 겨울을 예고하는 날씨에 마음이 더 추워진 듯하다. 어제 모처럼 생긴 여유에 아파트 놀이터에 잠깐 앉아 있었는데, 바쁘고 피곤하다고 노래하면서 살다 보니 못 봤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 한쪽에 자리한 은행나무 잎이 진한 노랑으로 물들었고, 단풍잎은 금방이라도 타버릴 듯한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네, 가을이었네. 몰랐다. 조금 더 덥고, 조금 더 서늘하고, 그저 아침에 나갈 때 점퍼를 챙길까 말까 하는 생각만 했는데, 계절이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다 지나간다, 기운 내라, 다 잘 될 거다. 너무 잘 아는 뻔한 말들이 귀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이런 말들이 눈앞의 현실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 듣고 지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머뭇거리고 싶을 때 말이다. 요즘 나의 일상이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 같으면 손이 가지 않았을 이 책들에 오늘은 잠깐 마음을 내려놔 볼 수 있었던 건, 내일 다시 시작될 한 주의 마음이 정돈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다. 오랜만에 찾은 도서관에서 신청한 책을 받아들고 나오다가 이상하게 눈길이 갔던 자리에, 이용자들이 읽고 반납한 도서를 놓아두는 자리에 쭉 늘어선 책들이 있었다. 한 사람이 빌렸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읽고 반납한 책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걸까. 상처받고 힘든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많은 사람이 지금 위로의 한 마디가 필요했던 걸까.



이왕이면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 무슨 일이 생기든 조금 더 배려하며,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 근심과 걱정이 휘몰아칠 땐, 결국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대담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 책임감의 무게를 애써 버틸 줄 아는 것. 그렇게 성숙하게 살아가는 것.” (남에게 좋은 사람보다 나에게 좋은 사람, 227페이지)


그래서 병이 났다. 그저 그러려니 하지 못해서, 둥글게 살아가지 못해서.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참 싫어하는데,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너무 자주 찾아왔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그러지 못해서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러니까 별것 아닌 이런 일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아야 하는데 성격이 그러지 못해서. 지난달에는 예정에 없던 지출이 있었다. 우리 집 한 달 소득 이상의 금액이었다.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고, 그만큼 오래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었지만, 막상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알면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소비할 수 있는 지출이었으니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면 될 것을, 필요한 지출이었으니 살아가는 날들에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지나가면 될 것을, 머릿속은 갑작스럽게 구멍 난 금액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계획으로 다시 분주해졌다. 그래봤자 뾰족한 다른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ㅎㅎ 별 수 있나. 그저 살던 대로 열심히 살면서, 평소의 소비 습관대로 또 살아가면서, 조금 더 아껴가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그러면 되는 일인데, 왜 속에서는 안달복달 불안함만 남은 것인지. 이런 마음을 다독여줄 어떤 문장이 박혔으면 싶어서 페이지를 또 한 장 넘겨본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좀 나아질 테니 하면서.



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너무 많은 것을 곁에 두려고 하면 스스로 견디기 힘들어진다. 가끔은 내려놓기도 하고, 또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무겁게 걸어가지 않았으면 싶다.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가벼울수록 멀리 갈 수 있으니까. 떠나보내고 내려놓아도 괜찮다. 모든 걸 짊어지고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 버리고 놓아주고 잊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신선한 기분. 뭐든 될 것만 같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159페이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단 한 번의 삶, 61페이지)


언제부턴가 누굴 옆에 두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에게 닿지 않을 때도 많았고,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시절 인연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한때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는 관계였다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끝난 인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사람 관계에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고, 언제 끊어질지 모를 마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다.


친하게 지내는 지인과 일주일에 2~3일 같이 일하고 있다. 겪어 보니 이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많은 순간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점점 그 성격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는 거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나란 인간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서 어디까지 지켜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 고민이 많아진다. 그 사람과 나,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일터에서 보이는 태도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주변이 불편해지는 걸 몇 번 보고 나니, 이 문제에 대해 언젠가는 대화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더라. 분명 유쾌하게 받아들일 문제는 아닐 테고, 내가 이 말을 꺼내는 순간에 이 사람을 다시 안 보고 살 수도 있겠다는 다짐이 아직 서지 못했다. 이 사람과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나쁜 마지막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다. 생각해보니 이런 바람도 너무 과한 욕심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어떤 마음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은 내려놓고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많은 것을 곁에 두려고 애쓰지 말고, 내려놓기도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가볍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순간을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고.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너무 컸나 싶기도 하고. 역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였던가 보다. 아직 까지는 그렇더라.



무조건 해결해야 한다고 애쓸수록 마음의 짐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피하는 것이 무조건 비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야 가벼워지는 짐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몰아붙이지 않고 때로는 느슨하게 자신을 다루는 것. 그것도 충분히 용기 있는 선택이다.” (어른의 품위, 87페이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조금 일찍 나를 쉬게 하는 일. 쉬는 것도 감각이다. 그 감각을 무시한 채 앞으로만 나아가면 나만 흐려진다.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고 내 선택으로 결정해서 멈췄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 내가 생각하는 휴식의 방법이다.” (어른의 품위, 92페이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기 앞에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아주 사소한 것도 잘 정리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최고의 것만 향해 가고, 좋은 것만 갖고 싶은 노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정말 사소한 순간 하나도 잘 끝내고 싶었다. 다 잘하고 싶은 마음, 그게 얼마나 사람 속을 태우는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일주일에 2~3일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정말 여유로울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엄마를 살피러 다녀오면 하루가 지나가고, 가끔 한 달에 서너 번쯤 엄마와 병원 투어를 하면 또 하루가 사라진다. 또 어떤 날은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엄마들은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갈까 하고 말이다. 이번 달에는 또 예정에 없던 병원 일정이 늘어나 있었고, 시어머니의 병원 일정까지 챙기게 되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 내일 하루는 좀 늦잠을 자고 밀린 은행 일을 보고, 시간이 남으면 혼자 커피라도 마셔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잠이 든 게 어젯밤에 세운 계획이었는데,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날은 없었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시간을 빠듯하게 사는 건 아닌데, 왜 항상 시간이 없다는 말이 입에 붙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고단했다. 몸이 먼저 알아채는 고단함은 잠잠했던 대상포진으로 표시를 냈고, 마음마저 물렁물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도 못 하고 종일 호되게 앓았다.


내가 해야 한다고 여기던 일들이 사실은 내가 아니어도 되었던 것을,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그 순간은 흘러갔을 것을, 왜 내가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마음을 볶아댔는지. 안 된다고, 싫다고, 핑계든 거절의 말이든 하면서 피해도 괜찮았던 것을 왜 못하고 그랬는지. 그래도 조금은 시간 여유가 되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마음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도 모른 채로,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순간이 올 것처럼 위태로웠던 것도 무시한 채로 말이다.



우리는 다 알면서 못 하곤 한다. 하다 보면 하게 되고, 일어서다 보면 걷게 되고, 잘하기 전까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 안다. 사는 동안, 살아 있으면, 살아가다 보면 또 살아지게 된다는 것을. 아는 대로 배운 대로 해 오던 대로 이겨 내면 된다는 것을. 결국 잘 이겨 내리란 것을 안다.” (행복할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12페이지)



주말이라 도서관은 5시에 폐관한다. 5시가 거의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자료실에 놓은 의자에 앉은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있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집중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선택한 책의 문장에 빠져있는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그들 틈에서 내가 오늘 이 책을 만났던 것은 의외의 인연이기도 하다. 평소에 자주 만나던 책들이 아니었기에, 그 뻔한 말들이 싫어서 화가 날 때도 있었기에. 잠깐이었지만, 그 문장들에 눈길이 머물렀던 순간은 좋았다. 거추장스러운 마음 한 조각 떼어내서 한쪽에 던져둘 수도 있었고, 변덕이 죽 끓듯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을 한 번 더 살필 수도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고 금방 또다시 잊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고달파질 때마다 한 번씩 생각날 것 같기는 하다. 살짝 등을 한번 두드려주는 것처럼, 잊었던 다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나를 먼저 돌보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를 먹고, 참 새삼스럽다. 그걸 몰라서 고민하고 있다니. 아니, 고민보다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못 했던 것, 상대방을 먼저 살피느라 내 마음 그대로 표현하는 데 주저했던 것을 드러내는 일을 이제부터라도 잘해야겠다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주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도,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던 어른들의 존재도 잠시 잊고, 잠깐이라도 나를 먼저 챙기고 돌보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이다.


주말 잘 쉬었으니, 다시 시작되는 내일을 잘 준비해야겠다.











#어른의품위 #내가죽으면장례식에누가와줄까 #단한번의삶

#남에게좋은사람보다나에게좋은사람 #위로가필요해 #또한번의다짐 #나를먼저살피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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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ZM 2025-11-10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라는 표현이 와닿네요
저도 다른 누구보다 내 감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ㅎㅎ인간관계에 지쳐있는데 글 보고 댓글 남겨봅니다^^

구단씨 2025-11-11 19:50   좋아요 1 | URL

이쯤 되니, 기대를 안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봐요.
그 사람에 대한 기대보다, 인간에 대한 기대였나 싶기도 하고요.

2025-11-20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단씨 2025-11-27 17:59   좋아요 0 | URL
제가 5년쯤 전에 대상포진 처음 걸렸는데, 진짜 죽는구나 싶었어요.
오래 치료 받고 주사도 맞고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대상포진이 가끔 오긴 오는데, 거의 느낌 없이 왔다 가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몸이 힘들었나 봐요. ㅎㅎㅎ

추워지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몸도 마음도 포근한 연말연시 지내세요. ^^
 



우리는 읽는다. 외롭고 괴롭기에. 우리는 읽는다. 도움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읽는다. 희망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읽는다. 길을 찾길 원하므로. 읽기는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가슴에 아름다움이 있는 채로 살아낼 수 있다. 독자인 우리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읽은 책 너머, 쓰인 책 너머, 아직 읽히지 않은, 쓰이지 않은 우리의 삶이 있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 179페이지)


노인과 돌봄, 나이 들어 살아가는 일에 생각하곤 한다. 요즘 나의 고민과 힘듦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이기에 생각이 저절로 그쪽으로 기운다. 충분히 겪어봤기에 이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복병처럼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릴수록 고달픈 마음은 매번 그 수위를 경신한다. 현실에서 아무 경험해도 이 감정을 공유할 사람은 많지 않다.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는 그 이치를 또 한 번 확인하는 셈이다. 그래서 읽어봤다.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수록 현실을 바꿔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느라 답답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음을 감당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이들에게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찾고 싶을 때 펼치게 된다.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어.’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이 정도로 마음의 위로가 되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거, 그걸 찾고 싶었던 듯하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처음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어떤 마음을 찾고 싶어서. 단순히 재미로, 시간 보내기로 책을 찾았던 건 아니었다. 어떤 상황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 둘 곳을 찾다가 발견한 게 책이었다고. 비슷한 맥락으로 읽게 된 게 이 책이다. 작가는 책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삶을 바꾼 순간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순간에? 그건 각자의 상황과 생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나는 좀 알 것 같다. 불안한 우리의 마음에 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유명한 강사의 몇 마디 조언보다, 순간적으로 와 닿았던 한 문장의 힘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책의 문장을 기억하려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 몇 마디 덧붙이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자기만의 마음을 담은 문장이 계속될 수 있기에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들린다. 우리가 찾고 싶은 것이(그게 무엇이든, 얼마나 큰 것이든),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말이다.


작가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나의 예상보다 길게 언급해서 좀 당황하긴 했다. 처음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리고 어떤 순간을 경험하면서 그 책이 주는 삶의 방식이 매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한 개인이 사유하는 그 책의 서사에 대해 듣는 일도 괜찮았다. 유명한 요리사의 자신감 정도로 여겼던 바베트의 만찬이 그렇게 우아한 결말이었던가 싶었고, 요리사의 손으로 예술이 불태워지면서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이 의미 있게 들려왔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작가들의 공통점을 떠올리며 그 작가들을 연결하는 방식이나 생각도 좋았다. ‘그들은 인간을 움직이는 힘, 내적인 추진력, 우리 삶이 중심축 삼아 빙빙 도는 핵심, 앞으로 나아가게 혹은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지배적인 그 어떤 것, 이를테면 행동과 선택의 패턴 같은 것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107페이지)’ 모르던 세계를 알게 해준 레이첼 카슨의 바다의 가장자리, 시간과 에너지가 만들어준 내 자리의 힘과 가능성을 발견해준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존 버거가 알려준 연민과 사랑 가득한 저항과 연대에 관하여.


책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게 한다는 걸 새삼 듣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한 문장을 곱씹으면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누구이고 싶은지 알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을 전파한다. 그렇게 우리가 책을 읽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 붙이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닮아간다고 말한다. 너무, 괜찮지 않나? 읽은 순간으로 멈춘다면, 그저 그런 취미 생활로 끝날 수도 있는데, 그 순간이 이어지면서 우리 삶이 계속된다는 말이, 계속 우리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는 것 같아서. 사실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이 책 읽으면서 어느 순간에서는 괜히 혼자 울컥한 적도 많았다. 그 이유를, 그 마음을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적을 수가 없다. 표현력 부족에,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어휘력 부족까지. 부끄럽지만, 그랬다. 내가 왜 이런 마음인 줄도 모르고 울컥해서 한밤중에 잠 못 드는 시간이 계속되는 게 힘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책이네.


작가는 말한다. 책을 읽는 게, 낯설거나 새롭거나 유혹적인 어떤 것인가를 받아들이면서 느리게 서서히 어쩌면 영원히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빠르게 갑자기가 아니다. 책을 읽었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히듯 바로 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서서히 달라지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고, 어느 순간 거울로 마주한 내 표정이 달라져 있는 것을 기뻐할 수도 있다. 우울과 상실에 빠져 둘러보지 못한 주변이 보일 수도 있다. 어느 방향으로 보나, 책을 읽어서 손해 볼 것도 없다. ‘문장들을 붉은 실 삼아 가슴의 상처를 꿰매려고 할 때찾아오는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게 되는 게, 그게 책이라는 게 괜히, 기쁘다. 한동안 읽지 못한 책이 어디로 도망갈까 봐 조급하던 마음마저 치유되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책을 펼쳐도, 삶과 연결되는 이야기로 남을 거라는 믿음에 안심이 된다.


특별히 소중하게 간직하는 책이 있다는 것은 마음을 다른 것, 자신이 가치를 부여한 어떤 것들로 채우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책 읽기는 낯설거나 새롭거나 유혹적인 어떤 것을 받아들이면서 느리게 서서히, 어쩌면 영원히 변하는 과정이다. 책 읽기는 이렇게 삶에 개입한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을 대면하고 돌아보고 자신의 진실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뜻깊은 일로 여기고 삶과 연결시킬 때 독서는 독자의 고유하고 창조적인 경험이 된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 175페이지)










#책을덮고삶을열다 #정혜윤 #녹스 #에세이 #문학

#바베트의만찬 #모비딕 #그러나아름다운 #호라이즌 #바다의가장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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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뉘엿뉘엿 어두워지는 때 있죠. 노을빛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갈 때. 여기선 그 시간을 북새라고 그래요. 나 시집왔을 때 어머님이 알려준 말인데 그때는 옛날 말이 그렇게 듣기 싫더니 요즘엔 정겨워서 좋아요. 북새에 강변 하늘을 바라보면요, 누가 저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칠해놨을까 싶어요.”(뜻밖의 우정, 69페이지)


우리가 걷는 모든 시간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급성으로 찾아온 질병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노년의 시간을 거치며 죽음과 가까워진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을 만나는 게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맡겨 놓은 것처럼 죽음의 문을 향해 걷고 있는 거다. 오랜 기간 아버지의 투병이 아니었다면, 매달 출석 체크하듯 병원을 찾는 엄마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나는 노년을 겪는 사람이나 죽음과 가까운 상황에 관해 잘 몰랐을 거다. 지금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경험했거나 지금도 경험하는 그 순간을 그래도 조금을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서늘하다.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었기에 말이다. 몸이 아프고 마음은 쓸쓸해지고, 자식들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과 이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어떻게 유쾌하기만 할 텐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TV만이 유일한 친구가 되는 일, 그게 노년의 시간이라면 나도 그 시간을 만나고 싶지는 않을 듯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어르신이 그렇게 지내고 있다. 나의 노년도 그런 모습일까?


뜻밖의 우정』을 쓴 김달님 작가는 내가 알듯 말듯 한 노년의 모습을 누구보다 많이 봐온 사람으로, 그들을 보는 시선이 다를 수도 있겠다. 태어나서 줄곧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면서 가장 이해하고 싶은 대상이었다는 것은, 작가의 전작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느끼기는 했다. 그런 느낌을 이런 방식으로 시도할 것을 알지 못했을 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노년을 지내는 어르신들을 만났다. 그 시기를 사는 모습이 다들 비슷할 거로 여겼는데,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일흔여섯의 정열 어르신은 래퍼 연습생이 된 것으로 마치 한을 풀어낸 것처럼 좋아했다. 순자 어르신은 중년에 시작해서 예순여섯 살에 검도 6단의 고수가 되었다. 영화와 책으로 일상을 꽉 채우는 승기 어르신은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홍자와 옥순 어르신은 같이 노인 돌봄 일하면서 마치 여고생 단짝이 된 것 같았다. 트로트 아이돌의 활발한 활동을 지켜보면서 삶의 활력을 찾은 선자 어르신의 바람이 계속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작가가 만난 많은 노년의 삶이 내가 아는 모습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었다. 아니, ‘모습이 아니라 그 마음을 듣는 게 낯설었다고 해야겠다. 아마 누구나 갖는 일상을 바라보는 마음이었을 텐데, 노인이라고 그 마음이 다를 거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나 보다. 생각보다 유쾌하게, 축 처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즐거웠다. 우리 대부분, 각자의 일상을 그렇게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지 않나?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며 지내기도 하지만,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오래된 바람 하나 이뤄가면서 만족하는 삶. 시대가 그래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우선이어서, 바쁘게 살다 보니 잠시 잊힌 꿈이 너무 오래 잊히기도 했다. MBTI ‘슈퍼 I’인 내가 그들의 일상을 보는 마음이 좀 떨리기도 했다. 노래를 쫓아 아이돌을 따라다닐 수 있지도 않았고, 운동하겠다고 체육관을 찾아가는 것도 선뜻 떠올릴 수 없는 일이다. 랩은커녕 문화센터 노래 교실에 가볼 생각도 못 하는 심장을 가졌고, 좋아하는 책도 무슨 하루 루틴처럼 읽어내지 못하는 게으름은 덤으로 갖고 있으니, 나는 그들이 보여준 일상의 방식과 다른 방향의 루틴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닮고 싶은 마음이 있다. 노년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안 되는 것만 생각할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야겠다는 거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힘들겠다는 지레짐작으로 포기하는 일보다,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으로, 비록 그게 무모한 시도라고 할지라도 해봤으니 됐다는 시원한 기분을 느껴보는 것.


엄마가 한 달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가는 내과 병원이 있다. 나도 항상 같이 가서 선생님을 만나곤 하는데, 환자 대부분이 노인들이라서 선생님이 괜히 우스갯소리로 대화를 시작할 때도 많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다른 아픈 데는 없는지 물으면서 다른 이상이 없으면 평소와 같은 약을 처방해주신다. 그러면서 인사를 하신다. “어머님, 다음 달에 꼭 오세요. 또 만나요.” 그러자 엄마가 흥칫뿡 하면서 대답하신다. 병원에 오는 게 뭐가 좋다고, 또 만나자고 하냐고. 그러니까 또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매달 꾸준히 오는 어르신들이 있는데, 다음 달 안 오고 또 그다음 달 안 오고 그래서 알아보면, 돌아가셨다고. 어떤 면에서 어르신들이 꾸준히 다니는 병원에 매달 정해진 약속처럼 방문하는 일은, 그 어르신의 생사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가 독거노인 안부 묻기봉사활동을 하면서 부딪힌 그 순간, 어떤 어르신 이름에 두 줄이 그어진 채로 사망하셨다는 표시에 당혹스러운, 더는 이 어르신의 안부를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아니라 일주일 사이에 세상과 이별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인 거다. 그래서 이 마음을 더 알고 싶어진다. 작가가 권하는 독거노인 안부 묻기봉사활동 참여에서 보고 알고 느끼게 되는 게 더 많아질 거라는 건 확실하다. 내가 향해 가는 그 시간, 지금 그 시간을 살아가는 이에게 관심 두며 마음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말이다.


작가님은 아직 모를 거예요.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하루가 어떤 건지. 그분들에겐 어쩌면 작가님과 나누는 통화가 하루의 유일한 대화일지도 몰라요. 오늘 아침엔 무얼 먹었고, 지금은 무얼 하는지, 오늘 하루 기분은 어떤지,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누구와 나눌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즐겁게 나눠주세요.” (뜻밖의 우정, 198페이지)


어쩔 수 없는 순간이 늘어나는 게 노년의 시간이다. 중년을 살아가는 나도 많이 느끼는데, 나보다 더 나이 든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더 많겠지. 엄마가 소화가 불편해서 내과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결과는 나이가 들어서 위장도 늙었다는 말이었다. 눈이 침침해서 찾은 안과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는 말에 절망이 앞서곤 했다. 엄마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나보다 연장자들과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행동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노년을 향해 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나의 노년을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집안에서도 자기 주변을 정리하지 않고 모든 걸 늘어놓은 채로 살아가도 이상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나도 그런 모습으로 늙어가지 않을까 싶은 어색함도 있지만, 지금 가장 가까이서 보는 엄마의 현재를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을 듯하다.


이미 작가의 전작을 읽어서 그런지, 작가가 노년을 주제로 이분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낯설지는 않다. 오히려 전작보다 더 피부로 와닿는 노년의 시간을 이야기해주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노년의 시간에 더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 걸까. 어쨌든 확실한 건, 우리가 그 시간을 만나지 않고 생의 끝에 닿을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러니 누군가가 앞서 걸었던 그 시간, 곧 우리가 걸어갈 그 시간을 모른 채로 살아가지는 말자는 것


사실 이 책 때문만은 아니라, 요즘 특히 노년과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이유가 있긴 하다. 이제 팔순을 넘긴 엄마가 더 노쇠해지는 게 더 눈에 보이기도 하고, 그만큼 병원에서는 어떤 치료를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내 몸이 불편한데 그 불편함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한 건 나뿐만 아니라 환자 본인이 가장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늙어간다는 게 이런 걸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 같아서 괜히 섭섭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거기에, 오십 대 중반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가까운 이를 보고 있자니,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는 걸 너무 잊고 살았나 싶기도 하다. 애써 내 몸의 늙어감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이제는 더 부정할 수 없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노안을 진단받았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게 예전처럼 마냥 편하지 않다. 책 읽으면서 늙어가는 할머니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그게 불가능한 일이 되면 어쩌나 지레 걱정부터 앞선다. 좋은 생각만 할 수 없던 요즘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또 요즘에 같이 읽고 있는 다른 책들을 떠올려 보니, 다른 이들이 전하는 노년의 시간, 상황, 마음을 들으면서 사는 일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더 들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정할 수 없게, 언젠가 마주할 내 모습을 미리 보는 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안 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좋아하는 것을 해보는 시간 준비하며 즐겁게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렇게 쌓인 하루가 나의 노년을 채울 테니...












#뜻밖의우정 #내가알던사람 #노년을읽습니다 #즐거운어른 

#즐겁게늙어가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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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피부가 벗겨지는 줄 알았는데, 며칠 사이에 여름 햇살의 뜨거움이 조금 사그라든 것 같다. 어제는 거의 두 달 만에 에어컨 없이 잠들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한낮의 더위는 견디기 힘들긴 하더라만. 지난밤에 좀 편하게 잠들었던 것만 기억하고 나갔다가, 여전한 더위에 근처의 카페부터 찾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에어컨을 켜고 있는데도 조금만 움직이면 덥고, 주방에서 뭘 좀 하다 보면 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서 아예 에어컨을 켜는 건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일을 다 끝낸 후로 미룬다. 땀을 흠뻑 흘리고, 개운하게 씻고, 시원한 커피 한잔 만들어서 에어컨 앞에 자리 잡고 앉는다. 여기가 천국이고,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이렇게 여름을 느끼다가도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이번 여름이 잊힐 것 같지만 말이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환경 전문가가 나와서 하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언제나 이번 여름이 가장 더운 것 같다고 말하지만, 오늘의 더위가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더위 중에서 가장 덜 더운 날이 될 거라고. 지구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고, 그렇게 만든 건 우리 인간이고, 조금이라도 덜 덥게 지내려면 환경을 살피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입버릇처럼 또 읊조린다. 이번 여름이 내가 경험한 여름 중에서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고 말이다.


그래도 이 더위를 이기게 하는, 가성비 좋은 처방전은 추리소설이 아닐까 싶다. 요즘 예정에 없던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안 그래도 책 잘 안 읽는 나날이었는데 더 안 읽고 있다. 몸을 움직이다 보니 평소보다 잠은 잘 잔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읽겠다고 다짐하며 추리소설 여러 권을 옆에 쌓아두고 있었는데, 갈수록 책 읽는 속도가 더뎌지지만 그래도 천천히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그나마 이 책들로 이 여름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비록 페이지를 넘기는데 손끝의 땀이 책장에 묻어나서 좀 거시기 했지만, 여전히 페이지 넘기는 맛이 나는 종이책이 최고라는 즐거움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수화기를 잡지 않은 오른손을 슬며시 꽉 쥐었다. 유리창을 깨고 그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그 여자들을 죽였는지 말하시라고요.”

아버지는 나를 보며 눈만 깜박이더니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잖아. 네가 죽였잖아. 아니야?” (핸디맨, 246페이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애런 니어링. 10년 동안 실종된 여성 열일곱 명의 잘린 손이 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되면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전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핸디맨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렇게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줄 알았다. 그 사건 이후로 26년이 지난 지금, 애런 니어링의 딸 노라는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고, 다시 손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면서 26년 전 사건과 주인공을 소환하게 된다. 경찰은 자연스럽게 핸디맨의 딸 노라를 의심하지만, 노라를 범인으로 만들 증거가 없다.


누가 범인일까? 당연하게도, 읽으면서 범인을 추리하게 되는데, 나는 그 범인을 맞추지 못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전혀 다른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나의 추리는 틀리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다. 진짜 인간의 본성은 유전력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더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왔어도, 핏줄로 이어진 그 본성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맞는 말인지...


프리다 맥파든의 모든 출간작을 섭렵하고자 마음먹었는데, 이 작품을 끝으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만났다. 우리나라 출간 기준으로는 이 책이 가장 먼저 출간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책을 가장 마지막으로 읽게 됐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이 가장 단조롭게 느껴졌다. <하우스 메이드>를 처음 읽었을 때의 꽉 찬 느낌이 없었다. 나름의 반전은 있었으나, 그게 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는 아니었던 듯하다.




소개 글에 혹했다. 일본에서 드라마도 있었다고 하고, 18년 전의 부모 토막 살인 사건을 새롭게 취재해 또 다른 서사로 구성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재판 과정과 재판정 안의 장면을 묘사하는 법정 화가, 여러 인물의 증언들, ‘그래서 진실이 뭐냐고?’ 하는 질문을 계속 쏟아내게 하는 흐름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면 매력으로 보였다. 부모를 살해했다는 잔혹함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보여주고, 이 끔찍한 이야기를 소설로 내놓으며 이익을 얻으려는 출판사는 또 얼마나 계산적으로 나오는지 기가 차기도 했다. 그 출판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작가는 또 얼마나 자극적인 표현과 서사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애쓰느라 발버둥을 치는지.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르고,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몰라서 헷갈리는 상황이 계속된다.


소재는 잔인했지만, 그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읽는데 더 초점이 맞춰지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 인간이 그렇다. 각자의 욕망에 충실해지려는 본성, 그러다 보니 이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 더 복잡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또 사회와 가족 그 내면의 이야기는 더 불편하고 어색하고,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결말을 만들기도 한다는 게 씁쓸했다. 다 읽고도 개운한 느낌은 별로 없어서 이런 장르의 책을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가정 폭력의 생존자인 렌. 아버지는 종말대비자로 세상의 구석으로 나와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정신이상자에 불과한 아버지를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 가정은 파괴되었고, 렌은 엄마와 오빠를 잃었다. 세월이 흘러 그 상처를 조금 잊고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그녀에게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데이트 앱으로 만난 그 남자 애덤. 렌은 애덤에게 푹 빠져버렸는데, 어느 날 애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할 틈도 없이 렌에게 탐정이 찾아오고, 애덤의 정체를 알게 된 렌은 혼란에 빠진다.


감쪽같이 사라진 그 남자 애덤, 혹은 레이프 맨스, 그도 아니면 티모시 존스턴, 또 다른 이름 클리프 젠슨. 이 남자의 본명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렌은 이 남자의 등장으로 벌어졌던 일을 좇는 탐정 베일리와 함께 진실을 찾기 시작한다. 애덤을 만나고 사라진 여성들, 그 여성들과 애덤이 정말 연관이 있는지, 그 여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살아있기는 한 건지.


어쩌면 요즘 우리는 진실을 감지하는 본능이 무디어지다 보니 진실과 거짓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고스팅, 155페이지)


애덤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파헤치며 렌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러면서 점점 맞춰지는 퍼즐에, 자기만의 세상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낀다. 자기가 만든 세상, 이게 옳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정하는 건 가능하다. 본인이 그렇게 살면 되니까. 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이 타인에게, 그런 방식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가 될 때 피해를 주는 거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게 피해를 주는 건지 아닌지조차 관심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작가의 출간작 두 권을 추천받았는데, 당분간 나머지 작품은 못 만날 듯하다. 이 작품 읽으면서 속이 터져 죽을 뻔했다. 범인을 찾는 건 쉬웠으나, 그 과정을 읽어가는 게 좀 지루하게 느껴지더라. 세상에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많으니 조심 또 조심하자는 메시지를 심어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피터 스완슨의 작품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다. 최근 출간작은 거의 안 읽었는데, 전작에서 등장했던 인물 릴리가 등장한다고 해서 궁금했다. 도서관 사서 마사는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 앨런은 교육 관련 영업하면서 출장을 자주 다닌다. 그는 마사에게 항상 일정을 공유하고, 출장지에서도 자주 연락한다. 다정한 남편이라고, 읽는 나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뉴스에서 어떤 여성이 살해되었다고, 자살했다고 소식을 전할 때마다 뭔가 조각을 잃어버린 퍼즐을 보는 기분이었다. 죽은 여성들이 있던 곳은 남편의 출장지였다. 어느 한 곳이라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텐데, 남편이 출장 간 곳에서, 남편이 출장 간 그 시기에 여성의 사망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마사는 의심한다. 내가 아는 앨런의 모습은 진짜일까?


세상에서 살인이 가장 쉬웠어요.’ 살인마의 머릿속에 이 문장만이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살인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이건 인간이 아니었다. 소시오패스나 다른 설명도 딱히 필요 없어 보였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는 말 밖에는. 그래서 누가 범인이냐고? , 그건 직접 읽고 찾아내야 하지 않겠어?


앞서 읽은 작품들보다 집중력이 떨어지긴 했다. 잔인한 살인마가 등장하는 건 긴장되기도 했지만, 좀 밋밋했다. 읽으면서 계속 추리했던 범인,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 건가 하는 나의 예측이 어긋났기에 결말에 관한 기대가 더 커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 살인마의 최후보다 릴리의 등장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궁금증만 남았다.




처음 계획에는 8월이 가기 전에 읽고 싶은 목록을 15권이나 추려놓았는데, 그중 절반도 못 읽었다. 지금도 내 옆에는 다 읽지 못한 목록의 책이 쌓여있는데, 그 사이에 몇 권 더 늘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 안 읽는데도 계속 책을 샀네. 못 살겠다. 에휴. 남은 더위를 이겨낼 추리소설을 마저 다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우선순위 목록을 정해서 다시 쌓아두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들여온 책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그래도 자꾸만 높게 쌓여가는 책을 보는 마음은 괜히, , 괜히 더 즐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네.




#핸디맨 #살인재능 #고스팅 #언덕위의빨간지붕 #책 #추리소설 #책추천 #더위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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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1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핸디맨은 서사구조는 좀 떨어지죠. 마지막에는 좀 뜬금없기도... ㅎㅎ 그래도 저는 이 소설이 좋았던게 프리다 맥파든 소설 중 유일하게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인물이 나온달까요? ㅎㅎ 여름은 추리소설이죠. 저도 요즘 집에만 있어서 책을 쌓아놓고 독파하는 기쁨을 만끽 중입니다. ㅎㅎ

구단씨 2025-08-17 17:2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바람돌이님 말씀 듣고 보니 이 책에서는 특별히 나쁜 애들이 안나오네요. ^^
한편으로는 이 책을 마지막에 읽은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해요.
처음에 읽었다면 재미 없다고 작가의 다음 작품들 안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아직도 읽고 싶은 책 엄청 쌓여있어요. ㅠㅠ
이게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지만요....

여전히 더운 날이 계속입니다.
언젠가 끝날 여름이겠지만, 매일 땀 흘리고 있다 보니 좀 힘들긴 하네요.
 



내 몸이 이렇게 살이 찔 수 있다는 걸 새롭게 확인하는 날들이다. 매일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경신하고 있다. 그냥 맛있는 것을 조금(?) 먹었을 뿐인데. ㅠㅠ 조심했어야 했다. 워낙 운동을 싫어하니 먹는 것으로 몸을 조절하며 살아온 인생이라, 그래, 그 맛있는 것(!)을 멀리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해서 이 몸뚱이가 되었다. 남편은 지금 자기가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새로운 여자가 옆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여동생은 왜 이렇게 살이 쪘냐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던 옷이 맞지 않으니 더 큰 옷을 사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몇 년째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몸이 커지니 여름의 더위를 견디기가 더 힘들어지고, 희한하게도 몸이 살찌니 손과 발까지 커진 듯하다. 매일 신던 슬리퍼도 꽉 끼네. 하아. 이번 여름의 이른 더위와 폭염, 폭우 속 꿉꿉함을 더 힘들게 견디는 중이다. 앞으로도 운동으로 몸을 만들지는 못 할 것 같은데, 다시 먹는 것을 조절하는 수밖에 없는데,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진짜 힘들다. 이런 몸으로 고민이 많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게 위로라면 위로가 될까.




이곳에서는 뚱뚱해도 놀림받지 않고 비키니를 입을 수 있습니다. 뚱뚱해도 옆 좌석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있습니다. 뚱뚱해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자유롭게 길거리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여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빅토피아, 8페이지)


165cm, 몸무게 110kg의 고도비만 엄희지. 평범한 여고생이 몸 때문에 현실에서 주눅이 들어 산다. 사람들이 자꾸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다. 뚱뚱한 몸이 아닌 날씬한 몸으로 변신한 애프터의 세계에 살고 싶지만, 아마도 이번 생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찾은 곳, 날씬한 사람은 입장할 수 없는 메타버스 빅토피아에서 친구를 사귀고 존재감을 느낀다. 어느 날 빅토피아의 이벤트가 열린다. 무려 1등 상품이 언리밋 테테크라고, 메타버스에서 맛만 느끼고 바깥 현실에서 아무것도 안 먹으면 쉽게 살을 뺄 수 있는 미각 동기화 시스템이다. 이걸 구매하려고 하면 3천만 원이 든다. . 3천만 원으로 이 시스템을 이용해서 살을 뺄 수 있다면 좋겠지만, 3천만 원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돈도 아니고, 그 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쓸 수 있는 금액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 이 경쟁에서 이기고 1등을 차지해서 언리밋 테테크를 상품으로 받고 애프터의 몸으로 살아가야지. 전투력 상승이다.


소설 빅토피아의 설정은 그냥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날씬한 몸으로 살고 싶은 우리의 갈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청소년 대상 소설인데도, 중년의 시간을 사는 나에게도 솔깃한 제안이긴 하더라. 미친 듯이 싸우고 이겨서 내 몸을 살이 찌기 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성시경 오빠 도와줘요~) 그래서 희지는 이 싸움에서 이겨 1등을 차지하고 애프터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비수를 꽂은 것은 남편이었다. 지난달 시아버지의 장례식 때 있었던 일이다.

큰일인데.”

남편은 자꾸 그 소리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뭐가 큰일이야?”

오늘 회사 사람들이 많이 조문 온대.”

그러면 감사하지. 다들 바쁜데 일부러 장례식에 와주시는 거잖아.”

회사에서 내 아내는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야. 내 동기나 상사도 우리 결혼식 때 말고는 당신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러고도 남지. 미안한데 노리코, 잠깐만 어디 좀 숨어 있으면 안 될까?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남편의 눈은 진지했다. 충격이다 못해 쓰러질 뻔했다. (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 19페이지)


남편이 저렇게 얘기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정말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장면이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당신의 살을 빼 드립니다에서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각각 다른 상황에 놓여 있지만, 살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건 비슷하다. 노리코는 갑자기 찐 살 때문에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우울하다. 예쁘다는 소리만 듣고 살다가 갑자기 살이 찌니 자신감이 바닥이다. 어렸을 적부터 먹는 것을 좋아하고 뚱뚱했던 고기쿠는 파티시에가 되고 싶지만, 아버지가 강요하는 삶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동안 뚱뚱한 사람을 혐오하면서 살아왔던 도모야는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자기 절제를 못 하고 먹어대기만 하는 뚱뚱한 몸이 되어 있었다.


뚱뚱한 몸이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어떤 이유로든 살이 찌면서 이들의 인생이 바뀌었고, 다른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기 어려워졌다. 불안감은 터질 것 같았고, 자기 인생인데 자기 의지를 담지 못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나부터도 살이 찌면서 자신감이 떨어지곤 한다. 맛있는 것을 보면 행복하지만, 먹고 나면 금방 또 우울해지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한다. 이 몸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그렇게 흐르니 세상의 민폐족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만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나의 인생, 나의 미래라는 커다란 삶을 파괴하는 일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이 순간을 바꾸기 위해 달라졌다. 뭔가 시작하면서 용기를 내고 있었다.




플럼은 뚱뚱하다. 그녀의 낮아지는 자존감은 위의 두 소설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회사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이유를 상기하며 하루하루 희망을 품는다. 월급을 꾸준히 모아서 수술해야 하니까. 곧 그녀의 몸에 머물던 지방은 사라질 거고, 날씬한 여자가 되어 그녀의 원래 이름 얼리샤도 되찾고, 그녀가 바라던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소설 다이어트랜드의 플럼이 정말 수술해서라도 날씬해질 것을 기대하며 읽었다. 열심히 월급을 모은 보람과 꿈을 이룬 완성의 순간을 같이 기다렸다. 하지만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데, 플럼이 어느 회사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플럼이 날씬한 몸으로 변해가면서 진짜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생각했는데, 슬프게도 이건 해당 프로그램을 주최한 회사의 상술이었고, 여러 가지 사기성 이벤트였던 거다. 한참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플럼은 날씬한 몸을 얻기 위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다이어트 프로그램은 망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수술이 남아 있으니까.


처음에는 뚱뚱한 플럼의 날씬해지려는 계획을 지켜보는 재미로 흥미로웠는데, 중간에 한 명씩 등장하면서 그들과 어떤 조화를 이루며 흘러갈까 싶은 기대감이 생기더라. 얼굴 반쪽이 화상 흉터로 자리한 새너, 아름다운 여배우에서 비만의 아이 엄마로 변한 말로,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던 리타, 비밀이 가득해 보였던 줄리아, 칼리오페라는 성을 만들고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베레나. 그동안은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플럼, 아니 얼리샤. 그리고 제니퍼. 제니퍼의 등장은 세상 모든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일인지, 자존감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면서 소설의 느낌은 점점 무거워진다. 무거워지는 만큼 진지하고,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체중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되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온갖 일들을 겪었음에도 겉으로는 예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은 달라져 있었다. 나는 변신을 거쳤다." (다이어트랜드, 318~319페이지)




어느 단식원의 코치 봉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봉희는 단식원에서 사라진 회원 운남을 찾으러 다니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단식원은 ‘Y의 마지막 다이어트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운남이었기에, 반드시 운남을 찾아야만 했다. 체중을 30kg 넘게 감량한 운남은 이 프로그램의 최적인 주인공이었다. 현재 운남의 몸무게 50kg대 초반이 되었고,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한 다이어트 아닌가? 이 다이어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로 운남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스스로 사라져 이 프로그램 관련자들을 곤란하게 한다. 특히 운남의 코치 봉희는 이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급기야 운남을 찾으러 그녀의 고향까지 갔지만 허탕을 치고, 오히려 운남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온다.


얼마나 처먹으면 이렇게 되냐? 무거워서 이거 어떻게 들어?’ 죽고 싶었지만, 바로 죽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죽으면서까지 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삶의 끝에서조차 존중받지 못할 거란 게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에요. 죽으면 끝이라는데, 웃기죠?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254페이지)


제목부터 비장한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는 우리가 비만에 대해 어떤 인식을 뒀는지 솔직하게 보여준다. ‘살이 찐 몸이 낮은 신분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듯하다. SNS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시선을 빼앗기고, 누군가 눌러주는 좋아요팔로워수에 일희일비하는 삶.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 시선에 모든 인생을 걸어서도 안 된다는 걸 자주 잊기에 소설 속 상황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타인이 보내는 시선에 상처받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그 상처에 누군가는 목숨을 걸기도 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이 소설은 그 목소리의 대변인이었다. 당신의 시선과 한 마디에 누군가는 상처 입고 좌절하며 생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그 상처의 주인공은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그 주인공은 당신이 될 수도 있다. 단식원에서 사라진 운남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을 때, 우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프로그램의 결말에 만족하고 안심하게 된다. 당당하게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빛이 난다는 걸 확인하면서 읽게 되는 소설이다.



몸에 관한, 다이어트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비슷한 경험과 괜히 혼자 상처받은 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건강 때문에라도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걸 아는데도, 이 몸으로 사는 게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 계산해 보기도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에 행복한 게 먼저인지, 손과 발까지 뚱뚱해진 내 몸을 관리해야 하는 게 먼저인지. 사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내 몸은 적당(?)했다. 불편함이 없었다. 맹장 수술 전에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의사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었다. 초음파 기기로 배를 눌러서 봐야 하는데, 양쪽 골반이 자꾸 기기에 걸려서 아프겠다고. (이런 날이 나에게도 있었다고. ㅠㅠ) 하루에 한 끼를 먹어도, 이틀에 한 끼를 먹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다는 건, 하루 세끼를 챙겨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배고플 때 먹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고 자꾸만 뭘 먹으러 다녔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혼자 먹기 어색할까 봐 같이 먹던 게 점점 습관이 되어 몸무게가 자꾸 늘었다. 입이 터졌다고 하는 그거 말이다. 평소 거의 안 먹던 사람이 한번 입이 터지니 그 터진 입을 꿰매지 못하고 오늘까지 이어진 거다. 먹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어 좋아해야 할지, 예전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 슬퍼해야 할지, ...


다음 주에는 남편의 휴가가 있다. 평소 더운 날에는 움직이기 싫어서 휴가가 있어도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하러 다니곤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몇 개의 병원 진료와 검진을 예약했고, 평일에만 가능한 은행 일정을 정해놓았다. 엄마 집과 시골에 한 번 다녀오면 짧은 휴가가 다 끝나겠지만, 아쉽지는 않다. 그 일정들 사이에 맛집 투어가 있기 때문이다. ^^ 평소 어느 식당의 어떤 메뉴가 맛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메모하고 저장해 두었는데, 이번 휴가 기간에 그 맛집들을 다녀오기로 했다. 메뉴도 소박하고 그동안 먹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시간이 안 맞고 귀찮아서 포기했던 음식을 먹으러 간다. 여전히 내 몸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지만, 맞는 옷이 없어서 한 번씩 우울해지지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으려니 기분이 좋아진다. 매번 음식을 앞에 두고 고민한다. 이 음식을 먹는 게, 마치 죄를 짓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이가 말한다. 이 순간만큼은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고. (아휴, 이 인간은 그러다가 내 몸이 이렇게 되었다는 건 잊었나 보다)


그래, 다음 주까지 맛있게 먹고 8월부터는 살을 조금만 빼자. 올해 안에 병원 검진도 받아야 하니, 괜히 검진하고 안 좋은 결과 나와서 계속 약 먹어야 하는 것보다 낫겠지. 소박하게 감량 목표는 한 달에 3kg? 될까? 되게 해야지. 이유와 목표가 생겼으니까. 예전의 몸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건 어려워도, 옷 크기를 지금보다 한 크기는 줄어야 내 몸이 건강해진 걸 확인할 수 있을 듯해서. 내 몸을 내가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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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3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깁자기 남편 폰에 입력된 제 이름이 신경쓰입니다. 절세미녀 ㅎㅎ 물론 제가 직접 입력해준겁니다. 구단씨님 이 글 읽다가 바꿔야하나 심각하게 고민 좀.... ㅎㅎ
한달에 3kg은 소박하지 않은거 깉아요. 대단한 목표예요.

구단씨 2025-07-23 18:06   좋아요 1 | URL
꺄아아아~~~
바람돌이님, 저희 남편 휴대폰에도 제 이름이 ‘절세미녀‘ 라고 저장되어 있어요. ㅎㅎ
맹세하지만 제가 그런 건 아니고요!!!
언젠가 제가 물어봤는데, 혹시라도 회사 동료가 보면 비웃을 거 같다고 했더니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더 살을 못빼나봐요. 간절하지 않아서요. ㅠㅠ

바람돌이 2025-07-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다씨님 승입니다.
저는 제가 입력해줬고 남편은 귀찮아서 안 바꾸는거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