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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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작가, 익숙하지 않은 흐름이었다.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네 명의 시선으로 추리가 펼쳐지는데, 이게 참 웃기다. 같은 사건을 두고 각자의 생각을 얘기하다 보면 사건 해결에 다다를 것만 같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공감하고 공유하며, 내가 미처 다 알아채지 못한 행간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을 때, 이래서 독서 모임 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네 명의 추리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한 사람이 놓친 것을 다른 사람이 찾아내어 퍼즐을 꿰어맞추는 듯한. 게다가 사건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그들이 감춘 속내가 슬슬 드러난다. 역시 인간이란, 자기 안위가 먼저가 아니겠는가.


특급호텔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의 사장 바이웨이둬가 사망한다. 총을 맞고 죽은 채로 산책로에서 발견되었다. CCTV도 다 확인했지만, 아무리 뒤져도 목격자나 용의자를 추릴 수 없다. 밀실 살인인 걸까?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고, 단서도 없다. 경찰이 출동하고 검찰까지 나섰지만, 사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푸얼타이 교수, 뤄밍싱 경관, 거레이 변호사, 인텔 선생이 한 명씩 나서서 이 사건을 추리한다. 물론 처음부터 이 사건 해결을 위해 머리 맞대고 모인 건 아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호텔에 모인 네 사람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로 향했고,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진짜 기가 막힌다는 생각과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완벽할 것 같지만 한 가지씩 모자라고, 뒤통수를 치고 있지만 동시에 당하기도 하는 이들의 활약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호텔 사장의 사망 사건을 추리하는 것도 벅찬데, 이어지는 또 다른 살인. 푸얼타이 교수가 범인으로 지목한, 호텔 조경을 담당하던 황아투가 호텔 사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황아투가 호텔 사장을 죽인 게 아닌가? 아니면 이들의 뒤에서 누군가 한 사람씩 제거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걸까? 푸얼타이 교수가 풀어낸 추리가 뭔가 부족하다 싶을 때 등장한 뤄밍싱 경관은 사실 또 다른 살인사건을 찾아온 거였다. 그가 현재 경찰도 아니었으니 이 사건에 뛰어들 이유는 없지만, 호텔 사장 살인사건과 뭔가 연결된 것만 같다. 그렇게 사건을 지켜보던 뤄밍싱 경관은 푸얼타이 교수의 추리를 살짝 비틀고 그만의 추리를 내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레이 변호사의 추리. 뤄밍싱과 거레이의 관계는 이혼한 부부였다. 죽은 호텔 사장 아내가 거레이와 친구였고, 호텔의 파티에 초대됐던 거레이는 이 사건을 모두 지켜본 이다. 그러면서도 푸얼타이 교수나 뤄밍싱이 보지 못한 또 다른 장면을 본 근거로 그녀만의 추리를 완성해간다. 이렇게 그들의 추리는 완벽해질 수 있을까?


각자의 자리에서 완벽한 추리를 하는 것 같은데, 막상 듣고 보면 마지막이 좀 모자라다. 그게 아쉽거나 미완성의 추리소설 같은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족함이 이 책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게 아이러니. 그들 모두 자기가 본 그대로 말하고, 그 근거로 이 살인사건을 풀어가려고 애쓰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모두 다르다는 게 재밌다. 앞서 세 사람이 꺼내놓은 추리는 나름 완벽(?)했고, 조금씩 이 사건이 풀리는 건 같았다. 그런데도 모자란 하나가 뭘까 궁금하던 차에 등장한 인텔 선생. 한때 이름을 날리던 괴도 인텔 선생은 부유층을 주로 털었다. 경찰이 그를 잡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어느 날 그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게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런 인물을 거레이 변호사가 불러냈으니, 그 이름 인텔 선생은 이 호텔 살인사건에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궁금할 테지.


이쯤 되니 예상되지 않는가?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의 사망으로 시작된 사건이지만, 그동안 각자가 수면 아래로 묻어놓았던 사실과 감정들이 하나씩 올라오는 게 기대된다. 가려진 정체와 진실, 숨겨진 관계와 고통, 혼자 음흉하게 계획한 미래의 일들까지. 네 명의 추리가 끝났을 때는 더 깊게 감춰둔 진실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어쨌든 추리소설의 재미와 결말이 사건 해결을 보는 거라면 이 소설은 성공한 셈이다. 그 성공이 너무 진지하지 않아서 독자의 눈길을 끈다. 결말 역시 상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끌어냈다. 골 때리고 뭔가 모자란 듯한 인물들 때문에 그 재미가 더해졌다는 건 안 비밀. 그들이 풀어낸 추리에 하나씩 더해져서 다음 인물이 다시 풀어내고 있기에, 챕터 하나씩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이 사건을 보고 있는지 더 궁금하게 한다. 코믹 액션 영화 한 편 본 기분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기 마련이다. 거레이 변호사가 뤄밍싱과 이혼한 과정이나, 네 명의 인물이 각자 본 것을 근거로 추리하는 것이나 비슷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가끔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조금은 생각해보는 것도, 다른 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유쾌한 추리소설 한 편으로 마주한 진실 찾기가 볼만했다. 그나저나 다음번에 푸얼타이 교수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다. 새를 미치게 사랑하는 이 교수 매력 쩔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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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소설 #소설 #문학 ##책추천 #도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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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4-07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재밌어 보이네요.
저도 기억했다 봐야겠습니다.
저는 어제부터 <그 해 우리는>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비슷한 형식 같기도 하네요.
로맨틱 코미딘데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나래이션 부분에 나오는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공감이 가더군요.^^

구단씨 2022-04-23 14:25   좋아요 0 | URL
약간 코믹(?)스럽기도 하고요.
한 사람의 추리가 끝날 때마다 반전이 등장하는데, 재밌더라고요. ^^
 
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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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아침 풍경에 드리운, 피가 낭자한 칼 한 자루가 눈에 선하다. 내 눈은 문장으로 칼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한 남자의 손에 일본도가 들려있었고, 그가 입은 셔츠는 붉고 눈은 빨갰다. 그날 그의 칼에 사망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잔인한 사건에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중에 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부부 중 남편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훗날 이날의 장면은 어떻게 기록되었을지 궁금하기만 했다.


매년 칠석이 다가올 무렵, 나팔꽃 시장이 열리는 다이토 구 이리야. 부모님이 반드시 치러야 할 행사처럼 매년 나팔꽃 시장을 찾는 게 불만이었던 소타는 우연히 유카타 차림의 다카미를 만난다. 같은 학년에 같은 이유로 나팔꽃 시장을 찾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두 아이는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가끔 만난다. 이 설렘이 첫사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카미에게 빠져있던 소타는 아버지의 검열에 걸려 다카미와 이별한다. 사실 아버지에게 걸렸어도 소타는 다카미를 계속 만날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 다카미가 아버지보다 더 단칼에 소타를 잘라낸다. 이유가 뭐지?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소타는 집안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한다.


소설은 세월이 흘러 이십 대를 살아가는 소타를 비춘다. 그리고 한때 수영선수였던 리노의 등장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리노의 할아버지가 타살되면서 등장한 형사 하야세와 그가 맡은 노인 살인 사건은 소타와 리노, 하야세 세 사람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까 궁금했다. 꽃을 키우며 사는 게 노년의 낙이었던 리노의 할아버지 죽음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과거 소년과 소녀가 만났던 나팔꽃 시장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 이 살인 사건과 만나게 될까. 모든 것은 리노의 할아버지가 살짝 보여준 노란 나팔꽃 때문이었다. 우연히 꽃 피운 노란 나팔꽃이 놀라워서 리노에게만 보여준 할아버지. 이 신기한 꽃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도 좋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비밀에 두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랗게 꽃피운 나팔꽃 화분이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이 노란 나팔꽃 때문일까? 이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던 리노는 소타와 손을 잡고 이 사건을 추적한다. 물론 이들은 형사가 아니다. 형사 하야세는 그만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쫓고,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이 다시 등장하면서 오십여 년 전 일어났던 MM 사건과 맞물려 새로운 단서를 쏟아낸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궁금증은 나팔꽃이 노란색이 없었나 하는 거였다. 나팔꽃을 자주 보지도 못했지만, 꽃잎이 무슨 색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에도 시대에 존재했다는 이 꽃이 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 자연스럽게 퇴화하여 인간 지구에서 사라진 식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이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건 자연스러운 소멸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세상에서 사라진 꽃이라는 거다.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굳이 인간의 손으로 멸종시켜야 했다면 그 이유도 있을 터. 한 노인의 사망으로 확인하는 식물의 양면성이었다. 그동안 들어왔던 의학 이야기에서, 원래 독은 약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독을 적당히 쓰면 약이 되고 과하게 쓰면 그대로 독이 된다고. 오래전에 사라진 노란 나팔꽃의 존재도 비슷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꽃, 하지만 그 씨앗은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약물로는 사용하면 안 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라진 꽃을, 씨앗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210페이지)


얼핏 이해가 되기도 할 것 같다. 몽환화. 말 그대로 꿈과 환상을 좇게 하는 꽃이 되겠지. 그 꽃을 쫓다 보면 자기가 멸한다는 경고를 깊게 새기지 않은 이의 잘못을 죽음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자기가 멸한다는 경고를 듣고서도 그 꽃을 쫓을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간절함을 아예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 소타와 리노를 보면서 어쩌면 인간은 자기 앞에 닥친 절망과 포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더 간절해지지 않을까 싶다. 원자력공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대지진과 탈원전 방향을 겪으면서 더는 자신의 공부가 의미 없다고 여기는 소타와 더는 수영을 할 수 없다고 여기며 겁에 질려 있는 리노는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이다. 고민한다는 건, 현재 상황을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기에 하는 일이다. 동시에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타가 그동안 해온 공부를 그만둔다고 해서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건 아닐 테다. 리노 역시 오랜 세월 자신의 업이라고 여긴 수영을 다시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더 나은 실력으로 현재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 이 청년들이 공부든 수영이든, 미래를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


리노 할아버지의 죽음을 중심으로 소타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오랜 노력을 엿보면서, 현재까지 대대로 이어진 그들의 임무를 생각해본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써왔을까. 그 노력의 결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내일의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할지. 무엇보다 주인공 두 사람이 고민하던 오늘의 문제가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 장래의 문제를 의외의 방향에서 접근하는 느낌도 있다. 작가가 들려주는 미스터리한 이야기에서 인간의 많은 고민이 들려와서 좋았다. 천재적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싶은, 아름다운 꽃을 개발하는 기쁨, 오랜 세월 달려온 인생의 변화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고민이 하나의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다 녹아있다. 그 결말까지 만족스러워서, 마치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작가의 많은 작품이 그랬듯이,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는 것 역시 놓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인간의 도리라고 말해도 좋을, 그들이 찾은 빚이라는 유산을 앞으로 어떻게 청산해갈지 기대된다.



#몽환화 #히가시노게이고 #비채 #일본소설 #추리소설 #미스터리소설

##책추천 #문학 #리뷰 #노란나팔꽃 #빚이라는유산 #인간의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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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 인물편 - 벗겼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벌거벗은 세계사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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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늘의 세계가 먼 훗날 어떻게 들려올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 기름값 전쟁을 일으킨 배경이 된 인물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세계사에 기록될까.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기름값으로 남편은 출퇴근만 겨우 하는 정도다. 주말의 우리는 버스나 도보로 다닌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장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삼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지만, 무엇보다 이 전쟁이 얼른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경제적으로나 피해자를 위해서나. 알렉산드로스가 전쟁의 명문을 찾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마 오늘의 이 전쟁도 분명한 명분을 제시하지 않으면 세계인의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다.


TV로 방송될 때 자주 챙겨보던 프로그램이다. 제시간 못 맞추면 아쉬워서 다시 보기로 가끔 찾아보기도 했다. 역사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제작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치 구연동화 듣는 기분으로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다. 매번 주제에 잘 맞는 강연자가 나와서 눈과 귀를 호강시켜줬다. 무엇보다 역사 지식이 쌓이는 만족감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우리가 역사에 쉽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각 회차에서 만난 여러 인물 중 몇 명을 소개한다. 이미 방송에서 봤던 내용도 있지만, 미처 다 듣지 못한 뒷이야기 같은 추가 부분이 더해져 꽉 찬 느낌이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이야기로 기억하게 되어 얼마나 재밌는 공부가 되는지 모르겠다.


세계사에 기록된 모든 사건과 인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이미 들어온 내용도 있겠지만, 이른바 가짜 뉴스인데도 사실처럼 기억하는 부분도 있다. 이 책에서는 세계사의 진실을 들려주면서 우리가 가짜 뉴스에 속지 않도록, 가짜 뉴스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지도 보여준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그녀가 하지 않은 말들,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는 상황들이 그녀를 구석으로 몰았다. 운명이 그녀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도 모른 채로 흘러왔을 뿐인데, 프랑스는 그녀를 악녀처럼 여기고 프랑스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물로 만들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안 되는 유명한 말로 그녀를 비난했고, 그녀의 끝은 결국 단두대였다. 슬픈 결혼생활로도 모자라 프랑스 국민의 미움까지 감당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인생은 참담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결합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그렇게 끝나버려 절망적이지만,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알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보이는 것 말고, 그 이면의 이야기까지 찾아봐야 한다는 것.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한 나라, 전 세계의 진실이 다시 보일 거다.


흥미로웠던 건 폭군이라 불리던 네로였다. 어렸을 적부터 너무 익숙하게 들었던 폭군 네로.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못된 성질의 황제였다고 알았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누구도 그가 어릴 적부터 폭군이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내 기억의 오류였다. 그에게 붙여진 폭군이란 수식어가 마치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여기게 된 건 왜일까. 네로는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가 원래의 성정대로 성장했다면 어쩌면 인자하고 현명한 성군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나중의 일을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린 소년이 엄마 손에 이끌려 권력 다툼의 한 가운데로 끌려들어 갔을 때 이미 그의 인생은 그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쥐고 흔드는 대로 듣고 따라 해야만 했던 그의 성장 시기는 점점 그가 성인으로 살아가는데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결국, 여자 문제로 어긋난 모자 관계는 폭군 네로라는 이미지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그를 향한 수식어는 그의 성정에 영향을 끼친 엄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거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종종 등장하는 수렴청정과 비교하면 어울릴까?


듣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알았던 내용과 많이 다르기도 하다. 역사에 남겨진 인물들이 모두 업적만 세운 건 아닐 테지만, 그 이면의 자세한 내용을 몰라서인지 알려진 좋은 이야기만 기억에 남았다.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입지와 인간미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노예 해방에 앞장섰다는 링컨 역시 그의 정치적인 발언이 온전히 노예 해방에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노예 제도를 찬성하지도 않지만, 노예 제도를 활용하는 이들의 방향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농사에 필요했던 인력을 흑인 노예로 채웠던 미국의 남부, 기술력이 우선이라 흑인 노예가 절실하지 않았던 북부의 싸움은 사실 노예 해방을 수면 위로 올려놓기도 했지만, 무역 제재와 각자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 어쨌든 전쟁은 일어났고, 북부든 남부든 피해가 있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나고 무너진 지역의 복구가 우선이었지만, 이미 몰락한 농장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우선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있고, 링컨이 더 크게 본 것은 미국의 통합과 유지였다. 미국의 남북전쟁, 링컨의 노예 해방의 진실은 정치적인 판단이 깊게 개입되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미국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다양한 흑인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흑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을 보호하는 민권법이 탄생했으며 제대로 된 투표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남북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중략)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흑인 노예의 해방과 그들이 법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와 부합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87페이지, 벌거벗은 대통령 링컨)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단순한 정의는 뒤로하고, 그 이면에는 그의 정체(?)와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돈을 좋아하는 상인이었고,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찾으러 떠났으나 그가 얻은 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대륙 발견의 모험은 실제로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터전으로 삼은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자기 문명과 종교를 강요하면서 대립하고 억압한다. 칼을 보고도 무엇인지 모를 원주민의 낙원 같은 영역을 그들은 정복하려고 했고, 살상한다. 그렇게 신대륙을 손에 얻고 좋았을까? 새로운 발견에 눈이 뜨이고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좋지만, 그만큼 부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그들이 열어놓은 여러 항로, 그리고 실크로드는 대륙과 대륙 사이의 무역이 가능해졌지만, 그렇게 오가는 많은 것 중에서 질병도 있었다고 하니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다. 문명이나 물질만 교류한 게 아닌 게 되었다. 얻은 게 있는 만큼 피해도 감당해야 했다.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먹고 살았던 원주민은 살 곳을 잃었고, 그들의 생을 빼앗겼다. 그렇게 생긴 대륙의 발견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얻는 것만큼 내놓아야 하는 건 역시 교환의 정의인가 보다.


해적과 손잡아 대영제국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성의 몸으로 그 많은 공격을 받아냈다. 그녀의 성장 역시 고요하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스페인과 싸우면서 일궈낸 업적은 대단하긴 하다. 그 배경에 해적의 활약이 있었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대영제국 측면에서 보면 나라가 탄탄하게 커진 시간이었으니 좋은 결과라고 해야 할까. 정치를 잘한 인물 같기도 하다. 길 위의 사람들과 전염병을 단속하려고 법을 만들고, 세금을 조정하면서 국민의 반감을 잠재우기도 한다.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나 국토 확장이나 영국 의회를 조종한 듯하다. 그래도 완벽한 군주는 아니었다. 부국강병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녀의 인생에도 끝은 있으니 말이다.


궁전은 왕이 사는 곳이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그보다 더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루이 14세가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과시하는 장소인 동시에 왕이 가장 통치하기 힘든 귀족을 길들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곳은 한번 발을 들인 귀족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덫과 같은 곳이 됩니다. (234페이지, 벌거벗은 태양왕 루이 14)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존재임을 주장하고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이를 포장했지만 살아 있는 신이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불가능한 꿈에 불과했습니다. (257페이지, 벌거벗은 태양왕 루이 14)


엘리자베스 1세와 비슷한 분위기로 읽었던 루이 14세나 나폴레옹 역시 알려진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권력에 집착이 심했고, 그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의 세우면서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돈이 드는 법. 그가 무리한 덕분에(?) 사람들은 살기 힘들어졌고, 그의 마지막 역시 초라했다. 그저 평범한 노인이 죽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생의 끝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살아온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무리하게 살아오느라 애썼던 시간만큼 칭송받으면 좋으련만, 그의 끝을 보니 그다지 현명한 왕으로 기억되지는 않을 듯하다. 나폴레옹 역시 그의 출신에 심한 고민이 있던 인물이라, 그 자신의 프랑스 황제가 되고 나서도 그는 완벽을 추구했던 것 같다. 권력을 갖기 위해 이혼도 불사하고,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기도 하지만, 그의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채워주지는 않았다. 그가 이뤄낸 많은 업적이 너무 과했던가. 아니면 무대뽀(?) 정신으로만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여겼던 걸까. 그의 몰락은 어쩌면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의 계획과 추위를 준비하지 못한 전쟁은 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몰았고, 그에게도 치명타를 입혔다. 백일천하로 끝난 워털루 전투까지, 그의 활약은 그렇게 끝이 난다. 분명 그에게도 좋은 평가가 있겠지만, 역사의 평가는 역시 양면이 있다는 게 맞는 말인듯하다.


칭기스 칸이 이뤄낸 몽골 역시 피를 깔고 있었다. 듣고 보면 비극의 시간이었으니, 어느 시대 어느 지도자에게도 칭송받는 것 이면의 어두운 곳이 있기 마련이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절대 권력을 위한 진시황제의 폭정은 만리장성을 세우면서 극에 달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뭔가를 만들고 세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 돈에 희생당하는 건 선량한 국민이고, 자기 권력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은 역시 몰락을 부를 뿐이다. 나중에서야 드러난 진시황제의 무덤 이야기나 사진 등은 정말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위신을 세우고 싶었을까? 죽은 후에 그렇게 묻히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기는 죽고 없는 세상에 그렇게 알려지는 게 좋았을까? 여전히 나는 죽은 후의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시황제의 무덤을 보면서 많은 이가 다양한 생각을 할 것 같다. 그의 힘을 여전히 느낀다고 해야 할지, 무덤까지 그 정도로 만들기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은 누가 위로해주냐고 따져 물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탈리아 사람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떨어진 중국 땅까지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실크로드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몽골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몽골 제국은 실크로드를 따라 교통과 통신 네트워크를 모두 연결해 실크로드를 관리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몽골 제국 전체에 철도를 깐 셈이죠. 마르코 폴로 또한 몽골 제국의 잘 짜인 역참(驛站) 교통로를 이용해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137페이지, 벌거벗은 무법자 징기스 칸)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뤘지만 이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창업(創業)은 이뤘으나, 나라를 지키는 수성(守成)은 리우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시황제와 진나라의 역사를 통해 새로움을 개척해 나가는 창업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수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나라와 같은 일이 역사에서 반복될 것입니다. (67페이지, 벌거벗은 정복자 진시황제)


이긴 자,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는 역사는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누가 썼든 언제 쓰였든, 이렇게 시간이 흐른 후에 진실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 모습에 치중한 기록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과정, 끝이 있다. 우리 눈에 다 보이지 않아도 보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 있다는 말이다. 시간이 흐르듯 과거와 현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렇게 쌓여가는 시간의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르니, 언젠가 마주할 장면들 아니겠나. 속성으로 배우면서 세계사의 큰 그림만 휘리릭 넘겼다면, 이제는 한 사건 한 인물 마주하면서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세계사의 흐름을 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아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 현재가 이루어진 과거, 미래를 그리는 오늘의 이야기가 채워지는 과정을 봐야 한다. 이야기로 만나는 역사를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재밌게 역사 공부를 하는 방법 하나를 알게 되었다.


송에서 다 못 본 내용, 방송의 여러 장면에서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을 추려서 완성된 이 책으로 우리 역사 속 인물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인물이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했는지, 시도와 성공과 실패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후의 인물은 또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 많은 인물 이야기가 하나의 줄기로 흐른다.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지역에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해석으로 지식의 장을 넓혀보자. 이런 프로그램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여운을 느끼고 방송에서 못다 챙겨본 부분을 이렇게 책으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외우지 않아도 좋은, 그냥 듣기만 해도 즐거운 역사 여행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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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의 인사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8
김서령 지음 / 폴앤니나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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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을 못 하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요청이나 듣기 싫은 말에 싫다고 말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그냥 웃고 말았던 날들. 그게 좋은 대처라고 생각했다. 막상 거절을 쏟아내면 상대는 기분이 나쁠 것이고, 상대와 내가 서먹하게 지내야 하는 분위기가 싫어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알았다. 분명하게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이상한 상황을 만들게 되고, 내가 웃음으로 넘겼던 애매한 순간을 상대는 긍정의 대답으로 여긴다는 것을. 그래서 연습했다. 내 마음과 다른 대답을 하지 말자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가 아니라 안 한다고, 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기를 많이 했다. 지금의 나는 거절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만,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대답하기 모호한 상황은 찾아오고, 어설프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딘가 싶기도 하다.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 한수정 대리는 평범한 스물아홉 살의 여성이다. 고향은 부산이지만 연정시가 좋아서, 사수가 좋아서 연정으로 근무지를 골랐다. 아버지와 엄마, 동생들이 있는 대한민국 평범한 집안의 첫째 딸 한수정. 좋은 사수를 만나고 연정에서의 삶이 좋았다. 혼자 살지만 외롭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인생 선배의 돌봄까지 더해지는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웠다. 철규 씨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나도 웃어요. 나는 잘 웃는 사람이거든요. 나한테 해코지도 하지 않는데 괜히 새침하게 구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도 하고요. 게다가 철규 씨는 우리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의 주요 고객이니까요. (27페이지)


연정 시장에서 떡볶이 가게를 하는 철규 씨는 매일 오후 3시에 현찰이 든 가방을 안고 한주은행 연정시장점으로 온다. 정확하게는 한수정 대리 앞으로 와서 그날의 매출을 입금한다. 은행으로서는 단골이니 놓칠 수 없다. 싫은 내색 해서 괜히 고객 하나 잃을 수는 없으니까. 문제는 철규 씨가 올 때마다 수정에게 치근댄다는 거다. 수정을 좋아한다면서, 이러지 말고 자기에게 시집오라고, 자기만 한 사람 없다고. 수정에게 철규 씨는 은행의 고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철규 씨는 수정을 사랑한다고, 금팔찌와 금목걸이를 휘두르고 끈질기게 괴롭힌다. 웃긴 건 주변 사람들이다. 안면 있는 시장 사람들은 수정을 볼 때마다 말한다. 너무 튕긴다고, 철규에게 시집가면 호강하면서 살 텐데 왜 그러냐고, 뭘 그렇게 재는 거냐고, 그만한 남자 없다고. 왜 수정이 바라보는 철규 씨를 그 사람들이 판단하는 걸까? 당사자는 수정인데?


참고 또 참던 수정은 철규에게 야멸차게 거절을 표현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어느 날, 스산했던 11월의 어느 밤에 철규 씨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수정을 따라왔다. 당신을 사랑한 거 말고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며 따졌다. 그날, 수정은 죽었다.


소설은 죽은 한수정의 목소리로 서술된다. 수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철규 씨가 눈이 돌아버린 순간 어떻게 죽었는지, 수정이 죽은 후 사건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들려준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두려움이 따라오는데, 동시에 수정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건 화가 난다. 누가 누구의 마음을 받아주는 게 왜 타인이 결정할 일인지 모르겠다. 수정이 철규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죽어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자기 마음 자기가 결정하는데, 왜 수정의 마음은 수정이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런 상황 종종 만나다 보니, 나는 타인의 간섭과 선을 넘는 일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칫 버릇없어 보일지라도 딱 잘라서 말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사람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자주 하는 착각이 있다. 인생 좀 살아온 어른으로, 그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단정하면서 내뱉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연주시장 상인들이 수정에게 하던 말은,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일을 기어코 이루어주려는 착각에 저지르는 폭력이었다.


사람을 죽였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가 죗값을 받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오히려 보복당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철규 씨가 감옥에서 나온 후에 찾아오면 어떡하지? 수정의 동생이나 가족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쩌지? 6년 형을 받고 억울하다며 항소하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이 왜 이러나. 왜 법은 제대로 심판하지 못하나. 왜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로 살아가야 하는가. 잊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날들을 누가 보상해주냔 말이다. 어떻게 살인이 청년의 순정으로 불릴 수 있는지... 자식을 보낸 엄마는 가슴을 치느라 손이 멍들었고, 동생들은 밥 한 숟가락 뜨는 거도 죄스러워 목으로 음식을 넘길 수가 없다. 수정의 사수는 이대로 있을 수 없어 탄원서를 챙긴다. 그런데도 피해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됐다. 슬픔은 끝나지 않았고,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가 세상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못한 사람은 누가 데려올 수 있지?


읽는 내내 서러웠다. 무섭고 화가 났다.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왜 간절히 바라야 하는 일이 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맵고 달달할 것만 같은 떡볶이가 이렇게 맵기만 하다니.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떡볶이를 좋아할 수 없을 듯하다. 떡볶이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철규 씨가 있을 것만 같아서, 혼자 사랑하고 혼자 배신에 떨던 그가 떡볶이 판을 뒤적이며 서 있을 것만 같다. 수정의 마지막 인사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돌아간 그 자리는 처음의 그 자리가 아닐 테지. 그런데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게, 아프고 또 아프더라.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을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수정의인사 #김서령 #폴앤니나 #폴앤니나소설시리즈 #스토킹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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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는 도시 - 세상 모든 사랑은 실루엣이 없다
신경진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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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랑이란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잊어야 하고, 나는 그녀를 잊어야 한다. 세상에 사랑은 단 하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사랑이 정말 하나일까? 사랑은 왜 꼭 하나여야 할까? (230페이지)


왜 연애의 끝은, 인생의 과정에 항상 결혼이 있어야 하는가. 궁금했다. 오랫동안 그래왔으니까, 보통 인간의 삶에 규정된 인식이 있었으니까 그러겠지. 세상은 변했고, 인간의 다양성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인생에서 결혼이 아닌 삶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닐까. 동시에 결혼이 누구도 아닌 본인의 행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건 당연하고, 주인공이 원하는 행복이 우선순위여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처럼, 로맨스의 해피엔딩이 반드시 결혼은 아니다.


영임은 상견례 자리에서 확실히 알았다. 남편 하욱이 쌍둥이 형 상욱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외모는 닮았지만,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신혼여행지에서 하욱은 영임에게 고백한다. 그의 인생 부족한 부분을 형이 채워졌음을. 거짓된 삶을 가진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임이 되어 생각해봤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사기 결혼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 같은데, 영임은 달랐다. 이 결혼을 돌이키지 않았다. 하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결혼을 꾸려나갔다. 그녀 특유의 배포를 휘두르며 누구도 그 결혼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이끌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정우는 미팅 자리에서 태윤을 만난다. 재수생 태윤은 정우와 연애를 하지만 곧 정우에게 이별을 고한다. 방심하고 있다가 당한 정우는 곧 군에 입대하고, 어느 날 갑자기 정우의 부대로 은희가 면회를 온다. 은희는 정우가 나간 미팅 자리에 태윤과 함께 있던 여자다. 은희는 정우와 연애하고 동거한다. 곧 결혼을 바라면서 흔들리는 정우를 붙잡고 나은 삶을 그리지만, 태윤과 정우, 은희의 관계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미술계 큐레이터 한나는 자신에게 기회가 온 걸 의아해하면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여긴다. 그녀의 동거남 준희는 엄마의 입김에 의해 조종되는 인물이고, 한나는 준희 엄마의 미움을 사는 게 싫어서 그에게 엄마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다. 이제 한나는 생활비에 더 연연해야 하지만 마음은 편하다. 준희 엄마의 간섭 없이, 준희 역시 자기 일상을 이뤄나갈 테니 이제 두 사람의 온전한 삶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이어지고, 그녀는 큐레이터 일도 준희도 모두 버린다. 그렇게 마주한 현실은 쓰고 추웠다.


누구는 결혼해서 거짓을 만났고, 누구는 결혼을 향해 가지만 결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되돌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꾸역꾸역 결혼을 이어가는 이가 생기는 걸 보면, 결혼이 본인의 삶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에 더 심각한 질문이 이어진다. 왜 주변의 많은 이가 결혼을 연애의 목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는지 고민하게 된다. 나 역시 비슷한 시간을 겪었고, 주변의 시선으로 받은 상처가 컸기에 이 소설 속 인물들이 매번 처하는 상황이 남다르지 않았다. 연애가 오래 이어질 수도 있고, 그 연애가 결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진다. 이상한 건, 왜 당사자의 연애 문제를 타인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는 일이 생기냐는 거다. ? 도대체 왜 누군가의 연애가 타인의 간섭과 조종을 받아야 하느냔 말이다.


주인공들은 행복을 바라며 하루하루 산다. 일하고 연애하고 결혼한다. 행복하겠다고 선택한 결혼이 완벽할 수만은 없다는 걸 뒤늦게 알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배울 수 있다면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문장에 장면이 그대로 묻어나서 읽는 생생함이 있다. 그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소설이다. 흥미만 생기는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직접 닿아 있는 이야기를 만나다 보니 더 실감이 난다. 거기에 더해져 우리 사회가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같이 고민하게 된다. 다양한 사람과 만남이 생기는 요즘 사회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 다양성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좀 다른 것 같다. 커밍아웃하거나, 자발적 비혼모가 되거나, 인생에서 결혼을 제외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 등, 기존의 당연하게 여긴 삶을 벗어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건 개인의 문제이고, 더 크게 보면 사회의 다양성일 뿐이다.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결혼은 사랑과는 또 다른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흔히들 두 대상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죠. 사랑의 종착점이 결혼이라고 여기는 생각 말이에요. 하지만 결혼은 연애와 달리 관습과 제도의 문제를 동반합니다. 반면, 사랑이 결혼의 필수 조건이 된 것은 불과 얼마 안 된 일이에요. 과거에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남녀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현재의 결혼은 근대 낭만주의의 욕망이 만들어낸 사생아일지도 모르겠네요.” (263페이지)


어느 방송인의 자발적 비혼모 선택이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으며 한마디씩 했지만, 나는 그 상황이 이상했다. 언젠가 그런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은 아니지만, 아이와 둘이 살아가는 삶을 생각한 적이 있다.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결혼까지는 바라지 않았던 때가 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런 내 생각은 생각에 멈추고 말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이상한 눈으로 볼 게 아니라는 것은 진즉에 인정했다. 우리는 왜 결혼한 사람만이 아이를 낳는 당위성을 부여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다양한 연애와 결혼의 모습일 뿐인데 말이다. 인생에, 그 선택에 사랑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었나? 법으로 정한 영역보다 함께하는 사람과의 만족한 삶이 더 중요하다.


소설 속 다양한 사랑과 연애, 결혼을 보면서 아마 많은 독자가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들의 이야기 너머에 있는,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다양성과 사랑의 본질을. 시대는 달라도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과 결혼으로 그 시대의 결혼이 어땠는지 보면서, 결혼은 선택의 문제이고 각자의 몫으로 만들면서 살아가면 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1960년대의 영임과 하욱, 태윤과 정우와 은희가 살아가는 1990년대, 그리고 한나와 태영이 만들어간 2000년대의 사랑과 결혼의 형태가 볼만하다. 거의 3세대가 흘러오면서 달라지는 결혼의 모습이 마치 현재의 혼란을 종식할 답처럼 보였다.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방식이 꼭 한 가지만은 아니라는, 결혼이 이렇게 진화되어 오는 것인가 하는 물음의 답이 된다. 그저 기호와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는 거다.


당연했던 취업이나 결혼이 간절히 이루고 싶은 소망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부정의 질문이 더 와닿는 요즘에 소설 속 주인공들이 더 이해가 되기도 할 테다. ‘영끌해야만 작은 집이라도 구경할 수 있는 세상에서 일과 사랑을 이루는 일이 더 팍팍한 현실이다. 특히 한나와 태영이 보여주는 지금 사는 모습에 많이 공감할 수도 있겠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뿌리 박혔던 결혼관이 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고, 사회가 변한 만큼 우리의 인식도 변해야 한다는 걸 증명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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