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안 사이코
버지니아 페이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모르지 않은 감정이었다. 폭발할 것 같은 분노, 죽이고 싶을 정도의 미움,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왜 상처받은 내 감정을 이렇게도 무시하는지.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받아들일 수조차 없다고 여길 때.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데, 내가 믿었던 사실에서 벗어날 이야기가 없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니까 열 받는다. 다 부숴버려야지.


위니프레드 노티를 엔저 저택에 새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호기심 충만한 눈빛이지만, 저택의 고용주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프랑스어와 바느질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미소 띤 표정을 장착하는 것. 뭐 빅토리아 시대의 숙녀다운 품위 유지 그런 걸 가르치라고 하는데, 이 저택의 아이들은 도통 관심이 없다. 좀 멍청하고 버릇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업무의 어려움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노티는 이 저택에서 그녀의 숨겨둔 내면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아이들의 귓가에 공포를 속삭인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잠이 든 밤에 혼자 저택을, 저택 주변을 서성이며 어둠을 즐긴다. 저택의 초상화에 흔적을 남기고, 불편한 눈빛을 보내는 저택의 주인을 무시하며,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피가 낭자한 잔인함을 표출한다. 이름 그대로 가정교사인데, 아이들이 이 시대의 지성인으로 자라는데 필요한 품위를 가르치라는데, 이런 임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아이들을 제압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노티의 가르침을 존중하지도 않은 채로 자기 멋대로 구니, 뭐 이것도 크게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엔저 저택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노티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손님들이 다 가고 나면 해고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저택의 파운즈 부인의 눈 밖에 나버려서, 이 저택의 크리스마스 행사가 그녀의 마지막 임무가 될 터였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행복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이 소설 안에서는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공포가 된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축제 같은 이 기간을 즐기려고 모여드는 사람들, 엔저 저택의 우아함을 칭찬하며 헐뜯을 게 없나 찾는 교활한 눈빛들, 아내의 텅 빈 머리에서 나오는 말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남자들,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가문의 재산을 자랑하며 우월함을 뽐내고 싶은 여자들. 저택에 모인 그 많은 사람이 쏟아내는 말은 좀, 혐오스러웠다. 유모차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물려줄 재산 이야기 말고는 자랑할 얘기가 그렇게 없었나. 돈과 가문, 계급으로 나눈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벽에 고정된 장식처럼 아이들 옆이나 뒤에서 시중들며 서 있는 보모들을 하찮게 여기는 말에, 나도 읽으면서 상처받았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소설 속에서, 이 시대에만 머물러 있는 환경은 아니지 않은가. 사회 불평등이나 약자를 혐오하는 태도는 지금도 너무 흔하고, 이런 부조리는 인간의 내면에 어둠을 키운다고.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미운 인간들을 찌르고 부수고 때리고 하는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걸까. 생고기를 뜯어 먹으며 입으로 피가 줄줄 흘러도 민망함이 없고, 귀족이라고 같잖은 허세 부리는 인간들의 민낯을 보면서 그녀의 상상은 현실이 되어 행동에 옮겨진다. 머릿속으로 잠깐 상상하듯 생각한 거 같은데,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상상이 아니었다. 너무 잔혹했지만 춤을 추듯 아름다웠고, 올림픽 경기하듯 우아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으며, 허공을 휘젓는 내장이 장미의 꽃잎 같다는 말에 토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 속의 문장이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는 황홀함이 이런 걸까. 오싹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는, 어쭙잖게 귀족의 권력을 내세웠던 인간들의 참혹한 최후에 이상한 쾌감까지 느껴지는 게 이상한 건가. 잔인하리만큼 소름 끼치지만, 그녀의 광기에 미친 듯이 웃음도 나는 내 마음을 또렷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무대 위 배우 같은 그들에게서 피 묻은 실크 스카프를 잡아당긴다. 그들의 내장이 한 줌의 장미 꽃잎처럼 허공으로 흩뿌려진다. (248페이지)


설명하기 어려운 시원함에 죽을 것 같은 이 폭염이, 잠깐이지만 용서가 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위니프레드 노티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기에, 그런 환경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정서의 어둠도 이해가 되더라만, 그렇다고 다들 이렇게 성장하지는 않는다. 웃으면서 석궁을 당기고, 환한 미소를 뿌리며 상대의 가슴에 칼을 쑤셔 넣고, 아무 표정 없이 목을 가르는 일들이, 이렇게 쉬운 거였어? 마지막 파티에서 그녀의 계속된 춤(?)이 이렇게 즐겁게 다가올 수 있다니 내가 이상한 인간인 건가 무섭기도 하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그녀 안의 악이 어떻게 커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면, 지금 그녀가 쏟아낸 광기의 정체를 알 것도 같다. 너무 눌렀어. 여자라서 하지 말라는 금기와 규칙은 너무 많았네. 이 정도의 살인이 어느 시대에서 벌어졌어도 당연히 사형인데, 이상하게 시원해지는 독자의 마음은 뭘까. 말로 해도 안 들어주고 법이 해결해주지도 못할 거라서 그런 건가.


근데 궁금한 거 하나 남았는데, 그 아저씨는 진짜 아빠야, 아니야?




(피가 낭자한 잔인한 장면쯤이야, 싶다면 추천)

 

 

#빅토리안사이코 #버지니아페이토 #현대문학 #소설 #공포 #스릴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의 선인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나 그랬듯이, 작가의 문장은 쉬웠다. 잘 읽히는 데다, 착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니 저절로 응원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 주인공이 잠시 내려놓았던 삶의 의미를 찾게 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재미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도둑 성장기 위픽
함윤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알았으려나, 사소해 보여도 누군가의 소중한 무엇이 사라진다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바늘 도둑은 소도둑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결말 같았다. 차게 식은 커피를 들이켜며,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이 알려줄 때까지, 사미는 공항의 카페에 앉아 있었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훔친 여자
알레샤 디케마 지음, 김현수 옮김 / 북플라자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페에서 일하는 로라는 미래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자기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엄마와 동생들, 집안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버지는 자기 편이 되어줄 수도 없다. 독립해서 살고 있지만 늘 돈에 쪼들린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책 한 권도 출간하지 못했다. 언젠가,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바라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긴 올까? 카페에서 일하는 게 유일한 생계 수단인 그녀에게, 어느 날 인생 전환을 맞을 기회가 온다.


설마 그게 기회일까 싶지만, 손님으로 온 테오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카페에 오는 손님 대부분은 그들이 원하는 메뉴를 얘기할 뿐, 그 외의 말을 걸어온 적이 없다. 그런데 테오는 달랐다. 그녀에게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한다. 누군가와 이렇게 얘기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매일 같은 시간, 테오는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와서 늘 같은 메뉴를 시킨다. 그리고 카페 문을 나서면서 윙크도 던진다. 어라. 지금 테오가 로라에게 작업 거는 거?


이제 그녀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온라인에서 테오를 찾아보고, 그의 집안, 배경, 그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고 놀란다. 넘사벽 신분의 차이,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장애물인 그의 아내가 나타난다. 뭐야, 아내 있는 남자가 작업을 걸어온 거야? 윙크는 왜 날려? 이런 의문도 잠시, 고를 것도 없이 이런 상황에서 선택지는 하나였다. ‘괜찮아. 그에게 아내가 있지만, 나는 그를 유혹하고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어. 내 인생을 바꿀 마지막 기회야.’ 로라는 스스로 주문을 걸면서 그와의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렇게 로라는 이름을 바꾸고 SNS에서 그의 아내의 일상을 훔쳐보며 접근하며 친구가 된다. 점점 그들의 세상에 스며든 로라는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다. 거짓말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이제 로라의 가짜 인생은 진짜가 되어야만 했고, 유일한 목표를 이루는 것밖에 없다. 테오. 그만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줄 유일한 길이었다.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로라의 자신감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나의 외모가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럴 이유도 없이 살아왔다. 그래서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이런 자신감을 뿜어대는 여성을 볼 때 궁금하긴 했다. 누구라도 눈길을 한번 주지 않고 못 견딜 만큼 평소 예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았나? 아니면 로라처럼 기를 쓰고 노력하면서 인생 전환점을 맞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고, 이게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각오로 덤비게 되는 건가. 뭐든 열심히 사는 건 좋지만, 이런 방법이 도덕적으로 욕을 먹는다고 해도 기어코 해야만 한다고 작정했다면, 해야지 뭐. 어쨌든, 로라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테오에게 접근하고, 테오는 그의 아내에게 모른 척하면서 로라와의 관계를 은근히 즐긴다. 그리고 테오의 아내, 아스트리드는 이들의 관계를 알까, 모를까?


하도 책을 안 읽었더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좀 읽어야겠는데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 끝이 어찌나 무거운지, 진짜 한 페이지 읽는 일조차 어렵더라. 좀 가벼운 이야기를 만나면 좀 괜찮을까 싶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비밀을 갖고 있다기에, 로라의 허무맹랑한(?) 자신감과 계획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읽어보긴 했지만. 가독성은 좋다. 페이지도 술술 잘 넘어간다. 아내를 끔찍하게 여기는 남편처럼 구는 테오를 볼 때면 가끔 어이가 없으면서, 테오와 로라의 긴장되는 장면에서는 <탐정들의 영업비밀> 보는 기분으로, 상류사회로 편입하려고 발버둥 치는 로라의 욕망을 걱정하면서 읽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하나 같이 의심스러워서 언제쯤 그 비밀이 드러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진실이 있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모두가 거짓말쟁이 같다. 남의 비밀을 그렇게도 궁금하고 파헤쳐서 떠벌리고 싶어 하면서 말이다.


결말이 좀 의외이긴 했다. 어떤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며 가문을 완성하고, 각자의 이익에 맞게 살아가는 게 인간의 민낯이겠지만, 이 방식으로 살아가면서도 끝이 보이기에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죄책감 없이 뻔뻔했던 테오도, 남편을 너무 믿었던 아스트리드도, 남의 남편을 빼앗아 나의 행복으로 만들고 싶었던 로라도,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 살아갈 때 벌 받을 거라는 걸 알았으려나. 무엇보다 위험의 시작은 남의 것을 탐냈던 로라였으니, 내 것이 아니면 욕심내지 말고, 착하게 살자. 괜히 욕심부리다가 위험하게 살 필요는 없잖아?



#훔친여자 #알레샤디케마 #북플라자 #추리소설 #소설 #외국소설 #스릴러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일곱명의 아버지들 -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독하게 끔찍한
안드레브 발덴 지음, 이민희 옮김 / 마인드큐브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상상은 성장의 시간 내내 긍정의 사고를 부른다. 언젠가 진짜 아빠가, 지금 가짜 아빠들의 나쁜 기억을 소멸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은 삶의 희망이 된다. 그게 전부였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어른이 된 나의 눈에 이 이야기는 순수하거나 즐겁지만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