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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지연이 할머니에게 듣는 이야기를, 그저 흘러간 과거를 소환하는 정도로 여겼다. 나이 든 사람이 습관처럼 하는 말, 나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왔네 하는 고릿적 이야기 말이다. 이십 년 동안 못 만나고 살아온 사이에서 등장하는 과거는 할머니의 일방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것으로 들렸다. 할머니와 엄마의 끊어진 관계를 핑계 삼아 들려주려는 것은 아닌가 했다. 이혼하고 시골로 내려간 지연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했고, 혼자였지만 나름대로 상처를 극복하려는 지연만의 방식은 누가 봐주지 않았다. 그때 만난 할머니, 오랜 세월 속 짧은 기억에 머문 할머니가 지연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깊었다. 더는 슬픔으로 머물러 있지 않게 하는 힘. 누구 탓도 아니라는, 그러니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는 위로였다.
백정의 딸이어서 외면당하고,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혼인하고,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못했다. 남자가 있는 여자의 인생만이 인정받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부딪히고 겪어내는 것만이 답을 찾는 방법이었다. 충분히 사랑을 주지 못한 딸은 엄마와 데면데면해지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그 사이에 있는 지연 역시 엄마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 모녀의 관계가 유전처럼 흘러온 것 같지만, 사실 덜 고통스럽기 위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었다. 지연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연히 할머니에게 그 집안 여자들의 역사를 들으면서 그녀의 마음도 변한다. 만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프지 않으려고 피하기만 했던 시간이 삶을 회복시키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처음에 자기 삶이 나아지고 있는지 스스로 묻던 지연은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지연은 변화한 삶을 찾는다. 엄마의 말처럼 하나하나 맞서지 않고 그냥 피하며 사는 게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님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는다.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여자이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녀들 때문이라며 비난받았다. 그럴 때마다 자책은 쌓이며, 자기 탓으로 돌리고 판단한다. 이번 생은 틀렸다고,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면서, 이럴 바에는 왜 태어난 거냐고. (지연의 엄마 미선이 할머니에게 했던 말처럼, 자기가 없었으면 할머니 인생 더 편하지 않았겠느냐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살아가는 동안 쌓일 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전하는 이야기로, 듣는 지연이가 있기에 과거와 지금이 이어지면서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가난과 고통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여자여서 핍박받는 인생을 건네주고 싶지 않았던 노력이었다. 보고 싶고 그리운, 아프지만 용기 있게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밝음이었다고 증명한다. 과거로부터 흘러와 오늘의 인생에 뿌리내린 삶의 방향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과거를 들으면서 현재를 본다. 세상의 폭력과 무시에 넘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녀들은 서로를 지탱하며 슬픔을 넘는다. 여자로 살아가는 게 한없이 어두웠던 시대에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건 어떤 건지 그대로 보여주는 이들이다. 삶을 놓고 싶을 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는 이가 옆에 있다는 건 기쁨이다. 가족에게도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꺼내놓을 수 있는 상대,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 할머니와 희자, 엄마와 멕시코 아줌마, 지연과 지우의 관계는 그래서 값지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 살아가는 용기가 된다는 걸 증명한 이들이었으니.
모계로 이어지는 여성 4대의 100여 년 역사는 슬픔을 넘어서 빛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픔을 겪고 나서 내 것이 된 삶의 흔적들은 이제 어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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