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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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의 세월을 돌아보니, 돌봄의 역할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를 간병했던 게 엄마와 나의 일이 되었던 건, 다른 가족의 강요는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그랬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함께 사는 이가 해야 하는 일이 되는 상황이 자연스러웠다. 아버지의 옆에 있던 엄마와 내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엄마와 나는 그 일을 다른 가족에게 떠넘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여겼다. 후에 비용적인 문제까지 발생했을 때는 가족이 함께 의논하고 해결했지만, 그 이상의 것은 함께하지 못했다. 오롯이 함께 사는 이의 몫이었다. 그게 당연한가?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게 왜 당연히 엄마와 나의 몫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도 나이 들어가고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몸이었다. 아내라는, 옆에 있다는 이유로 자기 돌봄도 어려운 사람이 다른 이를 돌봐야 한다는 당연함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다른 돌봄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작가의 전작 이완의 자세로 여탕에 드나드는 여성의 삶과 내밀한 속내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여성이 감당해왔던 돌봄을 듣게 되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돌봄이 왜 여성의 몫이 되었는지, 혹은 돌봄을 준비하는 것조차 여성의 책임이 되었는지 묻는다. 이 소설집에 담긴 열 편의 이야기는 한 집안의 여자가 책임지는 돌봄, 오늘을 사는 엄마의 역할이 만들어낸 돌봄, 고령화 시대에 감당해야 할 노인의 돌봄을 말한다. 그 어느 것도 우리 삶을 피해갈 수 없다. 집안의 문제는 해결해야 하고,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도, 나이 들어가는 당연함을 비껴갈 수도 없는 게 우리 삶이다.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의 돌봄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첫 작품 대추에서부터 마음이 쓰려왔다. 할머니를 돌보는 외숙모는 묵묵히 돌봄을 행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집의 대추 맛을 바라던 할머니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외숙모의 아들이자 할머니의 손자인 영석뿐이다. 남의 집 담을 넘어서까지 구해온 대추의 의미를 할머니는 모르리라. 엄마의 힘듦이 중단되기를 바라는 아들의 마음. 단지 그것뿐이었다. 할머니가 당연하게 여기는 며느리의 돌봄이, 손주에게는 엄마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 이상의 것은 없었다. 그 시절에는 그게 당연했을 테다. 경자에서 경자가 시대와 다른 여성의 인생이었다고 함부로 여기면서도, 정작 위기의 순간에는 경자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욕하던 경자의 삶이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거다. 경자의 삶을 욕하던 이들은 집안의 남자였는데, 집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건 여자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던 대로 살지 않는 집안의 여자를 욕하고, 그들이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라고 등 떠미는 것 역시 집안의 여자들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그 마음은 ()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흐르는데, 평생 식구들의 뒷바라지에 인생을 바친 큰엄마의 부고에 주인공은 올케언니를 원망하는 듯 말한다. 큰엄마의 희생으로 이 가족은 평안했으며, 그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 큰엄마는 주인공이 겪는 시집살이를 오히려 두둔했다.


미야. 큰엄마 말 들어라. 나 하나 불편하면 모두가 편하고 웃게 된다. 결혼해서 여자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되는 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지만 다 안다. 다른 사람들이 안 알아주면 부처님이라도 알아주신다. (65페이지, ())


이미 돌봄의 문제는 첫 번째 장에서 그 시작과 불평등을 확인됐다. ‘한 사람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문제였던 거다. 그때와 지금, 시대가 다르다고 하지만, 돌봄의 영역에서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두 번째 장에서 여성의 출산과 육아로 돌봄의 속내를 보여 준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화려했던 여성의 삶이 돌봄의 실패로 가해자(?)처럼 살아가게 하는 연주의 절반. 잠깐 사이에 아이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고, 시모는 그 탓을 며느리의 죄로 여겼다. 만만한 게 애 엄마라면서. 이혼 후에도 연주는 아이를 잃은 슬픔과 스스로 죄인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술로 위로받곤 했다. 화자인 는 육아의 고충과 위험에서 긴장하고 살지만, 연주는 자기 삶을 찾아간다. ‘만만한 애 엄마의 돌봄 세상을 자기 삶을 찾아가는 돌봄으로 채우는 것만 같다. 비슷하게 조리원 천국은 여성의 삶이 모유 수유를 잘하는 경쟁으로 이어지는 이상한 세계를 말한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왔는데, 아이를 출산함으로써 다른 경쟁에 빠진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돌보는 마음은 출산 이후의 아이 돌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보모를 구하는 어려움에서부터 아이를 맡긴다는 이유로 저절로 이 되어 고개를 숙여야 하고, 경력단절이 될까 봐 스스로 아이를 돌보겠다고 마음먹기도 어려운 순간이 절망적이다. 보모의 소소한(?) 절도 행각까지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게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금액을 지급하고도 안심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육아 문제는 엄마 혼자 전전긍긍해야 하는 돌봄의 세계였다. 누구도 위로해주지 못하는 그 마음은 내 이웃과의 거리로 절망까지 심어준다. 쇼핑몰 핫딜을 찾아다니는 이웃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은 자기의 배려가 자신에게 박탈감을 심어준 것을 느낀다. 100원을 아껴서 생활하는 이가 10억짜리 집의 소유주라니, 4천 원짜리 마스크 한 장이 별거인가 싶어서 나눠줬던 게 전세살이의 이유가 되었는지 스스로 묻는다. 이렇게 쏟아지는 불안과 불편의 감정은 오롯이 여성, 엄마의 몫이 된다.


당신은 대한민국에 눈치 안 보고 육아휴직 2년 쓸 수 있는 조식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출산휴가 3개월에 육아휴직 6개월, 도합 9개월밖에 못 쉬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다른 직원들 눈치가 얼마나 보이는 줄 알아? 기훈 씨 말대로 2년 쉬다 오면 기존 팀으로 복귀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그렇게까지 못마땅하면 당신이 육아휴직 해.” (151페이지, 돌보는 마음)


언니는 첫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육아 휴직을 신청했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육아 휴직이 끝나갈 무렵 언니는 복귀를 고민했다. 당연히 다시 회사에 나가겠다고 했던 처음의 마음은 점점 어려워졌다. 보모를 구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고, 비용이 상당했다. 언니가 받는 급여의 거의 70% 이상을 지급해야 했다. 흔히 말하는 가성비를 생각했고, 이렇게 어린아이를 두고 나가야 하는 마음을 걱정했다. 결국, 언니는 복귀를 앞두고 퇴직했다. 2년쯤 후에는 둘째 아이까지 태어났기에 당분간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기는 더 어려워졌다. 너무도 당연한 흐름이었다. 형부는 일하고, 집안일과 육아는 당연하게 언니 몫이 되어 두 아이를 돌보는 생활이었다. 외출은 물론이고 가끔 우리가 가면 같이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이 크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언니는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제 아이 돌봄에서 벗어나도 된다고 여겼기에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여전히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고, 언니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느라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일하기 시작한 거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육아의 문제는 경력단절로 이어지고,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엄마가 되는 건 선택이었지만, 육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경제적 능력까지 상실하게 되어 우울증까지 생긴다.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살피게 되고,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기에 이른다.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느냔 말이지.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모습은 이제 새롭지 않다. 입원의 분례는 치매에 걸린 남편에게 맞아가면서도 자신이 돌봐야 한다고 믿는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요양 시설에 입원시키고 오는 마음이 불편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특별재난지역의 주인공 역시 요양 시설의 아버지를 돌보고, 미혼부 아들이 놓고 간 손녀를 돌보느라 고단하다. 딸은 아들과 차별하며 키웠다고 엄마를 원망하고 엄마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배우고 살아온 대로 아이를 키웠을 엄마에게 돌아온 건 원망이라니. 하지만 그건 엄마의 마음이다. 딸이 느꼈을 서러움은 엄마가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테다. 독신주의였던 여자가 불쌍한 남자를 만나서 돌봐야겠다고 여긴 태풍주의보, 이상하게도 홀로 늙어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선택이었나 싶으면서도, 이런 돌봄을 선택한 여자의 마음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빠 부부처럼 잘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렇게 보이기 위해 누군가는 얼마나 많이 희생했을지 당신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 부부가 지금은 각자의 삶을 바란다고.


오늘이 누구 생일이가?”

대수가 물었고, 식구들은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대답이 없었다.

식사나 하이소.”

분례가 대수의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오늘 당신은 그곳에 가게 될 거라고, 그곳이 당신의 마지막 장소가 될 거라고, 그리고 아마 우리 모두 나중에는 그곳에 가게 될 거라는 말을 아무도 대수에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식구들 오랜만에 다 모이 가꼬, 오늘 기분이 윽수로 좋다.” (224페이지, 입원)


어떤 형태의 돌봄이든,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동안 그 돌봄은 끝나지 않는다. 이 소설집에서 보여 준 이야기도 그렇지만, 내가 경험한 돌봄 역시 마찬가지다. 제목처럼 돌보는 마음은 다양했다. 자기가 원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오랜 세월 당연하게 해왔던 습관처럼... 그때마다 누군가의 희생은 필요하다. 육체의 노동으로 하든 돈으로 지급하든, 한 가정을 지탱하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도 확인했듯이, 돌보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 세상의 모습 또한 다양했다. 인구 절감의 위기에 출산을 독려하면서도 경력단절의 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엄마가 출산했으니 육아의 담당도 엄마의 몫이 되는 흐름이 당연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이어져 왔다. 거기에 노년의 돌봄까지 아내와 엄마의 차지가 되어왔다. 여성의 의무와 책임은 왜 이렇게 거대해졌나. 특히 코로나 19 상황은 그 돌봄의 책임을 더 무겁고 크게 만들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생활의 곳곳에서 마주하는 돌봄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당황할 지경이다. 누구나 감당해야 할 돌봄의 문제가 유독 여성의 삶에 가득해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그 흐름과 이유를 알게 되는 게 서글펐다. 세월을 거슬러 시작되었던, 여성의 돌봄 노동이 여전히 이어져 왔다는 게 아프기만 하다. 그 크기가 조금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여성은 가족과 아이, 가정 내 돌봄이 필요한 순간에 먼저 차출되듯 선택되는 묘한 상황이 불편하면서도 애틋한 내 마음이 뭔지 궁금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돌본다는 기쁨, 이 돌봄으로 자기 인생의 변곡점이 생겼다는 원망, 같은 상황에 같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서로 완전 다를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는 질투와 열등감, 본인 말고 할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절박함까지.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기에 이 돌봄의 세계에서 버티는 사람들이다. 힘껏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의 엄마가, 내 가족이, 내가 돌보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들의, 나를 돌봐줄 이들의 이야기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공감하고, 너무 몰라서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을 듣는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무시를 견디는 엄마를 보며 살았던 내가, 엄마를 존중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무시하며 살았다. 결코, 당신의 삶에 나를 끼워 넣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는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간병에 오랜 시간과 노동을 감당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가족에 희생당하는 엄마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나고 보니, 나 역시 엄마를 돌보면서 그 돌봄의 책임과 의무가 나에게 당연하게 다가온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마음의 불편함을 치워버리고자, 엄마가 나를 돌봤듯이 이제는 내가 갚아야 할 일이 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제 혼자 남은 엄마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형제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크지 않은 돈이지만 갹출해서 저축하고, 엄마에게 생기는 문제를 같이 의논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내가 혼자 생각하는 돌봄의 순간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계속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


이 소설 속에서 많은 가족이, 여성이 맞닥뜨렸던 순간을 상상한다. 이미 겪기도 했던 일이라 새삼스럽지 않지만, 다시 그 순간을 마주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사회가 많이 달라지고, 여성의 삶 역시 달라졌다고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근본적인 삶은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돌봄 노동에 참여하든 돈으로 해결하든,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문제 앞에서 생각해야 할 게 마음이라고. 나를 보살피고,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지금 내가 찾아야 할 돌봄의 이유는 바로 마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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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내 좋아했어
와타야 리사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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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온라인 설문 조사에 응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이와 성별을 선택하는데, 언젠가부터 마주한 설문 조사에서 그동안 2개였던 성별 항목이 3개였던 적이 종종 있다. 남성, 여성, 선택하지 않음. 익숙하게 남성과 여성 중에서 고르면 되는 성별이 3개가 되었다는 게 처음에는 놀라웠다. 점점 그 항목을 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성전환하거나 혹은 같은 성을 사랑하거나 하는 이들의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런 시선은 아니었을 테다. 놀랍고, 이상하고,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볼 때 이상한 시선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점점 알아간다. 우리가 이성을 사랑하듯, 지금의 성을 자연스럽게 살아가듯, 나와 다른 이가 분명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면 되는 일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소우와 아이 커플은 여행지에서 소우의 친구 다쿠마와 그의 연인 사이카를 만난다. 우연히 만난 두 커플은 소우와 다쿠마의 오랜만의 재회에 반가워하면서 여행지에서 같이 지낸다. 처음 아이가 사이카를 봤을 때는 제법 도도하고 냉랭한 분위기여서 거리감이 있었는데, 여행 이후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아이와 사이카는 서로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가 된다. 이십 대 초반, 성인이 된 이들의 새로운 우정은 돈독하고 깊어진다. 일반인으로 단순한 일을 하던 아이와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 사이카는 서로의 환경은 달랐지만, 제법 친해진다. 이제는 소우와 다쿠마와 상관없이 둘만의 우정을 쌓기에 바쁘다. 거부감 있던 첫인상은 언제였냐는 듯, 둘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돈독한 관계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다쿠마가 사이카와 헤어졌다는 말을 듣는다. 바로 어제 만난 사이카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은 어느 순간에 찾아오는 걸까. 어떤 순간에 그 마음을 사랑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아이를 처음 본 순간, 사이카는 아이를 마음에 담았다. 여행지에서 이후에 자주 만나면서 자기 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입을 맞추고 안고, 온몸으로 그 마음을 표현했다. 처음 아이는 사이카의 행동에 당황했다. 사실 아이는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소우와 연인이 되었고, 별일 없다면 두 사람은 곧 결혼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사이카의 고백이 아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고백 때문이 아니었다. 사이카의 고백과 동시에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그 마음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매몰차게 거절하면 되는 일인데, 중요한 건 사이카의 마음을 점점 받아들이는 아이 자신의 마음이었다.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이 뭔지 고민하기 시작하는 건 이미 그 사랑에 빠져들었다는 거 아닐까?


아이가 혼란스러워할수록 이 소설을 읽는 나의 마음도 불안해졌다. 각자의 애인이 있던 상황에서 어떻게 정리가 될까 싶어서 말이다. 소우와 다쿠마는 선뜻 둘의 사랑을 인정해주고 애인의 자리에서 깔끔하게 물러날까 궁금했다. 어떻게 이 마음을,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사회의 시선은 아직 이 사랑을 예쁘게만 바라볼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헤쳐나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아이와 사이카는 두 사람의 사랑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소우와 다쿠마가 인정하고 물러났음에도, 두 사람은 당당하게 서로의 사랑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사랑했고, 각자의 일을 응원했다.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하루하루 감정을 쌓아갔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던 건, 아마도 내가 가진 시선 때문이겠지. 타인의 사랑, 누구나 사랑이 같은 모습을 아닐 거라고 알면서도, 인정하면서도 시원하게 이 사랑을 바라볼 수 없던 건, 나 역시 그 사랑을 바라보는 많은 이의 시선에서 비껴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지.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변하기 시작한 부분은 바로 여기에서부터다. 동성의 사랑은 어떻게 표현될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많이 들을 수도 없을 지극히 사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표현일 것 같았다. 서로 입을 맞추고 몸을 만지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는 이미 이들의 사랑을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마음 너머에 서로의 육체에 닿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부분에서였다. 보기만 해도 좋은데, 입 맞추고 그 피부에 닿고 싶은데, 저 표정 저 행동 하나에 반해버렸는데, 이 마음 그대로 육체로 표현하고 나누었으면 좋을 텐데... 같은 성의 연애가 아니라, 그냥 서로를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보면 되는 일이다. 이 마음이 사랑이라고 인정하면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현실은 이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 연애를 공개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서 부딪힌다. 한창 주가를 올리는 배우 사이카의 활동에 제약이 될 두 사람의 관계를 사이카의 소속사에서 정리한다. 공개되어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기 전에, 사이카의 경력에 방해되지 않게 미리 잘라낸다. 아이는 이 사랑을 위해 잠깐 물러난다. 소문이 잠잠해지면, 곧 사이카에게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소속사의 의견에 따른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다.


읽으면서 누구나 비슷할 거로 생각한다. 당신의, 나의 사랑은 어떠했을지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게 된다. 이 사랑을 오래 지키기 위해 지금 잠깐 물러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오래 만나지 못해도 그 마음 변함없이 지킬 수 있는지, 나를 거부하는 상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나를 더 보듬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이 사랑을 위해 이렇게 애써왔는데, 보지 못해도 이 마음 간직하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런 것도 몰라주고 나를 향한 원망만 쏟아내는 상대를 품어줄 마음이 나에게 남아있을까 궁금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의 그런 의문에 답을 내려주듯,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의 사랑을 어떻게 복기하는지 증명한다. 오직 가슴에 자리한 사랑만 꺼내놓는다. 과거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나눴던 사랑을 기억한다. 그거면 충분했다. 어떤 이유도 필요 없이, 그저 계속되는 사랑에만 집중한다. 이십 대 초반의, 인생의 찬란했던 시절에 경험했던 그 사랑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청춘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세월을 이기고야 만 사랑에 관해 말한다.


그동안 퀴어 소설을 접할 기회는 많았지만, 완독하거나 깊게 읽으면서 그 사랑을 헤아려보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는 사회에서 점점 그 시선이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알기 위한 노력도 없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현실 속 동성의 사랑은 이럴지도 모른다는 솔직한 느낌을 받았다. 사랑은 이런 거지. 이렇게 진하고, 솔직하고, 다정하고, 배려하는 마음.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누군지, 성별이 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사랑이면, 그거면 된 거다. 원래 사랑은 그런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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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과 싸는 것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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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내 것인데, 그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험. 혹시 경험해본 적 있는가? 한 달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저절로 났다. 이렇게 죽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만큼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아프다는 게 두려웠다. 맹장 수술 말고는 수술대 위에 누워본 적도 없고, 자잘하게 병원 드나들곤 했지만 큰 병을 걱정한 적은 없다. 그러니 많은 이가 겪는 질병의 고통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다. 이 책을 읽고 많이 생각할 수 있던 건, 저자의 말처럼 상상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누군가 아픈 일, 그 고통을 상상하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쉽게 말하면 안 된다. 아니, 상상 이상의 것이 존재하고,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저자가 겪은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이 책을 다 읽고도 알 수 없었다.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희귀질환을 처음 들었다. 갑자기 스무 살 청년에게 닥친 설사. 뭐 살다 보면 설사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싶었는데, 단순한 설사가 아니었다. 혈변이었다. 혹시 큰 병이 아닐까 걱정하면서, 이러다 말겠지 하면서 고통을 견디고 있으니 병은 더 심해졌다.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다 찾은 병원에서 생소한 병명을 듣게 된다. 궤양성 대장염. 여기까지 읽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 아니고 이니 다행인 거 아닌가 했다가, 바로 후회했다. 그 어떤 병명 앞에서도 다행인 건 없었다. 병을 알게 된 그 날부터 저자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은 물론이고,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약을 써도 완치가 되지 않는 병 앞에서 절망한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을 수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병은 더 심해질 테니까.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병원의 처방대로 하면 몸은 좋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낫는 게 아니라 괜찮아졌다가, 그 노력이 좀 부족해지면 다시 안 좋아지는 상황의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완전히 알 수 없다. 몸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 중요하고 인간의 기본이 무너진다. 아무거나 먹지 못했다. 아무 데서나 변을 지릴까 무서웠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타인에게 옮을 병이 두려웠다. 그런 삶을 13년이나 계속했다. 그 시간 동안 반복된 입원과 퇴원은 단순히 환자라는 이름만 붙여준 게 아니었다. 그가 먹는 것과 싸는 것을 어려워하는 동안 그의 사회생활은 불가능했다. 아무거나 먹을 수 없으니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변을 지릴까 봐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그의 생활은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집에서 나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먹고 싸는 제법 단순한(?) 문제를 두고 굳이 책으로 써야 할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지만, 반전은 책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먹는 것과 싸는 일이 인간에게 무엇인지 묻는 게 되었다. 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저자가 생각하고 쏟아내는 말은, 독자에게도 강한 충격이 된다.


누군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먹지 않든, 다른 사람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 누군가의 식단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 뭐라 불평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가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난하고, 먹이려 한다. (133페이지)


지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병에 걸렸으니, 나이가 먹었으니, 수치스러워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다. (193페이지)


먹고 싸는 일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먹고 싸는 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먹고 싶다고 다 먹을 수 없었고, 싸는 일도 자유롭지 않았다. 먹는 일은 여럿이 모여서 함께 하는 일이 되고, 누구에게나 드러내놓을 수 있다. 식사는 같이하기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싸는 일은 왜 혼자 숨어서 해야 하는 부끄러운 행위가 되었나. 배설하는 일은 수치스러움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배설의 상황에 수치까지 얹어지면 인간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싸는 일이 두려워 스스로 은둔을 선택하면서, 은둔형 외톨이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그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저 타인으로 지켜봤을 일이, 자기 일이 되니까 시야가 넓어진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알지 못했던 일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자기 병으로 인해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리고 싶기도 하다. 이런 병도 있다고, 이 병은 이런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모르고 하는 한 마디가 상처와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


꼭 질병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먹기를 강요(?)당하는 게 너무 괴로워서 힘든 적이 있다. 먹고 싶지 않은데 굳이 같이 먹어야 하는 경우, 간단하게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식사를 같이해야 하는 자리를 만들 때마다 괴롭기만 했다. 물론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면서 쌓이는 신뢰나 관계의 돈독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원할 때 좋은 효과를 내는 거 아닐까. 특히 저자처럼 병 때문에 먹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상대의 이유를 무시하면서 끊임없이 권하는 건 무슨 마음일까 싶기도 하다. 같이 먹는 걸 거절하면 비난하면서 배제하는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한다. 음식을 거절했다고 그 사람을 거절한 것으로 여기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다. 같이 먹지 않는다고 마치 무슨 문제가 큰 사람으로 여긴다. 왜 우리는 타인의 절박한 상황을 듣지 않고 함께 먹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코로나 상황이 전 세계를 고통에 빠트렸지만, 여럿이 모이거나 함께 먹기를 강요하는 사회를 잠시나마 멈출 수 있어서 좋았던 점도 있다. 솔직히 이제 거리 두기 해제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방역 지침으로, 잠깐 멈췄던 회식 문화나 불편했던 사적 모임이 다시 불을 피울 것 같아서 걱정이긴 하다.


단순하게 보면 이 책은 한 사람의 투병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다 읽고 나서 독자는 그 단순함을 머릿속에서 지우게 될 거다. 아픈 이야기가 무슨 책이 될까 싶겠지만, 질병의 고통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다양하게 뻗어 나간다. 희귀질환 앞에서 고통스러운 사람, 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먹기를 강요하는 사회, 똥을 지릴까 봐 선뜻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을 이어진다. 단순히 먹는 것과 싸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것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그러니 혹시라도 저자처럼 낫지 않는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의 진짜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상상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 고통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사자가 왜 같이 식사하는 걸 어려워하고 음식을 가려야 하는지, 인간의 기본인 생리현상으로 힘들어하면서 외출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다.


누구도 몰라줄 경험이 점점 쌓여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푸념하지 않으려고 참기도 힘들지만, 푸념을 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더욱 힘들다. (255페이지)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걸 그대로 확인한다. 섣부르게 아는 척하면서 병은 나아야 하는 거라는 둥, 인간은 성장해야 하는 존재라는 식의 판단은 넣어두시라. 세상에는 회복되지 않는 병도 많고, 그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도 성장하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그게 사실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당연하게 여겼던 극복 서사가 아픈 사람에게 육체적 고통에 정신적 고통까지 얹어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와 현실에서 위로와 이해를 받지 못한 저자는, 자기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서 문학으로 구원을 찾는다. 그가 연구하는 문학에서 마주한 문장으로 그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아프고 나니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이 책을 읽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타인에 대한 이해 넓혀주기를 바라는 게 저자의 마음이고,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 사회가 낫지 않는 병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지적하는 저자의 절실한 마음을 듣는 게,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웃음이 난다. 재밌다. 이 불편한 상황을 너무 적나라하게, 감추고 싶은 진심까지 드러내면서 쏟아낸다. 거기에 너무 잘 어울리는 표지, 저자의 솔직함과 재치 있는 문장(말투), 문학에서 찾아낸 적재적소의 인용구까지 삼박자가 잘 어우러져 즐겁게 읽힌다. 제목만 보고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마시라. 도대체 먹는 것과 싸는 것으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느냐고 걱정하고 있다면, 기우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식욕)와 생리현상(싸는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나 민감하고 중요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될 것이다. 너무 감동적이다. 흑흑.



#먹는것과싸는것 #가시라기히로키 #다다서재 ##책추천 #희귀질환

#문학 #에세이 #상상할수없는것이있다 #이해 #공감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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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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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있을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니, 내가 경험한 인간의 모습은 보통 힘든 순간에 더 절망하기 먼저 하기 마련인데. 아프기 시작하면 빨리 낫길 바라면서도 좋아질 거란 기대 먼저 하지 않게 되던데. 생각해보니 나는 너무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것을 먼저 떠올리는 인간이 된 것 같아서 씁쓸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서글프다. 내 뇌를 개조하지 않는 이상 나는 여전히 나쁜 결말이나 슬픔을 먼저 떠올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이 소설 속 가족의 모습에 병아리 눈물만큼의 긍정 에너지를 찾기도 한다. 그래도 좋아질 거라고, 나아질 거라고 믿고 살아가는 거 말고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싶어서 말이다.


15평 빌라에 여섯 식구가 모여 산다. 주인공 수경과 수경의 부모님, 수경의 남편, 남편의 조카 둘. 여기까지만 읽고 속이 답답했다. 15평 집의 크기를 상상하고, 그 안에 성인에 가까운 청소년 둘과 어른 넷의 삶을 그려보니 내 속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한 가족도 아닌, 사돈 관계에 가까운 이들이 모여 사는 건 어떤 걸까. 더군다나 이 가족 중에서 돈을 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유일하게 돈을 벌었던 수경은 일을 그만두고 몇 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동료가 건넨 음료수를 마시고 잠이 든 수경은 성범죄를 당할 뻔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직장에서는 이 문제를 조처하지 않았고, 수경은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됐다. 특히 누군가 건네는 음식이나 음료수는 절대 먹지 않았다. 수경의 남편은 수익이 없는 전업 투자자였고, 수경의 아버지는 사기당하고 딸의 집에 얹혀산다. 수경의 엄마는 딸을 돌보려 청소 일을 그만두었다. 이제는 돈을 벌러 나가야 한다. 수경이 벌어오던 돈으로 버티던 가족이 이제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으니. 수경 역시 더는 이 문제로 버티고만 있을 수가 없다. 돈을 벌어야 했다. 마음의 수습 따위 현실 앞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소설가가 수경을 바라보았다. 수경도 소설가를 바라보았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나도 힘들어.

너만 별 볼 일 없는 거 아니야. 나도 별 볼 일 없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그래. 그러니까, 마시자. (166페이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거다. 바로 옆에서, 오랜 시간 같이 웃으면서 일한 동료가 설마 약을 탄 음료수를 건넬 줄이야. 수경이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겠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됐겠지. 언제 어디서, 누가 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바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마저 의심하게 되는데, 어떻게 사람을 상대로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돈을 벌어야 했고, 사람을 볼 수는 없고. 수경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비대면으로 할 수 있는 일, 처음에는 택배 일을 한다. 노동자는 아닌데 노동자처럼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고, 노동자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사업자(?) 신분이고.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선택받지 못하면 일을 받을 수 없고, 내 맘대로 쉬자니 다음 일을 장담할 수 없는 논리가 적용된 일을 그래도 해야 했다. 수경과 엄마는 이렇게 택배 일을 시작하고, 가끔은 남편이 돕기도 한다. 수경의 아버지는 걸어서 음식 배달을 하고, 남편은 앱으로 콜을 받고 대리운전을 한다. 어쩌다 보니 온 가족이 플랫폼 노동자가 되었다. 그렇게 이 가족은 앱 도우미 헬프 미 시스터의 세계로 스며든다.


흔하게 주문하는 음식 배달 앱, 누군가는 한 잔 술에 필요한 대리운전, 지저분해지는 곳을 청소해주는 일, 물건 주문하고 기다리는 택배. 너무 일상이 된 이런 일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과정으로 소비자의 앞에 닿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론 이 소설로 그 세상을 조금 더 들여다본 것 같지만, 여전히 다 알지는 못할 테다. 그런데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전하는 플랫폼 노동자의 삶을 보면서, 분명 새로운 노동의 현장이긴 한데 이상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는 걸 보게 된다. 법이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언제나 그 빈틈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조리가 끼어 들어온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또 권리를 위해 싸우면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쟁취한 것들로 만족하며 살아간다. 수경의 경우, 더 절실한 상황이어서 그럴까. 이 가족의 도전이 의외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의욕이 없는 아버지, 고무장갑을 가지고 다니는 엄마, 헛된 꿈을 좇는 남편, 사람이 두려운 수경. 뭐 하나 도전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모여서 하나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기적 같았다.


이 가족을 보면서 이런 생각만 들었다. 좋은 일이 있을까. 더 절망으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구나.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삶이라고 여기고 싶을 정도로, 가족 모두가 벼랑 끝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을 살고 있었다. 의욕도 없고, 겁은 나고,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고. 그런데도 숨이 붙어 있으니 또 살아가기는 해야겠고. 모여 있으니 더 나쁜 것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가족으로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이 가족이 밖으로 나가고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는 걸 보니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부딪히다 보면 가슴 속에 쌓였던 불안함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에 속고 돈에 무너졌던 상처가 이렇게 치유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 말이다. 가장 큰 상처를 받은 듯했던 수경이 가장 먼저 그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누구도 돈을 벌지 않았던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런 수경을 돕자고 나섰던 가족들의 한 뼘들이 어느 순간 이렇게 자라났다. 이쪽으로 옮기고 저쪽으로 가보면서 만난 플랫폼 노동자의 삶은 이 가족에게 또 어떤 세상을 보여주려고 할까.


이상한 가족 구성이었다. 남편의 조카들과 아내의 부모가 같이 사는 집. 쉽게 볼 수 있는 가족의 형태는 아니다. 그런데도 어색하지 않게, 원래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 자연스러움은 이들의 연대로 이어진다. 수경과 엄마가 헬프 미 시스터에서 보여준 여성 연대의 세상이 색다르게 보였다. 여성 의뢰인, 여성 도우미, 남성과 마주칠 일 없어서 걱정 없이 의뢰하고 받아들이는 서비스의 형태. 이런 형태의 서비스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수경의 엄마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왜, 이런 서비스가 필요한 세상에 살게 되었는지 묻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손을 잡는다. 연대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변화와 치유가 증명하듯이, 우리는 밖으로 나가고 나아지는 삶을 그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것처럼, 함께 일어서서 웃는 기적을 만든다. 작은 차에 다섯 식구가 타고 나들이 같은 의뢰를 수행하러 갔을 때,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 이 가족은 이렇게 구원받는구나 싶어서 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에게도, 비슷한 시간을 걷는 누군가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읽게 된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 생계와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256페이지)


우리가 모두 바라는 삶이 비슷하지 않을까. 스스로 일어서기를, 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살아갈 수 있기를 말이다. 보통의 삶으로, 평범한 인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갖는 것. 웃고 있으니 좋은 거라고, 그러면 된 거 아니냐고 말하던 이 집의 꼬맹이 조카가 말하던 게 정답인 것 같다. 좁은 집에서도, 슬픔이 침범해도, 반지하밖에 선택할 수 없어도, 가족 모두가 웃고 있으니 그거면 잘한 일이라고 말하는 아이의 말에 안도한다. 이 가족이 이제는 웃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힘들어도 결국 나아갈 거라는 걸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적나라하게 너무 잘 반영해서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슬프게도,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 변화에 발 담그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 세상에서 또 허우적대면서 적응해야겠지. 하지만 그 허우적거림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다. 같은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만들어갈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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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오늘의 젊은 작가 33
김희선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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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결이 나에게 달려오는 것만 같다. 그건 영화 속에서 우주복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몰려다니는, 굉장히 강렬한 장면이었다. 하나의 은빛 덩어리가 되어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외친다.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자…… 다 함께 똑같이…….” 이상한 주문처럼 되뇌면서 몰려오는 사람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오히려 궁금증이 커지기만 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뭉쳐서 달려오고 있는지, 이들이 읊조리는 저 말은 무슨 뜻인지.


한 노인이 광장의 회전교차로에서 사망한다. 누가 봐도 자살이다. 자기 배낭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전동 드릴을 세워 놓고 작동시킨다. 노인은 무언가를 삼키더니 주저 없이 회전하는 드릴에 이마를 갖다 댄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피로 광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카페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기자 김영주는 기절하고, 곧 병원에서 깨어난다. 충격적인 장면이 쓰러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몰래 듣게 된 말로, 김영주는 노인의 사망이 단순한 자살 사건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다. 그에 후배 최 기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김영주는 최 기자와 함께 이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소설은 김영주가 본 노인의 죽음과 극동리에서 촬영 중인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면서 하나씩 그 퍼즐을 맞춰간다. 극동리가 화성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화성을 배경으로 한 SF 영화가 극동리에서 촬영 중이다. 붉은 토양이 가득한 마을 공터에는 영화 세트장이 설치되고, 마을 주민들은 영화의 엑스트라로 동원되어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 한때 성황했던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은 쇠락해가던 중이었는데, 이 마을 출신 기업가가 마을을 살리겠다면서 산업단지와 영화 촬영장을 만들었던 거다. 그 기업가는 단번에 마을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마을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기업가가 원하는 일을 다 해결해주려고 애쓴다. 그 중심에 마을 이장 오구식이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이상하게 일어나는 일들에 오구식은 앞장서서 해결한다. 시체가 발견되어도, 미친 노인네가 병원에서 난동을 부려도, 낯선 사람이 찾아와 마을을 감시해도 그의 손에서 다 해결된다. 도대체 이 마을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처음 노인의 죽음을 목격한 김영주가 밝히고 싶던 일들은 어느 순간 묻어지고 있었다. 노인의 죽음이 단순히 농약 자살로 결론지어졌다. 극동리 마을 주민 세 사람이 실종되었다는데, 이 의문을 풀고자 했을 때는 마침 그들이 놀러 갔다면서 이장은 실종 신고를 취소한다. 이 마을에 관련된 모든 일은 누군가의 조종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광장의 사람들이 목격한 큰 사건에도 농약 중독 정도로 수습할 수 있는 정도라면,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김영주 못지않게 이 사건은 최 기자에게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자꾸만 숨어드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고 싶어서 마을을 찾는다.


의문스러운 사건이 계속되고, 의문이 조금 풀릴 만하면 다른 사건이 등장하면서 앞선 사건에 의심을 더한다. 누굴까. 왜 그랬을까. 이 사람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하나씩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을 마주할 때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인가 하는 의문은 이어진다. 탄광 산업으로 마을이 활발할 때는 살만했지만, 어느 순간 광신이 문을 닫으면서 몰락해가기 시작했다. 어디 마을의 경기뿐일까. 마을에 남은 이들은 모두 노인들뿐이었다. 젊은이들의 활기도 없고, 무엇 하나 기대하면서 마을로 모여들 이유가 없어진 그때, 기업가의 마을 투자는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이 같은 건 아니다. 기업가의 개발이 마을이 죽음의 땅이 될 거라며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이름만 그럴싸한 산업단지일 거라고, 폐기물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희귀병에 걸려 죽어갈 거라고 말했다. 그가 바로 광장에서 드릴로 머리를 뚫고 죽은 노인 이만호였다. 많은 이가 찬성한 일에 왜 그 노인 혼자 반대했던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마을에 들어온 산업단지나 기업의 공장 터, 그들이 떠나고 난 후에 땅을 파보니 온갖 산업폐기물이 묻혀 있었고, 그 때문에 물과 땅은 오염되고 사람들은 자꾸만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고. 누군가 다른 생각을 말하면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이만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마을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여겼겠지. 죽어가는 마을을 살리겠다고 들어온 기업의 프로젝트를 방해하며 마을을 계속 죽은 동네로 만들어놓을 거냐고 화를 내고 싶었을 테다. 마을이 이렇게 활기에 찼는데, 사람들에게 이만호는 눈엣가시였을지도 모른다. 이만호는 누가 봐도 스스로 죽은 거지만, 그 죽음의 진짜 이유를 찾는 것. 최 기자와 김영주의 미스터리한 추적은 그래서 계속됐다. 그 안에서 인간이라면 가질만한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이장 오구식은 아침에 일어나서 개운한 기분을 느낀다.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있지만,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몸은 가뿐해진다. 육체가 회춘하는 느낌이 이런 걸까. 마을에 산업단지가 들어오고 영화 세트장이 들어서면서 활기를 띤 것처럼, 오구식의 몸도 활기에 찼다. 어디 오구식뿐일까. 마을의 노인들 대부분 이런 활기로 살아간다. 자기 농사도 지으면서 영화의 엑스트라로 뛰어다닌다. 몸은 고단하지 않았고, 매일매일 즐거웠다. 뉴스로 마을 번영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기쁨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활기는 이상하게 틈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여 영혼을 나간 것처럼 보일 때, 마을 소년 경오의 눈에 사람들 머리 위로 이상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들의 몸에 무언가 스며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을 때마다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것을 찾고 싶어진다. 소설은 최 기자와 김영주가 찾아다니던 진실을 독자와 함께 파고들면서, 이 마을과 사람들의 진짜 모습에 다가가게 한다. 그렇게 마주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활기가 섬뜩해 보였다. 왜 그랬을까 계속 생각하면서 읽는데, 그 안에 깃든 인간의 욕망이 그 섬뜩함의 이유였다. 영생을 바라는 인간의 간절함이 어떤 사람을 만들고 어떤 세상을 만드는지 확인했을 때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남겨두고 싶은 것을 위해서, 나의 존재를 계속 소멸하지 않게 하려고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란 말인지. 아무 고민 없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선뜻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그들의 욕망에 편승한 것만 같다. 어쩌면 아직 말하지 않은 우리 안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닐까. 젊음, 영생을 바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물으면서, 그들이 부르는 손짓과 하나 됨에 저절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결말이 이 세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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