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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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거예요. 요리를 하지 않는 당신도 그 정도는 하겠죠. 버터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음식이에요.”

(중략)

버터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차가운 채로 넣어요. 정말로 맛있는 버터는 차갑고 단단한 상태에서 식감과 향을 맛보아야 해요. 밥의 열기로 바로 녹으니까 반드시 녹기 전에 입으로 가져가야 해요. 차가운 버터와 따뜻한 밥. 일단 그 차이를 즐겨요. 그리고 당신 입속에서 두 가지가 녹아서 섞이며 황금색 샘이 될 거예요. , 보이지 않아도 황금색이란 걸 아는, 그런 맛이죠. 버터가 엉킨 밥 한 알 한 알이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마치 볶은 듯한 향기로움이 목에서 코로 빠져나가죠. 진한 우유의 달콤함이 혀에 감기고…….” (39~40페이지)


아직 밤 10시다. 집 근처 마트 문이 열려 있다면 좋겠다. 처음 이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벼 먹으라는 문장은 무슨 주문 같았다. 신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만 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안 되겠다. 주방 수납장을 여니 즉석밥이 있긴 하다. 잠깐 고민했다. 갓 지은 밥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나. 밥 한 공기 분량의 쌀을 넣고 급속 취사를 누른 후에,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동네 마트에 갔다. 브랜드도 모르겠는데 버터가 있긴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와서 계산하고, 집으로 오는 시간 동안 밥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전기밥통 근처를 서성이며 취사가 끝났다는 알림음이 울리자마자 밥을 덜고, 김이 나는 밥 위에 버터를 얹고 간장을 한 숟가락 정도 넣어주었다. 살인 용의자 가지이의 말처럼 일단 차가운 버터와 뜨거운 밥을 바로 입속에 넣고 그 두 가지가 따로 놀다가 하나로 합해지며 황금색 샘이 솟는 느낌을 맛보고, 그다음에는 잘 비벼서 먹어보는 시간의 경건함. 밥이 뜨거워서 그런지 버터와 간장과 밥은 아주 잘 비벼진다. 버터를 밥 위에 얹은 그 순간부터 풍기는 고소하고 부들부들한 버터 냄새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코에서부터 고문을 일으키던 순간을 이겨내고 드디어 한 숟가락 입으로 밀어 넣은 그 느낌은, , 이래서 밤에 뭘 먹으면 안 되는데, 하는 후회를 남김과 동시에, 향기를 먹는다는 게 뭔지 새삼 놀라면서, 다 먹지 않아도 채워지는 이 포만감은...


수도권 연쇄 의문사의 가해자로 알려진 가지이 마나코를 취재하려던 주간지 기자 리카는 벽에 부딪힌다. 아무리 해도 그녀가 만나주지 않는 것. 친구 레이코와 얘기하던 중 가지이가 관심 가질만한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더니, 가지이는 관심을 보인다. 바로 음식 이야기와 레시피. 한물 간 것 같은 이 사건에 리카가 왜 흥미를 보일까 싶어 독자인 나도 궁금했다. 가지이는 30대 여성으로 무직이고 주거도 불분명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던 이유가 그녀의 외모였다. 100이 넘는 몸에 아름답거나 젊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 몇 명의 남성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고, ‘꽃뱀이라고 여겼던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가지이의 블로그에는 맛있는 음식과 사치스러운 것들로 넘쳐났고, 보이는 것 뒤에서 있던 그녀의 이미지를 사람들은 마구 상상했겠지. 리카는 이 사건을 다른 방향에서 다루고자 했다. 가지이가 꽃뱀처럼 남자들을 대했던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과 가지이를 둘러싸고 계속되는 여성 혐오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가지이의 이야기를 듣는 게 먼저인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접근하면서 가지이와 만나고 이야기를 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리카는 처음 의도와 다른 방향의 변화를 맞이한다.


일본을 뒤흔든 꽃뱀 살인사건이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꽃뱀이란 단어에서 가해자의 이미지를 연상했을 것이고, 막상 마주한 가해자의 외모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로 공격(?)당한 듯한 충격에 한동안 멍했을지도 모른다. 결혼을 미끼로 남자들에게 10억 원이 넘는 돈을 갈취했다고, 그중 3명은 자살로 위장하여 교묘하게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이쯤 되면 우리가 가진 꽃뱀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름다운 외모, 예쁜 얼굴, 남자를 존중하고 위하는 듯한 말솜씨와 태도 등. 상대가 빠져들지 않고는 안 될 정도의 매력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가지이의 외모 묘사도 그렇지만, 실제 사건에서 사람들은 이 여자가 사기 칠 정도가 아니라고, 아니, 이 여자의 외모에 사기를 당할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도대체 그녀의 매력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형선고를 받고 구치소에 수감 중이면서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결혼도 했다는 게 더 화제였다. 그러니 작가가 다시 독자에게 던져주는 이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건 독자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리카는 가지이의 환심을 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편지를 쓰고, 사생활도 들려준다. 나는 너와 이렇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바람을 보내면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지이와 남자들의 관계를 알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리카는 가지이가 부리는 마법에 빠져든다. 그녀가 말하는 레시피를 따라서 해보고, 그녀가 말하는 곳에 가서 그녀의 기억 속 음식을 먹고, 그녀의 고향에까지 가게 된다. 평소 식사를 잘 챙기지도 않고 음식은 더더욱 하지 않은 리카가, 어느 순간 손수 밥을 해 먹고 직접 해서 먹는 음식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한다. 마른 체형이었던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건 당연했다. 그 중심에 버터가 있다. 가지이의 말대로 에쉬레 버터를 넣은 버터간장밥으로 시작된 리카의 식사는 한없이 발전하고 늘어난다. 몸이 불어나니 점점 불안해진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옷이 좀 안 맞나? 예쁜 옷을 입을 수 없어지나? 그러면서도 편안해지고 당당해지는 마음이 생기는 건 무슨 일인지.


어느 시선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할까 고민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대충의 내용은 알고 있기에 그 이야기 곳곳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나 싶었다. 마치 가지이에게 조종당하듯 따라서 하는 리카의 행동을 보는 게 불안하기도 했지만, 리카에게 찾아오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흥미롭기도 했다. 가지이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리카는 변한다.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실제 가지이 사건의 피해자들이 무엇을 바라고 가지이를 만났는지, 가지이가 어떤 매력으로 피해자들을 사로잡았는지 듣게 되었을 때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녀가 집밥으로 피해자들을 사로잡았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남자들이 바라던 어떤 여성상을 떠올리게 된다. 외롭게 살다 보니 자기 노후를 같이 봐줄 사람이면 외모가 무슨 상관인가 싶은 남자들, 집밥을 해줄 가정적인 여자라면 그 누구라도 괜찮다는 남자들의 바람은 그녀를 무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자와 여자가 나뉘어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지이는 자기 몸을 사랑했다. 타인의 시선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행복이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질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 순간에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면 돼. 귀를 잘 기울이고, 내 마음과 몸에 물어보는 거야. 먹고 싶지 않은 건 절대 먹지 마. 그렇게 결심한 순간부터 몸도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할걸.” (141~142페이지)


정말 가지이가 그 남성들을 살해했을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게 되지만, 어느 순간 가지이가 살해를 했는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게 됐다. 그녀가 먹는 음식, 그녀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 그녀가 성장하던 시간 속의 진실들을 마주하면서, 그녀가 왜 음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 찾게 된다. 음식으로 시작된 이야기 같지만, 음식으로 교묘하게 감춰진 살인사건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랜 세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묻는다. 리카가 몸무게가 늘어나는 걸 무서워하고 먹는 걸 주저하면서 관리하던 몸, 리카의 애인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살이 찌자 팬을 거부하던 태도나 리카가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했던 말들, 살이 쪘다고 이지메 당하던 어린 소녀의 슬픔, 그런데도 남자들은 집안에서 여자가 정성 들여 차려낸 집밥의 환상을 가지고 사는 시간의 모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바라보는 여성은, 그들에게 돌봄을 행해줄 대상이었을 뿐이라는 게 이 사건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누구를 위해 요리하는가. 가지이가 상대를 위해 끊임없이 요리하고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했던 마음이 어떤 날 사라졌던 것처럼, 그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던가. 내가 먹고 싶으면 요리하고 맛있게 먹고, 맛있게 먹은 대가로 살이 쪘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 좋다면 그래도 괜찮은 일이지 않은가. 가지이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그것 때문에 찐 살을 사랑스러워하는 게 너무 강렬해서 이 소설의 내용이 아무려면 어떤가 싶을 정도였다. 가지이가 음식을 향해 품은 욕망의 결과물이 자기 몸이었으니, 그 몸을 사랑하는 가지이의 태도를 보면서 그녀가 가진 욕망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강한지 새삼 확인했다. 타인의 시선 따위 그녀의 욕망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향해 계속 가는 그녀의 마인드가 이렇게 부러울 수가... 리카의 변화와 성장이 가지이로 비롯된 것이지만, 그녀가 원하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발견한 정의는 이 책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드나들 수 있는, 언제나 열려 있는, 그런 집. 우리 몸도 그러하다.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원래 집이란 게 지붕이 있고 비바람만 피하는 장소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사는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방법을 정하면 되죠. 규칙에 얽매이면 오히려 만족스러운 물건을 찾을 수 없게 돼요.” (494페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버터 향이 머물러 있는, 그 부드럽고 향이 진한 고소함에 빠져서 나오고 싶지 않은 소설이었다. 온몸에 머물렀던 버터간장밥의 마법은 이 책을 다 읽고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버터 향처럼, 당신은, 나는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된다. 혹여라도 그렇게 먹은 것 때문에 내 몸의 변화가 신경 쓰인다면, 그건 건강을 염려하는 이유 때문이지 타인의 시선이나 고정관념 때문일 필요는 없다. 점심을 거른 내 허기에 버터간장밥 한 그릇 더 채워줘야겠다. 벌써 코끝이 고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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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사건 #요리 #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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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27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간장 버터 뜨끈한 밥이 !ㅎㅎ 이책은 아껴두고 읽으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방탄 커피를 마신후에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ㅅ^

구단씨 2021-09-27 23:0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사실 간장버터밥을 계속 먹을 수는 없었어요. 밥을 아주 조금만 덜어서 먹어봤거든요.
평소 먹는 양이면 절대 못 먹을 듯.
근데 이게 은근 계속 먹어지더라는... ㅠㅠ
느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중독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ㅎㅎ

희선 2021-09-28 0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 눈보다 자신이 좋은대로 살면 좋기는 할 테지만, 그게 잘 안 되기도 하지요 이런 생각해도 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버터 간장밥 안 먹어봤어요 이 책을 보면 한번 먹어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9-29 21:41   좋아요 1 | URL
그래서 힘든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잘 안 되는 마음이...
저는 이번에 버터간장밥을 처음 먹어봤습니다. 문장으로 드셔보시는 것도 괜찮아요. ^^

scott 2021-10-0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주말 메뉴로
간장 버터 밥 찜!👆^^

구단씨 2021-10-11 2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주말에는 김치볶음밥에 느끼하게 치즈를 얹어서 먹었습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1-10-08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0-11 21: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날씨가 쌀쌀해졌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서니데이 2021-10-0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10-11 21: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이 책 추천합니다. ^^

희선 2021-10-0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 님 축하합니다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구단씨 2021-10-11 21:58   좋아요 0 | URL
연휴 잘 지내셨나요? ^^
비가 와서 그런지 쌀쌀해져서 금방 겨울 올 것 같은 날씨였어요...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1-10-0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축하드려요 ^^

구단씨 2021-10-11 21: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연휴 동안 책 많이 읽으셨나요?
책 읽기 좋은 날이었는데, 저는 한권도 못 읽었어요... ^^

thkang1001 2021-10-09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 님! 이 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연휴 보내세요!

구단씨 2021-10-11 21: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먹기만 하느라 살이 계속 찌는 연휴 보냈거든요.
계절이 바뀌려고 하는 듯해요. 건강 유의하세요. ^^

thkang1001 2021-10-1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제 건강을 걱정 해주신 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