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 빔 벤더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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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 나 할 것 없이 요즘에는 휴대품이자 필수품이 되어버린 카메라. 내가 생각할 때, 카메라가 더욱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필름카메라가 아닌 디지털의 등장이다. 흔히 말하는 ‘똑딱이’부터 DSLR.(내가 아는 게 이정도 밖에 안 되니 여기까지만 언급해본다.) 사진이나 카메라에 대한 것은 잘 모른다. 굳이 필요에 의해서 찍어두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카메라와 가까이 할 일이 없다. 문득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카메라 앞에 서 본적도,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무언가를 찍어본 적도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니 더더욱 낯설어질 수밖에 없나보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한 무언가가 더 간절해지지도 않는다. 필름 카메라를 쓸 때는 필름을 낭비할 수 없다며 오직 한 장을 위한 사진을 찍기 위한 마음이 있었는데, 디지털화 되고 부터는 그렇게 욕심내어 본 적이 없다. 필요하면 찍고, 맘에 안 들면 삭제하고, 부족한 부분은 수정도 하고, 몇 번이고 다시 찍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절실해지지 않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때로는 그립기도 하다. 오직 한 장을 위해 찍는 일이, 오직 한 장만이 인화되는 순간이, 파일로 만들어진 사진이 아니라 ‘찰칵’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찍힘이 가끔은 그립다. 그래서인지 가끔 폴라로이드를 찍을 때가 있다. 굳이 잘 정돈된 모습이 아닌, 그저 흐릿하게 나오는 장면이라도 한 번은 그렇게 찍어두고 싶어질 때가 있다. 또한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함을 대신해주려 나타나는, 사진이 가득 담긴 이런 책들을 만날 때면 두근거림과 동시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딘가에서 빛바랜 추억 한 자락 저절로 끄집어내게 만드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독일 전후 세계를 상징하는 대표적 감독이라는 빔 벤더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빔 벤더스’라는 이름을 모른다. 그 이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 ‘빔 벤더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많이 낯설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해 찾아보니, 조금은 아는 척을 해도 되겠다. 적어도 그가 만든 영화의 제목은 알고 있으니 말이다. (웃음) 하지만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만든 영화나 영화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오직 이 한 권에 가득 담겨 있는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사진들과 그 사진들과 함께 한 그의 글을 더 느끼고 싶다. 그가 담은 사진들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와 느낌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가 그동안 같이 작업했던 영화인들과의 한 컷, 어디론가 이동 중에 비행기 경유지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과 한 컷, 무심한 풍경 속에서 한 컷, 의미 없어 보이는 사물에도 한 컷, 무더위 속의 계절 안에서도 한 컷. 그가 찍어낸 사진들은 모두 한 컷이다. 그는 모든 것에 단 한 번의 찍힘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오직 한 장 밖에 없는 그 한 장의 사진들과 함께 그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낸다. 추억 한 자락 끄집어내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 한 마디 덧붙이기도 한다. 누군가를 기억해내기도 한다. 모든 것이 오직 한 번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찍힌 사진도, 그 사진과 함께 한 느낌과 생각의 기록도. 한 번은, 한 번은, 한 번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을 때,

그 순간은 》단 한 번의《 순간이 된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우리의 시간이,

사진으로 자신의 유일무이함과 고유함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단 한 번의 순간은

한 장의 사진이 없었다면 영원히 잊힐 수도 있었던

한 편의 이야기로 이렇게 태어난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한 번이다. 이유 불문하고 다시 되돌려 ‘두 번’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저, 그런 것이다. 한 번. 오직 한 번의 시간만이 존재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아마도 저자는 이렇게 사진들을 찍어가면서 그 순간의 느낌을 기억해내면서 저절로 잊지 않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처음 일곱 살 때 사진을 찍었고 열두 살 때 자신만의 암실을 만들었다는 빔 벤더스. 열일곱의 나이에는 아버지에게서 라이카 카메라를 선물 받았단다. 그러나 그 자신은 한 번도 사진작가의 꿈을 꾼 적은 없다고 한다. 사진은 자신의 일부이지 직업이 아니라면서. 그가 그런 생각으로 그동안 찍은 사진을 통해 그가 느끼고 만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는 아마도 셔터를 누르면서 ‘찰칵’하던 그 순간에 자신이 보았던 시선과 자신이 그 순간 느꼈을 그 마음, 그 순간의 피어오르던 감동을 알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만족’이란 것의 의미는 각자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만족’을 주는 것도 각자가 다 다른 것처럼. 그가 느낀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 만족을 주었기에 생업도 아니고 전부도 아닌 그 ‘사진’이란 것을 그가 시작했고 계속 하고 있는 이유일 것 같다고. 그리고 오직 한 번. 그 한 번의 의미로 충분하다고.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란 속담이 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땐

이 말이 꽤 명쾌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적어도 사진에 있어서 이 말은 옳지 않다.

사진에 있어서 한 번이란,

정말로 오직 단 한 번을 의미한다.

 

 

보이는 모든 것들과 모든 순간이, 흐뭇하게 웃음이 나게 하기도 하고 그 순간의 감정에 눈물이 나기도 한다. 오직 단 한 번 밖에 느낄 수 없는 그 찰나의 순간의 고유함이 전해지는 듯하다. 사진이 가지는 그 순간의 고유함을 조금을 알 것도 같다. 멈추지 않고 가기만 하는 우리의 시간의 모든 기록과 순간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조금은 들여다보고 갈 수 있게끔.

이 책은 사진집이면서 동시에 저자의 느낌이 그대로 활자로 담긴 수필집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 속의 말처럼, 사진이란 것이 나의 위치에 따라 찍는 게 달라진다는 게 마냥 신기하다. 그게 같은 것을 두고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것만 같다. 저자는 그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설명하듯 이야기 한다. 사진과 그 사진에 덧붙여진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려주면서 말이다.

그것이, 딱 한 순간, 지금, 아직도 사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단순히 사진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면 만화책 보듯 휙휙 그냥 넘겼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은 더디게, 한번은 더 그 글을 머금고 넘기느라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충만감이 생긴다. 사진을 통해서 본 모든 순간들과 그 사진들 사이사이에 이어져가는 저자의 이야기가 포근하다. 사진을 보면서 자칫 가질 수 있는 인공적인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한 편의 이야기가 계속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천천히 음미하듯, 누군가의 기억을 더듬어보듯,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듯이 볼 수 있는(읽어갈 수 있는) 편안함을 준다.

 

더불어 이런 다짐도 하게 만든다. 기록의 습관을 가져야겠다고.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기억도 희미해지고, 사진도 빛이 바랜다. 그 모든 것들의 순간의 기록이 얼마나 중요하고 때로는 아름답게도 느껴지는지 새삼 알게 된다. 그 순간의 느낌은, 오직 ‘그 순간’에만 딱 한번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나는 책을 읽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의 사진을 찍어 두고,

그 글귀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지금 그 느낌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오직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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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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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두 가지로 진행되는 분위기를 자주 파악하게 된다. 범인이 누군지 밝혀놓고 시작하는 이야기와, 반대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 점점 사건을 해결해가고 범위를 좁혀가면서 마지막에 그 범인의 실체를 드러내어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더라도 결론은 나온다. 범인도 밝혀진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면 된다. 또한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은 추리 소설을 읽을 때 흔히 스포일러라고 말하는 것들을 피해가고 싶은 순간도 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고 외치던 어느 영화의 관객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다던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이런 분야를 접하면서 절대적으로 피해가고 싶은 것이 바로 스포일러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굳이 그걸 피해가고 싶지는 않았다. 뭐랄까, 알면서 봐도 재미있는 소설이 있고, 모르고 봤음에도 ‘뻔하다.’라는 생각에 그 흥분마저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소설들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포일러의 유무는 책을 읽는 재미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저 이야기로의 재미가 충분하다면 스포일러쯤이야 알고 봐도 좋다는 주의다.

그런데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만큼은, 혹시라도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하여 그 스포일러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 책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그러다 보니 많이 답답하다.) 모든 독자가 나처럼 스포일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약간은 뜻밖의 마무리에 조금 놀랐다. (솔직히 많이 놀랐지만 안 그런 척 하고 싶다. 독자로서 일종의 어설픈 고정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책을 대했다는 점에서 나 혼자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교도소 내의 면회실 철망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부부. 철망을 사이에 두고 부부는 입맞춤을 한다. 한 명은 철망 안쪽에 다른 한 명은 철망 바깥쪽에서. 한 명은 이미 살인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이고, 그 누구도 이해 못할 짓이라고 하겠지만 다른 한명만은 희망을 놓지 않겠다고 말한다.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었으니 이제 다 괜찮다고, 사건을 번복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고. 그때부터 사건은 다시 시작한다. 어렵게 붙잡은 그 희망을 결코 놓을 수 없었기에.
스트립댄서 미미는 재벌가의 방탕한 외아들과 사랑에 빠지고 초스피드로 결혼을 한다. 물론 시아버지나 시누이 될 상대는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미를 그저 돈이나 뜯어낼 목적으로 들어온 사람 취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미는 그 집 안에서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행복할 것만 같았던 미미의 신혼생활은 결혼 몇 달 후 시아버지가 그 집안에서 살해당하던 날 끝이 난다. 결혼을 반대했던 시아버지에게 미미의 남편은 폭언을 하고, 그런 남편이 용의자로 몰릴 것이라 생각했던 미미는 경찰 조사에서 위증을 한다. 그래, 미미는 남편을 사. 랑. 해. 서. 위증을 한 거다. 그렇게 위증을 했는데도 진짜 범인은 제대로 밝혀졌을까? 범인은 정말 누구인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위증을 한 미미가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과 범인이 남편인가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동시에 생긴다. 그리고 왜, 무슨 이유로 미미의 시아버지는 살해되었나 하는 것도. 물론 범인이 밝혀지면 살해된 원인도 같이 나오니 그것까지는 애써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이 책의 분위기로 보면 살해의 이유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저 ‘범인은 누구인가?’ 하는 것과 이미 읽어본 독자들이 말하는 이 글의 짜임새가 궁금해질 뿐이다.


독특하게 독자를 우롱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내가 느낀, 이 책에 대해 처음 떠올린 단어다. 내가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추리소설을 즐기는 독자인데, 이제까지 이런 생각으로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이 책을 이야기로 즐기고 반전이 나오면 ‘와아~’하고 좀 놀라주고, 스토리가 탄탄하면 작가에 대한 칭찬을 좀 해주고, 범인이 잡히면 왜 그런 죄를 저질러야만 했는지를 찾아내려고만 애썼던 것 같다. 그대로 정석적이고 기존에 내가 고수해왔던 독자의 자세를 취하려고만 했던 건가 보다. 그래서 3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의 이 책을 읽어가면서 가장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었나? 마지막에 다다라서 범인을 발견한 순간(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범인은 의외로 쉽게 추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시작도 하기 전에 내 마음대로 정해놓은 방식대로 이야기를 접했던 것이었다. 분명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기존의 틀에서만 맞추어서 그 눈으로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나서는 결국 저절로 다시 1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확인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만큼 작가가 만들어낸 트릭에 나는 속았다. 나는 그만큼 추리소설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를 버렸던 것이다. 시선을 놓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하면서 읽어야 했던 것을, 처음부터 긴장과 예리한 눈초리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에잇~! 화가 나~!

정신과적인 질병 중에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병’이 있다고 한다. 흔히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의 성격중의 하나로 보기 쉬운데 그 정도에 따라서는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고 했다. 인간이 가지는, 질병으로까지 보기 모호한 그 정도에서 보면 이 책의 작가는 작가가 만들어낸 그 트릭에 그러한 성향을 가진 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셈이다. 독자가 이미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던 사이에 그 트릭 안에서 헤매는 것을 뻔히 보고도 모른척하고 놀게 내버려두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야 ‘너 속은 것도 몰랐지?’라고 놀려주고 있다. 괘씸하기도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작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읽는 재미를 충분히 즐기게 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바로 그 ‘변호측 증인’의 보는 순간은 이야기의 정점을 찍는다. 그저, 정말 뜻밖이어서 놀라울 뿐이다. ‘당신이 증인이었어?’

나오키 상 수상작가인 미치오 슈스케는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은 않은 전설의 걸작”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 당시에 태어난 이 작품을 보면서 충격이었나 보다. 1960년대에 이 책이 처음 나와서 지금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60여 년 전에 써진 이 작품을 지금 만나는 독자의 눈으로 보면 자칫 촌스러움을 느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요즘 무분별하게 ‘나는 추리소설이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많은 책들보다 충분히 월등하다. 읽어가는 재미는 충분할 듯하다. 단~! 어떤 책을 보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나친 기대감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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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0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의 스포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많지요...
특히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반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지요!

책 내용이 모두 스포일러라면 리뷰쓰기 좀 그럽니다..
제가 읽은 추리소설중에도 몇권 그런 책이 있어서.. 쩝

지나치게 기대할만큼의 스토리는 아닌가보군요.
그래도 미치오 슈스케가 극찬, 극찬했는데 기대를 아예 접을수가 있어야지요 ㅋㅋㅋ

pjy 2011-12-05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쯤이야... 매우 반기는! 정말 다 읽고나서도 헤매는 사람으로 매우 궁금한 소개군요^^; 긴장하면서 예리한 눈초리로 읽어보겠습니다ㅋㅋ
 
쌀례 이야기 세트 - 전2권
지수현 지음 / 테라스북(Terrace Book)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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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는 살인용의자 박해일을 마주했을 때 이렇게 물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붙잡아서 주리를 틀어도 모자랄 판에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장면을 보면서 분명 한국인의 오래된 정서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세상에서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묻고 있지 않는가,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배를 곯지 않고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 어려웠던 시절의 배고픔이 세상살이의 가장 큰 해결 과제였던 것처럼, 밥을 먹고 다니냐고 묻는 것은 묻는 이와 대답하는 이 서로의 가장 큰 마음을 담은 안부인사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밥으로 정을 나누는 것 같은, 밥에 대한 애착 같은 책이 아마 이 책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구수한 밥 냄새 나는 이름이 있다, "쌀례" 평생 쌀알 모자라는 법 없이 살라고 쌀례라 불렸던 여자. 열네 살의 나이로 얼굴도 모르는 스무 살 신랑을 찾아가서 혼인을 한다. 꽃가마를 대령하고 모셔가야 하거늘 기차를 타고 혼인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는 쌀례(세상이 바뀌어서 꽃가마로 3일 걸리는 거리는 기차로 하루 만에 간단다. ㅎㅎ). 그런데 이 신랑, 혼인은 하되 거기까지란다.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쌀례를 조혼 시킨 어른들의 입맛에 딱 그만큼만 맞춰준단다. 그렇게 너 자리 내 자리 알아서 살아가는 두 사람이다. 신랑은 학교도 다니고 몰래 야학도 하면서 자신의 신조에 맞게 살아가고 있고, 쌀례 역시 그녀의 모든 바람을 담아 기원하고 또 기원하는 그 공간 부엌을 신봉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역시나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흐르면 재.미.없.어. ^^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세월이 흘러, 이 신랑님 쌀례에게 반했다네~~ ㅎㅎ 줄거리도 그냥 다 말하면 재.미.없.어. ^^

아직은 우리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 1943년부터, 1945년 광복을 거쳐 1950년 육이오 전쟁을 겪고, 종전 그 후의 몇 년을 더 살아가는 이야기다. 시간으로 따지면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들을 살아가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쌀례와 쌀례의 남편 한선재, 그리고 거지 윤찬경의 이야기. 평생을 지아비 한 사람만을 정인으로 알고 살아가겠다는 여자 쌀례, 친일파 아버지의 욕심과는 반대로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남자 한선재, 거지로 살아가게 만든 누군가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은 남자 윤찬경. 전체적인 틀은 이들 세 사람의 인생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조금은 더 넓게 보자면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 안에서 우울하고 한편으로는 비장하게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까막눈은 안 된다고 세상을 보게 하려 애쓰던 남편에게 글자를 배우는 여자 쌀례의 인생은 피어난다. 나중에 쌀례 스스로가 독립하게 만들기 위해 가르쳤던 글자와 문명이 쌀례를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이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겼던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도 마음대로 품지 못했던 남자가 한선재다. 자신의 인생만큼 그 누군가의 인생도 소중할지 언데 그런 우선순위를 무시해버리는 아버지 때문에 나라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고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선재의 인생 역시 꼬이고…….
무너져 가는 또 하나의 청춘 윤찬경. 단 한마디면 되는데, 그저 잘 돌아왔다고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될 것 같았는데,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뻔 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욕심만 알았던 아버지라는 인간 때문에 세상의 악귀가 되어간다.

암울했던 시절을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과 인연에 가슴이 저리다. 왜 나를 봐주지 않느냐고 울먹거리는 쌀례나 마음에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선재나 한번 마음에 들어오면 남의 것이라도 뺏고야 말리라 다짐하는 찬경이나. 욕심이 지나친 사람들 때문에 꼬이고 엇갈리는 이들의 인생이, 보면서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시대적 배경이 그렇고, 사람의 욕심이 그렇고, 역시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마음들 때문에 그렇다. 어쩌면 한 여자(쌀례)의 일생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는 그녀의 중심으로 흐르고 열네 살 그녀가 스무 살이 넘어가고, 까막눈이었던 그녀가 글을 알고 학교에 다니고 신식여성의 삶을 살아보고, 어른이 되고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이 그대로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시대를 그렇게 살았던 누군가가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 같기 때문에. 실제 작가의 가족사에서 힌트를 얻어 써내려간 이야기라니까 완전 허구는 아닐 것이다.

특히나 아름다운 그 여자, 쌀례.
참 답답한 인생을 살아가는 듯 보여 이해가 안 될 것 같았는데(사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 저절로 그녀의 마음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부엌의 부뚜막에 정안수를 떠놓고, 부엌 조왕신에게 마음을 다해 빌면서 쌀을 안쳐 식구들을 위한 밥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삶. 집 나간 누군가의 몫으로 밥 한 그릇을 늘 따로 챙겨두고 그 밥의 주인을 위한 안부를 빈다. 집 떠나 있어도 배곯지 말라고 기원하고, 어딜 가서도 매 순간마다 '밥, 밥, 밥'을 외치는 그 여자의 밥 예찬은 끊임없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부르짖는 밥을 바로 내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듯한 기분을 내내 떨칠 수가 없다. 동그란 밥상 위, 누런 놋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고봉으로 담겨진 그 뿌듯함, 콧속으로 스며드는 그 뜨끈뜨끈한 밥 냄새, 아무런 반찬이 없이 그냥 그 밥만 먹어도 뱃속이 든든해지는 기분, 그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가면 그 무엇도 다 해쳐나갈 수 있는 듬직함이 그 밥 한 그릇에서 나온다. 그동안 쌀례가 배워오고 쌀례가 계속 했던 밥 예찬은 그래서 멈출 수 없다. 계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나가면, 나는 새로운 주발을 살 거야.
내가 깨뜨렸던 것보다 훨씬 예쁘고 단정한 새로운 조왕신의 주발을 사야지.
맑디맑은 물을 떠서 바쳐야지.
그리고 다시 한 번 합장을 하고 감사드려야지. 혹은 다시 빌어야지.
- 보우해 주세요. 내 쌀독에 쌀알이 가득하길. 내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기를.
기도는 이루어진 것도 있었고,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노여워서 주발을 부셔 버린 적도 있었고, 더 이상 기원할 것이 없다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주발이 있거나 없거나 정안수가 가득 채워졌거나 말라 버렸거나 그녀는 늘 빌어 왔었다.
기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끊임없이 보채는 것 같아 어떨 때는 스스로 얼굴 붉어지는 때가 있더라도, 삶은 기도다.
그것도 멈출 수 없는 기도.
끊임없이 허기진 배를 쌀알로 채우고, 집 떠나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더운밥 한 공기 아랫목에 묵혀 두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 다투다가 다시 밥상을 함께하는 그 모든 것은 다 행복해지기 위한 기원인 것이다. - 2권 445페이지

로맨스소설 특유의 달달함은 없지만, 그 약간의 로맨스에 저릿저릿함은 충분히 있다. 한 여자의 인생에서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인생을 배우게 된다. 어두웠던 그 시절의 젊은 인생들의 아픔도 보인다. 그리고 시간의 배경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욕심이 가져오는 선과 악을 동시에 보게 된다. 이른 새벽, 정안수를 떠놓고, 그 무언가를 간절히 빌고 있는 그 시절의 여인네들의 간절한 바람이 아직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앞으로도 계속될 그 바람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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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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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보면, 너무나도 평범한 독자인 나는 가끔 ‘나쁜 작가’ 라고 작가를 부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이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이건 아니라고’ 투정이라도 부리면서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흔히 열린 결말이라고 하는 마무리를 선사하는 작가는 나쁜 작가라 부르고 싶어진다. 단편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로 만난 작가 김경욱 역시도 그런 의미로 보자면 나쁜 작가다. 도저히 ‘이건 사실이 아니야.’ 라고 따질 수도 없는 회색빛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뻔뻔하다. 읽고 난 후의 어떤 답답함에 대해 답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세상의 속물적인 이야기(그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의 표정을 어디선가 숨어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하게 만든다. ‘네가 한번 그 답을 말해봐.’라고 묻기라도 하는 듯이.

이 책에 담긴 총 9편의 단편들 모두 우울하고 건조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의 희망 같은 것은 없다. 미래도 없는 것 같고,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일은 내일이 와봐야 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았던 것처럼 또 반복적으로 내일이 살아지겠지. 그래서 우울해진다. 기댈 것도 바랄 것도, 한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
같은 반 남자아이들에게 성폭행 당한 손녀에 대한 응징을 하려는 할아버지(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강의 이쪽저쪽으로 나뉜 삶에서 아무리 노를 저어도 건널 수 없는 강의 한 가운데에 표류하는 듯한 취업 사수생(러닝 맨), 1%를 향해가는 삶을 살고자 발버둥 치면서도 정작 그 1%에 속한 이들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느끼는 최대리(99%), 결국은 이기지 못한 이의 뼈를 갈아 마셔야만 했던 비운의 복서(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 아무 연관도 없는 이들 같지만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 같은 것은 너무 닮은 이들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형사의 시선(하인리히의 심장),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라고 비하하고 싶지만 인기 있고, 베일에 가려져 있기에 더 잘 팔리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취재하는 사진 기자(연애의 여왕), 아무리 구르고 굴러 뛰는 것보다 빨리 달리는 것 같지만 늘 제자리의 가난이 찌든 삶을 3대가 모여 사는 그 집의 청년(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그날 그렇게 그 사건과 시간을 겪으면서야 드디어 마음의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을 가져온 여자(혁명기념일), 어쩌면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를 일로 어긋난 삶을 살아온 부자(父子)(아버지의 부엌).

이들 9편의 단편들이 가진 공통점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첫 번째로 수록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의 노인이 보여준 것처럼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신의 뜻대로 용서를 행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신이 보여주는 그 ‘착함’이 가진 진정성이 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노인은 당장에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손녀를 성폭행한 가해자들과 타협할 수도 있었다. 돈을 받고, 먹고 사는 일을 해결을 하고, 덧난 상처가 아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이 말하는 용서를 선택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노인만의 방식의 용서를 선택한다. 신이 말하는 ‘착한’ 용서가 아니라 노인이 선택한 ‘진짜’의 방식으로 말이다.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을지도 모른다. 정말 간절해지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외치는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 요즘처럼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다고 외쳐대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우리는 신의 그 모든 뜻대로 방식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고 또한 절대적으로 착할 수만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을 믿는 척, 신이 바라는 대로 하는 척 하다가 저절로 가슴에 묻을 이름 모를 그것에 대한 ‘용서’는 또 누가 해줄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필요하다.
벼랑 끝에 몰린 순간에 보여지는 모습들이 진짜 모습일 것이다. 신이 내린 용서가 아닌 자기가 만든 용서, 결국은 파헤쳐 끌어내리겠다는 욕심과 질투,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고자 하는 발버둥, 책임지고 싶지는 않지만 미련 역시도 끊어내지 못하는 감정들. 인간이 가진 모습들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신께서 그 모든 것을 총괄하여 같은 방식으로 보듬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그대로다. 그냥 나열이었다. 그 누구의 진심을 파헤쳐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굳이 애써서 억지스럽게 그 속을 열어보이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저 들려주었을 뿐이다. 이런 삶 저런 삶, 자기 안의 소리들이 말하는 대로 행했던 이런 용서 저런 용서. 종교가 없는 내가 이 책의 등장인물들의 삶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신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내 안에서 내가 만든, 나의 생각에 따른 맞춤형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읽는 이로 하여금 교묘하게 그 안에 빠져들게 만들고, 또한 저절로 빠져나오게 만들고, 다시 읽게 만든다. 그게 작가가 가진 매력일 수도 있겠고, 그의 펜 끝에서 나오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들려주면서 동시에 함께 하게 만든다. 그 다음 이야기는 알아서 써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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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내숭구단님. 글 잘 읽었습니다 :)
정말이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맞춤형 신'이 마음 속에 있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복수를 할 때 그것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되뇌이는데, 그건 또 다른 사람의 맞춤형 신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김경욱의 단편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깔끔하게 잘 쓰여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직 심히 애정이 가는 정도는 아니지만 ^^;;

구단씨 2011-11-18 15:09   좋아요 0 | URL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교회에 다니시지만...) 그래서인지 아니면 평소에 호감이 없었던 부분들 때문인지 받아들이기 힘들 신의 '용서'였어요.
저 역시도 김경욱의 책을 처음 읽었습니다. 다른 작품들 가지고 있는데 한번 읽어볼까 합니다. 호감 가는 작가분이 되셨어요, 저에게...
댓글 감사합니다.

알리샤 2011-11-20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숭구단님, 질문인데요. 제일 위에 작품이미지와 평점, 장바구니 - 이걸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 저도 신간평가단인데, 이미지 넣기만 되고 다른 것들을 넣으려니 잘 모르겠어서 여쭤봅니다~~

구단씨 2011-11-21 15:49   좋아요 0 | URL
^^
저건 제가 이미지를 넣는 게 아니구요. 리뷰 등록하면 자동으로 생성되는 겁니다. ^^
이미지도 따로 넣는게 아닙니다. 해당 도서의 마이리뷰 등록하면 책 이미지와 같이 말씀하신 것들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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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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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배우자나 애인)에게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범위가 있다. 쉬운 말로 ‘바람’이라 부르는 행위. 최소한 가장 일순위로 지켜야할 서로의 믿음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단순하고 멍청해서 그런지 바람은 못 피우겠다. 상대방에게도 그걸 요구한다. 마음이 식었거든 바람이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씩 선택하라고. 누군가와 나누기는 싫다고. 실제로 상대의 바람을 알아차리고 헤어진 경우도 있다. 마음을 준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가슴에 돌덩이를 끌어안고 사는 것보다는 어쭙잖은 자존심을 택하겠다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떤 변수가 생겨서 생각이 달라질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그렇다. 그래서인지 이런 불륜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보면서도 분명한 복수가 등장하지 않으면 심통이 난다. 내가 해줘야지, 그 복수.

세상에서 불륜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와타나베. 그런 그가 그렇게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야 만다. 같은 회사의 계약직 직원인 아키하와 불륜이란 것을 저지른다. 그 아름다운 이름 ‘사랑’으로. 여기까지만 보면 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쓴 한 편의 사랑과 전쟁이 되시겠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가 된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동안에도 우리에게 재미를 선사하던 미스터리가 등장한다. 아키하는 15년 전 한 주택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관계된 인물이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그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 그리고 그런 아키하와 불륜에 빠진 와타나베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아키하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계획하던 찰나에 그 사건을 알게 되고 아키하가 그 사건의 용의자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그 사건의 내막 파헤치기에 참여하게 되는 와타나베.

자신의 장점을 상대방에게 최대한 드러내는 것이 연애라면, 결점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것이 결혼이다. 더는 상대를 잃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연애할 때처럼 상대의 눈길을 끌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결혼을 동경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도 그랬다.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너무 힘든 나머지, 편안해지고 싶어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편안함을 얻는 대가로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192페이지)

결혼이 그런 것이야?
사실 결혼뿐만이 아니라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다 보면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는 거 아닌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 버린 것의 몫까지의 만족감을 주는 순간도 있지 않아? 이 책에서 와타나베와 그의 친구들이 등장하면서 풀어내는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올 때면 진정 그런 것인가 하는 의문점이 들면서 동시에 그들이 선택한 결혼이 가져다주는 장점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공평한 것 아닐까 하고.

와타나베와 아키하의 불륜을 보여주는 그 과정이 참 재미있다. 떨리는 마음으로 ‘딱 한 번만’, 그 다음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미심쩍은 안도의 마음으로 계속 진행 중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결국은 유지해 온 가정을 버리고 새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대부분 불륜의 과정이 그런가?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듣고 싶으면서도 씁쓸하다. 결국은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짓일 수도 있음을 간과하고 말이지.

처음부터 불륜임을 말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다. 와타나베의 고백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건의 15년 공소시효가 끝나감을 자꾸만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불륜의 대상인 아키하와 살인사건을 연결시켜줌으로써 이야기의 재미는 배가 된다. 물론 살인 사건의 전말을 마지막에 드러내주면서 그 모두가 연관되었던 ‘불륜’의 말로를 가장 잔인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무고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짐으로써 더 이상의 불륜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 같기도 하다. 작가 특유의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던 그 센스도 잊지 않는다.

결혼이란 것을 선택한 자의 책임이란 게 있다. 사랑해서 결혼이란 결실을 이루었으면 지켜야 할 것들도 생겨난다. 배우자 외의 사람을 만나면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될 거라 생각하지 말자. “불륜은 불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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