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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허영심의 밑바닥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술술 넘어가는 추리소설을 읽어서인지 <순수의 시대>는 속도가 더뎠다. 책장이 허공에 부채꼴을 그리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짧디짧은 순간마다 여러 생각이 밀려왔다. 읽기를 멈춰도 머릿속은 온통 책 속이었다. 톱밥처럼 켜켜이 쌓이는 의미들을 세세히 살피려고 초점 없는 눈이 먼 곳으로 자주 향했다.
이디스
워튼은 이야기를 빈틈 없을 만큼 꽉 짜서 독자인 내 방식대로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으나, 그녀가 자신을
속이지 말고 생각해보라며 던지는 당당한 목소리는 이 책을 읽는 큰 재미다. 이디스 워튼이 만든 이야기는
꽤 현대적이라는 감탄을 자아내는데 90여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아이디어나
인물들의 관계가 여전히 인간에게 중요하고 진부한 주제가 아니기에 그렇다. <순수의 시대>는 세월을 통과하는 책을 읽는 기쁨과 함께 인간성 혹은 인간의 속성이란 문학의 오랜 주제를 다시 펼쳐놓고
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순수한 의도’라는 말은 꽤 웃기다. 내가 순수하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말이 많느냐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허세 역시 널렸다. 이디스 워튼은 인간의 겉모습 말고 그 너머에 뱀처럼 또아리를 튼 사악한 의도를 볼 줄 아는 작가이다. <순수의 시대>는 복잡다단한 동기를 밝히기에 적당한 소재인
상류층 사람들을 조명한 작품인데 1862년 뉴욕에서 태어나 1937년
사망한 작가가 자신이 살고 경험한 사회를 잔인하다 싶을 만큼 예리하게 포착했다.
가끔씩은 거의 그럴 뻔하기도
했지만, 그가 자기 허영심의 밑바닥을 잘 살펴보았다면, 한때
그를 사로잡았던 매력적인 어느 유부녀만큼 자기 아내가 …(14쪽)
여기서 ‘그’는 뉴랜드 아처, 결혼을 앞둔 젊은 남자이다. 뉴랜드 아처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이 문장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예언처럼 조롱한다.
콜롬부스가
발견한 신세계로 이주한 유럽인들은 상인계층이 주류였기에 이들이 자신들을 귀족운운하는 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초창기 상류사회는 한 둘의 귀족 가문에 매달려 이들과 혈연을 맺으며 자신들을 귀족인양 행세하며 만족했다. 이디스 워튼은 유럽의 진짜 귀족보다 더 예법과 형식에 연연하며 ‘순수한
의도, 순수한 동기, 순수한 사랑’을 자신들 삶의 근거인양 믿는 이들에게 불을 환히 밝힌다. 작가는
이 ‘허영의 불꽃’을 약혼녀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남자를 중심으로 비춘다.
사교계에서
일등 신붓감으로 인정받는 메이와 결혼을 앞둔 뉴랜드도 사회가 원하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주류 관념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는 자기 맨 눈으로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을 때때로 느낀다. 은밀하게 솟는 이 감정을 가까운 지인들 중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기에 간직하고만 사는 인물이다. 가족들은 파티와 드레스, 초대손님 명단 같은 것들을 진심이나 솔직한
태도보다 높이 떠받들며 자신들의 ‘순수’를 믿는 사람들이다. 뉴랜드는 내면에 불꽃을 일으킬 기회를 얻지 못 하다가 유럽에서 온 메이의 사촌 엘렌을 만나면서 변화를 경험한다.
엘렌은
오직 개인인 자신으로 존재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여성. 이런 엘렌은 집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요구 받는 상류층 사회에서 낯설고 불편한 존재이다. 엘렌이 상류사회 공동체의 일원인 메이의 결혼을 불안하게 만들자 사회의 일원들은 집단으로 뭉쳐서 엘렌을 유럽으로 쫓아내버린다. 이들은 균열과 모험, 낯선 것을 혐오한다.
뉴랜드 역시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아는 여성 엘렌이 사랑을 느낄 만큼 남들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려고 하는 듯 보이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회의 순수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가 원하는 테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 한다. 그가 순수라고 믿었던 자신, 자신의 일생의 바닥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던 것은 진실을 진실로 보지 못 하고 눈을 가려버리는 허영이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뉴랜드 아처라는 남자의 허영심의 밑바닥을 밝혀준 이야기 일 수 있다. 한 사람의 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전 우주의 속까지 알 수 있잖은가. 오랜 과거의 인물이나 지금도 여전히 뉴랜드 아처는 존재하고 그것이 이 소설의 생명력이다.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 할 뉴랜드 아처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기에 시대와 유행을 뛰어넘을 ‘등장인물’이다.
<순수의
시대>는 여러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등장인물에 주목하자면
순응자와 모험가로 대비해서 독해할 수 있다.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며 질서
안에서 만족하는 메이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순응자에 속한다. 반대편에 엘렌이 있다. 그녀는 모험가이며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사람들의 수군거림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와 질서를 경험하는 일에 엘렌은 관대하다. 이 두 세계에서
서성이는 회의적인 인물이 뉴랜드이고 이것과 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뉴랜드야말로 가장 다수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 일 것이다.
또한 통속적인 로맨스로도 읽힌다. 오래전에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애인>하고 줄거리가 비슷하다. 뉴랜드가 약혼한 양가집 규수는 현모양처인
이응경이고, 대화가 통하고 함께 있으면 살아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여자는 황신혜, 방황하는 남자는 유동근에 맞춰봐도 어색하지 않다. 고전인 <순수의 시대> 속 등장인물들은 현대에도 친근하다.
사회와
개인, 여성의 독립,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조종하는
조종자 등 여러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은 흔치 않다. 이디스 워튼은 분명히 독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식으로 책을 이해하도록 내용을 배치했는데 그녀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여러 관점을 제공하는 뛰어난 작가이다. 헨리 제임스에 필적한다고 불린 이디스 워튼은 이 작품으로 플리처 상을 받았는데 수상이유가 좀 이상해서 작가 자신도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방황했으나 순수를 지킨 한 남자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심사위원들은 이해했단다. 어쩌면 이디스 워튼이 작품으로 말한 순수의 시대는 이디스 워튼이 살았던 당대에도
여전했고 심사위원들(아마 다들 남자였을 것이다)은 이 작품을
‘순수로 감춘 허영심’이 아니라 ‘순수를 끝까지 지킨 남자를 추앙하는 이야기’로 읽고 싶어했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상을 주었다니, 어쩌면
이 소설의 끝은 수상소식과 수상이유까지 포함해야 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