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좋다.

혹시나 싶어 찾아봤는데 만세~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언어가 인터넷 강의가 생겼다. 내가 벌써 몇 년째 수시로 인강을 뒤졌는데 없더니 올해 들어 떡 하니 새로 생긴 것이다. 게다가 신년맞이 할인이 어마어마하다. 아직 홍보가 안되어 홍보를 하는 김에 대폭 할인을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감사할 때가.

아직 교재도 준비 중인 인강이라 교재도 없지만, 저녁마다 강의를 듣는다. 오늘은 퇴근이 늦어 이제 듣기 시작하면 12시를 넘길 기세다. 그래도 기분 좋은 것은 오늘, 인강의 발전적인 방향에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강의를 듣다보니 중복되는 부분이 보였다. 첫 강의라 그럴 수 있지 생각하고 들었는데 알고보니 뒷 강의 부분이 짤려나가고 대신에 앞 강의가 중복된 것이었다. 내가 애정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히 말을 얹는게 버릇인지라, 오늘 출근하자마자 쪽지를 보냈다. 확인을 해보더니 인강 담당자가 내 폰으로 전화를 하고, 또 인강을 하는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게 아닌가. 자기네들은 생각도 못하던 일이라, 강의가 중복되고 또 짤린 부분이 있다는 내 말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나보다. 어느 부분인지 정확히 알고 싶어 전화를 하신 선생님은 앳된 숙녀 목소리였는데 약간 상기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을 마친 다음,

"선생님 강의를 잘 듣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선생님 연락처가 아직 내 폰에 남아 있다. 물론 연락하고 그렇게하진 않겠지만, 그 나라가 좁다보니 언젠가 만날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4-02-0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작년말에 사주를 봤는데요, 그 때 그 분이 그러셨어요. 외국어를 잘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 굉장히 강한데 끈기가 없어서 정작 본인은 외국어를 못하는 사주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 완전 맞거든요. 달사르님의 이 페이퍼를 보니 그 동경의 마음에 또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불끈하네요. 하하하하하.

달사르 2014-02-04 22:1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반가워요. 다락방님. 우린 끈기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는 사이네요. ㅎㅎ
아니, 끈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거에요? ㅎㅎㅎ
나도 끈기 완전 없는데. ^^

여기에 이런 글 올리는 것도 일단 올리고 나면 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조금은 열심히 하지 않겠나, 라는 그런 얍삽한 생각 때문이거든요. ㅎㅎㅎㅎ

아. 덕분에 완전 웃었네요. 우리 끈기 없는 사람들끼리 외국어 공부 좀 해봅시다요. 그나저나 다락방 님은 어느 나라 언어 배우고 싶으세요? 사람들이 많이 안 쓰는 제 3외국어 이런 것도 조금 땡기지 않나요?

2014-02-04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4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6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6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5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6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해 첫 날에 꾸는 꿈이거나, 혹은 설날에 꾸는 꿈은 좀 더 특별한 느낌이다. 왠지 1년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으니까. 내 꿈은 주로 스펙타클한데, 우주 여행을 하기도 하고, 몇 십만 유순이나 되는 높은 기둥들을 풀쩍풀쩍 뛰어넘기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모험을 하거나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으러 다니거나 위험한 길을 오르는 등, 주로 행동과 관련된 꿈들이 다수다. 오늘 아침 꿈 또한 그랬는데 처음으로 꿈에서 겁먹지 않고 나쁜 짓을 했다. 아주 과감하게.

 

고등학교 시절에 나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책 읽는 법을 가르쳐줬던 친구가 꿈에 나왔다. 그 친구는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다.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물건을 하나 구매했는데 무거우니 같이 들어달라고 했다. 물건이 든 큰 박스를 낑낑거리며 친구네 방이 있는 이층으로 들고 올라갔는데 거기서부터 길이 험난하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이 두 길 낭떠러지가 된 것이다. 친구에게 너네 집이 왜 이러냐고 물으니 공사 중이라서 그러니 위험해도 좀 참고 가달라며 그 길을 친구가 먼저 걸어보며 시범을 보여준다. 봐. 이렇게 걸으면 떨어지지 않아. 그러니 걱정말고 걸어와. 친구의 걷는 폼을 예리하게 살펴본 나는 친구가 딛은 곳을 따라 걸으며 조심조심 외길을 건넜다. 이윽고 외길의 한 쪽에 담벼락이 생겨났고  담 위에서 이빨을 가진 털이 북실한 작은 동물들이 끽끽거리며 놀았다. 그들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손을 덥석 물어서 생채기를 내고선 지네들끼리 끽끽거리며 좋아했다.

-얘들은 뭐야. 나를 무는데?

힘겹게 박스를 나르느라 동물들이 나를 물어도 딱히 내치지도 못한 채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응. 주인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이야. 주인이 아끼는 동물이니 물려도 좀 참아줘.

친구가 말했다.

그래. 참지 뭐. 길의 막바지에 닿을 무렵 손과 팔목은 멍투성이에 작은 이빨 자국들로 가득했다. 마지막 발을 디딜 즈음 한 녀석이 좀 세게 나를 물었다. 나는 얼른 박스를 친구네 마당에 내려놓고 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빨을 내 손에 박고 있던 녀석이 내동댕이쳐졌다. 까마득한 아래로 녀석은 떨어졌고 나는 친구네 집에 들어갔다. 친구네 집은 천장이 아주 높았다. 박스를 열어서 물건을 꺼냈다. 기계치인 친구를 대신해 물건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볼트와 너트, 육각 렌치를 사용해 조립을 완성할 즈음  누군가가 나타났다. 집 주인이었다.

 

난 느긋하게 물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집 주인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나와 함께 어디를 좀 가자고 한다. 방이 갑자기 갈라지더니 아스라히 먼 곳까지 길이 열렸다. 아 또 걸어야돼. 그러나 털복숭이 동물을 내친 것에 대해 주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주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은 또 어디로 연결된 길이야.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식구들의 분잡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식구들은 서로 세배를 하니 받니 바빴고 세뱃돈과 덕담이 오갔다. 이윽고 떡국을 먹는 소리가 들렸으며 시댁으로 출발하는 언니네 식구들의 소리가 멀어졌다. 이제 좀 조용해졌나, 다시 잠을 청할 무렵 엄마가 깨웠다. 출근해야지.

 

떡국을 먹으며 깨달았다. 내가 꿈에서 무언가에 대해 겁 먹지 않고 과감하게 처음으로 내쳤다는 것을. 어젯밤에 올린 포스팅과 왠지 연결되는 느낌이다. 새로운 도전에 겁 먹지 않고 잘 시작한다는 의미일까. 이제 내가 영어랑 다른 외국어랑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일까. 히힛. 빨리 인강 신청이나 하러 가야겠당. 지금은 그저 지렁이 글씨로만 보이는구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Шинэжил баяр хvргье

С Новым годом

كل عام وانتم بخي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탄하 2014-02-15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은 무의식 작용이 매우 활발하신 듯.
저는 거의 꿈을 안 꾸는데...일년에 서너번 정도?

올해는 달사르님의 담대한 행동들이 기대되네요.

2014-02-16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나를 오랫 동안 다루다 보면, 다루지 못하는 다른 것을 만나도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요즈음 발견한 기분 좋은  이론이다.

 

어려서부터 암기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수학을 좋아했음에도 미적분의 그 많은 공식의 암기는 내게 힘든 일이었고 저절로 외워지는 몇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시험 칠 때 공식을 만들어서 쳤다. 그러니까 늘 내 암기는 80% 가량이었던 거다. 100%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왜 100%를 다 채워야 되는지 이해를 못했다고나 할까) 100%를 제대로 할 의지가 없는 적이 많았다.

 

작년 봄 즈음, 갑작스런 제안으로 시작한 공부는 많이 버거웠다. 돌아서면 외울 것 투성이였다. 매번 암기한 것을 테스트를 했는데 당장 한 주 전에 외웠던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다 못한 선생님은 암기하는 방법까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몇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암기하는 시늉만 하고 바빴다는 핑계를 대며 테스트 시간을 피했다. 다른 몇은 선생님 말대로 되는지 안되는지 테스트해보지, 라는 생각 조차 없이 그저 암기력이 떨어지는 판국에 누군가가 제시한 방식을 일단 따라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매일 반복을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여러 달이 지났다. 방학을 맞이한 요즈음, 양자간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다. 누군가는 기껏 외웠던 것조차 헷갈려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머리가 자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술술 나와버린다. 머리보다 입이,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다. 방학이라고 무작정 쉬는 것이 아니라, 다음 번 공부를 위해 기존의 못다 외운 것들을 죄다 암기해놔야하기에 요즘도 매일 동물이 입으로 자신의 털을 고르는 방식처럼, 입으로 점검을 한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운동하러 나가서, 자기전에, 그리고 중간중간에.

 

학창 시절에도 이렇게 열심히 해보지 않은 공부를 뒤늦은 나이에 하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제 옷인양 이미 내 몸에 붙어버렸나보다. 요즘엔 내친 김에 평소에 해보다 매번 실패한 것들을 하나씩 건드려본다. 먼저 외국어. 조만간 어디 나갈 계획이어서 외국어가 무척 절실한 상황이다. 학원도 실패, 인강도 실패, 개인 스터디도 실패, 이것저것 죄다 실패한 경력이 있는 나는 여전히 약국에 외국인이 오면 부담스럽다. 물론 바디 랭귀지로 다 소화를 해내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다. 언젠가 해외에 나갔을 때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를 많이 경험했다. 물건을 사는 것이나 길을 묻는 것 등이 아닌 사람이 사는 것에 관한 대화를 하고 싶었던 나는 그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일상사에 대해 듣고 싶었고, 그들의 언어로 나의 느낌을 이야기하며 교감을 나눠보고 싶었던 나는 (나에게는 어렵기만 한) 언어의 장벽을 절감했다. 그래도 80% 정도에서 늘 만족하는 게으른 성향 때문에 언어 구사를 못함으로 생기는 많은 아쉬움을 그냥 묻어두었다. 이번의 시도 역시 그럴 수도 있다, 라는 생각도 하지만, 실패는 두렵지 않다! 아자아자! 란 생각으로 재도전을 시작했다. 방식은 선생님에게 배웠던 방식 그대로. 계속 반복해서 듣고, 반복해서 복기하고, 반복해서 상상하고, 반복해서 이해하다보니 조금은 들리는 듯한 느낌이다. 외국 말이 걸러져 우리 말로 번역되어 들리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의 느낌 그대로 단어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고나니 기존에 알았던 외국어 단어까지 새삼스럽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 이게 이런 느낌이었어? 애플이 사과로 번역되지 않고, 애플 그 느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 느낌은 그러니까, 예전에 내가 '시'를 이해하던 방식과 비슷하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온전히 들어오는 그 무엇에 대해 손으로 만지듯 느껴지는 그 감각 말이다.

 

한동안 '시'를 들춰보지 않았는데 이제 잃어버린 그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낙원에서 쫓겨난 듯 그 감각이 이제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먼길을 둘러서 그 감각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배운 것 같다. 공부에서 외국어로, 그리고 '시'로 넘어가는 길이 제법 반질거린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4-01-3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달사르 2014-01-31 10: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떡국 맛있게 드셨습니까. ^^
설날 아침 출근길에 걷는데 날이 참 포근합니다. 벌써 봄 날씨 같애요. 놀러가기 좋은 날이에요.
명절에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식구들과 오붓한 시간 보내시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31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순간 시가 좋아지는 시기가 오더군요. 원래는 사춘기 때 와야 하는데 저는 늙어서 시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달사르 2014-01-31 10:12   좋아요 0 | URL
저두요. ㅎㅎ
시는 젊은 시절에 읽는 거라고 하던데 말이죠. 주위에 문학 청년들이 여럿 있었는데 저는 그네들을 무슨 신기한 동물처럼 봤었죠. 남자가 시를 다 읽어. 신기해. 이러면서요. ㅋㅋ
늙어서라도 시가 이해되고 좋아지니 것두 좋네요. 저는 시라는 존재와는 상관없는, 그러니까 감성이 아주 무딘 사람인 줄 알았더니 조금은 감성이 있었나부다. ㅋㅋ 그러면서요.
곰발님 시 읽어내시는 능력엔 매번 감탄합니다. 최근의 그 '바닥'이란 시..그새 작가 이름 까먹음..ㅠ.ㅠ..(저질 암기력..ㅠ.ㅠ) 시도 좋고 해석도 참 좋아요. 퇴근길에 바닥을 보면서 걸어봐야겠어요. 하하하.

프레이야 2014-02-0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우는 건 싫어라하지만 그냥 외줘지는 것들도 있더라구요. 달사르님 오랜만, 반가워요. ^^

달사르 2014-02-02 13:38   좋아요 0 | URL
그지요. 외우는 거 힘들어요.
외우는 걸 잘 못해서 그런지 겨우겨우 외워놓은 게 나중까지 기억나면 그게 또 뿌듯하고 그런 건 있긴 해요.ㅎㅎ 프레이야 님, 저도 반가워요. 요새도 이쁜 목소리 계속 쓰시고 계시나요? ^^

레와 2014-02-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국어에 대한 잃어버린 감각이 돌아와야 할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좋아하던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애증으로 바뀌고 증오까지 넘어가버린 건 아닌지..
달사르님 글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랬죠. 그랬죠.

참, 안녕하세요! 저는 레와라고 합니다. ^^

달사르 2014-02-04 22:3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레와님.
맞지여. 애정이 종종 애증으로, 그리고 증오로 바뀌기도 하지요.
외국어에 대한 감각이 애정하는 마음 만큼 쑥쑥 늘면 참 좋을텐데 이노무 외국어는 해도해도 안 느니 말에요.

해서, 요새는 뭐 걍 먼거리 연애하는 사람을 대하는 심정으루다 (잉?)
옆에 있으면 잘해주고, 옆에 없으면 바로 잊어버리고, 뭐 그렇게 말이죠.
이제는 나이가 들어 하나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도 꽤 버겁단 말이죠. 쩝.

걍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말자구요. ^^
 

 

 

 

 

 

 

 

 

 

 

 

 

 

이 책을 산 건 순전 김성중 때문이다. 계간지로 받아 보는 문학 잡지에서 김성중의 '게발 선인장' 소개글을 읽었는데 제목이 너무 궁금했다. 뒤늦게 생각하니 인터넷에 접속해서 검색만 하면 '게발 선인장'이 뭔지 알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게발 선인장이 실재하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외계의 혹성 여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처럼 게발 선인장을 여관 이름이거나 기타 생소한 종류의 것일거라 지레짐작한 탓이다.

 

소설은 도입부 부터 마음에 들었다. 나는 불현듯 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김성중의 문장들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에서 중요시 하는 부분이 문장이라는 걸 인정이라도 하듯이.

 

몇 개의 단어를 골랐다. 내가 몰랐던 단어들. 내가 잘 쓰지 않는 단어들. 의미는 알고 있지만 정확한 용어를 모르고 있던 단어들이다. 적재적소의 자리에 들어앉은 단어들과 그 단어들로 문장의 꽃밭을 만든 듯한 글을 보고 있노라니, 새상 김성중의 저력이 느껴진다.

 

 

 

단어; 느른하게; 맥이 풀리거나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다.

        힘이 없이 부드럽다.

# 개가 느른하게 꼬리를 흔든다

# 최소한의 가게가 문을 여는 오전의 시장이 파리하고 창백한 안색이라면,

느른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들이 게으른 슬리퍼 소리를 내는 정오의 시장은 점점 살집이 붙고 핏기가 도는 모습이다. 해가 기울면 거리는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며 변덕스러운 흥분 상태가 된다. 나는 창문을 열어놓고 골목의 기이하고 폭발적인 활력에 전염되면서 장사꾼과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인간의 소리로 지어진 허공의 집 위에 누워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단어; 말밥; 좋지 못한 이야기의 대상

        말밥에 얹다; 좋지 아니한 화제의 대상으로 삼다

        말밥에 오르다; 좋지 아니한 화제의 대상으로 되다

# 선배는 소주를 털어 놓고 이내 다른 사람을 말밥에 얹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를 수 없었다.(...)

 그대로 살자니 무당 집에 세 든 것처럼 찝찝하고, 나가자니 당장 이 돈에 그만한 방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적이 심란했다. 다음 날 부러 1층 식당에서 밥을 먹은 건 이 모든 게 뜬소문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싶어서였다.

 

 

 

단어; 느지막이; 시간이나 기한이 매우 늦게

# 한마디로 혈연과 아무 상관없는 노인 셋이 사는 집에 내가 들어온 것이다. 훗날 할머니는 '모든 것이 일주님이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했지만 나는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운명을 느꼈다. 불가해한 것에 유독 끌리는 내 기질은 이 시절에 빚진 탓이 크다.

느지막이 일어나 볕 잘 드는 거실을 차지한 할아버지는 수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도무지 하는 일이 없었다. 비대한 몸에 풍성한 텁석나룻,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노인은 이상야릇한 눈빛을 하고 있어 마주 보기가 꺼림칙한 인상이었다.

 

 

 

단어; 험구가;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뜯거나 험상궂은 욕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 그에 비해 진천 이모는 동네의 유명한 험구가로 친구도 적도 많았다. 이모의 귓속으로 들어온 소문은 그 뚱뚱한 육체 안에서 한껏 부풀었고, 밖으로 나올 때는 종류와 상관없이 얼마간의 음담이 섞여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이모가 뿜어내는 부정적인 영향력 아래 놓였고, 이모는 그런 식으로 자기 처지에 권력을 부여해 시장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누렸다.

 

 

 

단어; 경광등; 긴급함을 알리기 위해 차의 위쪽에 다는 붉은 빛을 발하는 등

# 친구들과 헤어져 늦게 집에 돌아오던 어느 밤, 흥미로운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고주망태로 취한 노인이 자정 넘어 순찰차에 실려 온 것이다. 경광등을 받고 선 할머니는 밤의 고양이들이 빛에 얼어붙는 것처럼 잔뜩 겁먹은 모습이었다. 종일 집귀신으로 살던 노인은 누구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할머니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김성중의 글은 낚시그물 같다.

 

사방이 다 보이지만 투명한 막이 있어 그 막 너머로는 나갈 수 없는, 완벽하지만 갑갑한 타입의 글이 아니다.

치어는 다 내보내주고, 알 굵은 놈만 잡는 성긴 그물 같은 그의 글은, 그래서 숨쉴 수 있는 여지가 곳곳에 있다.

 

그래서 나 같은 게으른 사람도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는 경우는 예전의 나와 만나게 해줄 때,  혹은 드물지만 미래의 나를 느끼게 해줄 때다.

 

 

 

김성중의 글을 읽고 과거의 나와 만났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탄하 2013-05-03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지난번과 같은 패턴이네요.
1. 페이퍼를 쓰려고 작심한다.
2. 괜히 글 쓰기 전에 서재에 들어와 이웃님들 글을 본다.
3. 글 읽고 댓글 달다가 그날 본 책에서 삘받아 '국내도서'로 눈길을 옮긴다.
4. 아무것도 못 쓰고 그냥 로그인한다. 구매 버튼 안 누르면 그나마 다행.ㅋㅋㅋ

오늘도, 제가 그동안 눈여겨보던 <개그맨>의 김성중이라 또 그 책을 흘깃거리다 갈 것 같습니다.

'(...)오전의 시장이 파리하고 창백한 안색이라면,
(...)정오의 시장은 점점 살집이 붙고 핏기가 도는 모습이다.'
-> 요 부분도 딱 꽂혔어요. 정말 그렇네요, 정오의 시장..핏기가 도는 모습.

전에 <금빛날개>도 슬쩍 읽어보았어요. 너무 궁금해서 말이죠.
달랑 하나만 읽고 덮기 뭐해서 표제작인 <너 없는 그 자리>까지 읽었는데, 참 좋더군요.
페이퍼에 이 책에 대해서도 쓰려고 했는데, 음..지금부터 부지런히 끄적이면
내일쯤은 올릴 수 있을까? 지금도 좀 졸렵거든요.
하지만..기필코 이번 토요일에는 뭔가 올려야 해요.
일요일은 어린이날이라고 조카가 쳐들어 올 예정이라...^^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달에게 소근~소근~ 하시면서요.

달사르 2013-05-09 23:45   좋아요 0 | URL
토요일 오후에 시장을 나갔더랬어요. 중간에 스포츠 매장을 들러 운동용 모자를 샀는데 아글쎄..시장통에 그와 꼭같은 모자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가격도 엄청 싸지 뭐에요. 십분의 일도 더 싼 가격에..내 과소비를 반성했지요.ㅠ.ㅠ
반성을 하고 나니 입이 궁금해지더라구요? 근데 마침 인근에 건어물 상회가 있길래 말린 홍합을 한 봉지 사서 질겅질겅 씹으면서 두리번두리번, 시장구경 했어요. 아직 소설 속 핏기가 도는 시장의 풍경은 아니어서 좀더 기다리면서 시장 구경 더 할랬는데, 손에 든 짐이 너무 무거워 그냥 집에 돌아왔지요.

눈으로 어떤 풍경을 보고 나서 새삼 감회에 젖는 걸 '서정'이라 한다면,
소설 속에서 읽은 어떤 장면, 어떤 문장이 실지 현실의 풍경에서 불러일으키기가 된다면, 이건 무어라고 불러야하나..궁금해지는군요.


김성중...궁금해서 뒤적뒤적거리다 사진을 보고는 깜놀했습니다.ㅠ.ㅠ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는데..여자더군요.. 문체를 봐서는 분명 남자였는데..ㅠ.ㅠ

<개그맨>은 책표지부터 멋지네요. 저도 나중에 읽어볼게요. 우리 비슷한 시기에 김성중 글, 읽어봐요. ^^

넵! 지금도 밤이네요. 살짝 비가 흩날려서 아주 운치있고 좋아요. 오늘 저녁엔 대금을 하도 불어서 목구멍이 아프네요. 굿나잇 인사는 소근소근.. ^^

탄하 2013-05-11 00:22   좋아요 0 | URL
반성 뒤에 입이 궁금해지다..하하하...이 밤중에 혼자 웃고 있어요.^O^
반성해서 착해요, 하고 상주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상기'라는 말 밖에 안 떠오르네요.
어쩌면 이런건 이론에서 뭐라뭐라 논했을 법도 한데...

허걱, 저두요..저두 남잔줄 알았다가 여자인걸 알고는 깜놀.
하지만 실제 사진을 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리고...저, <개그맨> 샀어요. 힝~!


제가 하도 불어 본 것은 '풍선'밖에 없어서 악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목구멍까지 아픈가요? 음, 저는 입술과 가슴이 아프던데, 아마 풍선하고는 다르겠죠?
언제 연주 한 번 들려주세요. 주말 아침에 들으면 세상이 다 평온할 같습니다.
아..내일 주말이네요, 주말...달사르님도 편히 쉬세요.

달사르 2013-05-11 22:45   좋아요 0 | URL
네. ㅎㅎ 상주는 의미.ㅋ
그 홍합이 여직 남아있네요. 방금 배 고파서 먹다 남은 라면이 있길래 홍합 넣고 팽이버섯 넣고 끓여봤어요. 불어터진 라면이라도 국물맛은 끝내주는데요? 아..근데..건홍합은 국에 넣는게 아닌가봐요. 짬뽕에 들어가는 홍합맛이 전혀 안 나요.ㅠ.ㅠ 홍합을 불려서 넣어야 되는 건지, 건홍합은 아닌건지..ㅠ.ㅠ 20개나 넣었는데 10개 먹고는 도저히 못 먹겠어서 버렸어요.ㅠ.ㅠ

지금은 점심 때 먹다 남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댓글 달고 있어요. 제가 음식 재활용을 잘하지여? 헤헤

아. 맞다. '상기'
그 단어가 있었군요.
'서정의 상기'
멋지다~

옷. <개그맨> 샀어요? 음..나도 빨랑 사야겠네요?

ㅎㅎㅎㅎ. 지금 목구멍이 아픈 상황이라서 더 그런거 같애요. 몇 달 째..ㅠ.ㅠ 나중에 목이 안아플 때 많이 불어보고 목구멍이 아픈지 안아픈지 말씀드릴께요. 한 곡만 완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어도 대금 들고다니면서 자랑질할 듯요. 하하하. 그나저나 요새 엘 콘도 파사, 연습하는데요. 물론 저는 여전히 소리가 안 나지만요.ㅠ.ㅠ 다른 사람들 소리 들으니, 가락이 정말 좋군요. 캬..
 

 

 

 

 

 

 

 

 

 

 

 

 

 

 

 

지금도 가끔 꿈에 그집이 나타난다. 무의식의 세계에 나타나는 집의 의미가 안식이거나 공포라면 그집은 어디에 속할까. 내가  드라마 속 수애처럼 치매에 걸린다면 난 아마 그집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집은 고향을 떠나 혼자 내 몸을 뉘인 첫 집이었다.

 

집은 1층의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주인 할머니 내외는 옆집의 이층 양옥집에 기거하셨고, 내가 세들어 사는 집엔 세 가구가  살았다. 초록색 양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방 3칸의 안채가 있고 오른쪽으로 문간방이, 뒷쪽 정면으로 부엌 딸린 작은 방(내 방)이 보인다.  마당은 시멘트를 거칠게 발라 아이들이 뛰어놀기는 위험했으며 오른쪽 문간방과 부엌이 있는 작은 방 사이에는 수돗가가 있었다. 수돗가를 돌아가면 계단이 나오는데 올라가면 작은 옥상이 있다. 옥상엔 장대 두 개를 연결한 빨랫줄이 중앙에 있으며 햇볕이 잘 드는 쪽엔 키작은 선인장들이 일렬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빨래는 잘 익은 대추 처럼 사시사철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나는 빨래를 핑계로 종종 옥상에 앉아 있었는데,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늦은 오후에 시원한 바람을 맞아가며 보는 하늘의 수채화는 매번 넋을 잃고 봤다.

 

안채에는 4인 가족이 살았는데 비쩍 마르고 강퍅한 아저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술에 취한 날엔 아저씨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키도 크고 덩치도 있는데다 양볼에 욕심보 마저 붙어 있어 인상은 좋지 않았으나 기분이 좋을 때면 내게 세탁기의 탈수 정도는 허락했다. 아이들은 영악해서 부모의 부부싸움 때는 쥐죽은 듯 있었으며 대개는 둘이 놀았다. 동네에 또래들이 많았으나 집에 또래들이 놀러오지는 않았다. 간혹 부부싸움이 지나쳐 경찰차가 오고 경찰이 올 때면 어른들은 사이렌 소리에 마실을 나왔고, 동네 아이들은 경광등 불빛에 홀려 경찰차를 둘러쌌다.오른쪽 문간방에는 직장을 다니는 젊은 언니 뻘 아가씨가 살았고 얼굴은 한 달에 한 번 보는게 고작이었다. 나는 학교 근처에 내 방이 생긴 것만으로 좋았다. 2번이나 버스를 갈아타며 다니던 이전 집은 같이 살던 친언니가 졸업하면서 나올 수 있었고 나는 홀가분하게 혼자서 학교 근처의 방을 구해 마음껏 뒹굴거렸다. 혼자 사는 첫 집이어서 무서움 보다는 설레임이 더 컸다.  

 

새로 터전을 잡은 내방에 적응할 무렵, 예비 2학년으로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엠티를 몇 일 갔다왔다. 땀에 절은 옷가지 등으로 눅눅해진 가방을 메고 도착하자마자 씻고 퍼져 잘 생각 뿐이던 내게 집 대문 한 켠에 우뚝 솟은 장대가 눈에 들어왔다. 장대에는 이파리가 조금 나 있었다. 장대로 빨래줄 다이를 만들려나보다.  고함을 많이 질러 쉬어터진 목이 아파 마당 한 켠 수돗가에서 물을 틀어 한 모금 먹고는 내 방문을 열어 바로 취침했다. 코를 골며 잠에 취해 열 몇 시간을 꼬박 잔 뒤, 다음날 오후 느즈막이 일어나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 대문에는 여전히 장대가 있었다.

 

 

 

 

달세를 드리기 위해 만난 주인할머니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평소와 달리 머뭇거렸다.

"계속 계약할 거야? 문간방 아가씨는 이번 달에 나간다고 하네. 그래. 잠자기는 괜찮아?"

"네? 왜요? 참, 할머니. 우리집 현관에 왠 장대가 계속 꽂혀있어요. 빨랫줄 다이를 새로 만들려나본데 아저씨가 안 도와주나봐요."

"그게..간판인데..그러니까..안채 여자가 무당이 되었다는구먼. 그참..전세기간이 많이 남아서 내보낼 수도 없고. 하필이면 전세계약을 새로 하자 무당이 될 게 뭐람. 이거..집값 떨어질까봐 걱정이구먼."

"네? 안채 아주머니가 무당이 되었다구요?"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네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싸움 소리가 나던 집이 요즘 들어 무척 조용했고, 아이들도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아주머니 이마에 못보던 점이 하나 보여서, 원래 있던 점을 내가 뒤늦게 발견한 건지 점을 심은 건지 헷갈렸는데 그럼 그 이마 점도..

"그래. 붙인거야. 무당의 증표지."

주인할머니의 말밥은 신난 것과 짜증난 것이 섞여 있었다. 나는 괜히 험구가가 된 듯해 말밥을 이어주기 싫어서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지금은..괜찮아요. 다시 이사하기도 힘들고, 뭐 이대로 좀더 있어볼게요."

 

 

 

느른하게 잠을 청하던 오후였다. 잠결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오고 있어?"

"그래. 지금 ...으니..조금만 더.. "

"어디까지.. 왔어?"

 

갑자기 잠이 확 깼다.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다. 애경이 소리. 술에 취한 애경이 소리다. 애경이는 술에 취하면 귀여워진다. 술이 조금더 취하면 운다. 울다가 술이 떡이 되면 아기 목소리로 바뀐다. 나는 애경이랑 술을 먹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른이 내는 아기 목소리는 뭐랄까 해소가 잔뜩 낀 노인네가 가래를 밭지 않으려고 할 때 내는 소리와 같달까. 쇠를 가는 소리와 같달까. 그 어색하고 불편한 목소리는 신경줄을 팽팽하게 만들어 그만 술맛이 떨어지는 것이다. 애경이 남친 병길이는 이런 애경이도 좋다고 한다. 나라면 도망갈 터인데. 하긴 나라면 병길이도 도망갈 녀석이다. 병길이는 신장이 안좋아 신장투석을 한다. 어마어마한 보험료를 감당하지 못해 병길이는 집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개인 세대다. 병길이는 요즘 들어 자주 신장투석을 하러 간다. 병길이는 얼굴이 검다. 병길이는 애경이가 술이 취해 애기 소리를 내도 그저 좋고, 애경이는 병길이 배가 자꾸 부어도 배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둘은 바보다. 둘다 바보다. 그래서 누구보다 이쁜 커플이다.

 

나는 애경이가 술에 취해 나를 보러 왔나 싶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애경이가 내 집을 어찌 알고. 학교에 무슨 일이 있나.

계속 말소리가 들린다.

"보이니?"

"까까..까까가 먹고 싶엉."

 

뭐야. 이건 애경이 소리가 아닌데?

분위기가 수상해 기척을 내지 않고 방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마당엔 아무도 없었고 맞은편 안채 마루에 아주머니 두 분이 앉아 계셨다. 둘다 머리게 고깔을 썼으며 안채 아주머니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연신 손가락질을 해대는게 뭐가 보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자세히 보니 쭈그랑 할머니였는데  앉은다리 옆으로 북을 하나 가지고 있었고 북채로 북을 연신 치고 있었다. 두둥 두둥. 북소리는 작았지만 낮은 심장소리처럼 내 피를 자극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계속 훔쳐 보았다.

 

"앙앙. 까까 줘. 까까 먹고 싶어."

"여깃네. 여기 까까 있다. 까까 먹자"

"냠냠. 냠냠. 까까 더줘"

....

꺄르르 꺄르르

 

안채 아주머니 속 아이는 실컷 먹고 실컷 놀다 갔다. 안채 아주머니 목소리가 원래로 돌아왔다.

"언제 집에서 죽은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입니다."

"아이고. 맞아요. 우리 신랑 먼 친척 중에 어려서 죽은 아이가 있어요."

"동자신이 무난하고 좋아요. 아이는 잘 삐치니 잘해줘야 합니다. 대신 바로바로 말을 해주니 그것은 좋지요."

 

그러니까 무당 수업 중이었던 것이다. 접신을 하는 법과 신이 들어왔을 때 신과 소통하는 법, 신을 어루는 법 등에 대한 수업.

그러나 내게는 개뿔. 거짓부렁 수업이었다. 접신이 저렇게 허투루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내 눈엔 암것두 안 보이더만. 저건 분명 오소리 귀신일 거야. 사람 귀신 아니야.

 

문간방은 한달이 지나도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당이 무서운지 무당이 사는 집이 무서운지. 학교에 가면 학과 친구들이나 동아리방 선배들이 자꾸 이사가라고 말을 한다. 그런 집에서 어떻게 살아. 그러나 원래 내가 살던 곳을 타의로 이사한다는 게 싫었고 무엇보다 귀찮았다. 그집은 빨래 널기가 아주 좋았다. 아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조금 외양이 바뀌었다고 안면을 바꾸고 무서워요, 도망가는 것은 내게는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겁이 전혀 나지 않았다. 미간에 빨간 점을 붙이든 눈매가 매서워지든 내가 알던 안채 아주머니 그대로인데.

 

 

 

 

주말에 고향집을 다녀와 반찬을 잔뜩 든 무거운 양팔을 낑낑대며 집 대문을 들어섰다. 이상한 향이 났다. 문간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누가 새로 이사를 들어왔나? 방문이 열려 있었고 나는 슬쩍 봤는데 방안엔 부처를 모셔놨고 제단이 있었고 향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상한 향의 정체는 향불이었다. 안채 아주머니가 견습을 드디어 마치고 샵을 차린 것이다.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손님이 많겠지. 그러나 학교를 오가며 봐도 손님 꼬라지는 보이지 않았다. 홍보가 덜 되었나. 이 동네는 점을 잘 보지 않나. 내가 들락거리는 시간대가 맞지 않나. 들락거리는 시간대를 바꿔 보았다. 아주머니가 용돈벌이라도 해야될텐데. 나라도 봐주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내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다. 늘 아프던 아주머니가 이제 더이상 아프지 않고, 시끄럽던 부부싸움도 더이상은 하지 않으니, 아주머니에게는 신내림이 딱히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그뒤로 무당을 보면 겁이 나지 않는다. 왠지 내 미래를 훔쳐 볼 것 같고, 내가 품은 나쁜 마음을 알아챌 것 같은 무당이었는데, 무당 견습을 본 뒤로는 어지간히 큰 무당이 아닌 고만고만한 무당들은 샵을 연 가게주인 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무당아줌마. 우리, 같은 상인으로써 작금의 불경기에 대해 이야기 한 번 해보자구요.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3-04-2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옛날에 꿈을 꿨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오더니 화를 내는 겁니다.
왜 밥상을 차리지 않았냐고 말이죠. 호통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꿈에 어머니가 밥상을 차렸는데 그 사람이 밥을 먹으려다가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는 겁니다.
그러더니 혼잣말을 하더라고요
" 어, 이 집이 아니네... "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더니 바로 옆집으로 가더이다.

꿈에서 깨어서 다음날 옆집에 물어볼려다가 만약에 진짜 그 집이 그날 제사가 있었다면 더 무서웠을 것 같아서
그냥 묻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달사르 2013-04-29 13:18   좋아요 0 | URL
어..
무서운 꿈이네요!

가끔은 꿈이 실제보다 더 현실적일 때가 있더라구요. 그런 실재감각에서 돌아와 꿈에서 깨어보면, 한동안 멍하고 그렇더라구요. 곰발님 꿈꾸고 나서 놀라셨겠어요. 무슨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그런 꿈인데 말이죠.
그나저나 오늘처럼 부슬부슬 비 내리는 날에 이런 귀신 이야기 하면서 전 부쳐 먹으면 딱일 것 같아요.

탄하 2013-05-0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예전에 말씀하셨던 신비스런 경험 중 하나인가요?
제겐 신비라기보다는 섬찟에 가깝지만요.^^

저는 이런 거 무.서.워요.
지금까지 무당집에 가본 적도 없고, 점집에도 가본 적 없고...
특히 가위에 크게 눌린 적이 몇 번 있는데 그 이후로는 더 싫어요.ㅠ.ㅠ
웬지 그쪽 귀신이 저한테 옮아올까봐.(무슨 병도 아니구..ㅎ)

김성중의 단편이 어느 하숙집 이야기인가요?
제 생각엔 김성중 작가가 달사르님 이야기에 오마쥬를 써 주셔야 할 듯.^^

달사르 2013-05-09 23:5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신비스런 경험은 좀더 나이가 들어서였구요. 저건 걍 선무당 구라를 구경한거죠. ㅎㅎ
저는 섬찟도 아니었어요. 그냥 웃기네..정도.
저 장면을 안봤으면 무서웠을텐데요. 무슨 만담하듯이 두 여편네가 거실에 앉아서 뭐가 보이네. 뭐가 돌아다니에. 하면서 목소리로 억지로 쥐어짜서 일부러 애기 목소리를 내니까 영~ 감흥이 안 생기더라구요. 저 여편네들은 연기학원을 더 다녀야돼. 이런 생각? ㅎㅎ
음..그러니까 생계형 무당이랄까..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신내림이랄까..

저도 무당집 가본 적 없어요. 무당집에 살아본 적은 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아...가본 적 있다!
무당아지매가 단골인데 약 갖다드리러 간 적 있어요. 울집 앞에 살아서 퇴근길에 약배달을. ㅎㅎㅎ
근데 무당아지매가 없어서 방문 열어서 안에다 놓고 왔는데요. 불상 모셔놓은 거랑 향불이랑 스윽 훑어봤다는. 히히.

넵! 하숙집(자취집)이야기에요. 우연히 시장통 어느 건물에 자취를 했는데, 어느날 알고보니 주인할머니 등이 어떤 사이비 종교를 믿고 있어서 깜놀했다는 이야기. 근데 주인공이 저처럼 그냥 눌러살아요. 무섭다고 도망가지 않고 귀찮다고 눌러살아요. ㅋㅋㅋㅋ 저처럼 말이죠.

순간, 아... 이 글.. 혹시 내가 썼나? 내 사연이랑 왜이렇게 비슷하지? 했더랬어요. ㅎㅎㅎㅎ

탄하 2013-05-11 00:31   좋아요 0 | URL
에이, 단골 약배달을 갔음 '내일의 운세' 한 소절 정도는 무료로 제공해주셔야 하는 건데..^^
아..안 계셨다고 그랬죠? 무당아지매가 계셨다면 분명 한 말씀 해주셨을 것 같아요.

와, 진짜 '내 얘긴가' 하셨겠어요.
하숙집 얘기겠거니, 했는데 이정도로 흡사할 줄이야!
저는 옛날에 편혜영의 단편에서 아주 초큼, 한 문장 정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본 적이 있어요.
커피숍에 있는 나무들(화분)이 싫다..뭐, 이런 얘기였는데, 제가 친구한테 그런 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혹시 그 때 편혜영 작가가 옆자리에 있었나? 생각했죠.ㅋㅋ

달사르 2013-05-11 22:5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주인할머니 집에 노인이 총 세 명인데요. 한 명은 사이비 종교 교주, 한 명은 신도, 한 명은 배교자에요. 근데 셋다 유일한 한 명이지요. 그러니까 저 사이비 종교는 이제 망해서 교주가 한 명, 신도가 한 명, 배교자가 한 명뿐인데 셋이 한 집에 살아요.

어느 종교나 그렇겠지만 무슨 염불 같은 것도 외울 테고, 향불 같은 것도 피울 테고, 신주단지나 부처나 하여간 어떤 종류의 상도 모셔놓을 거고,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걸어서 출근하기 길 중에요. 약간 허름한 동네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 중간에 허름한 가정집에 '무슨 무슨 교회'라는 간판이 있어요. 십자가도 안 보이고 암것도 없는데 벌써 몇 년째 간판이 있어요. 그곳도 그런 사이비 단체인가? 란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런 사이비 종교가 시골에는 의외로 곳곳에 많아요.

물론 정식 교회, 큰 교회, 큰 절 등이 사이비 간판을 안 달았다고 해서 정도를 걷는다, 라고 생각지는 않지만요. 사이비 종교를 무조건 터부시하고 싶은 생각도 없긴 해요. 어떤 종교이든 간에 저 사람들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런 종교를 믿게 되었을까..란 생각이지요.

ㅎㅎㅎㅎ 분홍신님도 비슷한 경험 하셨군요. 커피숍에 있는 나무들이라..커피숍 한 가운데 아주 큰 나무 있는 건 조금 무섭기까지 하던데요. 커피숍이 삼층짜리였는데 가운데를 통으로 터서요. 그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높이 솟아있더라구요. 그 나무는 가지를 얼마나 많이 잃었을까요. 옆으로 뻗지 못하게 해마다 잘렸을텐데..
분홍신님은 작은 화분도 싫어하시는 거지요?
음..이유를 알 듯 모를 듯. ^^

탄하 2013-05-1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베란다나 길가, 야외에 있는 나무, 식물들은 좋은데, 그게 실내로 들어와 있음 썩 반갑지 않아요. 이상하죠?
어떤 면에선 당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커피숍(까페) 인테리어의 어줍지않음과 그걸 무마시키려는 듯한 '장신구'로서의 용도..뭐,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그때는 왜..테이블 간의 프라이버시, 소음의 분산을 위해 군데군데 사람 눈높이~키높이의 화분을 두었잖아요? 저는 그게 다른 장식물이나 구조, 혹은 더 넓은 테이블 간격에 의해 소화되길 바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전원주택도 좋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된지 5년 남짓하니까, 근본적으로 자연친화력이 떨어지는 1인인지도 모르구요. 하여간 살면서 동물을 키워본 적은 있어도 제 손으로 화분을 키워본 적은 없네요. 8살때 학교 숙제로 채송화 심기 한 것을 제외하면..^^


앗!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이닷! 저두 저 책 사려고 벼르고벼르고벼르는 중입니다. 냉큼 사봤자 즉시 읽지 않을거라 한 템포 늦췄더니 지금까지 벼르고만 있네요. 에잇! 또 맘에 불을 지펴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