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산 건 순전 김성중 때문이다. 계간지로 받아 보는 문학 잡지에서 김성중의 '게발 선인장' 소개글을 읽었는데 제목이 너무 궁금했다. 뒤늦게 생각하니 인터넷에 접속해서 검색만 하면 '게발 선인장'이 뭔지 알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게발 선인장이 실재하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외계의 혹성 여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처럼 게발 선인장을 여관 이름이거나 기타 생소한 종류의 것일거라 지레짐작한 탓이다.

 

소설은 도입부 부터 마음에 들었다. 나는 불현듯 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김성중의 문장들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에서 중요시 하는 부분이 문장이라는 걸 인정이라도 하듯이.

 

몇 개의 단어를 골랐다. 내가 몰랐던 단어들. 내가 잘 쓰지 않는 단어들. 의미는 알고 있지만 정확한 용어를 모르고 있던 단어들이다. 적재적소의 자리에 들어앉은 단어들과 그 단어들로 문장의 꽃밭을 만든 듯한 글을 보고 있노라니, 새상 김성중의 저력이 느껴진다.

 

 

 

단어; 느른하게; 맥이 풀리거나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다.

        힘이 없이 부드럽다.

# 개가 느른하게 꼬리를 흔든다

# 최소한의 가게가 문을 여는 오전의 시장이 파리하고 창백한 안색이라면,

느른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들이 게으른 슬리퍼 소리를 내는 정오의 시장은 점점 살집이 붙고 핏기가 도는 모습이다. 해가 기울면 거리는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며 변덕스러운 흥분 상태가 된다. 나는 창문을 열어놓고 골목의 기이하고 폭발적인 활력에 전염되면서 장사꾼과 손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인간의 소리로 지어진 허공의 집 위에 누워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단어; 말밥; 좋지 못한 이야기의 대상

        말밥에 얹다; 좋지 아니한 화제의 대상으로 삼다

        말밥에 오르다; 좋지 아니한 화제의 대상으로 되다

# 선배는 소주를 털어 놓고 이내 다른 사람을 말밥에 얹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를 수 없었다.(...)

 그대로 살자니 무당 집에 세 든 것처럼 찝찝하고, 나가자니 당장 이 돈에 그만한 방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적이 심란했다. 다음 날 부러 1층 식당에서 밥을 먹은 건 이 모든 게 뜬소문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싶어서였다.

 

 

 

단어; 느지막이; 시간이나 기한이 매우 늦게

# 한마디로 혈연과 아무 상관없는 노인 셋이 사는 집에 내가 들어온 것이다. 훗날 할머니는 '모든 것이 일주님이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했지만 나는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운명을 느꼈다. 불가해한 것에 유독 끌리는 내 기질은 이 시절에 빚진 탓이 크다.

느지막이 일어나 볕 잘 드는 거실을 차지한 할아버지는 수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도무지 하는 일이 없었다. 비대한 몸에 풍성한 텁석나룻,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노인은 이상야릇한 눈빛을 하고 있어 마주 보기가 꺼림칙한 인상이었다.

 

 

 

단어; 험구가;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뜯거나 험상궂은 욕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 그에 비해 진천 이모는 동네의 유명한 험구가로 친구도 적도 많았다. 이모의 귓속으로 들어온 소문은 그 뚱뚱한 육체 안에서 한껏 부풀었고, 밖으로 나올 때는 종류와 상관없이 얼마간의 음담이 섞여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이모가 뿜어내는 부정적인 영향력 아래 놓였고, 이모는 그런 식으로 자기 처지에 권력을 부여해 시장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누렸다.

 

 

 

단어; 경광등; 긴급함을 알리기 위해 차의 위쪽에 다는 붉은 빛을 발하는 등

# 친구들과 헤어져 늦게 집에 돌아오던 어느 밤, 흥미로운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고주망태로 취한 노인이 자정 넘어 순찰차에 실려 온 것이다. 경광등을 받고 선 할머니는 밤의 고양이들이 빛에 얼어붙는 것처럼 잔뜩 겁먹은 모습이었다. 종일 집귀신으로 살던 노인은 누구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할머니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김성중의 글은 낚시그물 같다.

 

사방이 다 보이지만 투명한 막이 있어 그 막 너머로는 나갈 수 없는, 완벽하지만 갑갑한 타입의 글이 아니다.

치어는 다 내보내주고, 알 굵은 놈만 잡는 성긴 그물 같은 그의 글은, 그래서 숨쉴 수 있는 여지가 곳곳에 있다.

 

그래서 나 같은 게으른 사람도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는 경우는 예전의 나와 만나게 해줄 때,  혹은 드물지만 미래의 나를 느끼게 해줄 때다.

 

 

 

김성중의 글을 읽고 과거의 나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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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3-05-03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지난번과 같은 패턴이네요.
1. 페이퍼를 쓰려고 작심한다.
2. 괜히 글 쓰기 전에 서재에 들어와 이웃님들 글을 본다.
3. 글 읽고 댓글 달다가 그날 본 책에서 삘받아 '국내도서'로 눈길을 옮긴다.
4. 아무것도 못 쓰고 그냥 로그인한다. 구매 버튼 안 누르면 그나마 다행.ㅋㅋㅋ

오늘도, 제가 그동안 눈여겨보던 <개그맨>의 김성중이라 또 그 책을 흘깃거리다 갈 것 같습니다.

'(...)오전의 시장이 파리하고 창백한 안색이라면,
(...)정오의 시장은 점점 살집이 붙고 핏기가 도는 모습이다.'
-> 요 부분도 딱 꽂혔어요. 정말 그렇네요, 정오의 시장..핏기가 도는 모습.

전에 <금빛날개>도 슬쩍 읽어보았어요. 너무 궁금해서 말이죠.
달랑 하나만 읽고 덮기 뭐해서 표제작인 <너 없는 그 자리>까지 읽었는데, 참 좋더군요.
페이퍼에 이 책에 대해서도 쓰려고 했는데, 음..지금부터 부지런히 끄적이면
내일쯤은 올릴 수 있을까? 지금도 좀 졸렵거든요.
하지만..기필코 이번 토요일에는 뭔가 올려야 해요.
일요일은 어린이날이라고 조카가 쳐들어 올 예정이라...^^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달에게 소근~소근~ 하시면서요.

달사르 2013-05-09 23:45   좋아요 0 | URL
토요일 오후에 시장을 나갔더랬어요. 중간에 스포츠 매장을 들러 운동용 모자를 샀는데 아글쎄..시장통에 그와 꼭같은 모자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가격도 엄청 싸지 뭐에요. 십분의 일도 더 싼 가격에..내 과소비를 반성했지요.ㅠ.ㅠ
반성을 하고 나니 입이 궁금해지더라구요? 근데 마침 인근에 건어물 상회가 있길래 말린 홍합을 한 봉지 사서 질겅질겅 씹으면서 두리번두리번, 시장구경 했어요. 아직 소설 속 핏기가 도는 시장의 풍경은 아니어서 좀더 기다리면서 시장 구경 더 할랬는데, 손에 든 짐이 너무 무거워 그냥 집에 돌아왔지요.

눈으로 어떤 풍경을 보고 나서 새삼 감회에 젖는 걸 '서정'이라 한다면,
소설 속에서 읽은 어떤 장면, 어떤 문장이 실지 현실의 풍경에서 불러일으키기가 된다면, 이건 무어라고 불러야하나..궁금해지는군요.


김성중...궁금해서 뒤적뒤적거리다 사진을 보고는 깜놀했습니다.ㅠ.ㅠ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는데..여자더군요.. 문체를 봐서는 분명 남자였는데..ㅠ.ㅠ

<개그맨>은 책표지부터 멋지네요. 저도 나중에 읽어볼게요. 우리 비슷한 시기에 김성중 글, 읽어봐요. ^^

넵! 지금도 밤이네요. 살짝 비가 흩날려서 아주 운치있고 좋아요. 오늘 저녁엔 대금을 하도 불어서 목구멍이 아프네요. 굿나잇 인사는 소근소근.. ^^

탄하 2013-05-11 00:22   좋아요 0 | URL
반성 뒤에 입이 궁금해지다..하하하...이 밤중에 혼자 웃고 있어요.^O^
반성해서 착해요, 하고 상주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상기'라는 말 밖에 안 떠오르네요.
어쩌면 이런건 이론에서 뭐라뭐라 논했을 법도 한데...

허걱, 저두요..저두 남잔줄 알았다가 여자인걸 알고는 깜놀.
하지만 실제 사진을 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리고...저, <개그맨> 샀어요. 힝~!


제가 하도 불어 본 것은 '풍선'밖에 없어서 악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목구멍까지 아픈가요? 음, 저는 입술과 가슴이 아프던데, 아마 풍선하고는 다르겠죠?
언제 연주 한 번 들려주세요. 주말 아침에 들으면 세상이 다 평온할 같습니다.
아..내일 주말이네요, 주말...달사르님도 편히 쉬세요.

달사르 2013-05-11 22:45   좋아요 0 | URL
네. ㅎㅎ 상주는 의미.ㅋ
그 홍합이 여직 남아있네요. 방금 배 고파서 먹다 남은 라면이 있길래 홍합 넣고 팽이버섯 넣고 끓여봤어요. 불어터진 라면이라도 국물맛은 끝내주는데요? 아..근데..건홍합은 국에 넣는게 아닌가봐요. 짬뽕에 들어가는 홍합맛이 전혀 안 나요.ㅠ.ㅠ 홍합을 불려서 넣어야 되는 건지, 건홍합은 아닌건지..ㅠ.ㅠ 20개나 넣었는데 10개 먹고는 도저히 못 먹겠어서 버렸어요.ㅠ.ㅠ

지금은 점심 때 먹다 남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댓글 달고 있어요. 제가 음식 재활용을 잘하지여? 헤헤

아. 맞다. '상기'
그 단어가 있었군요.
'서정의 상기'
멋지다~

옷. <개그맨> 샀어요? 음..나도 빨랑 사야겠네요?

ㅎㅎㅎㅎ. 지금 목구멍이 아픈 상황이라서 더 그런거 같애요. 몇 달 째..ㅠ.ㅠ 나중에 목이 안아플 때 많이 불어보고 목구멍이 아픈지 안아픈지 말씀드릴께요. 한 곡만 완주할 수 있는 실력이 되어도 대금 들고다니면서 자랑질할 듯요. 하하하. 그나저나 요새 엘 콘도 파사, 연습하는데요. 물론 저는 여전히 소리가 안 나지만요.ㅠ.ㅠ 다른 사람들 소리 들으니, 가락이 정말 좋군요.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