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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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작가는 글을 쓸 때 두려움을 느낀다면서, ‘잘 쓰고 있나’ ‘인물이 윤리적인가’ ‘고증이 확실한가와 같은 자기 검열을 자주 한다고 고백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런 인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불편한 것을 애써 감추는 건 기만이고, 시대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이런 질문들을 오래 논했다는 작가의 말이 맴돌았다.(시사In) 인물들과 이야기에서 작가의 고민에 공감되는 지점들이 있다. 나 역시 다 읽고 나서도 그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리뷰를 할 방향을 찾지 못했었다.

 

모 배우의 한 줄 평이 카피라이팅 슬로건(copywriting slogan)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과장된 경향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둘째가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읽고 소설 넘 신박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다 읽은 책을 소장하기 위해 구입하는 것을 보고도 아이의 취향이겠거니 하고 읽어야 할 책 순서에서 뒤로 미뤄 놨었다. 막내 아이도 읽고 좋았다고 하고, 지인들도 좋은 평가를 하고, 그제서야 책을 옆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자는 의견이 나오고서야 읽기 시작했다. 확 빨려들어가고 신박한 느낌은 들었다. 계속해서 긴장시키는 부분도 있었다. 독서모임 회원들은 만난 순간부터 정말 좋았다고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나는 마음이 불편하지? 방어벽을 쌓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인물들이 주는 불편함이 너무 컸다. 선과 악, 윤리적이고 비윤리적인 문제는 아니다. 인물들이 경계에서 줄을 타고 있어서, 사유라는 게 없어서, 작가가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하고 있는 듯해서 무서웠다. 작가는 중립적인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문제를 던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짧은 문장 안에서도 작가의 철학은 묻어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독서모임에서 회원들과 토론하면서 나는 철학 없이 재미로 읽는다면 차라리 영화를 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미디어와 텍스트는 어떻게 다를까? 나의 경우 독자의 사유에는 텍스트가 더 선명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는 기이한 상상인데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주제는 무겁다. 내 경우, 망막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는 사라지거나 그 세계 안에 머물거나 인상적인 몇 장면을 남기거나 하는 정도로 생각을 만든다. 반면, 텍스트 한 단어 한 문장이 그대로 들어와 각인되고 비평과 수용을 통해 사유가 된다. 그래서 더 선명하다.

 

읽은 후 몇 달 동안 작가의 펜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일까 고민 했다. 권력에 복무하기보다는 항거하며 시대를 바꾸어나갈 수 있는 작은 지점을 찾아가는 게 문학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기억이고, 그것을 오답 삼아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나라고 한 작가의 말에서 조금은 안심이 됐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에는 마음이 쿵 내려앉는 불안을 겪는다.

 

등장인물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들의 경향성은 우리 시대정신이지 않을까? 특히 혼모노에서 무당이 섬기는 할멈 신이 그 정신의 극단적 상징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의 내용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혼모노는 최근 내란과 그 배후 사건들과 관련하여 더욱 시의적이다.

 

혼모노(ほんもの)는 일본어로 진짜’, ‘진품을 뜻한다. 일본 문화에서 이 단어는 장인정신의 상징이다. “저 사람은 진짜 혼모노다라고 말하면, 그 분야에서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한편 집착적인 오타쿠를 뜻하는 은어로 쓰인다. 그렇게 '혼모노'는 진품에서 비정상으로, 찬사에서 조롱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가 오타쿠처럼 집착하며 욕망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길티 플레져’, 죄의식을 동반하는 즐거움일까? 죄의식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누군가를 추앙하는 팬클럽 회원들 각자에게 숨겨진 의도에 대한, 순수하지 못함에 대한 것일까? 누군가를 추앙하는 것, 진실이 무엇이든 무조건 믿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때문일까? 그들은 배타적 언어와 규칙들과 가식적인 대화와 가장된 호의로 의구심들을 덮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모인 가짜들이다. 그들은 마치 이빨과 발톱이 빠진 호랑이를 만지는 것과 같이, 진실이 아닌 허위의 대상을 추앙하는 아니 자신의 욕망을 추앙하는 사람들이다.

 

'구의 집'이라는 이름에는 누군가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감금과 고문을 위해 지어진 이 건물을 설계한 주인공은 구보승이지만, 이것을 정부로부터 의뢰받은 자는 그의 스승 여재화이다. 대학원생이던 구보승에게 설계를 맡기고, 그 설계대로 세워진 건물에 이름을 구의 집이라고 명명한 것은 자신의 죄와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다.


이 작품에서 구보승은 이 건축물 설계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그것이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의의를 부여한다. 재능도 의욕도 없어 보이던 대학원생 구보승이 뜻밖에 열정과 비상한 재능을 보이며 설계에 구현한 공간은 감금과 고문, 의도된 자백을 받아내기에 최적화된 건물이다. 구보승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 중 누가 혼모노이고 니세모노(가짜)일까?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남영동 대공 분실’의 빈틈없이 용도에 최적화된 정교한 설계가 담겨진 도면을 볼 수 있다이 건물은 한국의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고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왜 작가는 한 건축가의 설계가 아닌 그야말로 무기력한 무사유의 인간이 그를 대리하게 했을까? 그 유명한 건축가를 변명하는 듯 보여 오랫동안 고민했다. 두 사람 다 설계를 의뢰받는 순간부터 건물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정의나 인륜 같은 것에 무심한 채 순간의 욕망과 성취감에 충실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사회적 명성, 사회적 지위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범죄에 다른 사람을 가담시키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결론은 그가 끌어들인 사람이 한 명 두 명 백 명으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타인의 안위나 사회적 정의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위험하다. 그 극단적인 정신의 형태가 혼모노의 할멈 신이다. 박수무당30년 간 섬기던 신은 다른 신애기에게로 옮겨간다. 그 귀신 조차 자신의 이익을 따라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런 신에게 자신의 안위를 의탁하고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국가와 많은 사람들을 위해야 할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신당을 찾는 욕망이 낳을 결과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할지는 자명하다.

 

이것이 시대정신의 경향성이다.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인의 욕망만을 추구한다. 타자들 혹은 공동체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아니 그런 것들을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직관적인 죄의식만을 희미하게 갖고 있는 것 같다. 습관이 된 이런 경향은 죽음의 위험을 당한 혈육 앞에서도 자신의 자존심과 욕심을 우선순위에 놓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시류에 합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욕망만을 추구하고 이익만을 챙기는 것이 삶의 습관이 되고 경향이 된 존재가 개별자로서 혹은 집단을 이루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무섭고 두렵다. 그게 내가 되지 않으란 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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