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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 제4개역판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어문학사 / 2016년 7월
평점 :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소설이다. 곧바로 리뷰하기에도 벅차다. 결론은 의미들을 건져 올리기에는 나의 그물이 너무나 엉성하다는 것이다. 역사, 문학, 예술의 변주와 패러디로 가득한 소설에서 나의 엉성한 그물은 흩어진 몇 개의 파편만을 건져 올렸을 뿐이다. 맞춰지지 않는 조각들을 여기저기 벌려 놓고, 그 유물의 형태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고고학자,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전위 예술품 앞에 서있는 감상자의 당황스러움이 이런 것일까? 모더니즘의 열광으로 채워진 무의미한 소리의 불협화음과 뒤틀린 동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조이스는 스무 살 때 아내 노라와 함께 고국을 떠나 취리히, 로마, 파리, 트리에스테 등의 유럽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다. 더블린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취리히에 묻혔다. 반면 그의 모든 작품은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나 『더블린 사람들』에서는 더블린의 곳곳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는 작가의 기억을 읽게 된다. 특별히 『율리시스』는 작가가 더블린 시를 조감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한다. 더블린 시의 지도를 펼쳐놓고 인물들의 동선을 그리고 있는 작가의 지적작업을 떠올린다. 지금 어느 골목의 모퉁이를 돌고 있는 인물과 다리를 지나고 있는 블룸이 몇 분 후 어디쯤에서 조우하게 될지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 또한 각 인물들이 같은 시간에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그리는 동시성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기법이다. 제10장 「거리」에서 총독의 마차가 지나가며 그 시간 거리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한 사람씩 비추는 장면은 마치 몽타주 기법처럼 보인다.
조이스에게 더블린은 어둡고 무기력하고 타락한 곳이다. 그가 『더블린 사람들』을 쓸 때, 소설의 무대를 더블린으로 선정한 것은 이 도시야말로 ‘마비의 중심지’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제적 빈곤, 실패한 혁명, 절망적인 정치, 부패한 종교, 도덕적 해이의 상황 가운데 있는 더블린 사람들 사이에서 스티븐과 블룸 그리고 몰리가 있다.
스티븐 데덜러스는 이 ‘마비 상태’를 겪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 아닌가 한다. 스티븐의 의식은 그의 망모(亡母), 멀리건, 아일랜드 및 교회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 죽기 전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거절했던 죄의식, 익사에 대한 공포심, dogsbody라는 단어를 통한 자기 비하, 수탈당한 자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20대 청년이다. 그의 친구 멀리건은 찬탈자다. 마텔로 탑의 열쇠를 가져가고, 스티븐의 죄의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집어놓고, 그에게서 술값을 받아내는 찬탈자이다. 스티븐은 자신을 영국과 이탈리아인과 엉뚱한 짓을 요구하는 세 주인의 종놈이라고 말한다.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수탈한 영국과 부패한 카톨릭과 멀리건과 같은 주변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산파의 가방에 담겨있을지 모르는 죽은 아기와 실종된 익사체를 상상하는 그에게 바다는 죽음의 공포와 자신을 더블린에 가두는 장애로 보인다. 고개를 돌려 시야에 들어온, 대기를 뚫고 움직이는 세대박이 배의 높은 세 개의 돛대는 세 주인을 뜻한다. 영국(혹은 민족주의), 카톨릭, 그리고 주변 사람들. 그 배는 귀향하고 있다. 조이스가 더블린을 떠났어도 끊임없이 더블린으로 끌려가듯이, 그 세 주인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으나, 여전히 노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스티븐의 의식을 그리고 있다.
“그의 돛을 가름대에다 죄인 채, 귀향하며 조류를 거슬러 묵묵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척의 묵묵한 배.(42p)”
리오폴드 블룸은 유럽에서 건너온 루돌프 비러그(루돌프은 자신의 성을 블룸으로 개명)의 아들이다. 유태인 혈통을 지니고 있다. 가수인 아내 몰리의 외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허용하고 있다. 아들의 죽음 이후로 불능인 그는 몰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보일런이 집으로 찾아오는 시간을 피해 더블린 거리를 배회하고, 길에서 마주칠뻔한 보일런을 피한다. 그의 의식은 두 사람이 만나는 오후 4시에 집중되어 있다.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목욕을 하러 가던 그는 비누를 사고, 그 비누를 주머니 속에 넣고 그 감각을 통해 아내를 의식한다. 스티븐에게 물이 죽음과 공포의 이미지라면, 블룸에게 물은 성욕과 연결되는 이미지다. 바닷가에서 스티븐이 상상했던 익사체에서 떠올렸던 성기의 이미지는 블룸의 목욕탕 장면에서 재현된다. 죽은 시체와 살아있는 블룸 사이에 이미지를 연결시킴으로,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 같은 블룸을 의미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오줌 냄새나는 근사한 특유의 맛을 주는 양의 콩팥을 좋아하고, 그의 성적 욕망은 배변과 항상 함께 등장한다. 나보코프는 섹스라는 테마가 끊임없이 변소 테마와 뒤섞이는 지점에서 반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블룸이 다소 평범한 시민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평범한 시민이 끊임없이 생리적인 일만 생각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나보코프 문학강의』 503p) 끊임없이에 문제의식의 방점이 있다. 그의 의식은 왜 이렇게 흐르는 것일까?
민족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정체성을 질문 받는 블룸은 자신이 아일랜드인임을 강조한다. 유태인인 그는 아일랜드에 속하길 원했으나 거절당하고 있다. 한 인간의 비존재, 삶에서 마주치는 불행, 채울 수 없는 욕구, 외로움 등이 왜곡된 성도착증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그를 비웃는 민족주의자들의 부도덕성과 허구성을 풍자하고 있다. 주점으로부터 탈출하는 블룸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엘리야, 구세주로 해학적으로 표현하면서 조이스의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6월 16일 하루 동안의 블룸의 여행은 장례식장에서 공동묘지, 박물관, 도서관, 신문사, 주점, 더블린 거리 곳곳으로 이어진다. 제 15장의 「밤의 거리」 장면은 괴테 『파우스트』의 ‘발푸르기스의 밤’을 연상케 한다. 밤거리에서 술에 취한 스티븐을 만난 블룸은 스티븐을 보호하기 위해 쫓아가고, 역마차의 오두막에서 다시 사람들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상황에 대해 토론을 한다. 스티븐의 주장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그곳을 빠져나와 두 사람은 블룸의 집으로 향하면서 겉도는 대화를 한다. 냉담한 스티븐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블룸은 그 사이를 좁혀보려는 시도를 하지만, 블룸의 외로움은 그 대화에서 더욱 깊어지는 것만 같다.
천박한 보일런 보다는 아내의 지적인 부분을 채워줄 스티븐을 그녀에게 이어주려는 블룸의 생각은 우스꽝스럽고 비극적인 현재와 애처로운 미래를 지시하고 있다. 이제 그는 여행을 마쳤다. 누구와? 라는 질문에 “뱃사공 신바드 그리고 재단사 틴바드 그리고 간수(看守) 진바드 그리고 고래잡이 윈바드 그리고 열성사 닌바드……그리고 폐결핵 환자 찐바드(607p)”라고 답을 한다. 이것은 더블린의 범부(凡夫)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블룸의 자아들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신바드의 모험이라는 만화에서 한 장면이 생각이 났다. 신바드가 계속 복제되던…! 신바드는 율리시스를 닮은 주인공이다.
블룸의 아내 몰리에 관해서는 비판하고 싶은 지점이 많다. 조이스 또는 당대 작가들의 여성상이고 시대적 한계 안에서 성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조이스의 삶을 얼핏 보아도 조금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 몰리의 의식은 조이스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 장은 Yes라는 단어가 몰리의 말버릇처럼 들어가는데 그 빈도는 뒤로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Yes의 크레센도! 몰리가 조이스의 또 다른 자아로서 현실에 대한 긍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육체적 관계 이후에 오는 여성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긍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나는 작가를 비판할 수밖에 없다.
18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26만 단어가 넘고, 약 3만 개의 어휘가 실려 있다. 또한 각 장은 여러 가지의 문체로 쓰여져 있다. 단도직입적이고, 명료하고, 논리적이고, 느긋하기도 하고, 불완전하고, 빠르고, 변칙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의식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또한 패러디를 위해 신문 헤드라인 (2부 4장), 음악(2부 8장), 신비적인 익살극(2부, 12장), 교리문답식으로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3부 2장) 등의 문체가 등장한다. 기호 역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데, 그것을 다 알아내기에는 한 번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가장 유명한 기호는 17장 마지막의 구두점인데, 이전 번역과 다른 출판사의 번역에서는 누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Where)라는 질문에 보통 구두점보다는 큰 모양으로 찍혀있는 이 기호는 오랜 생각을 하게 한다. 오리너구리의 알?
청각적 기법은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주점을 향해 멀리서 다가오는 시각장애인 소년이 가까워지면서 지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더 크게 더 빈도가 높게 들린다. 시간에 집중하고 있는 블룸의 의식과 그로 인한 맥박을 느끼게 한다. 탁탁탁 소리와 맥박이 함께 크레센도 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목격된 비옷 입은 낯선 남자는 누구일까? 더블린 거리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메킨토시 입은 남자를 나보코프는 작가라고 추리한다. 마치 이탈리아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 한 구석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처럼,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등장한다.
“그런데, 저쪽 비옷 입은 홀쭉하게 보이는 녀석은 누구야? 글쎄 누군지 알고 싶군. 글쎄 돈을 몇 푼 주어서라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으면, 꿈에도 결코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녀석이 언제나 불쑥 나타나거든. (90p)”
글쎄, 나는 그저 정체모를 시선이란 생각도 든다. 익명의 시선, 그것은 존재에 가해지는 관습, 도덕, 전통의 시선이고 그것은 권력이다. 그의 존재 안에 새겨진 절대자의 시선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이스는 자신을 그려넣음으로 그것조차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자신을 둘러싼 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조이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더블린을 떠나는 것만이 구원이라 생각했던 그는 떠난 후에도 여전히 더블린을 맴돌고 있다(hovering). 그의 의식은 그 공간으로 사로잡혀 간다. 어머니의 신앙, 종교, 아버지를 파괴한 애국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외면했지만 그럼으로 외로웠고 고통스러웠던 그의 욕망의 한편은 그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일랜드를 떠나서도 더블린 거리를 배회하는 인물들을 그리는 조이스의 작품에서 더블린 거리 구석구석과 바닷가를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들고 걷는 조이스의 모습을 본다. 그는 진정한 산책자(플뢰나르) 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독해야 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