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치를 향한 발걸음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2011년에 나온 영화 고지전(The Front Line)’을 보면 휴전회담이 진행중이던 1952년에서 1953년 사이 38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던 남북한의 병사들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전을 한다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남북한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이러한 전투는 휴전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지속됐다. ‘반공포로 석방’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외쳤다한국전쟁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승만이 했던 또 다른 일은 바로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부통령 이시영, 이시영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동생이다. 그는 이회영과 더불어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였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6형제 중 한명인 이시영은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새 국가건설에 노력을 다했던 인물이었다물론 이승만의 견제는 점점 심해졌고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다결국 부통령 이시영은 1951년 5월 1일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하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이승만은 부통령의 존재를 고깝지 않게 여겼다그는 매사에 유아독존적이었다정부의 각종 행사장에서는 부통령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국정의 주요 정책 결정에 소외시키기 일쑤였다국회는 5월 17일 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하여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 끝에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74표를 얻은 이갑성을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김성수도 부통령직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1952년 5월 29일 폭탄적인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부산의 임시수도 정부청사,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사용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선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원래대로라면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지만이승만은 노회함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다거기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이렇게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신이 주도하는 당을 발족했다그 당이 바로 자유당이다당시 자유당은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는데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원외파는 이범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구도였다이승만은 이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자유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생각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28일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났다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한청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소위 이들은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 요구 등을 내건 이승만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하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관제데모는 결과적으로 반 이승만 정서를 고조시키는 역풍을 불러왔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동원한 헌병들은 대낮에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연행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하기 위해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그는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 전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최전선에서 인민군과 대치중이던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을 선포했다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했고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다음날인 5월 26일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로 향하던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몰고 가서 연행했다이게 바로 부산정치파동 사건이었다이런 상황까지 가자 이시영김창숙김성수장면 등 반이승만 야당원로들이 부산에서 이른바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불리는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그러나 6.25기념식상에서 전 의열단원 유시태와 김시현 등이 주도한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야권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해방 후 친일경찰 채용에 앞장섰던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경찰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으로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직선제로 실시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발췌개헌 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서 충직한 심복 노릇을 한 이범석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권력욕이 강한 이승만은 족청을 등에 업은 이범석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결국 이범석을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자파라도 세력이 커질 것 같으면 그 뿌리부터 자르는데 머뭇거림이 없는 노회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투표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사되면서 한국전쟁은 막을 내렸다하지만 한국전쟁의 종결은 국내 정치적으로 남한의 반공보수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만 미만이었던 한국군은 60만 대군으로 급격히 자라났고경찰력도 증강되어 반공안보체제를 강화했다그리고 반공이라는 체제의 가치는 국시로서의 지위로 더 강화되었고소위 사회주의 노선이나 민주사회주의 노선 할 거 없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색체를 보이면이단취급 받는 광적인 사회가 되었다.

 

1953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가 한국에서 실시되었다3대 총선은 2년 앞으로 다가온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이승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우선적으로 이승만은 국회에서 이범석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이승만은 먼저 대통령령을 발포하여 각종 청년단체를 불법화하였고자유당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이범석의 족청을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그러고 난 뒤 이승만은 헌법 속에 들어있는 의원내각제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가능하게 하는 다수의석을 차지하고자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을 통한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공고화 되기 시작하자 대한민국 국회는 점차 반이승만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했다해방 후 이승만과 한편에 섰던 조병옥이나 이범석 그리고 신익희 등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했고이승만을 위해 백색테러를 일삼다가 국회의원 자리까지 들어가게 된 조직폭력배 김두한 또한 반이승만세력이 되었다아무튼 제3대 총선은 이승만이 이와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자유당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긁어모아 유권자를 매수하는 한편 깡패들을 동원하여 야당의 유세장을 기습하고 야당 후보 및 무소속 후보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갖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특히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등록 서류를 탈취하여 후보등록을 못하게 하고장면의 측근 오위영에게 후보를 사퇴하도록 압박하였다.

(자유당, 자유당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을 대변했던 정당이다.)

 

온갖 부정타락선거의 결과 자유당은 114석으로민국당 15대한국민당 3국민회 3제헌동지회 1무소속 67석에 비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당초 목표인 개헌정족수를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1954년 9월 7이승만의 자유당은 선거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이기붕 의원을 포함한 135명의 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국회에 제안했다이렇게 하여 제2차 개헌파동이 시작된 것이다개헌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투표제의 채택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②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민의원에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임권 부여.

 

③ 참의원 의원을 2부제로 개선.

 

④ 참의원에 대법관 기타 고급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 부여.

 

⑤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원칙.

 

⑥ 현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 폐지.

 

⑦ 기타 8개 항의 개정사항을 포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불과 2년전 부상정치파동을 주도했던 이승만은 종신대통령을 꿈꾸며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러 자유당이 원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이승만은 자유당의 개헌안을 공고기간에 거쳐 11월 18일 본회의에 상정했다또한 이승만은 국회상정에 앞서 우파 반공주의의 본산인 민국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개헌안 통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개헌안은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부 60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부결이 선포되었다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로 부결되었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전대미문의 수학계산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일요일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정부는 공보처장 갈홍기의 이름으로 203명의 2/3는 135라도 무방하다는 특별성명을 내는 등 개헌안 부결 번복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 27일 저녁 자유당 수뇌부는 서울대학의 수학교수 최윤식 등을 동원하여 203의 3분의 2가 135라는 희한한 방식에 착안하고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여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 의총은 성명을 통해 어제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부결임을 선포한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숫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 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해괴망측한 발표를 했다다음날 29일 최 부의장이 개회 벽두에 전차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자국회는 난장판이 되었다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이었다.

(사사오입 개헌의 논리)

 

이승만은 이런 전대미문의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토대를 마련했다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불법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이었다는 점에서도 한국의 헌정사상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이승만의 악행은 대통령으로서 독재정권을 강화하면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일을 가리지 않았으며,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이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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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지도)

 

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시작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주사변중일전쟁스페인 내전 등이 시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이지만종결은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Atomic Bomb)은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었고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결국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그러나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진격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고, <폭격의 역사>를 쓴 아라이 신이치나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등과 같은 인물들도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 공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그러나 미국은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렀고치열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겨우 함락시켰다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면 대략 100만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실제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군사작전을 계획했었으며그렇게 될 경우 태평양 전쟁을 1,2년 더 진행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반소련감정을 내려놓고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심지어 반공주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고 독일에 맞선 소련의 공로를 매우 높게 인정했을 정도며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들어진 동영상도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하지만 이런 미국의 입장은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쯤 되어 핵폭탄 실험이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외곽 사막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핵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지했었지만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그가 생각하기에 핵 보유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미국이 원하는 조건대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길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루스벨트가 급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매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트루먼은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더 이상 소련의 참전을 환영하지 않게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슬며시 다가가 지나가는 말투로 미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물론 소련은 이미 정보부를 통해 맨해튼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따라서 스탈린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소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결국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Little Boy)를 탑재한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 섬 기지를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고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원폭투하 이후 미국의 트루먼은 환호했다당시 원폭투하의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소련은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는데 원자폭탄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사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경우 주저 없이 소련에도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신호로 생각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일본 외무성 최고위급 관리 4명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나쁜 소식을 알렸다스즈키의 반응은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였다일본이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소련군의 공세가 있자 비상 내각회의를 소집한 일본 관리들은 회의도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실을 알게 됐다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깃발을 세우는 소련군)

 

무엇보다 소련의 만주 공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당시 소련군은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고이들은 만주와 몽골중국한반도 이북 그리고 그 외의 쿠릴열도와 사할린 이남을 통틀어 공격을 개시했다당시 일본이 소련군의 만주진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것은 이러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방정책으로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했고미군과의 전투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비록 보급이 안되긴 했어도 일본군은 주로 만주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보급물자와 지원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즉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만주와 중국 한반도를 포함한 지역에서 지원을 받음으로써 미국에게 격렬히 저항할 생각이었다그러기 위해선 소련과 접촉하여 외교적인 해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런 계획은 무산되었다또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동부전선에서의 4년간의 경험은 소련군을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기술을 발전시켜 놓았고만주에서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만주전선을 붕괴시켜버렸다비단 만주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중국 일부와 쿠릴열도사할린 이남그리고 한반도 이북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있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소련의 참전을 통해 알게 됐다스즈키 총리의 경우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의 길을 선택했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추축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기사)

 

종전 후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의 이유를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만주 진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일본의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 역시 원자폭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본다라고 말했으며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장도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따라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진짜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기 보단 소련의 만주 진격 작전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 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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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새조선 역사의 첫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일본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조각돌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누구를 위하여 당신들이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 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굴욕한 것은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군대는 조선 인민들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산업 기업소들을 개시하라. 붉은군대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군대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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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 - 리비아혁명의 정치철학
무아마르 알 카다피 지음 / 형성사 / 198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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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시 생각해보니 카다피는 위대한 혁명가다.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건 미제국주의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제가 남미에서 좌파정권을 어떻게 전복시키는지를 생각해봐라. 그놈에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자유니 떠들어 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 나라 자본 강탈 아니던가. 현재의 리비아가 그런 상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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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북주의자들이 항상 집회에서 하는 주장이 있다. 그 주장은 바로 ‘북진통일‘ 혹은 ‘북한동포 해방‘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북진통일과 북한동포 해방은 군사력 증강을 통해 북한을 굴복시키자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데, 즉 전쟁을 해서라도 북한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류의 주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때부터 친일파 세력을 결집하여 권력을 차지했던 이승만이 해왔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북한을 무력으로 정복시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주장에는 북진통일만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라는 의도도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이승만이 외치던 북진통일론은 박정희가 한국을 반공국가로 체계화하면서 소위 반공웅변 대회를 포함한 전 사회적 영역에서 이를 더 확실히 적용했다. 따라서 북한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관점은 박정희 시절 전 국민들에게 교육됐다.

그런 반공주의적 통일론은 이후 반민중 반통일 세력에게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통일 레파토리가 됐다. 그들에게 있어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 아닌 무너뜨려야할 적일 뿐이다. 거기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기근에 시달리기 시작할 때 1990년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실제로 북폭과 제2차 한국전쟁을 준비했었고,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필자는 아주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해법은 없다!˝라고 말이다. 북한 정권을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군사적 통일만 하면 다 끝날 것이라는 저급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일 군사적으로 대한민국과 미국이 북한을 정복한다면, 그 결과는 절대로 긍정적일 수가 없다.

얘를 들면 북폭과 북진에 성공하여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죽거나 체포당했다고 가정해보자. 어쨌든 북의 사회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북의 지도자를 북인민들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인민들은 미국의 고립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살아남은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의 인민들이 그러하다. 따라서 그 사회가 미국의 고립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던 상태에서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과연 북한에게 총구를 돌릴까? 이건 현실성 없는 상상력이다. 북진통일이 모든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관점도 전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관점이다. 북진을 하게 되면 북한에 있는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미국은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렇게 됐을 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미국의 폭격으로 죽게 된다. 이런 참상을 북한인민들이 경험하게 되면 설사 북진통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북한민중이 전 게릴라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들과 북베트남군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저항했던게 그런 이유였다.

김정은 정권 전복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2003년 미국은 현재 북을 보듯이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보고 독재라고 하며 무력으로 침공을 감행했다. 초기 전세는 미국이 이라크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면서 다 끝나는 것 같았다. 후세인도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을 다시한번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했다. 후세인 처형과 이라크 침공이 결과적으로 ISIS를 불러왔다.

2011년 리비아 내전도 그랬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NATO군은 반카다피 세력에게 공군력을 지원하여 카다피 세력의 거점을 폭격했고, 궁극적으로 카다피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다피가 죽고나서 리비아는 더 혼란스러워졌고, 지금도 내전이 벌어져 상황만 악화됐다.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군사적 개입사례를 보았을때 북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고 김정은을 죽인다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말 그대로 국제정치와 역사를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한 브루스 커밍스가 얘기하듯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해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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