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의 저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68년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이 전 세계 사회 혁명에 불을 지핀 것도 사실이었지만무엇보다 전쟁에서 거짓선전을 하고 있던 미국 지도부를 놀라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기습적인 대공세를 감행했고이것은 잠시나마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을 전선에서 격퇴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바로 구정 공세(Tet Offensive)였다.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에서 나온 케산 포위전, 2010년 당시 인기를 끌었던 콜 오브 듀티 블랙옵스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게임의 주인공은 베트남 전쟁 당시 케산 포위전에 잠시나마 참전하게 된다.)

 

구정 공세를 감행하기 10일 전인 1968년 1월 21일 북베트남군은 라오스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미군 기지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이것은 남베트남군 총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도 놀라게 만들었다이것이 바로 케산 포위전(Siege of Khe Sanh)이다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68년 원숭이해에 있을 대규모 공격을 차츰 준비해나갔었다전쟁 기간 내내 이들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를 통해 지속적인 병력 지원을 했고구정 공세 이전에도 이 호치민 루트를 통해 물자와 병력을 남베트남에 있는 해방전사들에게 지원했다이들은 구정 공세를 시작하기 전 적의 기지를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는데그게 바로 케산 기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상공에서 본 케산기지)

 

라오스 국경 근처에 있는 케산 기지는 미해병대 2,100명과 남베트남군 특수부대 3,500명 그리고 CIDG 프로그램을 통해 미군사고문단에게 훈련받은 고산족(몽타냐르(Montagnard)라고 불림부대 900명이 지키고 있었다구정 공세를 하기 전 케산 기지 근처에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시킨 북베트남군은 1968년 1월 21일 새벽 케산 기지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북베트남군이 동원한 정예군은 325사단과 304사단이었고, 304사단의 경우 14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던 군대였다.

 

북베트남군의 장거리포들이 케산 기지에 맹렬한 포격이 가해졌다포격 첫날에만 300발의 대포 포탄이 떨어졌고그날에만 미해병대 18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당시 작전에 투입된 제임스 헤브론(James Hebron)은 마이클 매클리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들이 퍼부어 대는 포탄이 폭우처럼 쏟아졌습니다첫날 하루만 300발이 떨어졌죠. 77일간 지속되었던 포위는 그저 죽음과 파괴의 연속이었습니다.”

 

북베트남군이 미해병대가 주둔한 케산을 포위하자이는 워싱턴의 미국 관료들도 놀라게 했다남베트남 주둔 미군 총사령관인 웨스트모얼랜드도 마찬가지였다. 2017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을 보면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던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잘 알 수 있다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 해병대는 북베트남군에게 포위되어 큰 난관에 빠지게 됐습니다웨스트모얼랜드는 이것이 미국판 디엔비엔푸 전투가 될 거라고 했죠베트남 전쟁의 승패가 달린 전투라고도 했습니다하지만 당시 북베트남군은 병력 대부분을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상태였어요.”

 

케산 포위전이 시작되자전황은 14년 전 북베트남군의 승리로 끝났던 디엔비엔푸 전투처럼 전개되는 것 같았다심지어 미 언론과 외신들마저 디엔비엔푸의 망령과 같은 식으로 보도를 했었다당시 케산을 수시로 취재했던 10여 명의 기자 중 한 사람인 피터 브래스트럽(Peter Braestrup)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었다.

(케산 포위전 당시 랑베이에서 있었던 전투, 여기서 북베트남군은 탱크까지 동원한 공격을 감행했다.)

 

케산의 전투 현장은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멜로 드라마와 최후의 순간을 눈앞에 둔 여러 가지 극적인 요소를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다포위된 이 고원 위에 우리의 해병 5,000여 명이 있었다북베트남군의 케산 포위작전은 디엔비엔푸의 승리자인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지휘하는 것 같았다우리는 이 점이 궁금했다.”

 

케산 포위전이 지속되면서 미군이 선택한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대규모 공습을 감행하는 것이었다물론 북베트남군도 대공포등으로 대응을 하긴 했지만대규모의 미군 항공지원을 돌파하긴 힘들었다실제로 북베트남군은 케산을 포위한 다음 미 해병대의 주력 방어선을 돌파하기도 했었다미군 지휘본부에서 가장 가까운 고지 861의 경우 2월 5일에 북베트남군이 돌파했었다그로부터 2일 뒤에는 라오스 국경 근처에 있었던 랑베이 미군 특수부대 기지에는 소련제 PT-76 탱크가 지뢰밭과 철조망을 헤치고 진격했었다.

(북베트남군의 포격이 있자 몸을 숙이는 미군들)

 

케산 포위전이 지속되고 그로부터 10일 뒤에 구정 공세가 시작된 이후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반격에 나섰지만또 다른 작전도 생각했었다그것은 바로 케산에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물론 이것도 디엔비엔푸 전투 때처럼 어디까지나 고려만 했었던 것이지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미군의 항공 폭격, 결국 미군은 대규모 항공기 공습을 통해 케산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한다.)

 

따라서 케산 포위전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미군이 생각한 방법은 대규모 항공기를 동원한 전략 폭격이었다. B-52와 같은 최신식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케산을 포위하고 있던 북베트남군의 군사적 시설들에 대해 공습에 나섰다당시 미군이 케산 기지에 투하된 폭탄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5배에 해당하는 화력이었고하루 5,000개 이상의 폭탄이 작렬했다즉 이런식의 공습으로 미군은 북베트남군의 포위망을 점차 뚫기 시작했다이렇게 해서 1968년 4월 15일 북베트남군의 포격이 끝나면서 77일간의 포위전도 끝이 났다.

 

케산 포위전에서 1,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다이 중 300명 가까이 되는 미군이 케산 요새 내에서 전사했다그 외에 남베트남군이나 고산족 병사들까지 합치면 최소 3,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북베트남군의 전사자 수치도 만만치 않았다미군 추측으론 최소 10,000명에서 15,000명 정도가 전사했다고 알려졌다그러나 이건 바디 카운트에 의한 과장 보도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미군베트남원조사령부(MAC-V)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북베트남군 전사자가 5,550명 정도라고 한다수치의 정확함을 떠나서 북베트남측도 꽤나 많은 전사자가 나왔던 것 만은 확실하다.

(케산 포위전 관련 서적)

 

케산 포위전은 미해병대가 대규모의 북베트남군 병력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포격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지만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미군은 프랑스군과는 다르게 북베트남군의 이동 상황을 즉시 파악했었기 때문이다디엔비엔푸 프랑스군 요새 150m 근방까지 들키기 않고 참호를 파서 준비했을 때와는 좀 달랐다또한 포위전도 미군이 포위망을 뚫은 뒤 그 이후부터는 소탕작전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나갔다는 점에서 북베트남측의 패배로 보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정치적인 차원에선 북베트남의 승리였다우선 케산을 포위하면서 미국의 시선을 케산 포위전에 집중하게 한 뒤구정 공세를 감행했고그 여파로 미국이 대규모 반전운동에 직면하여 이들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런 점에 있어서 케산 포위전이 정치적이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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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1-01-31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사에도 지식이 해박하시군요 ㅎㅎ
블랙옵스는 저렇게 그래픽이 좋았나요? 전 플스3으로 했어서 저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NamGiKim 2021-01-31 11:05   좋아요 0 | URL
제 전공이 사학입니다.(올해 4학년) 저는 블랙옵스를 고1때 처음 해봤는데, 당시 저는 그래픽에 충격을 받았었죠. 내용 전개나 그래픽은 인정할만 하죠.
 

1975년 남베트남 해방을 위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 해방군이 공격을 개시한 지 1달도 안 되는 사이 부온마투옷과 다낭을 포함한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들이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레민다오 소장이 방어하던 쑤언록 또한 얼마 못가 무너져 내렸다. 남베트남군의 쑤언록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해방군은 괴뢰군의 수도 사이공을 향해 진격했고, 1975430일 해방군의 탱크가 과거 응오딘지엠과 응우옌반티에우가 사용하던 대통령궁에 도착하여 임시대통령인 즈엉반민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해방전쟁이 혁명세력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 대신 미국이 접수한 남베트남은 말 그대로 반역자들의 집합체였다. 심지어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서도 베트남에서 유일한 대중조직은 베트민뿐이었다고 폭로할 정도로, 친 외세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인 남베트남 정부는 변론의 여지도 동정 받을 여지도 없었다. 따라서 미군 철수 이후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전선 전역에 걸쳐 진군하자 이들은 본인들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싸워야 하는 신세였다.

 

1975430일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자, 미국 편에 서서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남베트남군 장성들 중 일부는 패망과 동시에 자살했다. 남베트남의 한 경찰은 그날 수도 사이공에 있는 남베트남군 장병 기념비에 가서 경의를 표한 뒤 머리에 권총을 쏴서 자살하기도 했다. 남베트남이라는 국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던 날, 한 남베트남군 장교 또한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바로 남베트남 공화국군의 팜 반 푸(Phạm Văn Phú) 소장이다. 팜 반 푸 소장은 1975년 당시 푹롱성 전투와 부온마투옷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했었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거침없는 진격에 따라 철수를 거듭했었다.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됨에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팜 반 푸 소장은 상당히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1952년 당시 프랑스가 만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그는 1953628일 프랑스군 소위로 임관했고, 그해 12월에는 부중대장 그리고 19543월에는 중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디엔비엔푸 요새롤 포격하자 프랑스는 항공기를 통해 병력을 공수투하 했는데, 팜 반 푸 또한 그렇게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다.

 

역사에서와 같이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57일 전투지역에 있던 프랑스군 전부가 백기를 들게 되면서 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연히 중대장이었던 팜 반 푸 또한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고,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제네바 합의가 성립된 이후인 195578일 남베트남쪽으로 인계되었다고 한다. 응오딘지엠이 통치하는 남베트남에 온 팜 반 푸는 당연하게도 남베트남의 공수부대로 배치되었으며, 1975년 패망까지 남베트남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의 군대가 어떠한 이들의 집합체였는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따라서 남베트남의 군대는 말 그대로 프랑스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였으며, 이런 국가가 패망하는 것은 민중사적 시각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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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
정현채 지음 / 보담 / 202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코로나 창궐에도 아직도 정신 못차린 숭미 광신도들이 좋아하는 이승만 미화물. 이런 책 쓰면서 의료보험은 왜 받는거고, 재난지원금은 왜 받는 것이며, 한국사회에서 복지혜택은 왜 받는건지 의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뜻하는 엄마는 그 태극기 부대 주옥순을 뜻하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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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2 세트 - 전2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악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전 세계인들에게 악인으로 각인된 인물이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 외계인, 악마, 좀비, 로봇과 더불어 5대악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대중매체에서 악의 대명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일으키고 저지른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와 연관이 있다. 무엇보다 그가 1939년에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650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죽게 만들었고, 그의 편협한 인종적 사고관은 최소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아돌프 히틀러가 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악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의미에서 얘기해보자면, 학술적으로 많이 연구가 된 인물이다. 일단 국내에 출판된 그의 두꺼운 연구서만 보더라도 존 톨랜드가 쓴 책까지 합쳐서 총3권이다. 그만큼 연구가 많이 된 인물이다. 그가 집권하던 나치 독일에 관한 연구는 말 그대로 정말 많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돌프 히틀러는 20세기 역사에서 이 많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주 일요일마다 MBC에서 방영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보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대한 내용들이 음모론적인 차원에서 많이 소비가 된다. 나치의 UFO 제조설, 히틀러 여자설, 히틀러 고자설, 히틀러 생존설, 나치의 타임머신 프로젝트(어떤 타임머신 루트를 찾아 과거로 돌아가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는 얘기), 나치의 비밀 남극기지, 나치와 외계인 협력 그리고 나치의 달 기지와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 나치의 달기지 음모론은 2012년 영화 아이언 스카이(Iron Sky)’로 만들어져 패러디가 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12년간 통치하던 나치 독일은 여러 부분에서 많은 기행(奇行)을 했었고, 기행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일들에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었다. 앞에서 서술한 음모론들이 나오게 된 이유는 히틀러 개인이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의 나치 독일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타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었던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처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많은 분야에서 여러 가지의 학술적 연구와 더불어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후세대에게 양산해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를 공부해보는 일은 참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 대중매체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치 독일과 히틀러라는 소재가 악용되는 사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네오나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2017년 당시 샬러츠빌 사태와 같은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었다. 따라서 이런 점에 있어서 나치 독일과 히틀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적으로 매우 조심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게 되고, 대학교 전공까지 역사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는 중학교 시절 감상했던 히틀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한 몫 했다. 그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내가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철없던 시절의 나는 보았던 다큐멘터리나 대중매체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런 부분은 지적으로 성장하면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를 다룬 연구나 서적들은 상당히 많다. 일단 국내에 출판된 책들도 무수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히틀러를 다룬 전기를 지금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2019년 페이퍼 로드 출판사에서 출간한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장판을 읽게 되었고, 장기간에 걸쳐 완독했다. 2부작으로 구성된 책이라 분량이 워낙 많았기에 일부러 1,2권을 나눠서 읽었었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의 원서는 냉전이 끝나지 않았던 1976년 정확히는 베트남 전쟁 종결 1년 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존 톨랜드는 일본 제국 패망사‘6.25전쟁사등으로 국내에서 유명한 논픽션 작가로 자료조사 특히 인물 인터뷰라는 측면에선 방대한 자료를 통해 여러권의 책들을 집필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며 수많은 인물의 인터뷰를 토대로 책을 집필했다. 비록 국내에 먼저 번역된 책들보단 과거의 책이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자료를 소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작년 8월과 12월 그리고 올해 1월에 걸쳐, 1,2부를 나눠 읽었다. 1부는 작년 여름에 읽었고, 2부은 작년 12월과 올해 1월 초까지 읽었다. 아돌프 히틀러 전기를 읽어보지 못했기에 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번역도 매끄러워서 원 저자의 매끄러운 문장이 눈에 잘 들어왔다. 비록 방대한 분량이지만 내용 자체가 마치 문학이나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혔다. 이런 점은 학술적인 연구를 보다 바탕으로 한 책들보단 일반인들에게 진입장벽이 한 단계 낮아진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최대한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을 과거의 인물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입장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다. 즉 히틀러라는 인물이 가지는 정치성을 보다 배격하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히틀러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그는 히틀러의 생애 그러니까 독일 총통이 되기까지의 히틀러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즉 히틀러라는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나치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정치적 판단을 배제하고 접근하려 했다. 또한 저자는 히틀러 측근들이 본 히틀러는 어떠했는지도 얘기하고자 했다. 따라서 상당히 많은 인터뷰 자료를 책에서 참고하고 인용했다.

 

비록 전부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인터넷상에 퍼져있는 히틀러에 대한 여러 가지 들도 제법 적잖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런 썰에 대한 저자의 해설과 해석 혹은 추측도 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냉전 시기에 나온 책이라 사료적 한계도 돋보인다. 특히나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빈약하다. 이 점에 있어서 톨랜드도 과거 나치 독일 군 장성들의 회고록이나 인터뷰에 의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2부는 수정의 밤부터 히틀러의 자살까지를 다루는데, 당연하게도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책에 있는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들은 상당히 축소된 느낌을 받는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과정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까지는 제법 분량을 할애하지만, 그 이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이런 점은 시대상의 사료적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다. 세계 최악의 반인륜적 학살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을 생각보다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비록 분량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히틀러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 특히나 히틀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쉽게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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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라딘에 본격적으로 글을 올리게 된지도 3년이 넘었네. 여기에 글들 올리면서 내 스스로 배우기도 하고 다른 분들의 리뷰(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에서도 많은 걸 알아갔던 것 같다. 활동을 하다보니 여러사람들을 알라딘 친구로 맺었고, 이분들의 쓴 댓글들도 나름 유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라딘을 시작했던 공익시절에 깨닫게 됐다. 앞으로도 다 알찬 글들 올리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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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1-02-08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글 계속 써주세요^^

NamGiKim 2021-02-08 15:04   좋아요 1 | URL
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 이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