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남베트남 해방을 위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 해방군이 공격을 개시한 지 1달도 안 되는 사이 부온마투옷과 다낭을 포함한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들이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레민다오 소장이 방어하던 쑤언록 또한 얼마 못가 무너져 내렸다. 남베트남군의 쑤언록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해방군은 괴뢰군의 수도 사이공을 향해 진격했고, 1975년 4월 30일 해방군의 탱크가 과거 응오딘지엠과 응우옌반티에우가 사용하던 대통령궁에 도착하여 임시대통령인 즈엉반민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해방전쟁이 혁명세력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 대신 미국이 접수한 남베트남은 말 그대로 반역자들의 집합체였다. 심지어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서도 “베트남에서 유일한 대중조직은 베트민뿐이었다”고 폭로할 정도로, 친 외세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인 남베트남 정부는 변론의 여지도 동정 받을 여지도 없었다. 따라서 미군 철수 이후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전선 전역에 걸쳐 진군하자 이들은 본인들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싸워야 하는 신세였다.
19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자, 미국 편에 서서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남베트남군 장성들 중 일부는 패망과 동시에 자살했다. 남베트남의 한 경찰은 그날 수도 사이공에 있는 ‘남베트남군 장병 기념비’에 가서 경의를 표한 뒤 머리에 권총을 쏴서 자살하기도 했다. 남베트남이라는 국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던 날, 한 남베트남군 장교 또한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바로 남베트남 공화국군의 팜 반 푸(Phạm Văn Phú) 소장이다. 팜 반 푸 소장은 1975년 당시 푹롱성 전투와 부온마투옷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했었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거침없는 진격에 따라 철수를 거듭했었다.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됨에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팜 반 푸 소장은 상당히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1952년 당시 프랑스가 만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그는 1953년 6월 28일 프랑스군 소위로 임관했고, 그해 12월에는 부중대장 그리고 1954년 3월에는 중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디엔비엔푸 요새롤 포격하자 프랑스는 항공기를 통해 병력을 공수투하 했는데, 팜 반 푸 또한 그렇게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다.
역사에서와 같이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년 5월 7일 전투지역에 있던 프랑스군 전부가 백기를 들게 되면서 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연히 중대장이었던 팜 반 푸 또한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고,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제네바 합의가 성립된 이후인 1955년 7월 8일 남베트남쪽으로 인계되었다고 한다. 응오딘지엠이 통치하는 남베트남에 온 팜 반 푸는 당연하게도 남베트남의 공수부대로 배치되었으며, 1975년 패망까지 남베트남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의 군대가 어떠한 이들의 집합체였는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따라서 남베트남의 군대는 말 그대로 프랑스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였으며, 이런 국가가 패망하는 것은 민중사적 시각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