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은 남한 동해안 위쪽의 항구로 38도선에서 약 50마일(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큰 시멘트 회사 오노다는 한국에 많은 공장을 세웠는데, 삼척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부 북한에 있었다. 다른 곳의 공장과 마찬가지로 815일 공장노동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가 즉각 공장을 접수했으며, 그 결과 모든 것을 한국인들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오병호의 지도로 몇 달, 몇 년 동안 공장을 관리했다.

 

오병호는 1943년 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들어왔고, 전쟁 중에 일본인 기술자 6명이 군대로 징집되면서 빠르게 승진했다. 이는 식민지 시기 막바지에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오병호는 공장의 기술과장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실무를 익혔다. 신타로는 식민지 이주민 2세대로 1928년 북한의 승호리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진주의 지주 가문 장남이던 오병호는 1945년에 겨우 25살이었다.

 

공장의 숙련노동자였던 우진홍은 1920년 삼척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서울의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우연히도 나(브루스 커밍스)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43년 우진홍은 기술과의 숙련노동자였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공장에 흔히 길게는 3년까지도 머물렀던 북한과 달리 삼척 공장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즉시 한국인들이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이동했다.

 

915일경 미군정 민정팀의 채프먼이라는 대위가 공장을 방문했고,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먼저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기 팀의 본부로 썼다. 얼마 후 오병호는 서울로 가서 미군정에 공장 가동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상공부 공업국장 유한상으로부터 약간의 자금을 얻었고, 공장은 101일에 한국인 기술자와 공장노동자로 완전히 재가동되었다. 다음달 좌파-자유주의적인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에서 온 조직자들이 오노다에 지회를 설립했다. 우진홍에 따르면 노동자의 70%좌익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노동조합을 원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194512월 미군정은 명령 제33호를 발포하여 모든 공장의 자치위원회를 금지했다. 명령은 또한 이전에 일본인이 소유했던 모든 공공재산과 사유재산, 즉 큰 공장을 전부 포함하여 약 3000개의 재산이 군정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임명했다. 오노다의 관리자로 임명된 사람은 유한상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부재 관리인으로서 1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서울에서 임명한 다음번 관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누군가의 친구이자 부재 관리인이었다.

 

1947년 마침내 미군정은 좌익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정이 전평을 불법 단체로 규정한 지 이미 1년이 넘었지만, 전평은 자치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번창했다. 공장위원회의 지도자 전부를 포함하여 이른바 좌익분자와 빨갱이 30명이 체포되었다. 우진홍의 기억에 따르면 몇 년에 걸쳐 노동자 정치는 서서히 역전되었다. 1950년대에는 70%가 이른바 우익이었다. 이들도 노동조합은 갖지 못했다.

 

19506월 재래식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치위원회 출신자들은 대부분 공장노동자로 복귀했다. 일부 관리자와 기술자는 부산방어선으로 피신했으나 전부 다 달아나지는 않았다. 1950년 가을부터 19524월까지 남한군과 북한군은 서로 여러 차례 공장을 빼앗았고, 결국 석 달 연속으로 공장을 가동했던 북한군이 완전히 떠난 뒤로는 남쪽 사람들이 공장을 확보하여 보유했다.

 

1957년 마침내 이승만의 친구들은 서울에서 지명한 다섯 번째 부재 관리인 강직순에게 공장을 매각했다. 공장이 전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지만(자재 일부를 도둑맞았고 주 크레인이 파괴되었지만 나머지는 멀쩡했다), 미국은 국제연합 구호기금으로 공장에 632000달러를 배정했다. 매각은 그 후 4년 만의 일이었다.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기술을 배웠으며 남한 시멘트 기술자의 최고봉이었던 오병호는 1960년대 좌익이자 빨갱이라는 오명을 썼다. 이른바 좌익이었던 우진홍은 삼척에서 시멘트 관련 사업체를 소유했다.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논점은 많다. 20세기 중반 한국사를 풍부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곳은 단지 하나의 시멘트 공장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필연의 정치, 즉 결정되던 그날(즉 채프먼 대위가 도착한 날)에는 작아 보였지만 나중에는 매우 크게 나타나는 정치적 선택에 관한 것이다.

 

채프먼 대위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잘하고 있군요, 미스터 오. 계속 잘 하도록 하시오. 나도 조합원이요.” 이러한 처리 과정에 중립이나 공평, 불간섭을 요구하는 정중한 항변, 자신들의 점령정부에서 순진한 방관자로 남는 미국인 따위는 없었다. 채프먼 대위와 서울에 있는 그의 정치적 상관들이 무엇을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결국 미국인들이 잊힌 전쟁으로 알고 있는 그 내전을 초래한 것은 바로 오래전 따뜻한 9월의 그날들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미국인과 러시아인, 한국인이 했던 선택이었다.

 

출처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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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냉전시대에 돌입했다. 미국과 소련이 동맹적인 관계에서 적대적인 관계로 변모함에 따라,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나는 국가 내부의 이념 대립이나 식민지 해방 전쟁 또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 베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독립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에 샤를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다시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그 나라에 수십만의 군대를 상륙시켰고, 이것은 결국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으로 확대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민을 지휘한 호치민(Ho Chi Minh)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프랑스 혁명 인권선언문의 내용을 바탕에 둔 독립을 선포했을 당시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까지 미국과 소련은 호치민의 베트민에 대해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했다.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서 호치민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프랑스에 있었다. 형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프랑스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편입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도 있었고,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와 협력했던 사이이지만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호치민에 대한 막연한 의심같은 것이 존재했다. 특히나 루스벨트 이후 권력을 계승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베트남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원하는 프랑스가 호치민을 인정할 리가 만무했었다. 거기다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 단체인 프랑스 공산당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문제에서 초기에 양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수였던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1935년 당시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호치민을 신뢰할 수 없다. 그는 심정적으로는 트로츠키주의자다.”

 

이건 1930년대 당시 프랑스 공산당이 초기에 건설된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협력한다고 봤던 시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토레즈를 포함한 프랑스 공산당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이러한 시각으로 호치민과 베트민을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 토레즈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독립 열망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공산당도 프랑스 입장에서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런 프랑스 공산당 입장의 이면에는 소련의 부추김에 힘입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호치민 평전의 저자이자 OSS 요원으로 호치민을 만났던 찰스 펜(Charles Fenn)은 판단했다. 즉 모스크바 입장에서는 프랑스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면 프랑스령 식민지를 유럽 공산당 체계 안에 두는 것이 아시아적 독립을 모색한다고 우왕좌왕하게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인 1947년의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을 비판하는 세력이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소련의 스탈린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에 호치민과 베트민을 지원하지 않았던 이유에는 이들에 대한 스탈린의 개인적 의구심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스탈린의 의구심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치민이 프랑스와의 대립 사이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에선 사회주의 사회를 유지하면서 스탈린의 지도에 반발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의 사례가 존재했다. 티토와 스탈린의 대립을 생각하면 비록 옳지는 않더라도 스탈린의 이러한 의구심이 이해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스탈린과 트루먼은 이 점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로 미국은 1940년대 후반에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그리스에 우익군사독재정권을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냉전 초기 미국의 정책은 신제국주의적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의 소련 정책은 미국과는 사뭇 달랐다. 스탈린의 부관격인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19479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즈다노프는 소련은 억압받는 식민지 민족들의 제국주의 착취자들에 대한 투쟁을 지지한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식민지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도 우호적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또한 이것은 호치민에게 있어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을 가능성이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베트민에 대한 소련의 실질적인 지원은 없었다.

 

스탈린이 베트민을 다시보게 된 계기는 1949년 중국 국공내전에 있었다. 2차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호치민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을 시작했고, 1950년부터 군사고문단과 탄약, 소총, 식량, 의료품 등과 같은 물자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초 중국과 가까워진 호치민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말에 따르면 스탈린은 무례하고, 화를 돋우는태도로 호치민을 상대했다고 한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은 스탈린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모든 지략을 동원했다고 한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에서 스탈린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호치민에게 했다고 한다.

 

베트남의 요구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는 역할 분담이 필요합니다. 소련은 현재 동유럽 국가들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줄 것입니다. 중국이 비축하지 않은 물자들은 지원계획에 따라 소련이 중국에 보급중인 목록 중에서 선택하면 됩니다. 그러면 소련이 중국에게 더 보내줄 것입니다.”

 

스탈린이 호치민에 대해 어떠한 의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도 스탈린은 호치민의 요청들 가운데 한 가지는 확실하게 들어주었다. 1950130일 스탈린은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공식 발표를 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호치민과 스탈린은 1952년에 다시 한 번 만났다. 당시 두 정상 사이에 회담이 열렸을 때 스탈린은 회의실의 의자 두 개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호치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않고 싶소?”

 

여기에 대한 호치민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이 내용은 윌리엄 J.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대목에선 호치민이 실리적인 외교 정책과 국제관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국제관계와 외교를 상당히 베트남의 현실에 맞게 이용하고자 노력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호치민은 스탈린 뿐만 아니라 중국의 마오쩌둥과의 관계에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원을 얻기 위해 상당히 실리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1950년에 스탈린으로부터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호치민은 상당히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스탈린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 2013

 

호치민 평전, 찰스 펜, 김기태(), 자인, 2001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정영목(역), 푸른숲, 2003

 

프랑스 공산당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글루스 파리13구 블로그, 2020528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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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개월간 올리지 않았네요기다리는게 좀 느리더라도 개인 사정이 있으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은 5.4운동이나 다른 식민지 지배 국가들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지만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결정적인 이유에는 한일합병 이후 일본이 실행했던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이렇게 되자 일본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노선을 바꾸게 되었는데이것이 바로 문화통치였다문화통치가 실행되며 출판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고민족자치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관련 서적)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 미노루 총독은 1927년까지 조선 총독으로 있으면서 문화통치를 실행했다그러나 이 문화통치는 일본의 식민지배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었고진정한 목적은 친일파 양성을 통한 조선통치에 있었다일제는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최남선이나 이광수를 이용하여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했고최린과 박영효를 앞세워 민족주의자들을 일본과 타협하도록 설득했다또한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화도 실행되었다교육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조선은 옛날부터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온 열등한 민족이다와 같은 말들을 세뇌시켰던 것이다.

(사이토 미노루, 식민지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집권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그는 1920년대 이른바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통치를 실행했다.)


(문화통치의 실상)

 

1920년대 당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게 문화통치를 했듯이당시 일본 내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이했다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민중과 정당의 성장을 바탕으로 전개됐다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8년에는 미가 앙등에 따른 생활고에 민중들이 반발하여 쌀 소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했고이런 대규모 저항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큰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이로 인해 조선 총독 출신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번벌 내각이 총사퇴했고사태 수습을 위한 대안으로 하라 다카시가 이끄는 정우회 내각에 의해 정당내각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1925년에는 25세 이상 남성에게 재산에 상관없이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 선거법이 제정되었으며보통선거법의 제정은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산미증식계획의 진실)

 

앞에서 서술한 쌀소동에 대한 일본의 대책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산미증식계획에 있었다일본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늘었다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1년에 1,400만 석이었던 것이 1928년에는 1,700만 석으로 300만 석이 증가했다그러나 실질적인 조선인 1인단 쌀 소비량은 크게 감소하였다왜냐하면 일본으로의 쌀 이출이 1921년 300만 석에서 1928년 700만 석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따라서 실질적인 조선인들의 쌀 소비량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즉 이것이 산미증식계획의 핵심이었다거기다 지주의 숫자도 증가하여 농민들은 점차 빚을 잔뜩 짊어진 채무농민이 되어갔다일본의 경제 구조도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식민지 조선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 계층 간의 구조적 불평등은 극심했다.

(일본 공산당, 1922년에 창당된 일본 공산당은 현재까지 일본 정당정치에서 원내정당으로 남아 있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으로 개량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그리고 일본 침략 문제에 있어선 항상 진보적인 시각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하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이 시기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아나키즘사회주의 등과 같은 진보 이념을 표방하는 집단 및 단체들이 일본에서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1922년 7월에는 일본 공산당이 창당되었고일본 공산당은 군주제와 귀족원 폐지, 18세 이상 모든 인간에게 보통 선거권 부여집회·결사·출판의 자유, 1일 8시간 노동 실시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및 최저임금제누진소득세에 따른 과세 실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박열, 박열은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로 1920년대 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 이후 체포되어 22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둘은 혁명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박열은 해방 후 석방되었지만, 감옥살이를 하던 중 가네코는 1926년에 죽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7년 영화 박열로 개봉하기도 했다.)

 

1921년 11월에는 일본 내 조선인 학생들에 의해 이른바 흑도회가 조직되었고이는 일본 내 유학생들 최초의 이념 서클로서이후 많은 유학생단체들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었다그리고 당시 흑도회의 회원은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주인공 박열도 있었다박열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1923년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요인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불령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상하이에 인사를 보내 폭탄을 구입하기도 했었다. 1925년에는 김재봉박헌영 등이 주도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제1차 조선 공산당이 창당되기도 했다따라서 이러한 좌파조직들이 식민지 조선과 일본 내에서 생겨나고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 건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이 고스란히 사회 구조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불타는 일본)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여러 좌파조직들이 탄생했다고 해서 그 분위기가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고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가 약했던 것도 아니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는 이른바 대지진이 일어났었다이 지진의 규모는 7.9의 격진이었고일본 사가미만 연안과 보소반도 남부에서는 목조가옥의 50% 정도가 파괴되었으며수도 도쿄에서는 화재로 인한 사망이 4만 4천 명을 초과했다요코하마의 경우 6만 가옥 이상이 전소되었었다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5만 명에 달했고 피해액은 65억 엔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자경단의 학살, 이들의 학살로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대지진이 있자일본인들은 증오의 대상을 찾았다그 대상이 바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이었다그 다음날인 2일에는 일본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대가 치안유지를 담당하였는데관동지방 각지에서는 경찰의 협조아래 재향 군인회청년단소방대 등을 중심으로 자경단이 조직되어 조선인을 무차별 살해 및 학살했다지진 이후 일본인들에게 퍼진 유언비어는 지진 이후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조선인들이 방화하고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것이었다따라서 이 유언비어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고학살로 이어졌다학살은 6일간 계속되었으며 6,433명의 조선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관동 대지진 이후 학살을 부추겼던 일본 정부는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체포도 진행했는데여기서 박열을 포함한 아나키스트들도 체포했다이렇게 해서 박열과 그의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전에 계획했던 암살 계획이 드러나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옥중에서 결혼한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에 사망했고박열은 1945년 10월 27일까지 즉 해방이 되고 난 이후까지 2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일제 치안 유지법, 치안 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어 독립운동가들과 좌파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치안 유지법은 1948년 여순항쟁 시기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가 보안법이라는 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1925년 일본에선 이른바 치안유지법이라는 것이 통과됐다치안유지법 제1조에 따르면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그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 내에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덩달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

(다나카 기이치, 다나카 기이치는 중국 대륙 침략에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일본에 부여한 인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1919년 당시 일본 도쿄에 온 젊은 독립 운동가 여운형과 회담했었는데, 조선인을 전부 학살하겠다는 협박을 시도했었다. 물론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그를 놀라게 하기도 했었다.)

 

1926년 12월 다이쇼 천황이 사망한 이후새로운 천황이 일본에 즉위했다쇼와천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천황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로히토 천황이었다히로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일본의 상황도 점차 바뀌어 갔다. 1927년 4월에 성립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기존에 중국과 추구했던 협조 외교 대신에 대륙 적극 정책을 전개했다다나카 내각은 동방회의를 개최하여 만몽지역을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여 일본의 세력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장작림, 장작림은 1920년대 만주에 있던 중국 군벌이다. 일본의 계획으로 폭사하게 된다.)


(장작림 폭사 사건 당시 열차, 장작림이 사망했던 열차다.)


(장학량, 장쉐량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장작림의 아들이다. 일본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그는 반일감정이 강했고, 1930년대 일본과의 전투를 상대적으로 피하고자 했던 장제스에게 반감이 강했다. 따라서 1936년 시안사건을 주도해 장제스로 하여금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데 기여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북벌을 진행하자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중국 산동으로 출병하여 무력 대응을 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제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동군의 계획에 따라 철도 폭파 사고를 위장한 장작림 암살을 단행했다이게 바로 장작림 폭사 사건이었다중국 산동 지역에 출동한 일본 일본군은 총 5천 명이었고중국군과의 전투 도중 발생한 사상자 50명 이내였다이에 반해 중국은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1,700명이 일본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중국 대륙에 진입한 일본군, 일본은 1920년대부터 노골적으로 중국 대륙에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다이쇼 시대가 끝난 이후 일본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거기다 1925년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재건에 착수했던 몇몇 유럽 국가들은 점차 경제를 회복시켰던 반면일본은 불황을 겪었다.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그런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의 일본 경제는 그러했다그러던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드디어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만주사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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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퐁녓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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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책입니다. 1968년 구정 공세 당시 침략자 미제국과 더불어 추악한 민간인 학살을 벌였던 한국군과 거기에 희생당한 퐁니퐁넛 마을의 희생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작년에 그 곳을 방문했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잊어선 안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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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민주주의적 정치 및 신민주주의적 경제의 공화국은 전국의 90% 이상의 인민들이 찬동하고 있는 것이며 이 길을 버리고는 딴 길이 없다.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세우는 길로 나아가겠는가? 물론 이 길은 구미 자산계급들이 이미 걸어온 길이다. 그러나 국제적·국내적 환경은 중국이 이러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

 

국제환경으로 말한다면 이 길은 통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말하여 지금의 국제환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투쟁하고 있는 환경이며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성장하는 환경이다. 중국에서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우선 국제 자본주의, 즉 제국주의가 용사하지 않는다.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고 중국의 독립을 반대하며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반대해온 역사가 바로 중국의 근대사이다. 지금까지의 중국혁명은 모두 제국주의에게 교살당하여 실패하였으며, 무수한 혁명선열들은 이 때문에 철천지 원한을 품고 죽었던 것이다. 지금은 강대한 일본 제국주의가 쳐들어와서 중국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고 있고, 지금은 중국 자체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지금은 중국 자산계급이 독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자산계급이 중국에서 독재를 하고 있다. 사실 지금은 제국주의가 최후발악을 하는 시기로서 제국주의는 머지않아 멸망될 것이다. 제국주의는 사멸되어가는 자본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바로 그 자신이 머지않아 멸망될 것이기 때문에 더 한충 식민지와 반식민지에 의존해 생존하게 되며, 결코 어떠한 식민지, 반식민지에서든지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세우는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바로 그 자신이 엄중한 경제적 위기 및 정치적 위기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머지않아 멸망될 것이기 때문에 기어코 중국을 침공하며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이 자산계급 독재를 수립하는 길과 민족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길을 끈허버렸다.

 

다음으로 사회주의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모든 제국주의는 다 우리의 적이다. 중국이 독립하려면 결코 사회주의 국가 및 국제 무산계급의 원조를 떠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소련의 원조를 떠날 수 없으며 일본 및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각국의 무산계급이 자국 내에서 진행하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의한 원조를 떠날 수 없다. 비록 중국혁명은 반드시 일본 및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등 여러 나라들, 혹은 그중의 한두 나라들에서 혁명이 승리한 후에야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역량이 첨가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특히 소련의 원조는 항전의 종국적인 승리를 위하여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될 조건이다. 소련의 원조를 거부한다면 혁명은 실패되고 만다는 것은 1927년 이후의 반소운동의 교훈이 아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현 세계는 혁명과 전쟁의 새 시대에 처해 있으며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사멸하고 사회주의가 결정적으로 흥성하는 시대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중국에서 반제·반봉건 투쟁이 승리한 후에 다시금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세우려 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한 잠꼬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특수한 조선(자산계급이 그리스의 침략을 물리쳤고 무산계급의 역량이 너무 미약하였던 것)으로 말미암아 제1차 세계대전과 10월 혁명 이후에는 그래도 케말식의 미약한 자산계급 독재의 터키라는 나라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사회주의 건설을 완성한 이후에 있어서는 다시 그런 터키 같은 나라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며, 45000만 인구의 터키가 생겨나는 일은 더구나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특수한 조건(자산계급의 연약성 및 타협성, 무산계급의 강대성 및 혁명의 철저성)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는 종래로 터키에서와 같은 그러한 험악한 일은 없었다.

 

1927년에 중국의 제1차 대혁명이 실패한 후 중국의 자산계급분자들은 한때 케말주의니 무엇이니 하는 것을 부르짖지 않았던가? 그러나 중국의 케말은 어디 있는가? 중국의 자산계급 독재와 자본주의 사회는 또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소위 케말의 터키까지도 나중에 부득이 영국 제국주의와 프랑스 제국주의의 품안으로 들어가서 점점 반식민지로 전락되었고 제국주의적 반동세계의 일부분이 되지 않았던가! 목하의 국제환경에서는 식민지, 반식민지의 어떠한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그는 제국주의 전선 편에 서서 세계 반혁명 역량의 일부분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반제국주의 전면에 서서 세계혁명 역량의 일부분이 되는가, 반드시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게 될 것이며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국내환경을 두고 망한다면 중국의 자산계급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서 필연코 교훈을 얻었어야 할 것이다. 대자산계급을 비롯한 중국의 자산계급은 1927년의 혁명이 무산계급, 농민 및 기타의 소자산계급의 역량에 의하여 막 승리하였을 때, 이 인민대중을 도외시하고 혁명의 열매를 독차지한 후 제국주의 및 봉건세력과 반혁명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동시에 있는 힘을 다하여 10년간의 공산당 토벌전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하였던가? 오늘날 강대한 적이 국토 안으로 깊이 쳐들어와 있고 항일전쟁이 진행된 지도 이미 2년이나 되었는데, 그래도 이미 때가 지난 구미 자산계급들의 낡은 길을 그대로 답습하겠단 말인가? 과거 10년간의 공산당 토벌에서도 아무런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 사회도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그도 한 번 더 시험해보겠단 말인가? 물론 10년간의 공산당 토벌에서 일당독재를 토벌해내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반식민지 반봉건적 독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공산당 토벌을 한 지 4(1927년부터 1931년의 918일까지) 만에 만주국을 토벌해냈으며, 거기에 6년을 더한 1937년에 이르러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설치고 있는 중국 중심부로 토벌하기 위해 들어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제부터 또 10년동안 더 토벌하려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공산당 토벌의 전형이 되긴 하겠지만 본래의 의도와는 다소 구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먼저 발벗고 나서서 이러한 새로운 공산당 토벌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그 사람은 바로 왕정위(왕징웨이). 그는 이미 명성이 대단한 신식 반공인물이다.

 

누구나 왕정위 편에 가담하고자 한다면 가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자산계급 독재요, 자본주의사회요, 케말주의요, 현대적 국가요, 일당독재요, 한 개주의요 하는 등등의 듣기 좋은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거북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이 아닌가? 만일 왕정위 편에 가담하지 않고 항일 편에 가담하려 하면서 또 항일이 승리한 후에는 항일적 인민들을 차버리고 항일의 성과를 자기가 독차지하여 일당독재 만세를 부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또 꿈을 꾸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항일, 항일 하는데 대체 누구의 힘으로 할 것인가? 노동자, 농민 및 기타의 소자산 계급을 떠나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그들을 차려고 덤빈다면 그 자신이 도리어 차이게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보통상식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중국 자산계급의 완고파는 20년간에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모양이다. 보라, 그들은 아직도 공산당을 제한하자”, “공산당을 용해하자”, “공산당을 반대하자는 등으로 무턱대고 떠들어대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이당활동제한법이라는 것을 내놓은 후에 또 <이당문제처리법>이라는 것을 내놓았고, 이당문제처리법의 실시방안이라는 것을 하나 내놓지 않았는가? 도대체 이렇게 제한하고 처리해가다가 민족의 운명을 어떻게 할 작정이며, 또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 우리는 이 선생들에게 성의껏 충고하고 싶다. 다시는 자기들의 오류를 반복하지 말고 눈을 뜨고 중국과 세계를 한번 살펴보고, 국내와 국외를 한번 살펴보며, 또 현재의 형편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오류를 그냥 되풀이 해나간다면 민족의 운명이 불행을 당하게 될 것은 물론이려니와 당신들 자신의 일도 난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필연적이며 확정적인 운명이다. 중국 자산계급의 완고파가 만일 각성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의 항일통일전선이 지속되어 나갈 것을 희망하며 혼자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여 항일사업을 승리하도록 할 것을 바란다. 이것만이 사액이며 이외의 것은 모두가 하책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공산당원들이 충심스런 마음으로 하는 권고다. 그러니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고 변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밥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주 옳은 말이다. 적을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치는 이상 밥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어야 하고, 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해야 하며 글도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읽어야 한다. “혼자 삼키려 한다”,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수작은 봉건영주들이 하던 짓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20세기 40년대에 와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혁명적인 사람들을 결코 배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항일하려 하는 모든 계급, 계층, 정당, 정치단체 및 개인들의 통일전선을 견지하며 장기적으로 합작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공산당을 배척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통일전선을 분열시키려 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중국은 계속 항전해야 하고 단결해야 하며 진보해야 한다. 누구를 물론하고 투항하려 하거나 분열하려 하며 퇴보하려 한다면 우리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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