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815일 일본의 천황은 항복 선언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한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자 한반도 전역에선 기쁨의 함성이 울렸다. 이런 기쁨의 함성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다. 1944년부터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천황의 항복 선언 1일전 조선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회담하여,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 받아 해방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그 시기 여운형이 조직한 것은 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보통 건국준비위원회라고 부른다)였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해방 조선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는 막대했다. 여운형 평전의 저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이기형 선생은 해방 60주년에 만들어진 여운형 다큐에서 몽양 여운형이 가장 인기가 많은 지도자였음을 인정했다. 한국의 대통령인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 조직에 잠시나마 가담했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마찬가지로 소련군이 주둔한 한반도 이북에서 소련군과 함께 친일파 청산과 새 조국 건설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소련군이 주둔하지 않았던 한반도 이남의 경우 진보적인 인물 여운형이 건준을 이끌어 나갔고, 광주에서 벽돌공으로 숨어 지내던 박헌영은 이른바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여 세력을 키웠다. 쉽게 말해 좌익에 대한 민중의 지지율은 매우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공포에 떨었던 세력들은 바로 민족을 팔아먹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단계적으로 청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한반도 이남에 좌익정권이 들어서면 본인들 또한 역사의 심판대에 설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자 했다. 그러던 과정에서 이들이 생각한 것은 바로 좌익에 맞서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연합국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19452월 소련의 얄타에서 모인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은 한반도 분단을 결정했고, 5개월 뒤인 포츠담 회담에서도 이를 확인했다. 따라서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는 바로 38도선을 기점으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그리고 한반도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갈 계획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대일선전포고 이후 치스차코프 휘하의 제1극동전선군이 한반도 이북을 단기간에 해방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19456월에 끝난 오키나와에서 상륙이 멈춰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군의 상륙은 상대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었다.

 

194598일 첫 미군부대가 인천항에 상륙했다. 남한 땅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다음날인 9일에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미 제7사단에 있던 총지휘관은 바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의 패튼이라 불렸던 존 리드 하지였다.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을 갖고,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일장기를 내린 뒤 성조기를 올렸다. 이로써 미군정이 실시된 것이다.

 

미군정은 제1단계로 서울과 경기지역을 점령하고 912일부터 23일까지 개성과 수원 그리고 춘천 등을 점령했으며, 2단계에서는 제40사단이 경남북지역을 점령하고 7사단의 점령지역을 확대시켜 1010일까지 경기도와 강원도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제3단계에서 6사단을 동원하여 전남과 전북까지 접수하며 남한의 전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이 입성할 당시 민중은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이는 여운형이나 박헌영 등의 좌익계열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히 점령군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의 포고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이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의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이러한 포고문은 조선인민의 해방을 언급했던 소련군의 포고령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이남에서 이른바 미군정이 실시됐다. 포고령에서 밝힌 것과 같이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가장 먼저 공포에 떨고 있던 친일 세력들과 손을 잡았다. 총독부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유지했고, 그 인사들의 대다수를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로 채워나갔다. 경찰의 경우는 민중들의 반발을 샀던 친일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과정에서 자주적으로 건설된 인민위원회 그리고 여운형과 좌우인사들이 합쳐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이것은 우리역사에 있어 엄청난 실수였다. 서방에서 최초의 마오쩌둥 전기를 쓴 에드가 스노는 미군정이 건준을 해산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국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결국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나타난 이런 모순적인 구조는 1946년 모스크바삼상회의 이후 대구에서 10.1 항쟁이라는 민중투쟁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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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12 7일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를 기습 공격했다이른바 진주만 기습 공격이었다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일본의 동맹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미국은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태평양 전쟁 초기의 전황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했다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키고 있던 필리핀과 영국의 식민지 버마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미국령 괌과 웨이크 섬까지 일본군에 의해 단번에 점령됐다.

(조선건국동맹, 1944년 8월 10일 현우혁의 집에서 만들어 졌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보복 공습을 계획했다이 보복 공습이 바로 두리틀 공습이다. 1942년 4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는 대략 16대의 미국 항공기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미군 항공기의 공습을 받은 일본 도쿄는 순식간에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이 공습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그가 바로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이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던 여운형은 미군의 일본 공습을 목격하자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1943년 여운형은 친구 오건영에게 자신이 목격한 미군 공습에 대해 얘기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건국동맹 서울 조직의 현재 위치)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은 미국에서 이승만이 하고 있던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들었었고몇몇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방송 내용을 주변 인사들에게 전달했다그 결과 일제가 그토록 은폐하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의 전황과 해외 독립운동의 상황이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조선건국동맹 깃발)

 

1942년 12월 일본은 여운형을 치안유지법을 포함한 4가지 죄목을 씌워 감옥에 수감했다일본이 여운형에게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들의 침략전쟁에 대해 협력하지 않은 보복적 차원이기도 했지만여운형이 일제의 패망에 대해 비밀리에 알렸기 때문이기도 했다이렇게 구속된 여운형은 대략 7개월 동안 유치장에 구치되어 각가지 고문을 당했으며, 1943년 여름이 돼서야 풀려났다.

(서울 1945에서 나왔던 조선건국동맹)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1943년 8월 10일 조동호·이상도·이상백 등과 같은 인물과 만나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아우르는 조직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의했다그리고 이와 함께 조직의 하부를 구성하기 위해 각지에 연락원을 배치했으며조직을 넓혀 나갔다이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 1년 뒤인 1944년 8월에 새로운 단체로 확장 그리고 탄생했다그 조직이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었다여운형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정병준 교수는 1995년에 쓴 저서 <여운형 평전>에서 조선건국동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지금까지는 건국동맹이 1944년에 전격 결성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그러나 건국동맹은 실상 여운형의 형무소 생활시기(1942년 12~43년 9)에 구상되었고,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잠정명칭으로 1년여의 숨 가쁜 준비 작업을 거쳐 조직된 결과물이다즉 1944년 8월에 선포된 건국동맹은 1년 이상이 걸린 결과였던 것이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서울에 있는 현우혁의 집에서 건설됐다건국동맹은 ‘3불맹서라는 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했고두달 뒤인 10월 8일 자신의 고향인 양평군 용문산으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여기서 여운형은 또 다른 단체를 조직하는데그게 바로 농민동맹이었다농민동맹 또한 조선건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고징병 및 징용자들을 도피시키고 그들을 반일운동을 전개하게끔 활동하고자 했다또한 여기서 여운형은 청년학생들을 조직했고여운형이 이런 과정속에서 만난 대표적인 청년이 바로 독립운동가이자통일운동가 그리고 시인이자 <여운형 평전>의 저자인 이기형 선생이다.

(배우 신구가 연기한 여운형, 신구는 서울 1945에서 여운형을 연기했었다.)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국내의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제외하고 조직 가능한 모든 세력의 힘을 결집시키고자 했다사회주의자민족주의자노동자농민 그리고 학생과 부녀자 까지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결집했다비록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중요한 건 그런 감시와 억압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미리 대비했다는 사실이다또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1945년 4월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회담과 관련하여 연안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했으며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도 연락망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렇듯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일제 통치 말기에 이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고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하고자 했으며좌우를 총 망라했다여운형의 이러한 노력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남과 북을 아우르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으로 확산되었고해방정국 초기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해나갔다안타깝게도 여운형은 이러한 업적에 비해 매우 저평가 당해왔다이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이기도 하다앞으로는 그의 이러한 독립투쟁사가 재조명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몽양 여운형 평전김삼웅채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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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파리 코뮌 - 민중의 함성
자크 타르디 지음, 홍세화 옮김, 장 보트랭 / 서해문집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51일 노동절이 되면 집회에서 항상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시작은 일어나라!’로 시작하여 끝은 인터내셔널로 끝난다. 바로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 이 노래는 대다수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불린 대중음악으로 지금도 각종 시위 현장에서 불리고 있다. 이 곡이 대중적으로 불리게 된건 1888년이었지만, 처음으로 작사된 것은 1871년이었다. 1871! 이 해의 프랑스 파리는 역사가 새로 쓰였다. 바로 2개월간 지속되었던 파리코뮌(La Commune de Paris)이다.

 

1870년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잘 훈련되고 규율 있던 프로이센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어야만 했고, 비스마르크의 군대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1871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른바 통일된 독일 제2제국을 선포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프랑스 정규군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의 모습을 본 파리의 시민들은 이들에게 맞서 스스로 무장하여 봉기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코뮌이었다.

 

2개월간 지속되었던 파리코뮌에서 봉기한 시민과 노동계급은 선거를 통해 시 전역을 통괄하는 민중 주도의 새로운 입법, 행정 정부를 구성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개혁들을 실시해나갔다. 비스마르크 군대로부터 대포와 탄약을 지원받은 프랑스 정규군의 고립 속에서도 코뮌속의 민중은 민주주의와 평등사회 그리고 진보사회를 위해 싸웠다.

 

파리코뮌이 전 세계에 보여준 엄청난 변화였다. 19177월 봉기 이후 핀란드로 망명했을 당시 레닌이 쓴 저서 국가와 혁명을 읽어보면 칼 마르크스가 1871년의 봉기를 지지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혁명운동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시도이자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에서 일정한 진보이며, 수백의 강령과 논의보다 더 중요한 실천적 일보라고 보았다.

 

사회주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파리코뮌은 사회주의 역사 그리고 인류 역사에 있어 진보적 전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코뮌은 프랑스 정규군의 잔혹한 학살극으로 마무리가 됐다. 자주적이고 진보적이었던 노동계급의 코뮌은 권력과 침략군에 굴복한 프랑스 정규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프랑스 정규 군대의 진압에는 최신식 대포가 동원되었다. 또한 7만 명 이상의 진압군대가 동원되었다. 그 결과 코뮌에서 시민과 노동계급 최소 2만 명이 학살당했다.

 

서해문집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설국열차(Snow piercer)의 원작자인 자크 타르디가 쓴 만화책이다. 책에서 중심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한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와 한 개인의 복수를 향한 여정일 수도 있다. 물론 책은 그 과정 속에서의 코뮌과 그 코뮌속의 개개인들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또한 코뮌이 어떠한 열정에 차 있었는지도 생생히 느끼게 해준다. 부패한 관리들,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코뮌의 민중들, 비참한 사회에서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하지만 총을 들고 코뮌에서 싸웠던 파리의 매춘부들 그리고 진압군이었지만 항복하여 코뮌에 합류한 군인들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개된다.

 

1871년의 파리코뮌을 얘기하면 우리에게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박정희가 살해된 뒤, 잠시나마 있던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대학생들을 광주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면서 다시 군사독재라는 지적 사상적 암흑의 터널로 들어갔던 역사가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비록 파리코뮌보다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980518일부터 27일까지 대략 10일간 광주 시민들은 무차별 학살과 폭력을 휘두르는 계엄군에 맞서 카빈 소총을 들고 싸웠다.

 

광주항쟁에서 계엄군의 총과 탱크에 맞서 싸웠던 이들 대부분이 민주주의를 원했던 학생들과 노동계급 그리고 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1871년 프랑스의 파리코뮌의 혁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1871년 프랑스 시민들의 투쟁이 1980년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총을 들고 저항을 했던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민중들을 떠올렸다. 이랬기에 책의 내용이 더 와 닿을 수 있었다. 1871년의 프랑스 파리 그리고 1980년의 대한민국 광주. 이 투쟁이 연결되어 보이는 것은 아마 앞에서 설명한 그 유사성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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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유행했을때 나온 만화에요. 즐겁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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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에서 패배했지만 적(프랑스군)은 여전히 상황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그들은 디엔비엔푸를 쉽게 점령한 나머지우리가 그곳을 공격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여겼다집단전술기지가 매우 강력하게 구축된 데다디엔비엔푸와 아군의 후방지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베트남 콘툼성, 콘툼성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다. 이 지역은 이후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과 미군이 결전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된다.)

 

적은 우리가 여러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중이므로디엔비엔푸에 대한 공격을 주저할 것이고보급의 어려움을 안고 있으므로 조만간 북서지방으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우리가 일련의 문제를 감수하고 그들을 공격하더라도우리 정규군의 일부를 격멸하고 뚜언자오(Tuần Giáo)와 손라(Son La)를 점령하여 최종적으로 나산(Nà Sản)에 복귀하는 기존의 계획을 이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안케 전투 당시 베트민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프랑스군과 장갑차)

 

적이 15개 대대를 동원해 1954년 1월 20일부터 제5연합구역 내에 위치한 푸옌(Phú Yên) 남부에 공세를 전개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다아틀랑트 작전으로 명명된 이공세는 나바르 계획의 전략적 공세로중부의 남쪽지역에 있는 모든 해방구의 점령이 목적이었다적이 우리 해방구를 공격했음에도불구하고5연합구역의 우리 군대는 가장 결연하게 그들의 계획을 이행했다적에 대항하고 우리 후방지역을 엄호하기 위해 후방에 극소수의 부대만 남겨놓고주력은 적이 상대적으로 노출된 전략적 요충지역인 떠이응우옌(Tây Nguyên)을 점령했다.

(전투에서 손실된 프랑스군 탱크, 손실된 탱크가 M4 셔먼인걸로 봐선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보인다.)

 

공세는 1954년 1월 26일에 시작되었다다음날우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지방인 망덴(Măng Đen)구역을 확보했다뒤이어 닥또(Dacto) 초소를 무너뜨리고콘툼성의 모든 북부지역을 해방시켰다. 2월 5우리는 콘툼시를 해방시키고 적을 떠이응우옌 북부에서 밀어내어 9번 국도까지 전진했으며한편으로는 플레이쿠(Pleiku)시를 공격했다적은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제5연합구역에 대한 공세를 멈춰야 했다그리고 떠이응우옌의 남부에 위치한 일련의 요새와 플레이쿠시에 병력을 증원하여 우리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프랑스 부대들이 중부 라오스와 빙찌티엔에서 철수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되었던 베트민군)


콘툼의 승리는 동춘 전역에서 거둔 우리 인민과 군의 또 다른 위대한 성공이었다우리는 제5연합구역에서 적의 꽝남성꽝응아이성에 대한 위협을 불식시켰으며떠이응우옌 북부에 16에 달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해방시켰다우리 해방구는 꽝남과 꽝응아이 해변에서 베트남-라오스 국경선까지 확장되어해방된 라오스의 볼라벤 고원지대와 연결되었다이번 승리는 당중앙위원회 지도 원칙의 가치를 전적으로 입증시켜주었다적은 점점 더 수세로 몰려갔다적은 중부 라오스 중원을 위해 북부 삼각주의 병력을 전환시키고이후에도 라오스 방면과 빙찌티엔에서 떠이응우옌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안케 전투 승전 기념 행사, 2015년 베트남에서 열린 행사 같다.)

 

적은 제5연합구역을 공격점령할 목적으로 전투력을 집중시켰으나이제 우리 공세에 맞서기 위해 계획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적은 병력을 집중시키기를 원했으나계속 분산을 강요받았다플레이쿠와 떠이응우옌 남부에 있는 일련의 요새들은 프랑스 부대들이 몰려드는 4번째 지역이 되었다떠이응우옌에 대한 아군의 공격은 승세를 타고 1954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우리의 대성공 중에는 한국에서 막 돌아온 제100기동연대를 각개격파한 안케의 승리도 포함되었다우리는 안케를 해방시키고 많은 차량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출처 디엔비엔푸 p.43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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