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로 미 중앙정보국이 심어놓은 우익 정부가 반란에 직면해 있던 라오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 가운데 한 곳인 단지평원이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정부나 언론은 이런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지만, 라오스에 살고 있던 미국인인 프레드 브랜프먼(Fred Branfman)은 저서 단지평원의 목소리(Voices from the Plain of Jars)에서 이에 관해 이야기했다.

 

“19655월부터 19699월까지 단지평원에 대한 25,000회가 넘는 출격이 이루어져 75,000톤 이상의 폭탄이 투하됐다. 지상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했으며 수만 명이 지하로 내몰렸고 결국 지상의 사회 전체가 철저하게 무너졌다.”

 

농촌 마을에서 라오스인 가족과 함께 살면서 라오스 말을 할 줄 알았던 브랜프먼은 폭격을 피해 수도 비엔티안(Vientiane)으로 몰려들어온 피난민 수백 명을 인터뷰했다. 브랜프먼은 그들의 말을 기록하고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존해 뒀다. 시엥쿠앙(Xieng Khouang. 단지평원이 자리한 주) 출신인 26세의 간호사는 고향에서의 생활에 관해 말해줬다.

 

나는 우리 마을의 흙과 공기, 고지의 평야, 논과 못자리와 하나가 되어 살았지요. 달 밝은 밤이나 낮이나 나와 마을 친구들은 새들이 지저귀는 숲과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추수 때나 모내기철에는 땡볕이든 빗속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땀 흘려 일하면서 가난하고 비참한 환경에 맞서 싸우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부의 삶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1964년과 1965년에 우리 마을 근처에서 터지는 폭탄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늘을 선회하는 비행기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 중 한 대가 기수를 아래로 돌려 땅을 향해 곤두박질을 치면서 가슴을 찢는 듯한 굉음을 지르고 나면, 사방이 빛과 연기로 뒤덮여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웃 마을 사람들과 어제 있었던 폭격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곤 했어요. 집이 몇 채나 부서졌는지,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구덩이! 구덩이였어요! 그 때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는 데 가장 필요했던 건 구덩이였어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논과 숲에서 곡식을 키우는 데 쏟아야할 땀과 힘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덩이를 파는 데 다 써버렸습니다.”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친구들이 왜 라오스의 혁명운동, 즉 라오스애국전선에 이끌리게 됐는지를 설명해 줬다.

 

어린 소녀였을 때 저는 과거의 역사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남자들이 약자인 여성을 학대하고 놀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라오스 애국전선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뒤부터 아주 달라졌어요. 라오스애국전선 아래서는 심리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그들은 여자도 남자만큼 용감하다고 가르쳤지요. 예를 들어볼게요. 전에도 학교에 다니긴 했는데, 오빠들은 다니지 말라고 했었어요. 졸업을 해도 고위직 관리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꾸니까, 그런 꿈은 엘리트 집안이나 부자 집안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거니까 학교를 다녀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말이었지요.

 

그런대 라오스애국전선은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우리한테도 동등한 권리를 줬고, 누구도 우리를 놀림감으로 삼지 못하게 했지요.

 

그리고 낡은 관념도 새루은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령 새로 교사와 의사로 양성된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어요. 또 그들은 극빈층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지요. 많은 논을 가진 사람들의 땅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거든요,”

 

17세의 소년은 혁명군대인 라오스의 땅(Pathet Lao(파테트 라오), 라오스애국전선의 군사조직) 병사들이 자기 마을에 온 일에 관해 말해 줬다.

 

몇몇 사람들은 두려워했는데, 대부분 돈 있는 사람들이 그랬죠. 이런 사람들이 라오스의 땅 병사들에게 먹으라고 소를 내줬는데, 병사들은 받지 않았어요. 받는 경우에는 적당한 값을 치렀죠. 실로 이 병사들은 사람들에게 아무 두려움도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촌장과 군수 선거를 열어서 주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게 했습니다.”

 

중앙정보국은 자포자기식으로 흐몽 족(Hmong, 라오스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민족)을 군사작전에 편입시켜 흐몽 족 수천 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라오스에서 벌어진 일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역시 비밀과 거짓말로 점철된 작전이었다. 19739, 라오스 주재 정부 관리를 지낸 바 있는 제롬 둘리틀(Jerome Doolittle)뉴욕타임스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캄보디아 폭격에 관해 국방부가 최근에 한 거짓말을 들으면서 나는 라오스 비엔티안 주재 미국대사관의 공보담당관으로 있을 때 종종 생기곤 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했던가?

 

처음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작은 나라에 우리가 대규모적이고 무자비한 폭격을 하는데 대한 모든 언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미국은 라오스 왕국 정부의 요청으로 비무장 정찰 비행을 수행하고 있으며, 공격을 받을 경우 응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무장 호위 비행대가 정찰기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기자들도 모두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노이 역시 내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국제통제위원회 역시 알고 있었다. 관심 있는 모든 하원의원과 신문 독자들도 알고 있었다.

 

결국 이런 거짓말은 어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그 어떤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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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Paperback) -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Nick Turse / Picador USA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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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찾고찾던 책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전쟁범죄가 미라이 학살 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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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장제스 총통이 비밀리에 푸른셔츠단이라는 엘리트 조직을 결성했다. 푸른셔츠단의 한 대원은 "처음에는 파시즘을 후진적으로 생각했다"면서 "그러다가 국가를 발전시키는 진보적인 수단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파시즘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가 보전이었다. 푸른셔츠단의 기관지는 사설에서 "파시즘이란 파멸 직전의 국가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구했다.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스트 정신을 모방해 폭력 투쟁의 길로 나서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장제스 총통은 파시즘 도입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푸른셔츠단 대원들에게 "파시즘이 중국을 구원할 것인가"라고 물은 뒤 "그렇다. 파시즘이야말로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제스는 서구인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싫어했으며, 히틀러의 지도자 원리를 수용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느라 세월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제스는 히틀러의 집권 8개월 뒤 당 간부들에게 "파시즘의 핵심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고 말했다. 국가는 지도자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 재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연히 혁명 정신을 갖춘 위대한 인물로서 모든 당원의 본보기로 일한다. 한편 개별 당원들은 지도자와 집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데 간접적으로는 사회와 국가, 혁명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혁명집단에 참여한 순간부터 권리와 생명, 행복까지 집단에 위임하고 이들 모두를 지도자에 바쳤다. 그래야만 진정한 파시스트라 불릴 수 있다."

 

히틀러의 첫 임기 4년간의 치적은 생각이 같은 다른 사람들을 고무했다. 파시즘은 불평불만자나 권리를 빼앗긴 사람뿐 아니라 선의를 가진 책임자들을 파고들었다. 젊은이뿐 아니라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신선한 대안으로 받아들인 지식인 계층들도 끌어들였다. 국가마다 개성을 가진 파시즘이 발호했지만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의 추종자는 정신적인 단합만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여겼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다.

 

출처: 아들프 히틀러 결정판 1 p.687~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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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륜의 사진)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아내였던 헬렌 포스터 스노우(님 웨일즈)는 어느 한 조선인 혁명가에게 매력을 느꼈었다. 조선인 혁명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헬렌은 그를 인터뷰했고,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책 한권을 출판했다. 그 책이 바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1940년대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후 1960년대 일본에서도 출판됐고, 당시 한국의 젊은 기자출신인 리영희는 우연히 도쿄의 한 서점에서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리영희는 감동했고, 이 책은 이후 한국의 운동권에게도 널리 읽히게 된다. 아리랑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으며, 2000년대 국내에서도 개정판이 나왔었다, 그 아리랑의 주인공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 혁명에도 참가했고, 이후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라는 오명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1970,80년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됐다. 그 인물이 바로 김산이다.

 

김산의 전기인 아리랑이나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을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젊은 시절 김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19년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도 가입했었다. 그 시기 김산이 가장 신뢰하던 혁명 동지 한명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세운 인물 중 한사람이며, 1922년 의열단이 주도했던 다나카 기이치(1919년 여운형과 회담했던 그 인물이다.) 암살 기도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바로 김산의 혁명동지인 오성륜이다.

 

오성륜은 1900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1907년 부친을 따라 간도 지방 허룽 현으로 이주했고, 1918년 훈춘 현 다황거우의 북일중학교를 졸업했다. 3.1 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왕칭 현 봉오동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 독립군 부대에 들어갔다. 1920년 오성륜은 베이징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전광일, 전광, 오진, 오한생, 오성임 등의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성륜은 1922328일 의열단의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 부두에 내린 다나카 기이치 전 육군대장을 저격한 사건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아쉽게도 그가 쏜 총알이 오발루 뒤에 있던 미국인 여성이 숨졌고, 김익상이 던진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오성륜은 김익상과 함깨 체포되어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넘겨졌으며, 2달 뒤인 52일에 수감돼 있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오성륜에게 당시 현상금 500달러를 걸었다.

 

이후 오성륜은 위조 여권으로 독일에 갔다가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방근로자공산대학을 1926년에 졸업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마친 오성륜은 192612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와 광동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입학했고, 거기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79월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내전이 터지자 혁명동지인 김산과 함께 광동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참가하여 국민당 군대에 맞선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국민당 군대의 토벌로 홍콩으로 탈출했고, 1929년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오성륜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으며,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일했다. 193677일 진촨허리 회의에서 항일연군 1, 2군을 합쳐 1로군을 편성했을 때 약 2,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2군의 지휘체계는 군장 왕더타이, 정치위원 웨이정민, 정치부 주임 오성륜이었다. 당시 김일성의 경우 2군 산하 6사의 사장이었다고 한다.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부주임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이 끝나가던 1941년 오성륜은 체포됐고, 일본에게 투항한 그는 친일로 변절했다. 변절한 그는 만주국 치안부로 들어갔고 열하성 경무청 경위부로 일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하북성 승덕에서 한교동맹 위원장 겸 조선독립동맹 승덕시 책임자가 되었으나, 연안에 머물다가 화북지역을 해방시키며 진격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그를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규 작가에 따르면 오성륜은 그들과의 재회를 기뻐하였으나, 조선의용군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47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가 병사했다고도 한다. 정확한 진실은 모르겠으나 그는 1947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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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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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0일 서울대병원에서 100살 먹은 한 노인이 사망했다. 사망일로부터 5일 후 그는 대전에 있는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죽음과 장례식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망 전날에는 서울 시장이었던 박원순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따라서 두 인사의 장례식은 정치적 성향에 다른 이들의 충돌을 우려하여 다른 장소에서 치러졌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돌파 이후 미군 제1 기병사단과 선두 경쟁을 벌인 끝에 북한의 수도 평양에 먼저 입성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백선엽이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으로 알려진 백선엽은 역사적 비판을 피할 수 없는 행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일제시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는 만주군 군사조직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인 19393월에 창설된 부대로 1945년까지 만주에서 활동했던 친일파 부대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적잖게 있었다. 간도특설대에 지원했던 조선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가치와는 상반된 친일 행위였다.

 

간도특설대가 만주에서 창설된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의 뿌리 뽑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만주지역은 항일투쟁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만주 지역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해졌다. 1932년 일본은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창설했지만, 만주지역 곳곳에서 일어나는 항일무장투쟁을 완벽히 꺾지는 못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당시의 중국 대륙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간의 내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반감을 사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만주 지역에 있던 중국 공산당 휘하의 군인들은 일본에 맞서 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을 도와 일본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만주국을 세운 이후에도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토벌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전개됐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다 전사했고,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은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만주 지역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70만 이상이 되었고, 최소 600대 이상의 일본군 항공기도 만주 지역에 배치됐다. 태평양 전쟁과정에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 적잖은 병력이 태평양 전선으로 차출되기도 했으나, 일본 관동군은 명실상부 일본군의 주력을 담당한 병력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세력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병력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협력하던 조선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만주 항일무장투쟁에서 명성을 쌓아 올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현재 북한 최고지도자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수많은 전투를 만주에서 전개했다. 민생단 사건으로 죽을 위기에 놓일 뻔했지만, 김일성은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항일경력을 알아본 중국 공산당의 스중헝이 변호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그 당시 항일 무장투쟁의 붉은 별이었다. 물론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은 김일성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 또한 독립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김일성과 같은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전개한 일본군 안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적잖게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위 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인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에 해당된다. 다만 이들의 경우 일본군에 복무했던 시점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 부대가 만주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시점이었다. 대신 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벌였었다. 이들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을 토벌의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세력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1932년부터 1935년 봄까지 특히 만주의 간도 지역에서 3차에 걸친 대토벌을 벌였고, 그 이후에도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운 토벌 작전을 1940년대 초반까지 전개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마친 김일성은 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최소 1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소련으로 피신하여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됐다. 동북항일연군 3로군 참모총장 허형식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다가 194283일 현재 헤이룽장 성 청안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 이처럼 만주의 상황은 항일과 친일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였다.

 

이번에 김효순 선생의 책 간도특설대를 읽으며, 만주에서 전개된 친일파와 항일독립군의 토벌과 반토벌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던 그 역사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가 말했듯이, 일제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항일의 기준만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토벌하는데 동참하거나 그런 정책에 동참했던 이들이 자신의 행적을 낯부끄럽게 미화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적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으로 포장하려는 행위는 당시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가 산화한 이들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 백선엽이 근무했던 간도특설대의 존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책에서도 언급된 사실이지만, 1939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를 포함하여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여러 특수부대들을 창설했다. 당시 일본이 창설한 특수부대 중에는 소련에서 탈출한 이들을 모아 편성한 아사노 부대도 있었다. 이 아사노 부대는 하사관 이하 사병이 모두 러시아인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만주 북부 지역의 소수민족인 오로촌족을 모집하여 만든 오로촌 부대, 몽골인들을 모아 창설한 기병부대인 이소노 부대 등이 있었다. 일본이 이와 같은 부대를 창설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1년까지 일본이 만주에서 벌인 군사작전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대소정책은 19414월 소일 중립조약이 체결되고 같은 해 127일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수정되었으나, 이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공산주의자 색출 및 토벌이라는 제1차적 반공주의적 목적의 색채가 짙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반공주의적 목적에 따른 정책은 이후 미국이 계승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일정책은 평화적인 정책에서 반공주의적인 정책으로 수정됐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반공주의 정책을 국제적으로 표명했는데, 이에 따라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켜 반공주의 라인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미국의 제임스 포레스털 해군장관은 소련을 봉쇄하려면 일본, 독일과 그 밖의 추축국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는데, 포레스털의 주장은 미국의 대일정책 기조가 됐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냉전 초기 미국의 대소련 정책이 과거 일본의 대소련 정책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다. 일맥상통하는 것은 바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다. 비극적이게도 만주에서 일어났던 토벌의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반복됐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백선엽이 지리산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현상과 그가 이끌던 빨치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반공주의에 의해 가려진 만주 항일투쟁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며, 김효순 선생의 저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사실을 읽는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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