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을 방문한 응오딘지엠)


1963년 11월 2일 새벽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선 일부 군인들이 발사한 총소리와 그들이 운전하는 군용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였고, 대통령과 대통령의 동생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결국 쿠데타군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과 그의 동생은 항복했고, 항복한 그들은 지휘본부로 호송중 총살당했다. 당시 쿠데타 군이 처형한 대통령은 남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재자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었다. 응오딘지엠은 한때 미국이 공산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을 들어 내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지원을 받은 내부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왜 응오딘지엠은 암살당한 것일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됐다. 이에 따라 17도선 이북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호치민이 이끄는 정부가 세워졌고, 이남에는 미국이 내세운 정권이 등장했는데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내세웠던 인물은 무능한 황제 바오다이(Bao Dai)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바오다이는 용도가 다 떨어졌고, 여기서 미국이 찾은 인물이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

(남베트남 병사들을 보고 있는 응오딘지엠)


응오딘지엠은 대힌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 Man Rhee)처럼 미국의 구미에 아주 잘 들어맞은 인물이었다. 우선적으로 그는 식민지 시절 20년간 고위 관료로 일했던 경력이 있었고, 망명 초기 벨기에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몇 년간 미국서 살던 인물이었다. 거기다 그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이런 점은 미국 정치인들에게 좋게 비추어졌다. 냉전이 한참이던 당시 미국은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도미노 이론이란 한 나라가 공산화 되면 다른 나라도 덩달아 공산화 된다는 이론으로써, 만일 베트남이 공산주의가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주의가 된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방어벽을 만들기 적합한 곳으로 남베트남을 선택했고, 과거 프랑스가 일정부분 통치하다 물러난 지역에 새로운 민족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은 미국에서 살던 반공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에게 남베트남의 대통령 자리를 앉혀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민중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다. 호치민이 이끌던 북베트남은 정통성에 있어서 항일 항불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찔러 독립을 쟁취했던 업적이 있었다. 그에 반해 디엠 정권의 그렇지 않았다. 새로들어선 남베트남의 군대는 과거 프랑스가 창설한 베트남 괴뢰군에 있던 인물들이 군사에 있어 주요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디엠정권의 내각은 중세시대의 족벌정치를 연상시켰다. 남베트남의 내각은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인물들이 아닌 가톨릭 신자들과 디엠의 일가친척들로 구성됐다. 즉 응오딘지엠이 원하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었다. 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좌관으로, 응오딘 누의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자기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선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응오딘지엠 정권은 토지개혁에도 실패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토지를 할당했고, 민중 대다수가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석가탄신일을 불법화하여 불교도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몇몇 절들을 습격하여 불교도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다. 이것이 결국 민중이 응오딘지엠을 지지하지 않게 된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 남베트남에선 자생적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내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응오딘지엠 정권의 민중탄압은 그 강도가 높아졌다. 그들은 전략촌(Strategic Hamlet)이라 하여, 농민들이 사는 마을에 ‘지역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주민 통제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주민들 보호이기 보단 억압에 가까웠고, 역으로 대다수 농민들이 베트콩을 지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분명히 반민중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정권이었다. 당시 미국은 디엠 정권이 무능과 부정부패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1950년대 후반부터 고문단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규모는 1961년 900명이었지만, 불과 2년 뒤인 1963년에는 1만 6000명까지 증가했다.

(응오딘지엠의 시신)


이렇게 해서 남베트남 안에선 제국주의 모순이 드러났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63년 6월에 있었다. 극심한 불교도 탄압에 맞서 틱광둑(Thich Quang Duc)이라는 한 승려가 수도 사이공에서 몸에 기름을 붙고 소신공양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된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남베트남의 종교 탄압을 아주 정확히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응오딘지엠의 재수인 마담 누(Madame Nhu)는 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신공양한 고승을 ‘바베큐’에 빚대어 얘기하면서 베트남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분노를 샀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남베트남 곳곳에서 승려들이 소신공양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응오딘지엠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도 격렬해졌다. 그 이후에도 응오딘지엠은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여 불교 사원을 습격, 30명의 승려에게 부상을 입히고 1400명을 체포했으며 사원들 폐쇄시켰으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디엠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디엠은 듣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존F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응오딘지엠을 제거할 계획에 착수했다. 1963년 10월 2일 케네디는 CIA에서 한 달이 넘도록 세밀하게 검토한 수정 계획을 승인했고, CIA는 즈엉반민(Duong Van Minh)을 포함한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 있는 남베트남 군부와 접촉하여 쿠데타 계획에 착수했다.

(응오딘지엠 암살을 알렸던 서방의 기사)


쿠데타는 1963년 11월 1일에 개시됐다. 오후 1시 30분에 시작된 쿠데타는 주요 시설들을 장악한 뒤,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당시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 대령은 1개사단을 지휘했었는데, 그 또한 이 쿠데타에 참여했다. 대통령궁을 포위한 쿠데타 군은 응오딘지엠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2번이나 항복을 거부했고, 오후 4시에 쿠데타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다음날인 2일 새벽 3시 30분, 대통령궁에 대한 전투기와 탱크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되자, 응오딘지엠은 경비대에 전화를 걸어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3시간 뒤인 오전 6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항복과 명령 자체는 전화를 통해 이어졌고, 쿠데타군은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쿠데타군이 응오딘지엠을 발견한 곳은 인근 가톨릭 성당이었다. 항복을 선언한 디엠은 동생 누와 함께 무장 호송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호송도중 총살당했다. 이로써 응오딘지엠이 죽고 그의 정권이 무너졌다. 미국은 베트남 분단 초기 그를 호치민에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이라 착각했지만,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응오딘지엠 통치 초기부터 드러났다. 미국은 응오딘지엠 정권이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미노 이론에 빠져 그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이 응오딘지엠을 제거하는 계획에 착수한 것은 1963년 그가 미국의 말을 무시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미국이 보기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신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서 부패하고 무능하며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미국에게는 이대로 가면 남베트남이 분노한 민중에 의해 공산화 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응오딘지엠과 케네디 암살을 같이 주제로 다룬 책)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진 이후 즈엉반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새로운 정권은 또 다른 쿠데타로 전복되고, 남베트남 내부의 쿠데타는 1965년 젊은 군부로 결성된 응우옌 반 티에우와 응우옌 까오 끼가 일으킨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즉 응오딘지엠 암살부터 1965년까지 총 10번 이상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것은 남베트남이 응오딘지엠때부터 무너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남베트남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1965년부터 세계 최강의 군대가 베트남에 대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진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역사학계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당시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을 시점으로 붕괴했을 것이라는 입장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대다수 학계의 주장이다. 즉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학계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그 부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따라서 이런 정권을 옹호하는 일각의 시각은 지극히 반공주의적 시각이며, 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역사를 그저 반공주의에 맞게 해석하는 편협한 관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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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나라 소련은 70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나라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라는 제1의 자본주의 경제대국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경쟁을 했던 나라로 냉전(Cold War)을 장식했던 국가였다. 미국하고 경쟁했던 소련이 미국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였던 부분은 바로 체제에 있었다. 미국은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소련은 집단과 공동체의 이익과 소유를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사회였다.

 

냉전시기 그 냉전의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던 한국사회에선 공산주의는 절대로 긍정받을 수 없는 혹은 긍정해서는 절대로 안 될 악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대중들이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좋게 볼 리 만무했고, 소위 서방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리거나 과장한 내지는 왜곡해온 소련에 대한 인식이 한국의 대중들에게도 먹혀들어갔다. 1990년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소련(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 섬에 살던 한인 1세대 중 한명은 19913월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왔는데, 2일 뒤 기분이 매우 나쁜일을 겪었다. 수십년만에 고국에서 친척을 만났지만, 친척들이 인식하는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인식이 매우 천박했기 때문이다.

 

그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사할린 동포)을 마치 감자와 빵만 먹고 사는 즉 못먹고 사는 가난뱅이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 공산주의 국가는 가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소련 시절 일반 인민들의 삶은 절대 빈곤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굶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저 빵과 감자만 먹는 사회가 아니었단 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회주의 국가하면 가난하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아주 불행한 국가 취급을 했다. 그리고 이런 편향된 우익적 편견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남아있다.

 

소련에 대한 이와 같은 편견은 비단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한국만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소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서구 국가들 또한 소련과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 대표적으로 서방세계가 소련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학살, 독재, 강제수용소, 비밀경찰, 언론탄압, 굶주림과 같은 단어들이다.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북한을 볼 때 막연히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익적 편견에 맞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집단이 유럽에 있다. 그게 바로 그리스공산당(KKE)이다.

 

1918년 창당이래로 지금까지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항상 행동으로 실천해왔던 그리스공산당(KKE)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혁명적 업적과 대의를 이어받고자 고군분투하는 단체다. 지난 2013년 그리스공산당에선 소련에 대한 우익들의 왜곡에 맞서 3가지 파트로 나눈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이다. 책의 구성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economy)’, 두 번째는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on the socialist power)’, 세 번째는 역사왜곡에 대하여(On the falsification of history)’.

 

첫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계획경제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를 이루는 요소인지, 그리고 그 계획경제를 통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어떻게 달랐는지 또 왜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필요한지 거기서 인민들에게 부여되는 경제적 혜택이 무엇인지를 얘기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자본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들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하면 그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크다. 즉 이렇게 이상적이기에 사회가 발전할 수 없고 생산력이 낮아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1930년대 소련이 추진한 사회주의 경제 모델은 사회주의를 왜곡하는 서방의 기준으로도 연 최소 14%의 경제성장률과 생산력을 보였으며, 단기간의 발전을 통해 무상복지를 인민들에게 부여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이란 똑같이 분배한다는 개념이라기 보단 인민이 받아야할 하나의 권리로써 의료나 교육 공공시설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개념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모두가 똑같이 월급을 공평분배 받는 사회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선 노동한 만큼에 따라 급여를 받는 사회였다. 즉 더 많이 일한 사람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1930년대 소련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이 일어났다. 책에선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하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로 사회주의 건설 첫 해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노동자들이 조직한 자발적 노동인 공산주의 토요노동(Communist Subbotniks)”이 있다. “공산주의 토요노동은 사회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인 공산주의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 태도를 형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했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규율을 장려하고 노동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였다. 또한 주목할 만한 사례로 1930년대 소련에서 발전한 스타하노프(Stakhanovite) 운동이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사회주의 생산에서의 혁신적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운동으로 새로운 기술의 응용에 기초하여 노동 생산성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26~28

 

두 번째 파트인 사회주의 권력에 대하여 서방과 우익들이 가장 많이 악의적으로 얘기해온 주제로써 거기에 대한 반박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공산당의 독재라던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가 같다던지 하는 우익들과 서방세력들의 악의적인 주장들에 대한 반박 말이다.

 

소련 사회는 1924년 소련 첫 헌법에서 확립되었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직접적임 참여가 대표적인 단체들에서 간접선거에 의해 수행됐다. 1936년까지 소련에선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공장, 생산단위, 마을에서 노동자권력의 중핵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련의 대중 조직들의 기능을 통해 이루어졌고, 국가의 법률을 승인하기 위한 절차에선 노동자권력의 중핵 조직들의 회합이 개최되었으며 그 모임에서 노동자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 기관들의 작동은 정치활동에서 대중들의 전례 없는 참여를 보여주었다. 1977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국가권력의 지역기관(예를 들어, 대표자 소비에트)은 국가 전역에 5만개 이상이 존재했다. 이러한 소비에트에는 220만 이상의 선출된 대표자들, 즉 소련 전체 주민의 대략 1%가 있었다. 11936년 헌법부터 41년 만에 2,500만 명 이상의 인민들이 비스와 콜호즈(집단농장)에 있는 인민의 통제기관 안에서는 노동자 회합에서 2년마다 대표자를 뽑는 선거가 있었고 대략 9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관들에 참여했을 정도다. 즉 소련이라는 사회에는 최소한 이러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에서의 중심은 노동자 권력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서구식 민주주의를 얘기하면 마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인냥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면에선 민주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공산당도 포옹한다는 논리로 간혹 나가기도 한다.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 계급이 일반적으로 공산당들이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당들이 자신들을 전복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공산당들에 대해 더 가혹한 수단들을 동원한다.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그리스에서 그리스공산당(KKE)의 역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로 점철돼 있다. 공산당의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은 노동자 계급의 승리이다. 그리스에서 1929년 엘레우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민주정부는 공산주의를 법률 위반으로 선언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법률로 금지했다. 그리스공산당은 27년 동안(1947-1974) 불법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기간 중 20년은 파시스트나 군사독재 기간이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부의 기간이었으며, 그 시절 테러, 고문, 추방, 처형 등이 자행됐다. 최근까지 민주주의의 정점으로서 위선적으로 유럽연합(EU)을 대표했던 의회민주주의와 다당제 체제의 옹호자들이 유럽연합의 많은 국가들에서 공산당들과 청년조직, 공산당의 상징들을 법으로 금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체코 공화국에서 공산주의 청년조직은 최근까지 불법이었다. 부르주아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 내렸다. “공산주의 청년조직 강령에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대체할 필요성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범죄이다! 폴란드와 어디에서든지 공산주의 상징물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존재한다. 발트해 국가(Baltics)는 공산당을 금지하는 반면 나치 친위대(Nazi SS)를 찬양한다.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공식사상을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게 만들어버렸고 파시즘과 공산주의, 반공주의를 자극적으로 동일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공산당들이 합법적인 경우조차도,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선전되는데 많은 장애를 두고 있으며 물론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하에서 부르주아는 공산당들에게 권한을 주는 것을 허용한다. 부르주아 정치체제와 부르주아 국가에게 공산당들이 그들의 최고의 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법은 노동자들의 권리"이지만 역시 대중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들(파업, 부르주아 정책 등에 반대하여 저항하고 통제되지 않는 조직)은 합법의 경계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공산당은 얼마나 오랫동안 정치사상을 압축한 당의 구호 때문에 공격을 당했던가?”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과 거짓 p.74~76

 

마지막으로 다루는 세 번째 파트인 역사왜곡에 대하여는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우익들이 항상 악의적으로 왜곡해온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왜곡을 다루고 있다. 서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룰 때 항상 얘기하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나, 폴란드 분할, 핀란드 침공, 카틴 대학살, 베를린 장벽, 헝가리 봉기 등에 대한 서방의 과장 혹은 왜곡을 반박한다. 사실 필자는 이 주제가 가장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여기서 깊게 다루는 역사왜곡은 현재 서구 세력들 구미에 맞게 포장되어 있으며, 소련의 처지를 악마화 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동독과 베를린 장벽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베를린 장벽이나 동독에 관한 것은 지극히 서방과 서독 입장에서 서술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 구도는 대표적으로 동독은 못살고 자유가 없지만, 서독은 잘살고 자유가 없어서 대다수 사람들이 동독을 떠난다인데,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을 담고 있다.

 

실제로 냉전 초기 동독과 소련의 자료에 따르면 서독에서도 최소 60만 이상이 동독으로 이주를 갔는데, 설사 서방의 논리를 적용하여 그것이 과장된 수치라 할지라도 분명한건 서독에서도 그 체제에 반대되는 사람들이 동독에서의 탈출자 못지않게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독일의 분할은 소련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서방국가들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스탈린은 1952년 당시 포츠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게 독일의 재통일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한 것은 서구세력들이었다. 1955년 소련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동독이 합류한 것은 1954년 서구 세력들이 제국주의적 목적에 따라 창설된 NATO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을 책은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은 우리가 우익과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근거 출처를 밝혀가며 입증하고 있다. 책을 통해 필자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혹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부르주아적 이익에 따라 의도적으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던 가치들을 책임지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이익의 원리에 따라 사회가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의도적으로 사회주의가 추구하던 가치를 부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이타주의 보단 이기주의와 욕심을 강조하고, 그런 가치들을 폄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91년에 해체됐다. 해체 원인에는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작용이 있었지만,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추구했던 가치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자본주의 국가들이 추구했던 가치보다 훨씬 아름답고 인간적인 가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련은 냉전시기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혁명의 편에 섰으며, 제국주의자들의 반혁명적 책동을 분쇄시키고자 했다. 중국 혁명, 베트남 혁명, 쿠바 혁명에서 소련의 지원은 그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소련 사회가 추구했던 가치는 지금도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남아야 한다. 인민 모두가 무상으로 교육받을 권리,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 공공시설을 이용할 권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책 끝부분에 나온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청년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역사를 공부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전 혁명 세대들의 가치 있는 모든 경험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당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인 전통을 끌어낸다. 앞으로의 투쟁과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투쟁에서 더욱 더 유능하고, 효과적으로 되도록. 우리는 조직된 인민들의 정당하고 억누를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깃발, 국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깃발 아래 우리는 투쟁을 계속할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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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초기에 중국인 막자고 하던 분들은 왜 미국인 막자는 얘기는 안하나요? 최근 확진은 거의다 미국유입인데? 주한미군도 검사해야하는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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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반민특위 해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해방 이후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지원하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이 친일세력의 방해와 공작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정부 수립문제에 있어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노선을 확실하게 했고,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9479월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UN)에 이관했다. 즉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이 점차 이승만과 친일세력에게 유리해져 갔다는 것이다.

(1947년 유엔 총회 제1차 위원회에 참석한 임병직)

 

유리한 기회를 얻은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을 유엔으로 보내 로비 활동을 지속했고, 19471114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소련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43:0으로 가결시켰다. 결의안에 따르면 남북총선거 실시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뜻했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고 나서 3달 뒤인 19482월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

(메논과 모윤숙, 일설에 따르면 친일파 모윤숙은 메논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즉 모윤숙이 허리한번 돌리니 메논이 이승만에게 설득당했다는 얘기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남북한 선거관리 국가로 필리핀, 엘살바도르, 중국, 프랑스, 러시아, 캐나다, 오스트리아, 인도 대표로 구성하고 인도대표 메논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북한의 입북거부와 관련, 남한만의 선거 실시 여부에 대해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의 손에 한국의 장래, 특히 이승만의 정치적 운명이 달려 있었다. 8개국 가운데 ~번 국가들은 남한만의 총선을, ~번 국가는 통일정부 수립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메논 의장의 손에 단정 수립 여부의 결정권이 부여되었다. 당연히 이승만은 인도의 메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권력의지를 작동했다. 친일매국노이자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먹었던 모윤숙은 친일경찰을 등용했던 조병옥장택상과 더불어 메논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극우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이 책은 메논을 건국을 도운 애국자로 묘사한 책이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밤이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메논을 데려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했다. 모윤숙은 드라이브를 빙자,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 이승만과 만나게 하고 프란체스카가 전해주는 연명서를 귀로에 메논에게 전하였다. 메논이 유엔총회로 떠난 후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의 이름으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호소하는 서신을 띄웠다. 메논은 유엔 소총회의에서의 보고서에서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네루가 인도의 국민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박사는 한국의 영구적 분할을 옹호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라고 이승만을 극구 찬양하였다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모윤숙의 역할이 컸다. 세간에서는 모윤숙의 미인계가 메논을 움직였다고 보았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을 미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두고 토론 끝에 226일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위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역사적 결의를 하게 되었다.

 

1948년 들어 남북한 정부가 단독정부 수립 방향으로 나서자 임정의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있을 수 없다.”며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협상에 나섰다. 이로인해 1948427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15인 요인회담도 열렸다. 남측 대표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엄항섭, 북측에서는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남북회담 또한 결과적으로 무산됐고, 김구를 포함한 남측 대표단은 5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510일 드디어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것이 바로 5.10 총선거였다. 남북협상파와 민족주의계열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실시된 510총선거의 결과는 71.6%의 투표율로, 당선자는 무소속 85, 이승만의 독촉 55, 한민당 29, 대동청년단 2, 기타 19명이었다.

(38선에서 사진을 찍은 김구,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는 분명 반공주의자였지만, 이승만과 달리 1948년 남북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반탁을 외친 것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나서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고, 남북협상은 늦은 선택이었다. 확실한건 1948년 시점에서 그는 분단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총선 당시 이승만과 대립했던 인물 중 최능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해방 후 조만식의 건준 산하 평양치안부장을 역임하다 월남한 그는 친일경찰을 많이 등용하는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미군정청의 수사국장 자리에서 해임됐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를 선언하고 등록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후원과 지지를 받는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그의 후보등록 서류를 탈취했고, 결국 최능진이 딘 군정장관에게 이승만 측의 등록방해 사실을 항의하여 마감일을 연기하면서 가까스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측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등록된 서류의 추천인을 문제삼았다. 당시 선거법에는 후보 등록에는 200명의 주민 추천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최능진 추천인들을 협박하여 추천 사실을 부인하도록 한 것이다. 최능진은 결국 후보등록이 말소되고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최능진, 그는 이승만의 정적이었다. 결국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당한다.)

  

이승만의 찌질함과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01일 수도청 형사대가 최능진을 체포하여 종로경찰서에 구금했다. 구속영장에 의하면 최능진은 독립운동가 서세충, 광복군 출신인 여수 6연대장 오동기 소령 등과 공모,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정권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었고, 1019일 최능진은 내란음모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시기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풀려난 최능진은 즉시 종전평화통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한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2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최능진을 체포했던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악질 친일파였고, 보도연맹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훈장까지 수여할 정도로 그를 매우 아꼈다.

 

1948724일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이 724일 중앙청광장에서 거행됐다. 이승만은 취임사 말미에 대한민국 307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하여, 때로 상해임정을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취임사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절이라 하는 것은 이승만의 발언마저 무시하는 무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민족청년단)

내무부장관 윤치영(독촉국민회)

외무부장관 장택상(전 수도경찰청장)

국방부장관 이범석(국무총리 겸임)

재무부장관 김도연(한민당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이 인(전 검찰총장)

문교부장관 안호상(서울대 교수)

농림부장관 조봉암(국회의원)

상공부장관 임영신(여자 국민당수)

사회부장관 전진한(국회의원)

보건부장관 구영숙(무소속)

체신부장관 윤석구(국회의원)

교통부장관 민희식(군정청운수부장)

무임소장관 이윤영(조민당부당수)

무임소장관 지정천(대동청년 단장)

총무처장 김병연(조선민주당)

공보처장 김동성(합동통신사장)

법제처장 유진오(고대교수)

기획처장 이순택(연대교수)

심계원장 명제세(한독당)

고시위원장 배은희(목사)

감찰위원장 정인보(국학대학장)

 

비록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이용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초대 내각에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우긴 했었다. 이렇게 해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해방 정국 시기 자신과 결탁했던 한민당을 배제했고, 이것은 양자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민당은 서서히 반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초대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유산몰수 유산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실행했는데, 이것은 태생적으로 친일지주들이 많은 한민당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임정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은 반민특위에서 일하며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아쉽게도 그의 노력은 이승만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이 매우 곤혹스러워 했던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이승만과 결탁했던 친일파들은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한 상태였고, 사회 각계에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남한내에서의 친일파청산의 시도는 미군정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군정장관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제헌국회는 헌법 부칙에 반민법의 제정을 명시하고, 국회는 반민법 제정 주도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194891일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특위는 정부 안에 있는 친일파 숙청안을 의결하면서 이승만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교통장관 민희식과 법제처장 유진오, 상공차관 임문항이 대상이었다. 반민특위가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93일 담화를 발표, 특위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시작부터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 이승만을 반민특위가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신익희와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할 것을 종용하였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심지어 해방 후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고문하여 월북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 노덕술은 그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애국자였다. 따라서 그는 노덕술을 옹호하고 비호했다.

 

194922일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헌법위반이라는 말 안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그해 4월에는 노덕술을 포함한 친일경찰 출신들이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부탁을 받은 테러시트트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그 사건은 미수에 그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충격은 엄청났다. 이렇게 친일세력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측은 5월에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호를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이 남로당프락치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6월에는 이들 외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을 발표하여 노일환·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11명의 의원을 구속했다. 구속된 의원 대부분은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국회에서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등을 제안했던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쉽게 말해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빨갱이 몰이 했던 것이다.

(노덕술, 노덕술은 악질친일경찰로 무수히 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까지 고문했었다.)

 

(반민특위측에게 체포된 노덕술, 노덕술은 반민특위 활동 당시 체포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애국자라고 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다.)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했다. 이승만은 심야에 은밀히 반민특위위원장의 공관으로 김상덕을 찾아가 노덕술 등을 석방할 것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차관을 하던 장경근 휘하의 경찰병력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른바 6.6 사건이다. 국립경찰의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그들은 조사서류를 탈취하고 요원들을 폭행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이렇게 해서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방해오 와해되고 말았다.

(반민특위 습격, 1949년 6월 반민특위는 장경근이 지휘하는 경찰에게 사무실이 습격받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것도 당연히 이승만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다.)

 

(반민특위후손모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특별법의 법적근거마저 모두 제거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각종 권력기관의 완장까지 차게 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민특위 해체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처벌 받은 친일파는 단 한명도 없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로 포장했다. 또한 이들이 이후 대한민국에 등장할 독재정권의 주구가 됐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적을 방해했고, 그를 이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또한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의 심각한 악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어난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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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옳았다 - 5·16과 10월유신의 정치경제학 박정희가 옳았다 1
이강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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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라는 인물은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중 하나다. 그를 찬양하는 측에선 그가 집권할 당시의 경제성장을 예시로 들어 산업화의 아버지혹은 배고픔을 해결해주신 분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반면, 그를 비판하는 측에선 독재자혹은 친일파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인물이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아직도 아주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가 태어난 구미 시에는 박정희 생가가 있고, 거기엔 어마 무시한 박정희 동상이 서있다. 또한 서울 월드컵경기장역 옆에도 박정희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박정희 기념 도서관이 있다.

 

이처럼 박정희의 향수는 어느 특정 세대와 특정 정치집답에게 아주 강력히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이 찬양하는 박정희는 어떤 이미지의 박정희인지 그들이 전개하는 논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즉 아무리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향한 운동권 출신이 쓴 <박정희가 옳았다>를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게 됐다. 읽기 전부터 책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향이 필자의 생각과는 완전히 상극을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읽어보니 그 상극은 더 길어졌다. 왜냐하면 이 책은 독자만의 지나친 억측과 논리비약, 역사왜곡, 어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인신공격, 국민들에 대한 우롱 그리고 극단적 반공주의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 있는 내용을 다 반박하려면 정말 몇 십장이나 되는 논문이나 혹은 책 한권이 나와야 할 정도로 오류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쓰는 것은 책에 대한 서평이기에 이 글에선 그만큼 다룰 생각은 없다. 이 서평의 목적은 저자가 저지른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와 허점 그리고 사실왜곡에 대한 지적이다. 따라서 이 서평에선 필자가 생각한 저자의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가 무엇인지 간추릴 것이다.

 

우선 책 저자에 대해 소개를 하겠다. 책 저자는 한때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운동권 출신이다. 대부분의 80년대 운동권이 그랬듯이 저자 또한 1991년 소련 연방의 해체를 경험하면서 쉽게 말해 사상적 혼란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책 저자가 택한 길은 바로 극우였다. 책에서 저자가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는 뉴라이트들이 하는 논리와 같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소위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해서 세계 경제 대국 10위에 오른 기적과도 같은 위대한 나라고, 북한이라는 나라는 소위 인민민주주의를 선택해서 세계 최빈국 대열에 껴 지옥으로 변모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승만 정권의 탄생을 대한민국의 건국은 자유민주혁명이다.”이라는 형용모순이 매우 심각한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저자는 해방 이후 민중들이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것과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친일세력들을 등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친일세력에 지원을 받는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아주 쉽게 무시한다. 저자는 이승만 정권의 탄생이 민중들의 염원인 것처럼 얘기하기 위해, 당시 민중들이 이에 저항했다는 것과 민중의 70%가 이를 반대한 것 그리고 그 민중이 바로 빨갱이로 몰려 무차별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여기서부터 저자의 극우적 색체는 아주 명백하게 들어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을 싫어했던 인물이었지만, 저자는 이를 무시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는 무리수를 둔다. 박정희는 군인시절 이승만을 매우 싫어했던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군인시절 이승만을 제거할 생각을 했었던 인물이기까지 하지만, 어떻게든 이승만과 박정희를 연결하려는 저자는 이런 사실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한다. 심지어 영국의 명예혁명에 빚대어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 까지 한다.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포장하기 위해 과거에 있던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폭력성과 극단성을 강조하며, “5.16 혁명은 그런 세계사적인 혁명에 비해 유혈이 낭자하지 않은 위대한 혁명이라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혁명은 일으키는 주체가 누구냐를 떠나 그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는 반공이라는 구호를 걸고 일어난 사건인데, 반공의 주체는 약자와 빈민을 대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따라서 5.16은 반혁명 내지는 군부관료들의 쿠데타일 뿐이다.

 

비슷한 시기 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CIA의 사주를 받아 일어났던 쿠데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남베트남에서 일어났다. 남베트남에서 즈엉반민(Duong Van Minh)의 지도하에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걸고 일어난 쿠데타 또한 그 시기에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사건을 현재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같은 맥락에서 박정희의 5.16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 성장 즉 대기업 위주의 성장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거의 종교적 맹신을 뛰어넘는다. 박정희 시절 배고픔과 경제를 잘살게 해줬다는 종교적 믿음과 부자가 잘살게 되면 가난한 사람도 잘살게 된다.”는 상류층 중심적인 저자의 생각은 책에서 이중합창을 한다. 여기서 저자는 소위 박현채가 작성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구했다는 대중경제론을 지적한다. 즉 대중경제론을 선택했다면 한국이 가난을 면치 못했을 거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이다. 급속도의 경제 발전에서 생산한 것을 누구에게 분배를 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박정희 시절 한국이라는 국가가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거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장이 과연 가난한 민중을 위한 것이었나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토대로한 경제발전이 성공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나라가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폴이다. 물론 이 나라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잘 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 나라들이 채택했던 경제체제가 진리고 올바른 선택이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또한 저자의 왜곡된 믿음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에 놓여있는 가난한 나라들은 전세계적으로 아주 많다. 즉 한국이 경제성장을 박정희 때문에 할 수 있었다는 얘기와 자본주의를 선택해서 발전했다는 주장은 사실 왜곡된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런 경제성장은 부유층들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원리로 돌아가지만, 정작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노동자들에겐 그 혜택이 부여되지 않았다. 물론 박정희 경제성장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한 형태였기에 1920년대 미국식 경제성장하고는 달랐다. 현재 한국사회가 실행하고 있는 복지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일정부분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국가 치고 그런 복지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위에 있는 북측이 미약하지만 무상의료 무상복지를 실행한 측면도 강했다. 즉 북한이 하니까 본인들도 그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초반에 미약하게나마 실행했다. 이것은 마치 히틀러가 반볼셰비즘을 표방하면서 복지혜택을 부여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박정희때는 그런 복지체제가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연금제도도 공무원과 군인 교사에만 한정해서 하고 교육도 철저히 시장원리에 맡겼다. 쉽게 말해 인민대중의 복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박정희가 가난한 인민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다.

 

저자는 반공주의가 고로 자유민주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이 지원한 남미의 반공국가들은 전부다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이며 무수히 많은 인명 학살을 저질렀던 나라들이었다. 박정희 정권 또한 매우 탄압적이어서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탄압은 매우 극심했다. 여기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 있던 간첩 조작 사건들을 단순히 반공의 이름으로 합리화 시키며, 어떻게 해서든 북한하고 연결시키고자 한다. 예를들면 책에서 나온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치 좌파로 몰지만,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철저한 우파였다. 전혀 친북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인물임에도 그저 박정희에게 반대하면 무조건 좌파 빨갱이로 모는 저자의 논리가 과거 반공주의 시대와 판박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현재 더불어민주당 정권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좌파 종북으로 모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현재 문재인 정권은 친미 친기업적인 구조에서 한 치도 물러난 적이 없지만, 단순히 더불어민주당이 박사모와 반대된다는 이유를 들어 종북 좌익세력으로 모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박근혜 탄핵을 사기 탄핵이라는 박사모들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쉽게 말해 저자가 책에서 전개한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문재인 정부의 전두환 자서전 판매 금지 조치를 두고 출판을 탄압하는 비민주적인 조치라 얘기한다. 그러면서 드는 것이 1974년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 논리 출간이다. 이것은 확연히 다르다. 전두환 자서전이 출판이 금지된 건 1980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었을 뿐이다. 마치 현재 독일에서 나치에 대한 찬양 서적을 내면 처벌하듯이 말이다. 반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다르다. 우선 박정희 시대의 출판 금지조치는 전환시대의 논리도 적용이 됐다. 또한 저자도 베트남 전쟁 종결 이후 구속되고 감옥살이를 지냈다. 또한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이 책을 읽으면 빨갱이로 몰려 끌려가기도 했다. 쉽게 말해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따위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얘기다.

 

저자는 세련된 공산주의와 후진적 공산주의를 얘기하며 공산주의는 실패로 귀결된다는 신자유주의적 망언을 한다. 세련된 공산주의로 드는 예시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인데, 거기서 저자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경제를 망쳤다며 역사를 왜곡한다. 오히려 경제를 더 망친 인물은 책에서 저자가 경제성장 운운하며 찬양하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였다. 피노체트의 경제성장은 신자유주의를 적용한 상태에서 오른 성장이었을 뿐, 빈부격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고, 대다수 민중의 삶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락에 떨어졌다. 또한 아옌데 정권이 나중에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국가의 경제고립과 우익들의 노골적인 테러 행위 때문이다. 저자의 편협한 반공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역사적 맥락마저 무시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가 끝난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밑에 있는 나라 쿠바는 미국보다 영유아 사망률도 낮고, 주거와 의료 교육에 있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더 안정적인 삶을 구가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만 모든 국가의 사례를 접근하는 저자의 관점은 얄팍하고 편협한 관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소위 5.16 군사혁명을 성공시킨 박정희는 무오류 무결점의 반신반인 예수 부처다. 쉽게 말해 박사모들의 종교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이 1부터 10까지 전부다 억측과 비약, 역사왜곡 반공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단순히 사회주의를 실패의 논리로 보는 것도 그렇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유를 미제국의 경제고립에 대한 맥락을 싹다 빼놓고 단순히 체제문제로만 보는 시각도 매우 단순하고 단세포적이다. 박정희의 왜곡된 반공 신화는 2012년 종교에 심취한 한 무능한 인물을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 신화의 오류고 시대역행이다.

 

저자는 공과 과를 평가하는 것은 단순하다고 얘기하며, 어떠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 시대사적인 맥락을 파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는 시대사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받아야할 반역자요 친일파였다. 이것은 프랑스의 나치청산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면치못하는 반역자일 뿐이다. 5.16 또한 일부 군관료들의 뒤틀려진 반공 쿠데타였을 뿐, 민중을 1도 대변하지 않은 반동적 행위였을 뿐이다. 따라서 과거 극단적 반공주의 즉 친미제국주의적 기조하에 탄생한 반공주의적 시각은 이제는 타파되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청산되야 한다. 그 시작은 바로 무능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의 왜곡된 신화의 허상을 들추어내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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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네im 2020-07-2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는 너가 뱃속에 있지도 않던 시절을 직접 체험하며 보낸 철없는 사회주의 망상에 빠지다가 정신차려 회개한 사례야 선생님으로 모시면서 강의를 몇백먼 들어가며 들어야한단다 읽어다면서 하는 꼬라지봐라 본문에서도 죄다 엉터리를 쓰는 주제에 뭔 역사를 논한단냐 ㅉㅉ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리더였냐면은 밖으로는 매일같이 북한과의 총격전이 벌어지며 안으로는 국회의원.사회단체원노동자 등 사회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위장하면서 간첩에 협조하며 국가를 갖다바치려는 매국노들 때려잡으면서 의문사.자살.사형집행 전부 합쳐 30명도 안되었으면서도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없어 회생불능으로 판정난 나라를 20년만에 중진국으로 발돋음했던 말이야 세계 근현대사를 통틀어 이런 사람은 없었어 즉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이루었딴 말이야

너가튼것들 문빠나 민주당좋아하는 것들 2500만명 정도 되는데 북한에 싹다 보내버려 24시간 집안에 김돼지들 모시며 비밀경찰 감시받고 쫄쫄 굶고 공개처형 구경하는 꼴을 1년만 체험해봐야 얼마나 자유와 민주주의가 소중한지 깨닫게되지

친일파? 히로히토에 애비가 죽은거만야 90도 대가리박은 도요다다이쥬 무덤파고 시체를 토막내야 한다는 주장이나 하거라 이런거보면 중남미처럼 민주팔이들 몇만명 사형시켰어야 했는데 고작 고문.투옥이 태반이었는데 과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