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 1945년 8월 15일-9월 9일,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길윤형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8월 영화 강철비2를 봤다. 영화 강철비2는 북·미 정상회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영화는 가상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문제가 주변국의 이해관계와 국제관계에 따라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아주 객관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한반도 평화 문제가 단순히 한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닌 그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화는 미국 대통령 스무트(트럼프 역할)의 결정과 판단에 따라 한반도 문제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데, 이것은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문제점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이 왜 중요한지를 아주 강력하게 역설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이루어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해 42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양국의 교류 및 관계 형성, 종전협정을 논의했고, 612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역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다음해인 20192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안타깝게도 회담은 결렬됐다. 이것은 책 저자의 주장대로 한반도가 해방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미국이라는 외세의 규정력이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분단 75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단이라는 냉전의 모순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강철비2와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외세에 의한 작용도 매우 크다. 남북한은 서로 대치하고 전쟁 상황직전까지 가는 위험 혹은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양국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한 발걸음 또한 주기적으로 있어왔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미친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음에도 우리가 자주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룩하려는 움직임은 남북한에서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이념갈등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은 남북 분단 체제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존재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러한 노력은 분명히 있었으며, 일제의 패망과 미군상륙과정 속에서도 존재했다. 이 과정을 재조명 한 책이 길윤형 작가의 신간 <26일 동안의 광복>이다.

 

많은 학자들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을 1945년부터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얄타와 포츠담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에 주둔하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연합국들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합의하기 이전부터 일제치하의 식민지 조선에선 일본의 패망을 대비한 조선인들이 해방 이후 한반도 정국을 어떻게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며 점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4년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단체를 뿌리내린 여운형을 들 수 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남은 소련군이 주둔하던 이북과 달리 세력이 크게 3개로 나뉘어 각파 전을 벌였다. 첫 번째는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여 정국을 이끌어 나갔던 몽양 여운형과 같은 좌익 인사들이었고, 두 번째는 일제시대 당시 전향하여 친일활동을 벌인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이들로써 몽양 여운형을 포함한 좌익인사들에 대립하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사실상 40년간 한반도를 통치해오다 패망하자 한반도에 거주하던 90만 일본인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였다. 26일 동안 벌어진 삼파전은 194599일 오키나와에 있던 아시아의 패튼 하지 준장의 제24군단과 제7사단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막을 내린다.(물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은 전신조직인 건국동맹에서 그랬던 것처럼 좌익과 우익의 연합체를 결성하고자 했다. 좌와 우를 통합시키려는 여운형의 노력은 이후 우익 민족주의 정당 한민당의 주역이 되는 고하 송진우에 의해 두 번이나 무산되었다. 송진우가 이끌게 되는 한민당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그는 친일 문제에 있어선 매우 깨끗한 인물이었고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켰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 패망 이후 좌우연합체 결성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스스로가 거부했고, 분열의 씨앗을 창조했다.

 

당시 송진우가 좌익과의 연합을 거부했던 이유에는 건준에서의 좌우익 비율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는 안재홍과 같은 우익들이 있었지만, 그 비율이 좌익들에게는 매우 밀리는 수준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우익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송진우가 규합한 세력들은 그를 제외하면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좌익들이 정권을 주도하면 자신들에게 더불리해 질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송진우가 주장했던 임정봉대론은 이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란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매개로 세 개의 이질적인 그룹이 뭉친 느슨한 연합체였다. 첫째는 이만규·최근우·이여성·이상백 등 여운형의 오랜 측근 그룹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이 어느 길을 택하든지 끝까지 따를 이들이었다. 두 번째는 정백을 비롯한 옛 서울파와 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 여운형과의 개인적 인연에 따라 합류해온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마지막은 이들과는 이념적 색깔을 달리하는 안재홍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여운홍은 당시 건준 구성을 공산당원인 극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 우익, 무조건 형님을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으로 나뉘어질 수 있었다고 적었다.”

 

출처 : 26일 동안의 광복 p.226

 

실제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서중석 교수의 주장 따라 좌경화가 있었다. 당시 건준에는 사회주의자들이었던 정백, 이강국 등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좌경화 현상은 태평양 전쟁기 광주 벽돌공장에 노동자로 숨어있다고 등장한 박헌영의 영향도 컸었다. 전형적인 우익 독립운동가인 송진우의 입장에서 보면 좌경화 현상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다르게 얘기하자면 좌우 통일된 조직의 건설보다 헤게모니 장악을 더 우선시 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여러 가지 사례와 그들의 이해관계를 통해 한반도 분단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격동의 26일을 재조명했다. 또한 필자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들과 나름 새로 밝혀진 자료들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걸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필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좌익들 보단 우익들과 미국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나온 바와 같이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연합과 좌우 협력을 거부하려 했던 세력이 바로 해방 후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98일 상륙한 하지 장군의 미군은 한반도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들어왔고, 좌익들이 선포한 인공과 건준을 해산해버렸다. 또 다른 분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 최초의 전기인 <중국의 붉은 별>을 집필한 에드가 스노 지적한 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해방정국은 크게 방향을 달리했을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을 활용하지 못한 건 미국이었다.

 

그리고 그 미국에게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접근한 송진우와 우익 세력들은 해방 이후 좌우를 연합하여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여운형에 대해 친일파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신공격을 주도했다. 이런 공격을 했던 한민당원 대다수가 친일파들이었고, 근거가 될 만한 물증도 전혀 없었다. 이게 역사적 팩트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봤을 때,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1차적으로나 2차적으로나 우익들에게 있다. 물론 좌익들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했던 욕심이 있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큰 틀에서의 연합을 거부한 이들이 우익이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분단을 고착화 한 것도 우익이기에 분단의 책임은 이들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 75년 분단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8.15 해방부터 미군정 탄생까지인 격동의 26일에서 가장 높게 평가 받아야 할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또한 사회주의 성향을 겸비한 중도좌익이어서 그가 이끄는 단체는 좌익인사들을 대다수로 결성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좌우연합체를 결성하여 통일된 국가와 조직을 만들어나가고자 했던 그의 노력과 행적이다. 그런 점에서 몽양 여운형은 매우 높게 평가 받아야 한다. 분단과 갈등 그리고 대립보단 좌우연합과 통일,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여운형의 노력과 정신이 인정받고 높게 평가 되어야 하는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그가 추구했던 통일 및 통합정신이 현재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남북평화통일과 화해의 목적과 비슷한 맥락과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외에 중국에서 한반도 침투 작전을 준비했던 중경 임시정부의 스토리와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이야기,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 총독부의 동선,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상황 및 이야기 그리고 우익들의 모습까지 매우 폭 넓게 알 수 있었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 75주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가 분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분단이 된 과정과 그 사이에서 벌어진 통합의 노력은 잘 모르는 편이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몰랐던 공백을 채워줄 것이고, 분단이 아닌 통합과 통일이 왜 중요한 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려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20-09-11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책을 읽다보면 과거 인물들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선택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역사적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음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비록, 그 선택이 지극히 개인의 이익에 편향된 것이라할지라도 자신의 기준에서는 최선이었겠지요...) 또한, 해방 전후의 극심한 혼란기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존경받는 분들도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경우가 있다는 점도 고려한다면, 해방전후의 비극을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를 살아간 인물들의 한계와 시대 상황 속에서 빚어진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여겨집니다...^^:)

NamGiKim 2020-09-11 13:06   좋아요 1 | URL
네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죠. 그러나 그 주체가 무엇을 추구했냐, 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그들 나름의 목표와 선택지의 이유를 다방면에서 접근했습니다. 그래도 전 개인주의를 추구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 보다 통합의 노력을 기울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 같은 분들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중국공산당 측의 신사군)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행위가 한참이던 중국대륙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 사건이 바로 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New Fourth Army incident)이다. 일본은 1931918일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했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들이 치르고 있던 내전은 1927년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주의자들을 일방적으로 대대적인 학살을 전개하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침략자 일본을 저지하기 보단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을 축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1936년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이 이른바 시안사건을 일으키면서, 부하에게 구금당했던 장제스 또한 일본군과의 교전과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19377월 베이징에서 이른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면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했고, 거기서 대대적인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벌여 20~30만이나 되는 중국 민간인을 학살했다. 일본군들은 이런 학살을 비단 난징에서만 저지르지 않고 중국전역으로 확대시켰으며, 중국인민들을 제2차 국공합작으로 단결시키는 계기를 형성했다.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던 시절 마오쩌둥은 연안에서 철학강의를 하며 실천론모순론같은 사회주의적 철학 서적도 남겼지만, 세력 확장과 현실에서의 투쟁적 실천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4년 장제스군의 제5차 포위전 끝에 이른바 대장정의 길에 올랐었고, 이들의 병력은 대장정 과정에서 대폭 감소하였다. 실제로 대장정에 참가했던 병력은 10만 명 중에 8천 명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 외의 분산된 병력까지 합친다면 2만 명 안팎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대장정에서 얻었던 것은 한 가지 확실했다. 바로 민심이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뭉친 홍군은 중일전쟁의 시작과 제2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세력이 확장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할 당시 팔로군 3만 명, 신사군 12천 명이었던 홍군은 1938년 말에는 팔로군 156천 명, 신사군 25천명으로 증가되었고, 1940년말에는 팔로군 40만 명, 신사군 10만 명으로 총병력 5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당건설도 급진적으로 진행하여 19374만 명이었던 당원이 1940년에는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공산당 세력의 급하급수적인 증가는 장제스와 국민당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따라 중일전쟁이 대치국면으로 전환하면서 국민당 정부는 홍군의 활동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공산당을 습격, 점령, 제한, 대항하라19391월 국민당 지도부의 비밀지령에서 드러난다. 국민당 정부가 마오쩌둥 세력의 확장을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홍군이 국민당군보다 세력이 강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후 일어나게될 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군의 총병력이 대략 430만이었던 반면 공산당군은 120만 명 안팎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병력 규모면에서 국민당군은 홍군을 압도했었다. 또한 공산당군에 새로 편입된 대원들이 모두 총기를 소유하거나 공산당군이 충분한 탄환을 보유했던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마오의 공산당측은 근거지에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었기에 병사들이 늘어나면서 이것을 감당하기 버거워 했다. 즉 이점에 있어서 국민당군과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에 대해 무척 불길한 느낌을 받았고,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이나면 다시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공산당군을 사전에 짓누르고 싶어 했다. 그들 입장에서 공산당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은일본을 물리치는 것 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았다. 1939년 봄 장제스의 군대는 서북 지방과 산시성에서 공산당의 확산을 저지하는 공세를 시작했었다. 그 다음해인 1940년 장제스는 병력 40만 명을 항일 전선에서 분리하여 홍군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옌안 지역을 봉쇄하는 작전에 투입시켰으며, 2차 국공합작으로 매월 공산당에 지급하던 18만 달러의 정부 보조금을 중단했다. 또한 1940년 여름 국민당 군대는 안후이성과 장쑤성에서 공산당 측의 신사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보기도 했었다.

 

194010월 장제스는 홍군에게 한 달 내로 양쯔강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신사군 본부는 안후이성 남부에 위치했고, 이들은 부대 이동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부대를 이동하게 될 경우 일본군 통제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기에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심리변화를 주시하면서 가능한 시간을 끄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194114일 홍군은 마오쩌둥이 승인한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2일 뒤 국민당군의 매복지로 들어가고 말았으며, 국민당군과 홍군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는 1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국민당군의 비행기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비행기도 공격에 참여했다. 신사군 포위 작전에 투입된 국민당측 비행기는 사정없이 폭탄을 퍼부었고, 홍군이 피해 들어간 마을에도 기총소사를 했다. 결국 신사군 사건은 포위된 신사군이 궤멸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생포된 신사군 인원은 9천 명이나 됐다. 여기에는 군인뿐 아니라 간호사, 의사, 장교 가족, 짐꾼, 들것 운반인 등 비전투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위되었던 이들 중 약 1천 명 정도는 탈출에 성공했으며 소규모 집단으로 분산하여 양쯔강 이북의 안전지대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신사군 사건 이후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노골적인 반공정책을 펼친 장제스에게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국민참정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국민당의 반공정책을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신사군의 해산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진의를 총사령관으로 류샤오치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사군의 재건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이처럼 장제스군이 개시한 신사군 포위 사건으로 국민당에 대한 이미지는 나빠졌다. 그리고 제2차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사이는 더 악화되었고, 불신의 감정이 더 쌓이게 됐다. 리영희 선생은 책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신사군 사건에 대해 헐리 대사 보고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국대사관을 찾아와서 정세를 논의한 손과 입법원장은 중국군의 전쟁능력이 급속히 회복돼야 한다는 심각한 정세평가를 했다. 손과는 중국군의 대일전쟁능력 상실의 가장 큰 원인은 장총통이 정부군 30만을 공산당지역 봉쇄를 위해서 고정 배치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군 30만의 손실일 뿐 아니라 그에 포위되고 있는 공산당군대, 일본군에 대항해서 그토록 잘 싸운 수십만의 공산당군대를 무장해제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라고 말했다.”

 

출처 : 전환시대의 논리 p.139

 

이와 같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마찰은 변론할 여지없이 장제스가 홍군의 규모와 활동구역을 가능하다면 국공합작 당시의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물론 공산당도 국민당 정부가 철수한 지역과 일본군이 점령한 배후지역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혁명근거지를 확장하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하자면 양측 모두 전쟁에서 보다 더 유리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양측의 긴장관계 속에서 19411월 이른바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고, 국민당군은 공산당 측의 신사군을 궤멸시켰다. 확실한건 신사군 사건에서 이들을 속여서 먼저 공격한 것은 국민당군이었고, 방법도 상당히 비열했다는 사실이다. 국민당군이 저지른 신사군 사건은 그들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되었으며, 그 화살은 결국 자신들에게로 왔다. 어쨌든 중일전쟁에서 민심을 바로 잡았던 것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었고, 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국민당에 대한 지지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2002

 

마오쩌둥 2, 필립 쇼트, 교양인, 20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안전조치 미이행, 주한미군장갑차에 의한 사망사고

경찰은 미군직접조사로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라!

지난 8월 30일 밤 경기도 포천에서 SUV가 미군 장갑차 후미에 추돌하여 SUV탑승자 4명 전원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사고 현장은 사진만 봐도 처참하다. SUV차량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고, 미군 장갑차 역시 무한궤도 일부가 부서질 정도로 큰 사고였다.

미군 장갑차는 도로 위로 나올 때부터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밝은 낮에도 장갑차에는 동행하며 불빛 등으로 이동 사실을 표시하는 콘보이(호위) 차량들이 함께 하는 것이 원칙이다. 더군다나 작전 수행용 장갑차는 차체 색을 어둡게 한다. 그런 상태로 야간에 후미등도 제대로 달지 않고 단독주행을 했다.

사고지점인 영로대교는 평소에도 군용 차량 이외에는 통행량이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직선도로이기 때문에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추돌한 SUV의 입장에서는 저속주행중인 장갑차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주한미군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이 목숨을 잃는 참변이 또다시 발생한 것이다.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켜 호위차량들이 있었다면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해도 직선도로에서 미군 장갑차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참담한 심경이지만 현재는 사고의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보도된 기사를 보면 블랙박스가 사고지점인 영로대교 진입 전 상황까지는 녹화가 되어 있고 진입 후부터 충돌까지의 상황은 기록되지 않는 등 몇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주한미군이 안전수칙을 어기고 위험한 야간주행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 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면 비슷한 사고가 다시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고를 눈여겨보고 있다. 우리의 높아진 자주의식은 이제 사소한 일 하나도 그냥 두고보지 않는다. 하물며 대한민국 국민 네명이 사망한 대형사고임에도 지금까지 으레 그래왔듯 여러 의혹들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넘어가려 하거나 사고의 원흉인 주한미군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불평등한 한미동맹 아래 쌓여온 민중들의 분노와 원통하게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몫까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20년 9월 1일

한국진보연대 자주통일위원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0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전환시대의 논리새는 '.'의 날개로 난다등의 저서를 남겼던 저항적 언론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은 워싱턴포스트에서 근무하던 1960년 일본 도쿄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했었다. 구입했던 몇 권의 책들 중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의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었다.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가 그 책에 끌렸던 이유는 바로 아리랑(Ariran)’이라는 반가운 낱말이 눈에 띄어서였지, 책의 내용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당시 조봉암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를 정도로 부정부패하고 타락했던 이승만 정권은 소위 반공(Anti-Communism)’이라는 가치에 맞지 않는 것들을 일체 부정했었다. 조금이라도 진보적이거나 혁명에 대한 긍정적 색체가 보이면 그것은 빨갱이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만큼 반공이라는 가치가 강요되고 우선시 되는(혹은 그 모든 악행들이 합리화 되는) 사회였기에 한국전쟁에 미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리영희가 그 책의 존재를 알기에는 시대사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이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됐던 것이 일본의 수도 도쿄였던 것은 시대사적인 흐름에서 너무나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도쿄에서 아리랑을 구매하게 된 리영희 선생은 그 책을 읽고 감명 받았다. 그 책 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한 혁명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제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고, 세계를 뒤흔든 열흘카탈로니아 찬가와 더불어 3대 르포문학 작품인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를 집필한 에드가 스노(Edgar Snow)에게는 옌안지구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 하던 당시 미국인 아내 한명이 있었다. 스노의 아내는 님 웨일즈(Nym Wales)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그가 바로 헬렌 포스터 스노(Helen Foster Snow)였다. 스노의 아내 헬렌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로 한 혁명가를 만나 인터뷰 했다. 그녀가 인터뷰한 혁명가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년이었고, 중국공산당 안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인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였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김산(Kim San)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장지락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화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1960년대 김산이라는 인물에 매료됐었다. 그것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 당시로써는 반공주의에 어긋나는 중국 근현대사와 중국 혁명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2005년에 출간된 아리랑 개정판에는 1991년에 쓴 리영희 선생의 추천 글이 같이 실려 있다. 추천 글에 따르면 그는 중국 혁명을 공부하면서 김산을 떠올렸고, 본인이 직접 총을 쏘고, 굶고, 쫓기고, 고문당하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만큼 김산을 포함한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내가 김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4년 전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휴학생이었던 나에게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라면 중국의 붉은 별 저자 에드가 스노의 아내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필독서로 읽어야 한다.”고 충고 및 조언을 해줬고, 그렇게 해서 나 또한 김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박근혜 퇴진 집회가 한참이던 2016년 말 나는 사회복무요원(공익)으로 소방서에서 복무하게 됐다. 당시 퇴진 집회가 한참이라 매주 토요일 마다 열심히 나가 집회에 참가했었다. 이와 동시에 나는 소방서에서 복무하면서 체게바라 평전,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공산당 선언 등 닥치는 대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24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내가 읽게 된 책은 점차 쌓여갔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리영희 선생이 젊은 시절에 읽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도 있었다.

 

내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읽은 것은 2017년이었다. 당시 나는 3교대로 근무하며 1주 주간 그리고 2주는 야간근무를 하며 구급출동에 나갔었는데, 새벽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걸리는 구급출동과 그 과정에서 보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의 아픔 및 고통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난 그때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한 인간으로써 추구했던 사상과 혁명을 위해 실천했던 그들의 행동과 역사에 감동받았었다. 당연히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또한 그런 감동을 나에게 주었고, 그의 남편 스노가 집필한 중국의 붉은 별 또한 그러했다.

 

COVID-19로 인해 발목이 잡힌 요즘 나는 김산이 일대기를 다룬 책을 다시 펼쳤다. 바로 이원규 작가가 2006년에 집필한 김산 평전이다. 이번에 읽게 된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나에게 과거 리영희 선생이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나 또한 경험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책에서 나온 혁명가 김산을 읽으며 직접 혁명현장에서 총을 쏘는 느낌이었고, 국민당군에게 추적당하며 굶고 쫓기기는 느낌을 받았으며, 일제 형사들에게 고문당하는 기분도 들었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흥미진진했고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김산은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 러일전쟁이 한참이던 1905년에 태어난 김산은 15살의 나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그 대가로 4일간 구금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했었다. 이후 작은형의 도움을 받아 일본 도쿄에서 살던 김산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의 민족해방에 대한 노력에 감명받아 모스크바로 유학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주에 있는 이회영 소유인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이후 약산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도 가입했고, 1923년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북경에서 의대를 다니며 의학을 전공하기도 했었다.

 

1926년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4.12 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하자, 1927년과 1928년 그 또한 광주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힘든 전투를 치렀다. 1929년 초에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공산당 지하투쟁에 참가했으며, 국민당측에게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진 뒤 혹독한 고문을 받았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베이징에서 학생과 노동자 시위를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가 석방되고 난 이후 다른 공산당 동지들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었고, 1931년엔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1932년 김산은 사노 마나부의 포이어 바흐, 마르크스·레닌의 일생을 번역하였고, 그해 8월 중국 공산당 하북성위원회가 주도했던 무장봉기에 참여하였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맹목적 봉기를 비판하는 의견서를 냈다가 트로츠키파로 몰리기도 했었다. 이후 그는 장제스가 만든 반공조직 남의사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졌고, 19337월에 고국으로 압송되기도 했지만, 8월에 석방됐다. 193512월 그는 북경 남쪽 도시 석가장에서 청년학생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대장정 이후 중국공산당이 발표한 8.1선언을 지지하는 시위를 이끌기도 했으며, 1936년 서안사변 이후 홍군이 거점지로 주둔하고 있는 연안으로 갔다. 그 다음해인 1937년 에드가 스노의 아내 헬렌 포스터 스노 즉 님 웨일즈를 만났고, 그와의 기나긴 인터뷰를 함으로써 헬렌이 자신의 전기 아리랑을 집필하게 만들었다. 중일전쟁이 개시 된 이후 홍군에서 소위 일제첩자 밑 반혁명파 그리고 트로츠키파 숙청이 일어나면서 그 또한 캉성(Kang Sheng)에 의해 트로츠키파 내지는 일본첩자로 몰려 처형된다. 19381019일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총살당했고,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스노의 아내였던 헬렌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에 김산 전기인 아리랑을 출간하여 생전에 김산과 약속했던 일을 지켰다. 하지만 이 책도 헬렌의 남편 스노가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이 책도 탄압을 받았다. 1934년 그와 결혼했던 조아평은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들 고영광은 1978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심의를 공식 요청했고, 이 요청은 1981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의해 심사에 들어갔으며, 19831월 중국공산당은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 당시 중국공산당이 내린 결론은 결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결정문은 맨 밑에 있다.)

    

처형된 지 45년 만에 복권된 독립운동가 김산은 200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혁명가적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김산은 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혁명에 몸바친 혁명가였다. 그 또한 일제시절 다른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 활동들을 전개했다. 그랬던 김산이었기에 1937년 그를 만났던 헬렌도 그에게 매료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에 읽은 김산 평전은 또 다른 점에서 김산을 알 수 있었다. 헬렌이 아리랑을 집필하면서 국민당의 감시와 검열을 피해 의도적으로 틀리게한 서술들과 인터뷰 과정에서 놓쳤던 일부 얘기들이다.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이런 세세한 부분들을 바로잡아줘서 혹시나 잘못알고 있게 될 얘기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헬렌이 집필한 아리랑 그 자체의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김산 평전에서 읽은 혁명가 김산의 생애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3년 전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이 이번에 더 많이 와 닿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책을 읽으며 과거 리영희 선생이 느꼈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반공주의적 편견과 오만감에 빠져있는 이들은 김산을 그저 빨갱이로 판단하는 저열한 인식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들이 심장이 뜨겁지 않은 냉혈한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일제 시절 조선의 독립과 중국 혁명을 위해 싸웠던 그의 뜨겁고 열정적인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고, 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왜 불의에 투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장명 동지는 김산, 유청화, 이철암, 한국유, 유한평 외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인으로 1905년생이다. 20년대에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7년 광주폭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장은 우리 지하당의 북경시위 조직부장 재임시 체포되어 조선으로 보내졌다. 몇 달 뒤 장은 다시 북경에 왔으나 1933년 5월 1일 체포되어 다시 조선으로 보내졌다. 1934년 장은 도 북경에 왔다. 이 기간에 우리 지하당은 그를 트로츠키파나 일번의 특무로 의심하고 그를 조직과의 관계에서 회복시키지 않았다. 1936년 우리 북방국은 그를 연안으로 가도록 소개하였다.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그에 대하여 조사를 실시하고 일본 특무에 준하여 처리하였다.

1. 체포에 관한 문제

여러 차례의 조사에 의하면 장명은 1930년 12월 9일 체포되어 심문 중 시위원회 조직부장임을 강력히 부인하고 자기는 조선독립당 사람으로 공산당은 동정하나 중국국적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뒤에 증거 부족으로 조선으로 인도되었으며 3년간 중국 입국을 금하는 처분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장명은 비밀리에 중국에 욌으나 1933년 5월 1일 다시 체포되었다. 장은 이번 체포뒤 태도를 바꾸고 ‘나의 고백’이라는 것을 써서 광서인으로 1935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현재의 공산당 정책결정이 절대로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어떤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고 공산당의 맹목적 정책과 국민당의 대일본 무저항주의 및 대내의 군벌 혼전 국면을 반대하였다.


2. 트로츠키파 가입에 관한 문제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 여부의 문제는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 조사 시에 인정하지 않았다. 1933년 5월 1일 재차 체포 뒤 역적 장문운이 적에게 장명이 트로츠키파라고 진술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사 뒤 장명은 트로츠키파 마계강, 양수이 등과 왕래한 적이 있음이 밝혀졌다. 양수이는 장은 단지 그들에게 일본 글을 가르쳤을 뿐, 정치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현재 조사된 트로츠키파 인원과 관련 자료에 모두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가를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보건대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는 부정할 수밖에 없다.

3. 일본 특무 참가에 관한 문제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장명의 일본 특무참가 문제를 조사하였다. 당시 보안처 보고에 의하면 ‘이 범인은 일본의 특무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되어 있고, 강생은 ‘위원회 결정에 따라 비밀리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장명의 일본 특무 참가 여부 문제는 장이 두 차례의 체포에서 볼 때 당 조직의 문제를 누설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장은 중국에 돌아온 뒤 1931년부터 1936년꺼자 6년간 적극적으로 당과 관계를 가지려 했다. 그는 북경 지하당의 조직부장으로서 많은 기층 조직 상황을 이해했으며, 우리의 많은 지하당 책임자와 당원을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당원과 발전된 관계를 유지하여 그가 연안에 가기 전까지 당의 조직에 손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기간 국민당 북경시 공안국과 일본의 주 북경경찰서에 수사 체포된 적이 있다. 이런 설명은 장명이 일본의 특무라는 것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상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장명 동지는 체포된 뒤 당에 불리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당의 조직과 기밀은 누설하지 않았다. 트로츠키파 참여와 일본 특무 문제는 증거가 없으므로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 조건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마땅히 정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당에 대한 충성은 우리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공헌이 있으므로 그가 장기간 받았던 억울한 누명을 마땅히 깨끗이 씻어주고 명예를 회복해주며 그의 당적을 회복시키는 바이다.

1983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실행했다고 알려진 세균전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와 지방 항공 감시소들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15개 지역에 대한 전문가의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그곳들에서 발견된 곤충이 1952128일과 312일 사이에 확증되었다. 많은 경우에서 특별한 종류의 파리, 벼룩, 거미 딱정벌레, 빈대, 귀뚜라미, 모기와 기타 곤충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곤충들은 많은 경우,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예컨대 눈 위와 강의 얼음 위, 그리고 풀과 돌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곤충이 나올 수 없는 대단히 낮은 기온을 고려할 때, 또한 그 곤충들이 왕왕 한 장소에서 같이 발견할 수 없는 파리, 거미와 같은 각양각색의 곤충들로 구성된 집단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곤충들이 나타난 것은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전문조사 결과 곤충들이 병균에 감염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곤충들은 인공적으로 배양된 것으로 생각된다.

 

1952223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는 산 위에 파리와 생선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생선들은 거의 썩어 있었으며 콜레라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생선들은 산 위에 잘못 투하된 것으로 생각된다. 발견된 세균 종류는 급성 콜레라, 파스토르, 페스트, 에비텔라, 리브스, 바칠루스, 파라브스등이었다.

 

파리는 토종의 한국 파리와는 다른 이상한 것들이었다. 발견된 파리는 날개가 길었으며 조금 벌어져 있었다. 몸집은 큰 편이었으며, 머리는 토종 파리의 그것보다 비교적 큰 편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겨울호랑이 2020-09-02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피해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한국 전쟁 당시의 생화학전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여러 의미에서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NamGiKim 2020-09-02 14:33   좋아요 1 | URL
괜히 브루스 커밍스가 Forgotten War 라고 한 것은 아니겠죠.

독서가 한량 심씨 2020-09-02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치산소설 보면 재귀열이란 병이 돌아 전력을 많이 잃어버리는데...바로 세균전이군요.

NamGiKim 2020-09-02 14:34   좋아요 0 | URL
영화 남부군(빨치산 출신 이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을 보면 재귀열로 고생했다는게 나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