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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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 말기인 1978년 대한민국 어린이들이 무조건 시청했던 만화영화 똘이장군은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상상하고 있던 북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나온 북한사람들의 삶은 말 그대로 자유와 개인이 전혀 없는 지옥과도 같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군림하는 이들은 붉은 돼지 김일성이며, 그 김일성에 충성하는 이들은 당간부 여우와 인민군 늑대 그리고 남파간첩요원 박쥐다. 쉽게 말해 만화에 등장하는 북한이란 존재는 사람이 아닌 동물인 것이다.

 

한국이 민주화를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반공이라는 그 잔재의 파급력은 막강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이버 뉴스에 북한관련해서 달린 댓글들은 만화영화 똘이장군 수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인터넷상에서 반북주의를 표출하는 사람들의 경우 북한은 그저 사람이 살지 않고 지옥과도 같은 존재로만 인식되어야 하고, 비난받아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북한은 무너져야할 대상 즉 쓰러뜨려야할 적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만 보더라도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력은 재앙적인 수준으로 바로잡기 힘든 단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북한은 어떤 사회이고 실제로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까? 평소에 북한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2017년과 2018년 당시 북한을 취재했던 대한민국 기자 진천규 작가의 책을 읽게 됐다.

 

책에서 나온 북한 사회는 세간에서 왈가왈부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고 공간이다. 물론 경제적인 격차에 있어 남한사회가 더 앞선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북측의 사회가 불안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불만과 공포로 얼룩진 사회라는 일각의 인식은 대다수는 허구와 상상이 가미된 거짓이었다. 반공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북한을 생각하면 굶주림과 가난 그리고 체제에 불만을 품고 탈북민들이 늘어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책에 나온 북한 사회의 일상 사진들은 이것이 반공주의와 반북주의가 만들어낸 악의적 선전이 대다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북한을 취재하던 2017년 북한과 미국은 긴장관계에 돌입했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라는 소름끼치는 발언을 했었고, 이에 대응하여 북한에서도 반미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과 북한간의 긴장관계가 최고조에 달하자 국내에선 북한을 고립시키면 굴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북한을 취재했던 저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평양 사람들이 마음껏 여가생활과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즉 당시 북한의 사회는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으면서도 사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찍은 사진에 나온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했다. 이들 또한 우리처럼 연애를 하고, 가족끼리 여가도 즐기고, 휴일도 알차게 이용한다. 이들 또한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고,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피자와 스파게티도 즐긴다. 맥주 또한 자주 즐긴다. 이들 또한 손전화기(스마트폰) 보급률도 늘어서 손전화기 500만 시대를 맞이했다. 패션또한 바뀌어 하이힐과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도 많아졌다. 경제제재로 기름이 부족하여 자동차를 많이 못굴릴거라는 편견과는 달리, 북한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차량들이 많이 달리는 편이다. 이처럼 북한도 많은 발전과 변화가 있었고, 그런 변화를 거치면서도 사회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책에서 나온 2017년과 2018년의 북한은 과거 경제적으로 어렵던 고난의 행군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비록 시설이나 장비가 한국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북한 또한 쿠바처럼 무상의료를 전인민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교육또한 무상이라 대학에 진학하면 소련사회가 그랬듯이 학비가 없으며 국가가 많은 것을 무상으로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런 변화상에서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바로 정보의 편향성이라는 문제다. 물론 책 저자는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을 취재했고, 그 변화상과 북한의 진실을 사진을 통해 잘 보여줬지만, 북한의 시골이나 다른 곳의 정보를 균형있게 담지는 못했다. 한국도 서울과 지방도시에서 많은 것이 차이가 나듯이 북한도 마찬가지다. 또한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했고, 미국과 서방의 경제적 고립속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아 사회를 안정시켰으며, 서방의 경제고립이 현재로서는 효과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써 북한에서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립속에서 자력갱생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족하더라도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자신들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북한 인민들이 무조건 고통스럽다느니, 전국민이 노예라느니 하는 일각의 주장은 지극히 제3자 입장에서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주장하는 편향된 생각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많은 영역에서 북한에 대한 가짜뉴스를 많이 만들어냈고,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다. 올해 있었던 김정은 사망설이나, 현송월 총살 등 거짓말들이 재생산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북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만들어낸 그릇된 결과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분명하다. 북한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이며, 우리와 같은 감정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즉 북한에 대한 악마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펜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진실을 추구했던 리영희 선생은 살아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다.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분명히, 소위 애국이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리영희 선생이 남긴 명언과 같이 우리 또한 진실이 눈으로 북한을 보아야 한다. 적어도 북한 사람에 대한 노골적인 악마화를 피해야 하며 반공주의가 양산해낸 거짓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아야 한다. 진찬규 작가의 책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상당히 많은 측면에서 독자에게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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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12 7일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했던 이 기습 공격으로 24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사망했고소식은 미국 본토 전역으로 전파됐다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다음날인 12 8일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미 의회를 긴급 소집하여 일본에게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이렇게 해서 미국이 치르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다이 뉴스를 들었던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이것으로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일본도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고 하며 환호성을 외쳤고중국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도 자신의 일기에 행운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소식을 들었던 이들 중에 기쁨을 표출했던 지도자가 연합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당시 유럽 정복에 착수했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도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장제스나 처칠은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에이들이 미국의 참전 소식을 기뻐할 이유가 충분했다하지만 히틀러의 경우는 달랐다미국의 참전 소식은 엄밀히 말해 나치독일이 치르고 있던 양면전선에 부담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히틀러가 미국의 참전소식에 기뻐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당시 그가 했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 없다우리는 지난 3천 년간 패배한 적이 없는 파트너가 생겼다.”

 

여기서 히틀러가 얘기하는 파트너는 일본을 뜻하고, 3천 년이라는 숫자 단위는 일본의 역사를 뜻한다히틀러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역사를 2600년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3000년이라는 얘기를 했었다일본에서 주장하는 2600년 내지는 3000년 역사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660년 초대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즉위했다고 나오고이것을 일본 역사의 시작이라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쉽게 말해 한국으로 치자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된다.

(진무천황, 기원전 660년에 천황으로 즉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화가 아니라 신화이기 때문에 실존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선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또한 일본의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 또한 진무 덴노는 신화이지 실존 인물이 이니다라고 주장했다가 공산주의자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었다아무튼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학살이 있긴 하지만주로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와 비교하여 천황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후대가 연대를 올려 고쳤다는 설과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즉 이 두 가지 설이 학계에선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거기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에서 나오는 진무천황이 즉위하던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보았을 때이른바 조몬 문화 시대였다매머드가 사실상 멸종하던 기원전 1만 년부터 야요이 문화 시대가 열리는 기원전 3세기까지를 조몬 문화시대라고 하는데이 시기에는 토기 발명과 밤나무나 도토리 채집 내지는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으로 살던 시대였다따라서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내세운 2600년 내지는 3000년이라는 역사는 어떤면에선 과장이 섞였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일본 역사는 조몬 문화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로 넘어가는데이 야요이 시대는 3세기까지 계속되었고벼농사의 시작과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등장하였다또한 당시 인접국이던 가야나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이것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선진 문물을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규슈(九州)나 시코쿠 등 일본 서부 지역에 위치한 각종 소국들을 복속시켜 나갔으며 점차적으로 관동지역 일대에 주거하고 있던 아이누 계통의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현재 일본의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야마토 시대, 일본 문명의 시작점이다.)

 

또한 3세기 여왕 히미코가 다스리는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연합국 시대를 거쳐 4세기 초 긴키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의 성립되었다그리고 이 야마토 정권은 5세기 무렵 왜 5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지역 세력들의 연대를 전제로 성립된 호족 연합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6~7세기 무렵 일본은 국가로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이 아스카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한반도를 거치지 않은 채 중국의 선진 문활르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이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를 기입하여 이를 보여주기도 했다이게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일본의 특징인 그들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날 사용되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덴무(673~686)와 지토(690~697) 천황의 시대에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또한 일본 군주의 호칭인 천황이 처음 사용된 것도 목간을 비롯한 당시의 실물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덴무 시대다따라서 일본의 천황제는 7세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일본은 7세기 이후 대륙의 선진 문화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9~10세기에 접어들면서 달라졌다특히나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발해가 멸망하면서 일본은 이 나라들과 대외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적인가치를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10세기 이후에는 이른바 국풍화 현상이 나타났다즉 문학과 학술적인 측면에서 일본적 특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무사계급 즉 유럽 중세로 치면 기사에 속한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중세로 들어갔다중세로 들어가면서 일본에선 소위 무사라는 계급이 등장했고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문이 생겻으며, 11세기 중엽부터 이들은 군사 전문가인 동시에 토지 개간자 혹은 그 관리자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이 시대가 바로 헤이안 시대였다. 12세기 일본은 이른바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되었다이 가마쿠라 시대는 150년간 존재했다가마쿠라 시대에는 소위 쇼군이라는 명칭이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따라서 쇼군은 막대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으며이것은 천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몽골의 일본 침략, 1281년 쿠빌라이칸은 일본을 침공했었다. 그러나 그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가마쿠라 시대인 1281년 일본은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게 대대적인 침략을 받았었다. 13세기 몽골의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세계 최강의 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이들 또한 침략을 받은 것이다초반에 몽골 고려 연합군은 하카타 만에 침입하였지만거센 태풍이 오는 바람에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당시 일본을 침략했던 몽골-고려 연합군을 빗대어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은 경멸과 공포의 언어가 되었고몽골군을 무찌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바람은 신풍 즉 가미카제라는 말로 불리게 됐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 항공모함에 자살돌격을 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의 어원이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전국시대 당시 영주세력들, 15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말 그대로 엄청나게 많은 세력과 전쟁을 초래했다.)

 

몽골 침략을 기점으로 가마쿠라 시대는 점차 쇠퇴했고, 1333년 멸망했다가마쿠라 막부 이후인 1338년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이 되었지만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나타난 남북조 시대의 갈등과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이렇게 하여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애니메이션 이누야샤를 보았다면 무조건 들어봤을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전국시대는 일본의 여러 세력들이 나와바리 다툼에 참여했는데이 전쟁은 대략 150년간 지속되었다이 과정에서 고려 이후 새로 탄생한 나라 조선에게 대마도를 침공당하는 일도 벌어졌다그러던 1543년 전 세계적으로 무역로를 넓혀가던 포르투갈이 일본에게 획기적인 무기하나를 갖다 주었는데그게 바로 나는 새도 잡는 다는 조총이었다이 조총의 도입으로 오다노부나가라는 인물이 전국을 평정해 나갔다그러나 그는 부하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고노부나가의 충실한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통일을 이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 성분은 안좋았지만 일본 최고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개인적 기대와는 달리 처참한 패배와 실패를 맛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전투를 가리킨 지도)

 

전국시대는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끝이났다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꿈이 매우 큰 사람이었고단순히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그는 과거 자신의 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던 몽골처럼 일본을 대제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그렇게 해서 명나라를 먹는 다는 이유를 들어 1592년 이른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 사람들의 거센 저항과 명나라의 지원 그리고 전멸에 가까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났고전쟁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일본군도 철수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때 군대를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히데요시 죽음 이후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일본의 쇄국정책,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며 일본은 에도 막부에 들어섰고, 이른바 쇄국정책에 들어섰다. 이 사진은 1945년 미국 국방부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난 이후 일본에서는 또 다른 인물이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섰다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군대를 전혀 보내지 않았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틈타서 세력을 확장하나갔다.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그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는 에도막부가 시작됐다하지만 에도막부를 시작으로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해오던 서방과의 무역을 중단했다.

(일본과 미국, 1776년 독립전쟁을 통해 탄생한 소위 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일본의 쇄국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1612년엔 가톨릭 금지령이 내려졌고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도 시작됐다즉 쇄국정책으로 들어간 것이다물론 나가사키 같은 곳은 네덜란드 상인들의 무역로를 열어놓기도 했지만딱 거기까지였다. 17세기 중반 일본은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고네덜란드에게는 나가사키에만 문을 열었으며중국과의 무역은 나가사키를 통해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를 통해류큐(오키나와)하고는 사쓰마를 통해 관계를 맺고 있었다. 200년 뒤 일본의 이런 정책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한 서구 문명이 일본에 큰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일본의 쇄국정책에 엄청난 충격은 나라는 서구세력이었고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였다바로 미국(Untied States)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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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반일 불매운동 로고, 한일관계가 파탄으로 치달았던 2019년 많은 사람들이 이 로고를 들고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일본 불매운동에 참가했다.)

 

2019년 7월 한국에서 반일 불매운동이 아주 거세게 일어났다클리앙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떤 유저가 만든 ‘NO, BOYCOTT JAPAN’이라는 로고가 유튜브나 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었다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이 로고를 사용하는 이들이 많아짐에 따라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본 제품 불매 및 관광거부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특히나 일본군 위안부나 731 부대 그리고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역사 왜곡 기업들에 대한 불매로 이어졌다.

(일본 불매운동 당시 아베 규탄 집회, 많은 사람들이 아베를 규탄하기 위해 이 집회에 참가했었다.)

 

민주노총한국진보연대 등 680여 곳의 시민단체로 이루어진 아베 규탄 시민행동은 매주 토요일마다 아베 규탄 집회를 진행했고주한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부근에서도 진행되었다. 7월에 시작된 불매운동은 8월에도 계속되었고박원순 서울시장은 한국 시민사회는 강력한 불매운동을 벌이면서도 그것이 일본 그 자체에 대한 적대가 아닌 아베 정권과 부당한 경제보복그 조치의 기반을 이루는 군국주의와 일방주의가 타깃임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일본 불매운동으로 인하여 일본산 자동차의 경우 3개월 만에 판매량이 72%나 줄어드는 타격을 받았었다. 11월에 실시된 시사저널의 여론조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불매운동의 지지율은 78.9%로 매우 높았고불매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응답률도 75.8%에 달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소녀상, 이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강제로 끌고갔던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아시아에서 큰 이슈가 되면서 한국에서도 일본의 정식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오늘날까지도 반일집회 할때 빠지지 않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필자 또한 4년전 서울 일본 대사관 근처에 있는 이 소녀상을 지키는 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

 

2019년 일본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데에는 바로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문제가 있었다일본과 한국의 갈등에는 20세기의 피의역사가 있다식민지지배강제징용일본군 위안부, 731 부대 생체 실험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인 노무자 학살군함도 등 과거 일본이 한국에게 저지른 범죄와 악행의 역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이런 범죄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민족성을 말살시키며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이런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극우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일본 극우들은 이런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침략의 상징이었던 욱일기를 들고 다니는 것도 그런의미다. 필자는 이런 일본극우를 대마도에서 봤던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인은 분노하지만 대다수 일본인의 경우자신들에게 분노와 원한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을 공식적으로 이해하기 보단 문제 삼으려고 하고 있다심한 경우 해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일삼는 일본의 극우들의 경우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비하를 일삼으며 망발을 하기도 한다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망발을 일삼거나역사적인 차원에서 일본 정부나 일본인들의 사상은 대체로 군국주의 내지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이들에게 있어 조선의 식민지 지배는 그들에게 문명화와 발전을 선물한 유산이고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인 태평양 전쟁(Pacific War)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즉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선택으로 기록되고 있다제국주의 침략의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미화돼서 기록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대해 망언을 하는 극우 파시스트 아베)

 

현재 일본의 아베 극우정권이나 이에 부역하는 이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데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자라는 사실에 있다따라서 양국 국민이 가지는 보편적인 관점이 매우 다른 것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도움과 1950년 한국전쟁의 여파로 자본주의 방식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복을 입었을 때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천황제를 유지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전범들은 이른바 민주주의 정치에 참여하여 세력을 키우고 확장해 나갔다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존재하는 것이 일본의 자민당이다여기에는 세계대전 이후 나치독일과는 달리 전범청산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미국의 책임도 막중하다당시 청산되지 않고 이른바 민주정치에 입문한 이들이 현재 일본 극우세력의 뿌리라 보면 된다.

(반일 종족주의, 2019년 뉴라이트 출신 학자 이영훈은 이 책을 집필하여 많은이들로부터 지탄받았었다.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것에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 지배 과정과 태평양 전쟁에서 저지른 과오들과 악행들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지만우리가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하기도 힘들다왜냐하면 해방 후 한국은 정부수립 과정에서 친일 출신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며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했고 그 잔재들 또한 대한민국 사회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현재 대한민국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고반일불매운동시기 이른바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출간되어 전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반일종족주의의 저자인 이영훈이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반일을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일본군의 전쟁범죄는 과장되고 날조된 것이며친일을 비판하는 것은 친북이다.”라는 것이 그가 책에서 근본적으로 하고 있는 주장이다.

(신친일파, 양심적인 학자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를 반박하는 차원에서 집필한 책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우리 또한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이 사회적 영역에서 청산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옹호는 냉전의 유산인 반공주의하고도 손쉽게 연결되기도 한다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에 빌붙었던 친일파들이 내세웠던 논리가 바로 반공이기 때문이다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반공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나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고유사점이 많다더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한국의 반공주의와 현대 일본 제국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다.

(일본 제국 패망사, 이 책은 미국인 논픽션 작가 존 톨랜드가 쓴 책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담고 잇는 책이다.)


(일본견문록, 이 다큐멘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미국 국방부에서 제작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본성을 1592년 임진왜란에서부터 찾고 있다.)

 

필자가 이번에 일본 제국주의성장과 패망의 역사라는 시리즈를 준비한 이유는 개인적인 차원에선 언젠가는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고보다 큰 차원에선 SNS를 통해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원했기 때문이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역사와 범죄 그리고 성장과 패배를 보다 정확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사실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들과 이들의 패배를 다룬 서적들은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출판됐다따라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분명히 밝히지만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기존의 학설에 무조건적으로 도전하는 글이 아닌말 그대로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과정과 패배 그리고 범죄를 기록한 글이다.

(일본 제국이 접수했던 최대 영토, 제2차 세계대전 중반기인 1942년 일본은 유럽을 대다수 점령했던 나치독일과 더불어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을 접수했고, 미국령인 알래스카와 호주까지 위협했다.)

 

제목에서 나온바와 같이 이 글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에 몸담게 되는 19세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기까지의 역사를 다룬다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라는 책과 넷플릭스에 있는 미국 국방부 제작 다큐 멘터리 프랭크 캐프라의 일본 견문록은 필자에게 이 글을 쓰는데 호기심을 불어넣어준 자극제였다그 한권의 책과 한편의 다큐멘터리는 일본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일본 제국 패망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패배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미국과의 전쟁을 진행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고프랭크 캐프라의 일본 견문록은 비록 미국 국방부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그 나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잘 고찰했고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욕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부터 근원을 찾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앞으로 연재하다보면 분명 부족한 글일 테지만이 글에 큰 기대를 해주시는 분들에게 한도 끝도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공부하고 학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야욕이 불러오는 결과와 피해 그리고 허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바로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만행 그리고 패배의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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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영화 리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1412일 소련의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기지에서 공군 중위 출신의 우주비행사가 탄 로켓트가 우주를 향해 발사됐다. 그 로켓트의 이름은 보스토크 1(Восток-1)였고, 보스토크 1호는 우주에 도달하여 1시간 30분간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우주비행을 마친 보스토크 1호는 다시 지구로 돌아왔고, 원래 목표했던 도착지 보다 400km 떨어진 곳에 착륙했지만 확실히 지구에 귀환했으며 조종사 또한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을 마친 조종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유리 알렉세이비치 가가린(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즉 유리 가가린이다.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그 상징성이 매우 강력하다. 소련이 해체 된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러시아인들 마음속에는 가가린이라는 인물이 여전히 영웅으로써 기억되고 있다. 4년 전 공익근무를 시작하기 몇 주 전 러시아 여행을 갔던 필자는 러시아에서 레닌, 스탈린, 푸틴, 소련 상징물과 더불어 유리 가가린의 얼굴이 담긴 관광 상품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현재 러시아에서 유리 가가린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얼마나 강력한지 필자는 러시아 여행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COVID-19로 인해 사실상 밖에 나가기도 힘든 요즘 필자는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자 눈에 아주 강력히 들어온 영화 한 편이 있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영화 유리 가가린(Gagarin First in Space)였다. 영화는 2013년 러시아에서 제작되었고, 러닝타임은 2시간 정도 된다. 영화는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는 과정과 그가 걸어온 인생사를 총괄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흐름은 우주비행전과 우주비행 과정 그리고 우주비행 후로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중간 중간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가가린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유리 가가린의 인생회상 장면에선 어린 시절 그가 놀았던 기억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치하에 있는 마을에서 독일군의 음식을 훔치려다 동생을 잃을 뻔했던 기억,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농촌을 떠나 도시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던 시절, 전투기 조종사 시절, 아내와의 연애시절과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가가린의 모습 등의 장면이 회상신으로써 나온다. 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는 가가린이 동네에서 악단단원으로 연주를 하다가 도시로 가 학교에 입학하기를 결정하게 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가가린은 아버지에게 도시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겠다고 밝히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가가린아버지 저는 도시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학교가 교복을 준대요. 트렌치코트랑 부츠도 주고 기숙사에는 침상도 있대요.

 

아버지또 다른 건?

 

가가린식사도 주고 월급도 줘요.

 

아버지: 뭘 준다고?

 

가가린: 돈을 준다고요. 한 달에 7루블요.

 

아버지: 예전에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아버지가 학비를 내줬어. 학비가 모자라서 송아지도 팔았어. 그랬었지.

 

가가린: 그건 옛날 얘기에요.

 

소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놓칠 것이다. 즉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 일반인들이 다니기 힘든 학교는 소련을 거치며 무상교육으로 발전했고, 학생들이 필요한 학용품과 생필품 그리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는 사회가 바로 소련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에겐 영화상에서 언급되는 이 대사가 매우 반가웠고, 소련이라는 사회가 비록 미국보다는 경제적으로 밀릴지언정, 인민대중의 복지체계가 갖추어진 사회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주제는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당시 가가린의 경쟁자이자 동료였던 선발된 우주비행사들 또한 외면하지 않았으며,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를 매우 비중 있게 등장시킨다. 영화에는 유리 가가린 다음으로 우주비행을 마친 우주비행사 게르만 티토프도 나름 의미있게 다루는데, 첫번째 우주비행이 아닌 두 번째 우주비행사가 된 아쉬움이 남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도 잘 보여준다. 사실 영화상에선 언급되지 않아서 그렇지 티토프는 인류 세 번째로 우주비행을 한 우주비행사였다. 그 이유는 가가린 우주비행 성공 1달 뒤 미국의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가 우주비행을 마쳤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당시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 소식을 들은 소련사람들이 이 사실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는 중에 알려진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된 소련인민들은 우리가 인류 최초로 우주에 인간을 보냈어!”라고 하며 열광하고, 앞으로의 우주개척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었다. 코롤료프로부터 가가린의 우주비행 소식을 접한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은 혈압체크를 하던 중, “전 세계가 우리의 위상을 알게 될 거야!”라고 하며 기뻐한다. 우주비행에서 소련인민들이 느꼈을 감정을 대변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 외에도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기 전 느꼈을 기쁨과 두려움 고된 훈련 및 그 외의 감정들까지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가가린이 타고 있던 로켓트가 우주비행을 하는 과정의 그래픽과 연출 또한 상당히 현실적이고, 고증도 잘해놨기에 볼만했다. 러시아의 영화기술이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유리 가가린! 그는 1968년 단순한 비행사고로 34세의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가 전 세계적으로 준 영향은 상당했고, 수많은 러시아인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소련의 영웅 가가린과 인간 가가린을 동시에 보고싶은 이들에게 이 영화를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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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11일 비행기 두 대가 세계금융의 도시 뉴욕에 있는 WTO 쌍둥이 빌딩에 자폭했다. 이 자폭테러로 최소 3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비슷한 시각 미국 펜타곤에도 비행기 자폭 테러가 감행됐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 충격은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든 기폭제였던 진주만 기습 공격만큼이나 파급적이었고, 이것은 부시 정부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북한, 이란, 이라크를 가리켜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하며 제국주의적 언성을 높였다. 또한 미국은 9.11 테러에서 받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9.11 테러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테러리즘(Terrorism)을 선보인 것이다.

 

과거에도 미국은 이와 같은 테러리즘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이들이 자행했던 악랄한 테러리즘 중에는 911일에 했던 것도 있는데 그게 바로 1973칠레 쿠데타(The Coup in Chile)’였다. 1973911일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닉슨 정부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노체트 군부세력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닉슨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의 군부세력은 아옌데가 있던 궁전을 탱크로 포위하고 시가전을 벌였으며, 궁극적으로 아옌데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미국이 칠레에서 반동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유는 명백했다. 왜냐하면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사회주의 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 국가들을 사실상 자신들의 경제적 지배하에 놓고 싶어했다. 연합과일과 같은 미국의 독점자본들은 남미인민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했고, 남미의 부르주아 세력들은 미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동포들을 착취했다. 다른 중남미국가와 마찬가지로 칠레의 상황도 비슷했다. 칠레의 부르주아지들과 지배계급은 미제국주의의 이익에 복무했고,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인 칠레는 그 구리 생산이 미국계 양대 기업 케니코트구리와 아나콘다 구리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칠레의 반공 그룹에게 지원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709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회주의자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민주적인 선거에서 반대세력을 꺾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칠레에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탄생하게 됐다.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집권하게 되자, 베트남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던 닉슨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새로 출범한 아옌데 정권을 존중한다.”는 말을 했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미국은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을 겨냥하여 흑색선전에 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 부었으며, 미국에 부역하는 반공세력들을 이용하여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미국은 아옌데 정부가 칠레 산업의 핵심인 구리기업을 국유화 하자, 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당시 극심한 유아 사망률과 분유 부족에 시달리던 아옌데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정책에 착수하자 미국은 칠레의 분유수입도 끊어버렸다. 또한 칠레의 중요산업 중 하나인 운수산업을 망가뜨리기 위해 요원들으 위장취업 시켜 어용단체를 만들고 파업을 주도하였으며, 경제를 붕괴시키고 물가를 급상승시켰다. 쉽게 말해 미국은 아옌데 정부가 경제적으로 망하게 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경제가 더 어려워지면 민중들이 아옌데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국과 CIA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닉슨 정부와 칠레 부르주아지들의 예상과는 달리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1972년 아옌데의 지지율은 전보다 더 올랐고,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 또한 높았다. 칠레 민중이 아옌데를 지지했던 이유는 확실했다. 바로 그가 민중을 위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아옌데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빈부격차가 극에 달했던 칠레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을 실행했다. 당시 폭등하던 물가인상률을 30%대에서 15% 이하로 감소시켰고, 전 정부에서 3%도 이루지 못했던 국내총생산 성장률을 약 8% 이상까지 치솟게 했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다. 그는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집권 초기에 아옌데가 보여준 단기간의 성과물은 더 많은 민중들이 지지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재제와 각종 방해공작에 의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아옌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내놓은 최종 해결책이 사회주의 정권에 반감을 품은 이들을 동원한 쿠데타였다. 이것은 미국이 직접 개입한 칠레에 대한 테러리즘이었으며, 대다수 민중들의 염원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일이었다. 쿠데타는 1973911일에 시작되었고, 피노체트의 쿠데타 계획에 따라 미 해군은 전날 밤 자국 전함들을 발파라이소항에 정박시켜 아옌데 정부와 칠레 인민을 향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미제국주의가 계획한 반동 쿠데타로 아옌데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소총을 들고 저항하다 결국 죽음의 길을 택했다.

 

아옌데가 쿠데타로 죽고나서 칠레는 또 다른 테러리즘에 시달렸다. 피노체트는 칠레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칠레 가수 빅토로 하라는 쿠데타 이틀 후 체포돼 고문 끝에 숨졌다. 군인들은 하라의 숨이 끊어졌는데도 총질를 가했으며, 몸에서 무려 44 발의 총탄이 발견됐을 정도였다. 또한 피노체트의 지휘 아래 검거 선풍이 시작된 이래 3개월 동안 좌파로 의심되는 시민 3,197명이 학살되고 1,197명이 실종됐으며 13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것은 CIA가 지원했던 작업이었고, 미국이 칠레에게 저지른 또 다른 테러리즘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정부 기간 동안 총 35000명이 학살당했고, 위에서 상술한 초기 검거 당시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911일 미국은 칠레에서 테러 행위를 자행했고, 그 이후에도 CIA를 통해 테러 행위를 했다. 미국이 칠레에서 한 테러행위로 인해 수만 명이 학살당했고, 또 다른 수만 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빈라덴의 9.11에 의해 잊혀진 미제국주의의 9.11 테러의 역사다. 지금의 미국은 예전하고 전혀 다르지 않다.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지난해 초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작년에 미국이 베네수엘라에서 했던 방식은 칠레에서 했던 테러리즘과 매우 유사했다. 이들은 후안 과이도라는 제국주의 앞잡이를 내세우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를 고립시켰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민중은 미국이 내세운 과이도를 선택하지 않았고, 사회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다. 결국 미제국주의가 지원하는 세력은 반민중 반동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일 것이다.

 

미국사람들은 9.11 테러하면 자신들이 더 많은 학살을 저질러 분노를 해소했던 2001년 사태를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9.11 테러가 일어나기 28년 전 미국은 칠레에서 저지른 9.11 테러는 전혀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재도 미국은 반미국가들에게 테러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올해 1월엔 이란에 테러행위를 저질렀고, 코로나가 전세계적으로 강타하는 와중에도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미국사람들은 빈라덴의 9.11을 기억하기 이전에 칠레에서 저지른 9.11테러, 즉 대학살극으로 이어진 테러리즘에 대해 알아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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