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동네 책방의 역사모임에서 <라틴아메카의 역사>를 함께 읽고 있어요. 올해 5월부터 시작했는데 거의 5개월 만에 상권을 끝냈고, 이번달부터 하권을 읽기 시작했어요. 모임을 통해 오랫동안 그들의 역사를 읽어내려가다 보니,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가치관이 나의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것'이었음을 안타깝게 깨닫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시작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기원전 수만 년 전,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빙하기의 말미에 아시아의 인류가 빙하를 건너, 북아메리카의 끝자락을 건너와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빙하기는 머지않아 끝났고, 따뜻해진 기후는 얼음으로 간신히 연결되었던 아메리카 대륙을 거대한 섬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꽤 오랫동안, 아메리카 대륙은 태평양과 대서양의 커다란 바다에 둘러싸인 채, 대륙 안에서 형성된 문명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이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문화를 교류하고, 새로운 기술들을 발견하며 문명을 성장시켜 나가는 동안, 그들의 문명은 석기에서 청동기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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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명과의 교류가 없이 거대한 대륙 안에서 성장한 문명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어떠한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 이해하고 해독하는 것도 불가능했죠. 지금까지도 인류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혹은, 정복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한) 잉카나 마야의 문명을 해독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당연해 보입니다.

공통점 없이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독자적인 기록이었을 테니까요. 수많은 SF 영화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문명에 대해 외계인의 클리셰를 동원하는 이유도, 우리가 여전히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청동기 문명의 끝자락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그들이 만나게 된 것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유럽인들이었어요. 1492년에 거대한 함선을 앞세워 건너온 철기문명의 이방인들은, 무기로도, 질병으로도, 정치력으로도,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앞세워 대륙을 순식간에 정복해 버리고야 말죠.

제대로 된 정복전쟁도 없이 그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절대적인 '문명의 시차'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콜럼버스의 대항해에 대해 가졌던 '모험과 도전'이라는 호의적인 시각이, 끔찍하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어요. 우리는 왜 지금껏 '정복자'의 시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했을까요?

라틴아메리카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자원들로 구대륙을 먹여살렸고, 금이나 은, 설탕과 염료에서, 커피와 카카오로 이어진 그들의 착취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죠. 게다가, 심각한 질병으로 90퍼센트에 가까운 원주민들이 몰살당하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실어 나른 노예들은, 지금까지도 아메리카 대륙을 위협하는 인종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해요.

농업이나 광물 자원의 종속에서 시작된 식민지의 착취는,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로는 구대륙에서 팽창적으로 증가한 공업 생산품들의 소비시장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공고해지고야 말았죠.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까지 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농업, 광업, 목축업과 같은 1차 산업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식민 지배의 시작은 스페인이었지만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은 곧바로 제국 확장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어요.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질서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넘어갔고, 남미에 대한 착취도 미국의 역할이었죠.

칠레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3년의 기록
 
대통령궁에서 자결해야 했던 아옌데의 비극 <아옌데의 시간>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로드 아옌데의 집권기였던 1970년부터 1973년까지의 기록을 그래픽 노블로 그린 작품입니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같이 읽다보니, 그들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 대통령궁에서 자결해야 했던 아옌데의 비극 <아옌데의 시간>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로드 아옌데의 집권기였던 1970년부터 1973년까지의 기록을 그래픽 노블로 그린 작품입니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같이 읽다보니, 그들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 아모르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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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고 싶은 <아옌데의 시간>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는 칠레에 대한 이야기이자, 작은 승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현재의 칠레와 남미가 벗어나지 못하는 지배의 굴레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중요하게 읽힐 수 있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읽혀서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아옌데의 시간>은 가상의 인물인 미국인 기자, 존 니치의 시선을 통해 아옌데가 선거에서 승리하던 1970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던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져버린 1973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입니다.

작년에 칠레의 시위를 보면서 읽었던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관련기사 : 칠레의 2019년... 대한민국이 얻어야 할 교훈)와는 달리, 아옌데 대통령의 집권 시기에만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기에,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을 이용한 적절한 선택이라고 느꼈어요.

여기에 올해 다시 읽은 아옌데는, 80년 전에 칠레에서 있었던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대통령 집권기의 비극이 그대로 되풀이되는 역사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만나다 보니 더욱더 아프게 읽히네요.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는 1886년부터 1891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이었어요. 질산 비료의 원료였던 구아노의 주도권을 두고, 파라과이, 볼리비아와 벌였던 태평양전쟁 (1879~1883) 직후에 집권하면서, 중요한 자원이었던 구아노의 국유화를 통해 국가의 경제를 강건하게 하고, 공교육을 강화하여 국가의 기반이었던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의회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혀 축출되고, 망명지였던 아르헨티나에서 자결하고 말아요. 그 후로 칠레는 영국이 주도하던 다국적 자본가의 지배에 억눌리게 되었고, 민중의 빈곤과 억압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죠.

발마세다의 비극에서 구아노라는 자원을 구리로 바꾸고 영국의 지배를 미국으로 바꾸면, 이야기는 그대로 1970년에 집권했던 아옌데의 것이 됩니다. 쿠바 혁명의 성공과 1962년에 있었던 미사일 위기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미국이, 영국보다 더 집요하게 아옌데를 방해한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겠죠.

당시 소련과의 이념전쟁으로 한창이던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공산주의에 잡아먹히는 것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여, 아옌데를 무력화시키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아옌데의 충실한 조력자로 보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자신들의 무기로 선택했죠.
 
"피노체트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고 친절한 군인처럼 보인다. 그는 안전과 공공질서, 그리고 정치적 사건이라는 매우 새로운 문제들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는 것이 분명하다." - CIA 비밀 전보, p.77

1973년의 칠레는 혼돈이었습니다. 미국은 어떻게든 민중의 연대를 망가뜨리고자 애를 썼고, 분열된 민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무너진 연대와 민중의 혼돈은, 미국이 선택한 군부에게는 좋은 기회였음은 물론입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인들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대통령궁을 공격하였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자살을 선택하고야 말아요. 그 후로 칠레는, 40년이나 피노체트의 군부독재에 시달리며 국민의 절대다수가 빈곤에 시달리는 국가가 되고야 맙니다.

헌법을 다시 쓰기로 한 칠레 민중의 선택
 

코로나19 시대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읽어내려가는 것은, 지금껏 세상을 지배했던 지배의 논리가 허상이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되풀이되는 역사의 비극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그 나라의 민중이 스스로의 뜻을 세우는 길뿐임을 깨닫는 경험이기도 하고요.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이 끝나지 않고 계속 되풀이되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식민 지배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식민 지배의 주체는 계속 바뀌었지만, 기득권이 지키려 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었으니 현재의 극단적인 양극화는 당연한 결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2020년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가요?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고 있나요? 적어도, 코로나19의 방역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우리의 결정이고 잘한 결정이라고 보입니다. 덕분에, 안전하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그간 나를 지배했던 사대주의의 시각과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에서 조금은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앞으로는, '선진국'이라고 이름 지어진 그들을, 무조건적인 동경의 시선으로 '관대하게만'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가르침을 갖게 한 2020년의 고립이 마냥 '쓸데없던' 것만은 아닌가 봐요. 불행 중 다행인가요?

이 글을 쓰는 동안, 작년의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이 촉발한 시위에서 약속했던 칠레의 국민투표 결과가 나왔네요. 아옌데와 발마세다의 후손은, 드디어 민중의 선택으로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습니다. 피노체트의 40년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중의 칠레를 건설하기 위한 헌법을 다시 쓰기로 한 거예요. 그들의 선택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을 옮깁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며,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민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존엄하고, 더 나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권리,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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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공공·보통 선거를 통한 주권 행사에서 비롯된 천부의 권리를 갖고 행동하는 미주 해방지구의 쿠바 국민은 호세 마르티 기념비 옆에서 그를 추모하면서 쿠바 전국국민대회를 열었다.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우리 아메리카 민중의 의지의 표현인 강령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저 코스타리카 산호세 선언을 전면 거부한다. 그 선언은 미제국주의 주도 아래 아메리카 대륙의 주권과 존엄성, 각 국가의 민족자결권을 침해한다.

 

2.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모든 민중에 대해 무지막지하고 불법적인 지배를 서슴지 않는 미제국주의를 강력히 비난하는 바이다. 1세기 이상 지속된 침략으로 멕시코, 니카라과, 아이티, 산토도밍고, 쿠바의 대지는 한 번 이상씩 침탈당했고, 텍사스같이 광대하고 자원이 풍부한 땅, 파나마 운하 같은 전략 요충지가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심지어 푸에르토리코처럼 전 영토가 점령지가 되기도 했다. 남아메리카 민중은 미 해병이 우리의 아내와 딸들, 나아가 우리 대륙의 가장 고귀한 선열(그중 한 사람이 호세 마르티다)을 모욕하는 현실을 감내해왔다.

 

우월한 군사력 불평등 조약, 매판 정부의 수치스러운 협조를 통한 지배로 (볼리바르, 이달고, 후아레스, 산 마르틴, 오이긴스, 티라덴테스, 수크레, 마르티 등이 해방하려 했던) 우리 아메리카 대륙은 착취의 대륙, 미국이라는 금융·정치 제국의 뒷마당, 국제기구 표결의 거수기가 되어버렸다. 남아메리카 국가들 중 쿠바는 이 국제기구에서 우리를 무시하는 거칠고 잔인한 북미에게 부담이 되는 괴물로 항상 간주되었다.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정부들이 이러한 제국주의 지배를 받아들임으로써 독립의 이상을 배반하고, 민중들의 주권을 파괴하며, 남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진정한 연대를 방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 대륙의 불멸의 선조들을 움직여온 바로 그 해방의 신념으로, 쿠바 국민의 이름으로 그들의 지배를 거부하는 바이며, 그리하여 남아메리카 민중의 희망과 의지를 실현하려 한다.

 

3.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먼로 독트린을 영속화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이 독트린은 호세 마르티의 예측처럼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자들의 아메리카 대륙 지배를 연장하고, 또한 오래전 호세 마르티의 비판처럼 차관, 운하, 철도 등의 독소를 손쉽게 주입하는 데 현재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앞에서 줏대 없는 정부의 굴복이자 아메리카 민족에 대한 미 독점기업의 전횡에 불과한 잘못된 범미주주의(Pan-Americanism)에 반대하여 쿠바전국국민회의는 마르티와 후아레스(Benito Juarez)의 남아메리카주의의 해방을 주창한다. 나아가 전국국민대회는 미국인, 즉 박해받는 지식인, 린치 위협을 받는 흑인, 악당들의 손아귀에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우호의 손길을 뻗치며 전 세계의 일부가 아닌 전 세계와 더불어 전진하려는 의지를 재천명하는 바이다.

 

4.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만약 우리의 조국이 제국주의 군대의 공격을 받는다면 쿠바를 지원하기 위한 소련의 자발적인 행위는 개입이 아니라 공개적인 연대 행위로 간주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미국의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쿠바에 제공되는 그러한 지원은 소련 정부의 명예를 드높이는 반면, 쿠바에 대한 비겁하고 불법적인 공격은 미국 정부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이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쿠바 영토가 미국의 침공을 받는다면 소련의 미사일 지원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미국과 전 세계 앞에 천명한다.

 

5.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서 대륙의 단합과 통일을 분열시키고 위협하기 위해 쿠바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이용하려는어떠한 세력도 철저히 거부한다. 첫 번째 사격에서 마지막 사격까지, 폭정을 전복하고 혁명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 속에서 쓰러져간 첫 번째 순교자로부터 마지막 순교자까지, 쿠바혁명의 첫 번째 강령에서 마지막 강령에 이르기까지, 쿠바 국민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해왔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속화된 범죄행위와 모욕에 대한 쿠바의 정당한 대응인 쿠바혁명의 성공에 대해 소련 혹은 중국을 비난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 반대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아메리카 대륙과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가 미국 정부의 정책에 크게 위협 받고 있다고 믿는다. 미국은 남아메리카 정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책을 모방하도록 강요하면서 소련과 중국을 고립시키고,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행동으로 개입하며, 중국이 60억 인구를 사실상 대표하고 있는데도 중국을 유엔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한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세계 모든 민족과의 선린정책을 확인하고 특히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 의지를 재확인한다. 이 순간 이후 전국국민대회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리하여 미7함대에 의해 지탱되는 대만 괴뢰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의지를 밝힌다.

 

6.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민중의 일반여론을 표현한다는 확고한 신념 아래 민주주의는 결코 다음의 것들과 양립할 수 없음을 확인한다. 즉 금융과두제, 흑인에 대한 차별, KKK단의 폭력행위와 양립할 수 없다. 또한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를 쫓아내고, 폴 로비선의 위대한 음성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게 하며, 여러 정부와 교황 비오 7세를 포함한 전 세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젠버그를 사형에 처하는, 그런 박해와는 양립할 수 없다.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민주주의는 허구적인 결과를 생산하기 위해 부유한 지주와 직업정치인이 장악하는 선거만이 아니라, 민중 중심의 이 국민대회가 지금 실천하는 것처럼 국민의 결정권에 의해 지탱된다는 쿠바인의 신념을 밝힌다. 나아가 민주주의는 대중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 자유롭고, 가난한 자가 기아, 사회적 불평등, 문맹, 사법제도에 의해 비참하고 무능한 조재로 전락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남아메리카에 뿌리 내릴 것이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농촌 사람들에게 불행의 원천이 되는 낙후되고 비인간적인 대농장 체제를 비판한다. 이 체제는 대규모 토지를 보유하되 제대로 경작하지도 않고 놀린다. 기아선상의 임금, 비합법적인 특권계급이 저지르는 가혹한 노동 착취에 반대한다. 문맹, 교사·학교·의사·병원의 부재, 아메리카 국가들에 만연한 노인 복지의 빈곤을 개탄하고, 흑인과 인디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한다. 여성 차별과 착취를 비판한다. 우리 국민을 헐벗게 하고 민주주의와 주권의 완전한 실현을 가로막는 군사적·정치적 과두체제를 비판한다. 국민의 이익을 무시하는 부정한 거래로 국가의 천연자원을 외국 독점기업에 양도하는 것을 개탄하고, 국민의 정서는 무시한 채 미국에만 우호적인 정부를 비판한다. 과두제 정치와 제국주의 억압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언론과 여타 미디어가 국민을 구조적으로 기만하는 행위를 비판한다. 미국의 도구이자 심복, 대리인에 의한 뉴스의 독점을 개탄하고, 단결하면 모든 나라에서 다수인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이 애국적·사회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단결하는 것을 가로막는 억압적인 법을 비판한다. 남아메리카에서 자신들의 의도와 이익에 따라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우리의 자원을 약탈하고,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며, 우리 경제의 피를 빨아먹을 뿐 아니라 낙후한 상태를 영구화하는 독점기업과 제국주의자들의 기업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제국주의 금융자본에 의한 저발전국의 착취를 거부한다.

 

따라서 쿠바전국국민대회는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 자신들 노동의 산물인 과일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아동의 권리, 의료 혜택과 병원에서 치료 받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 실제 쓸모가 있고 과학적인 교육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학생의 권리, ‘전적인 인간 존엄성을 누릴 흑인과 인디언의 권리, 시민으로서 사회적·정치적 평등에 대한 여성의 권리, 노후 보장에 대한 노인의 권리, 연구와 작품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려는 지식인·예술가·과학자의 권리, 국가의 부와 자원을 회복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독점체의 국유화 권리, 세계 모든 국가와의 자유로운 교역에 참여할 수 있는 국가의 권리, 완전한 주권에 대한 국가의 권리, 요새를 학교로 바꾸고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흑인·인디언·여성·청년·노인 등, 억압 받고 착취당하는 모든 자들이 자신의 권리와 미래를 지키기 위한 무장의 권리 등을 천명한다.

 

7.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위한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흑인·인디언·청년·여성·노인의 투쟁 의무, 억압 받고 착취당하는 국민의 해방 투쟁 의무, 거리나 지리적 분할과 관계없이 어디에 거주하든 억압 받고 착취당하고 식민화 되고 고통 받는 국민들과 더불어 공동의 대의를 만들어야 할 의무도 주장하는 바이다. 세계의 모든 인류는 형제다!

 

8. 쿠바전국국민대회는 단합되고 영광스러운 남아메리카가 경제를 미제국주의의 풍성한 전리품으로 만들고 있는 속박에서 해방될 것이며, 겁먹은 장관들이 독재자를 따라 천박한 목소리로 합창하는 회의석상에서도 각 지역의 진정한 목소리가 들리도록 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확인한다. 따라서 전국국민대회는 남아메리카 공동의 운명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대륙은 개별 국가의 자유로운 결정과 모든 국가의 공동의 목표에 뿌리내린 진정한 연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된 남아메리카를 향한 이 투쟁에서 공직에 앉아 강탈자 노릇이나 하고 있는 자들은 그저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여 석탄과 주석 광산에서, 일반 공장과 설탕 공장에서, 사파타와 산디노의 후손인 로토, 촐로, 가우초, 히바로 등이 자유의 무기를 드는 봉건적 압제에 짓눌리는 토지에서, 시인과 소설가, 학생, 여성, 어린이, 노인과 무력한 자들로부터,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우리 형제들의 이러한 목소리를 향해 쿠바 전국국민대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죽 우리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쿠바는 실패하지 않는다! 쿠바는 오늘 여기서 남아메리카와 전 세계 앞에 쿠바의 역사적이고 변치 않을 혁명을 천명한다. 조국, 아니면 죽음을!

 

9. 쿠바전국국민대회는 이 선언을 아바나 선언으로 명명할 것을 결의한다.

 

쿠바, 아바나, 미주 해방지구

196092

피델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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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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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다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도 공부나 독서 혹은 해야할 일을 할때 게을러지고 싶을 때가 많다. 이건 만인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사회가치나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상시적으로 원하는 게으를 권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예전에 <빠빠라기>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남태평양에 사는 추장은 쉴틈없이 일을하며 사는 문명인들을 '빠빠라기'라고 하며, 여유없는 현대문명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다. <빠빠라기>에서 신랄하게 지적하듯이, 칼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층들에게 게으를 권리를 호소한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라파르그는 분명히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활성화된 천박한 자본주의 구조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타파해야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방법론에 있어서 마르크스하고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선 단결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노동해야할 권리를 주장해야한다 추구했다. 그러나 라파르그는 노동해야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노동 자체를 금지해야한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 시간 단축과 자본가로부터의 노동해방이 아닌,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일할권리를 부정한다. 이런 점에선 확실히 마르크스하고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라파르그가 게으를 권리에서 하는 주장들이 고찰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게으를 권리를 더 강조해서 주장하는 건 반대하는 입장이다. 물론 착취를 막아야 하고 노동을 줄이는 쪽으로 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 자체를 부정하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인류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나 또한 게으름을 피울때가 있고, 거기에 대해 크게 여념하지 않는 편이지만, 노동 자체를 금지해야할 대상으로 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라파르그가 무조건적으로 노동을 사라지게 만드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해도 충분하고 나머지는 한가로움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걸까?


라파르그가 보기에 노동은 강요된 것으로 길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윤리와 사회정치적 경제논리와 자유사상가들의 논리에 그런 '길들임'의 기이한 윤리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런 편견을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게으름은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강력한 반박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자유사상가들과 사회정치적 경제논리가 추구하는 길들임에 익숙해지는 순간 평생 동안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라파르그의 생각인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자나'라는 자기 강박적 생각은 자칫 길들여지는 첫걸음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라파르그의 주장이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에서 기계의 생산력과 가내수공업이나 인간의 생산력에 대해 지적한다. 그는 자본가들이 이윤축적을 위해 노동을 강요하며 노동자들에게 기계 못지 않은 생산력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라파르그는 기계가 생산하는 양이 인간이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빠르게 생산한다는 사실을 얘기하며, 자본가들에겐 인간 노동자 보다 더 많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기계를 더 중요시 여긴다고 비판한다. 이와같은 그의 주장은 상당히 소름끼친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 원리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라파르그는 자본가들이 기계가 더 효율적이면 노동자들이 죽든 살든 혹은 해고당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점에서 그는 현재 느리지 않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폐해를 예견한 측면도 없진 않다.


이 책은 단순히 라파르그가 쓴 게으를 권리만 다루는 책이 아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남긴 여러 글들을 게으를 권리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이 책에서 게으를 권리 외에 흥미롭게 읽은 파트는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과 '사회주의와 지식인' 그리고 '여성문제'다. 마르크스를 회상하는 파트에선 마르크스에 대한 칭찬을 담은 그의 회상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마르크스가 단기간에 러시아어를 마스터하여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그의 회상이다. 그외에도 마르크스의 천재성을 아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사회주의와 지식인 파트는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운동의 변화와 흐름 그리고 라파르그 나름의 대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여성문제는 그의 본업인 의사답게 그 시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자본가와 지배계급 그리고 자칭 잘난 자유철학자들의 인종주의적 망언과 뇌피셜들을 일목요연하게 반박한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그런 문제가 성별 즉 생물학의 문제가 아닌 지배계급과 자본가들의 강요한 사회체제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기에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게으를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본능적 혹은 이성적으로 공감되는 부분도 분명히 많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본능적으로 게으르고 싶을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얘기를 마치자면 그 당시 사회주의자 중에 마르크스와 가까우면서도 방법론에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인물의 주장을 알 수 있서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게으름을 자주 부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게으름을 잠시 접어두라 얘기한 뒤,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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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1-11 0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아하는 책이네요. 몇번을 읽어도 그 예리한 통찰에 놀라게 됩니다 ˝모든 것에 게을러지자. 사랑하는 것과 게으름 피우는 것 빼고.˝ 정확하게는 기억 안 나지만, 정말 좋은 말입니다 ㅋㅋ

NamGiKim 2020-11-11 00:35   좋아요 0 | URL
정말 재밌게 읽은 책입니다. 특히나 여성문제는 통찰력이 예리하죠. 거기다 현재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자주하는 실수도 반복하지 않고요. 게으름이라는게 나쁜게 아니라 사람의 생물학적 본능일 수 있다는 걸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ㅎㅎㅎ
 

(보신전쟁 전개 지도, 1868년 1월에 시작한 이 전쟁은 1869년 훗카이도 하코다테에서 마지막 정부군이 항복하며 끝났다.) 


1868년에 들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길로 접어들었다에도 막부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그러나 반막부세력이 주도한 신정부가 탄생하였지만그래도 여전히 일본엔 도쿠가와 세력의 존속을 주장하는 친막부세력은 이에 저항했다따라서 막부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이들 간의 갈등은 있었던 것이다이런 갈등은 당연히 양측의 전쟁으로 이어졌고이것이 바로 보신전쟁이었다.

 

보신전쟁은 1868년 1월 26일 막부의 군함이 효고에 정박해 있던 사쓰마번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보신전쟁 시작 1주일 만인 2월 2일 메이지 정부는 오사카 성을 장악함으로써 막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친막부세력은 3월 29일 고슈가쓰누마[甲州勝沼전투에서도 신정부군에게 패배하였으며, 4월 5일엔 영국 공사인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의 요청에 따라 교섭을 추진했다그 결과 신정부군은 5월 3일 에도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에도 성이 신정부군에게 장악당한 이후에도 친막부 세력들 중 일부는 저항을 계속했고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하코다테에서 마지막으로 큰 전쟁을 치렀다물론 이 저항은 신정부군에게 진압 당했고, 1869년 6월 27일 이들이 항복하면서 보신전쟁은 메이지측의 승리고 끝이 났다.

 

보신전쟁 이후 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들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869년 1월 정권의 핵심인 사쓰마·조슈·도사·히젠의 번주들을 설득하여 이들이 누려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정부에 반환하는 판적봉환을 단행했고다른 번들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신분제도를 개혁하여 다이묘와 상층 귀족은 화족일반 무사는 사족농공상민은 평민으로 정했다또한 사민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평민의 성씨 사용신분 간의 결혼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허용했고, 1871년에는 번들을 통폐합하여 현을 설치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임명한 지사를 파견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통해 변한 일본의 수도 도쿄)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왼쪽에서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중앙에 상투를 튼),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사진은 1872년 런던 체류 중 촬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조선 후기 개화파 유길준에게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라 10,000엔 지폐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187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근대화가 문화적으로도 커다란 진전을 보였다특히나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서방에 파견했던 이와쿠라 사절단의 경험을 통해 한층 확고해졌다이와쿠라 사절단은 원래 서양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을 하기 위해 구성되었고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부사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정부의 실권자들이 포함되었다. 1872년 신정부는 학제를 제정하여 전국을 여덟 개 대학구로 구분하고 소학교·중학교·대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제도를 설치했고, 1871년에는 단발령도 공포했다서양 문물은 일상생활에도 침투했다서양식 단발머리에 양복모자구두를 갖춰 입고 소고기와 같은 육류를 먹는 것이 유행했다요코하마 같은 개항장과 대도시에 서양식 건물이 축조되었고의자와 테이블 같은 가구도 수입되었다이 당시 돼지고기를 밀가루에 묻힌 후 소량의 기름으로 프라이팬에 지져내는 요리가 일본에서 유행했는데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カツ,pork cutlet)의 시초였다.

(돈까스,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돈까스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음식이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1872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반 국민을 기초로 한 근대적 군사제도를 탄생시켰다메이지 정부는 육군은 프랑스해군은 영국을 본보기로 이른바 천황의 군대를 건설하기로 했고이에따라 1871년 사쓰마·조슈·도사·히젠 등에서 번병을 차출해 중앙군인 어천병을 만드는 한편지방의 치안 담당을 위해 번병을 재편성한 뒤 도쿄오사카진제이도호쿠의 4개 진대를 설치하기도 했다징병제가 시행됨에 따라 1873년에는 4월부터 징병된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각 진대에 입대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다. 1874년에는 육군의 기간이 된느 보병연대 9개가 처음으로 편성되었다. 1871년 일본의 군사력은 육군 병력 1만 4,800함정 14척에 불과했지만, 1877년을 거쳐 점차 증강되었고, 1868년부터 1877년까지 약 10년간 메이지 정부는 국가예산의 15.9%를 군사비에 투입했다보병연대도 1875년에는 14, 1878년에는 15개로 증강되었다. 1870년대 전반 메이지유신 정부는 근대국가’, 즉 서구형 국가 건설을 위해 폐번치현학제징병령지조개정과 같은 일련의 제도개혁에 착수했고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동시에 대외팽창과 탈아입구의 기점이기도 했다즉 메이지 정부는 이 시점부터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들이 대외팽창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하나는 1874년 일본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던 대만 출병이고다른 하나는 1873년쯤에 나온 이론인 정한론(征韓論)이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본명은 이하응이다. 그는 조선 말기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구했다.)

 

정한론은 말 그대로 조선을 일거에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주장으로 막부 말기와 메이지 초기에 대두된 이론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쓰시마 섬 즉 대마도에 개입하여 조선에 대해 왕정복고를 한 신정부의 발족을 통고하고 개국을 강요하며 국교 교섭을 시도했었다하지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집권 아래 쇄국정책과 척왜정책을 지향하던 조선은 외교문서가 종전과 달리 고종을 격하하는 등 당시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사신의 접견을 거부했었다이를 시작으로 일본 내에선 이른바 정한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1870년에는 조선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다 하쿠보가 구체적인 정한론의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며 정한론이 유력하게 대두되었다.

 

1872년에는 외무대신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했지만조선 측은 일본의 사신이 군함을 이끌고 온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으며수개월간 체류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한편 조선 정부는 부산 등지에서 성행하는 일본 상인들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전령서를 내렸는데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하였다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력 침공을 주장하고 스스로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하였다. 1873년 8월에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지만같은 해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오쿠보 도시미치이와쿠라 도모미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에 충실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를 이유로 이를 반대하자, 10월에 파견 중지가 결정되었다.

(운요호 사건 당시 사진, 1875년 일본은 시험삼아 강화도를 공격했었다.)

 

이후 정한론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고정한론은 1880년대에 들어서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메이지 유신때부터 유지해온 대외팽창적 전략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몰락과 때를 맞춰 일본은 1875년 운요호를 파견하여 강화도 앞바다를 공격했다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인천 근해의 영종도를 불법 포격하고 방화와 살인·약탈행위를 서슴지 않았다이러한 일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은 무기력하게 대처했다.

(강화도 조약, 1876년에 체결된 이 조약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876년 정월 일본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카를 지휘관으로 한 6척의 함선(군함 3수송선 3)을 파견하여 조선을 위협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했던 똑같은 방식을 이번엔 일본이 조선에게 한 것이다이로써 1876년 2월 3일 연무당(현재 서대문 옆)에서 12개 조항으로 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당연히 강화도조약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강요했던 것처럼불평등조약이었다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항 외에 2개의 항구를 개방했고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치외법권 지역도 인정해야 했다이처럼 일본은 메이지 유신부터 대외팽창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이 시점부터 점차 팽창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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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미국 역사를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가?

 

1776년 독립선언을 통해 탄생하게 된 나라 미국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 최강의 군사, 경제, 정치체제를 소유한 국가로 부상했다.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서까지 승리를 장식한 미국은 현재 엄연히 전 세계의 국제정세를 이끌어가는 패권국가로 남아있다. 이러한 패권국가의 위치에 있는 미국의 입지를 잘 반영해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배워온 미국의 역사란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신에 따라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고 전 세계에 전파한 자랑스러운 역사 즉 위대한 역사다. 이처럼 미국인들에게 널리 대중화되고 다소 신화화된 미국사는 책 저자의 말대로 미국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책의 저자 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진실의 극히 일부만을 반영한 역사일 뿐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했다. EH카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역사는 그러한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다. 따라서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기 위해선 미국의 흑역사인 제국주의의 역사, 인종차별의 역사 그리고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빈부격차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많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만 배워왔고, 현재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네오콘과 같은 세력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른바 우파적 역사 수정주의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 패권주의에 충실히 이행하는 대한민국 또한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미국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미국은 단 한 번도 제국주의 국가인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를 기사로 내보내기 까지 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광화문에 나와 태극기 성조기를 같이 흔들며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절을 하기도 하고, 북폭(北爆)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사실 이런 현상에 대해 엄밀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미국 역사에 대한 총제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즉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와 현재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미국의 이면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읽게 된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이자 저서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지금껏 우리가 얘기하지 않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던 미국의 이면을 가르쳐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과연 무엇일까?

 

2. 21세기 헬게이트 이라크 전쟁과 오바마 제국

 

21세기는 시작부터 충격과 공포를 미국인들에게 맛보게 해주었다.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감행한 9.11 테러는 21세기를 시작하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2001911일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추구했던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비행기를 납치하여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미국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가했다. 특히나 비행기 자폭테러로 인해 당시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고, 최소 3,000명 이상이 테러공격으로 희생됐다. 9.11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이에 분노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는 곧바로 전쟁준비에 착수했고, 9.11테러로부터 한 달 뒤, 알카에다가 있다는 심증만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전쟁 초기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주요도시와 군사거점들을 접수했다. 물론 여기에는 최신식 무기가 동원되었고, 미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한 반면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의 사망률은 급증했다. 뉴햄프셔대학 마크 해롤드 교수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4,000명 가까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9.11테러로 인한 미국 민간인 사망자 숫자를 상회했다. 전쟁 발발기간 몇 개월 후까지 기간을 늘려 잡으면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 아프간 민간인 사망자는 2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다. 물론 시작만 좋았을 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전쟁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미국은 또 다른 희생양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 희생양이 바로 이라크였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포악한 독재정권이라는 비판과 주민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 부시와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이런 조작극을 아주 치밀하게 계획했고, 결국 20033월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수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을 규탄했고, 전쟁 전후로 해서 전 세계 800여 개 도시에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소 수백만 명의 세계인이 이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심지어 중동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국가 이스라엘마저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이라크 전쟁도 초기에는 미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개전 3주 만에 수도 바그다드에 진입했고,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다. 마치 19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군을 상대로 보여줬던 것처럼 미국은 육··공군에서 이라크군을 압도했다. 미군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이 전쟁은 전 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또한 미국이 독재자라고 규탄했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도 생중계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라크 전쟁을 계획한 미국이 심리전팀을 동원하여 연출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현장에 나와 있다가 무너진 동상을 짓밟으며 환호하는 이라크 주민들은 사전에 동원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전쟁 초기에만 승기를 잡았을 뿐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 두 전쟁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킨 부시 정권이 끝나고 나서 등장한 오바마 정부에서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미국 역사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진보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의 대기업들과 자본가들에게 많은 양보를 했고,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구조를 더 극대화시켰다. 당시 미국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는데, 이는 2011년 당시 독일 민간 비영리 기구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수치가 201110월 독일 최대의 민간 비영리기구 베르텔스만재단(Bertelsmann Stiftung)’이 발표한 보고서 “OECD 회원국의 사회정의 수준 비교(Social Justice in the OECD-How Do the Member States Compare)”에서 드러났다. 보고서는 미국을 31OECD 회원국 중 27위로 평가했다. 미국의 뒤를 잇는 나라는 그리스, 칠레, 터키 정도였다. 보고서는 빈곤 방지, 아동과 노인 빈곤율 소득 불평등, 영유아에 대한 교육비 지출, 건강보험 등을 포함한 여러 요인을 비교 고찰했다. 미국은 전반적인 빈곤율에서 29, 아동 빈곤과 소득 불평등 항목에서 28위를 기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아동빈곤연구센터는 아동의 42%가 저소득 가구에서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중 절반은 빈곤선 이하였다 AP통신은 201112월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빈곤 상태이거나 저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계청은 20104,620만 명의 미국인이 빈곤선 이하라고 보고했다. 이는 52년 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로 최고치였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69~370

 

그뿐만 아니라 오바마는 전쟁을 지속했다. 이라크에서는 철수하려는 모습을 보인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오히려 병력을 증강했다. 이에 따라 2010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은 역대 최대치인 10만 명을 돌파했다. 또한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드론 공격의 횟수를 늘렸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재임 첫 3년간 드론 공격으로 1,350~2,250명이 사망했을 정도다. 거기다 오바마 정권 시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른바 킬팀(kill team) 사건이라 해서 젊은 미군 병사들이 민간인을 죽인 뒤 정당방위처럼 조작한 사건도 있었고, 특히나 드론 공격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개입했을 때도 오바마가 보낸 NATO군의 공습으로 죽어나간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속출했을 정도다.

 

오바마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아주 굳건히 유지했고, 심지어 네오콘들한테 아낌없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어떤 네오콘 학자는 오바마의 대외정책이 네오콘 정권 때하고 달라진 게 없다며 소위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게 부시였다면, 그 전쟁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은 오바마였던 것이다. 어쨌든 오바마가 철수하고자 했던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 4,500명이 사망하고, 이라크 민간인 60만 명이 사망했다. 20115월 오바마는 9.11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파키스탄에서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파키스탄 정부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였다. 이처럼 오바마 정부 또한 미국을 제국주의의 길로써 이끌었고 욕심 많은 자본가들과 결탁하는 길을 걸었으며, 결국 대외정책에서도 네오콘의 이익에 반대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따라서 오바마는 제국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3. 냉전사의 재인식

 

냉전(Cold War)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1990년 소련이 붕괴직전까지 대략 45년간 지속되었던 시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형성했던 반파시즘 동맹에서 벗어나 서로가 모든 면에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고, 이것은 자칫하면 양측의 핵전쟁 위기로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미국이 데프콘 2까지 발동하였고, 미국의 케네디와 소련의 흐루쇼프가 합의를 볼 때까지 전 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였었다.

 

많은 사람들이 냉전시대에 대해 배울 때 보통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미국보다 더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배웠고, 또 그렇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생각은 과연 역사적인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 것은 올리버 스톤의 책을 읽어보면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된 절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정도로 소련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했다. 19467월에는 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여 소련에 대한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특히나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를 발표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사회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그리스에서 전 나치 협력자와 우익들에게 무기와 장비 그리고 고문단을 지원했다.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자,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전 무솔리니 정권 협력자들을 동원하여 정권 전복에 착수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인기가 없고 부정부패가 극심한 중국 국민당 정권을 지원했으며,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내세운 괴뢰 황제 바오다이를 위해 CIA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또한 일제로부터 35년 만에 독립한 한반도 이남에 분단정부를 수립했고, 민중에게 인기 없는 늙은 지도자 이승만을 지원했다.

 

소련의 경우 미국에 비하면 그런 노골적인 개입은 거의 하지 않은 편이었고, 오히려 미국이 소련을 위협했으며 실제로 커티스 르메이는 소련에 대한 핵폭격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으로 갈 뻔했던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의 김일성이 시작했다는 이유 한 가지 때문에 미군의 반인륜적 범죄는 매우 잊혀졌다. 특히나 미국이 남북한을 가릴 거 없이 투하한 폭탄과 네이팜탄은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다.

 

특히나 냉전에서 미국의 개입이 노골적이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에는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반공주의자를 내세워 괴뢰정권을 만들었다. 민중의 80%가 항일 항불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무차별 융단 폭격과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와 같은 고엽제 투하를 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로버트 맥나마라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죽인 베트남인은 380만 명이나 됐다. 즉 이들 대다수가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 그리고 미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죽은 것이다. 심지어 1968년 미라이 마을에선 미군 30명이 504명이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남미에서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퍼부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혁명을 성공시키자 피그스만 침공을 개시했었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쿠바 정권 전복 훈련을 개시했으며,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미국이 이런 시도를 해서 피델 카스트로가 소련의 흐루쇼프와 협력하여 핵미사일을 배치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맥락이다. 또한 미국은 과테말라에 등장한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권을 CIA를 통해 전복시켰고, 1954년 아르벤스 정부가 사퇴하면서 성공했다.

 

미국이 중남미에서 제국주의적 정책을 매우 강력하게 추진했고, 민주주의적 법칙마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1970년대 칠레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1970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칠레에 적용했다. 그러자 미국은 경제제재를 하는 것은 물론, 사보타주를 통한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이 인기가 떨어지지 않자, 19739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사살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수천수만 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즉 미국의 지원으로 칠레는 피바다가 되었다.

 

미국에서 진보의 이상이라고 불리는 존F.케네디 대통령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었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한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을 지원하는데 열정적이었고, 쿠바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또한 당시의 미국 흑인인권은 여전히 차별적이었으며,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책에서는 케네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케네디는 생의 마지막 몇 달간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잘못된 판단을 고집해 상황이 심각해진 카스트로의 쿠바에 대해서도 노선 선회를 고려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철군을 추진하면서도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쿠바 문제에서도 피델 카스트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CIA 주도의 사보타주 공작을 다시금 재가했다. 카스트로에 대한 케네디의 이중적 태도는 결국 라틴아메리카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 케네디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계속 지원했다. 심지어 19633월에는 과테말라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6

 

4. 로널드 레이건의 실체

 

냉전시기 미국과 경쟁했던 나라 소련은 197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경제 사정이 점차 나빠졌다. 특히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선 1947년에 폐지했던 배급제를 다시 실행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고전하며 경제적으로 위태로울 시기 미국에는 헐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가 바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미국이나 한국 사람들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로널드 레이건은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영웅적 전사였을까?

 

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널드 레이건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전 정권인 지미 카터정부가 닉슨 정부에서 형성된 데탕트를 추구하며, 대외적인 지원을 제국주의적으로 했던 것에 반에 로널드 레이건은 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특히나 그의 극우 반공주의적 도그마는 중남미에서 잘 드러났다. 1979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43년간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통치를 해온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건설했다. 당연히 미국의 카터는 반공주의자들을 지원했고, 이런 지원은 로널드 레이건에 와서 더 심화되었다. 레이건이 이들을 타도하려 했던 이유는 산디니스타 정권은 토지, 교육, 의료 개혁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건이 지원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은 잔인무도한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레이건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까지 촉발했다. 즉 이란에 인질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빌미로 무기 거래를 하고 그 자금을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했던 것이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학살로 최소 3만 명이 희생됐다. 그 외에도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서 극우세력들을 지원하여 이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 당시 레이건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을 이른바 자유투사로 칭찬했는데 그들의 실체는 민주주의와 정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실체는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CIA의 정보 사이드가 완전히 찌그러든 상황에서 공작 사이드는 물을 만난 고기였다. 엘살바도르 미국 군사고문단 책임자 존 왜겔스타인 대령은 진짜배기 게릴라 소탕작전 기술은 야만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은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받은 엘살바도르 정부군과 과테말라 정부군, 그리고 미국이 주도한 니카라과 반정부 게릴라 활동에 딱 들어맞는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자유의 전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은 강간, 고문, 거세, 사지 절단, 참수, 시신 절단 같은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질렀다. 과테말라 정부군의 경우 1981~83년 마야문명의 후예인 아메리카 원주민 농민 약 10만 명을 살해했는데, 그런 잔학성을 키워주기 위해 훈련 단계부터 신병들을 구타하고 모욕하고 하수구에 처박는가 하면 똥통에 장시간 처넣기도 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인간성을 말살당한 정부군 병사들은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4~165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8~169

 

얼마 후 놀라운 학살행위가 또 벌어졌다. 미군에게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무장한 살바도르 정부군이 1981년 말 엘 모소테 마을 주민 767명 전원을 학살한 것이다. 군은 13세 미만 어린이 358명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고 기관총을 난사해 죽였다. 소녀와 성인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73

 

로널드 레이건은 반공주의자로 베트남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타국 침략에 나서기도 했었다. 바로 그레나다 침공이었다. 대략 7,000명의 미군이 그레나다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명분은 쿠바의 지원을 받는 그레나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함이었다. 침공 작전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미군 29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했으며 헬기 9대를 잃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작전 성공 후 바로 철수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레이건은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굴욕을 극복하고자 했고, 그 승리에 심취했었다.

 

또한 레이건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 맞서 싸우던 이른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당시 레이건은 스팅어 미사일을 포함한 온갖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고, 이런 지원을 받았던 이들 중에는 이후 9.11 테러를 일으키게 되는 오사마 빈라덴도 포함됐다. 미국은 과거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겪은 고통을 소련 또한 겪기를 바랬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다. 레이건은 냉전 말기 반공주의 정신을 강화하며 국방비 예산을 늘렸던 반면, 민중의 빈부격차와 복지를 위해선 예산을 삭감하는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에따라 미국의 빈부격차는 더 극대화됐다. 왜냐하면 그가 독점기업들을 위해 세금을 삭감해주고, 민중의 복지혜택을 줄였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책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과연 레이건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무엇일까?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업무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지시도 내리지 않는 행정부 수반이었지만 부활한 강경 반공 우파 인사들에게는 힘을 실어주었다. 이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군사화하면서 냉전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레이건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무기를 대주었다. 또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국지적, 지역적 분쟁을 냉전의 싸움터로 확대시키는 한편 공포정치가 민중의 운동을 억압하도록 방조했다. 그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군사 부문에 투입한 반면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삭감했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대폭 삭감했고, 국가채무를 3배로 늘려놓았으며,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권국(취임한 첫해인 1981)에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1985)으로 바꿔놓았다. 198710월에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주식시장 붕괴를 맞아야 했다. 레이건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격용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어영부영하다가 날려버렸다. SDI라는 유치한 환상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 종식에서 레이건이 한 역할은 과대평가되고 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217~218

 

5.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나라?

 

미국인들에게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무찌르고 민주주의를 전파한 역사다. 미국인들의 이런 관점을 반영이라도 한 듯 서방에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밴드 오브 브라더스’, ‘씬 레드 라인’, ‘아버지의 깃발’, ‘핵소고지’, ‘퓨리등 미국과 서방 연합군의 중심이 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끈 주체는 미국과 서방연합군이 아니라, 바로 독일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감당해야 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나치 독일은 단기간에 유럽전역을 점령했고, 19416월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받았고, 수도 모스크바 외각까지 독일군이 진격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나치 독일과 기업분야에서 협력했던 미국은 공식적인 차원에선 나치독일에 대해 비판을 했었다. 따라서 1941년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받자 소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후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소련에 대한 물자지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에선 소련을 칭찬하는 선전과 캠페인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나로서는 그건 참 부인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이오. 러시아군은 유엔 25개 회원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파괴했소. 따라서 1942년에는 당연히 최대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그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지원해야 할 것이오.”라는 얘기를 했었다.

 

1942년에는 미국의 영화사 헐리우드도 소련 찬양에 열을 올렸다. 19427월이 되면 MGM, 컬럼비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같은 주요 영화사들이 제작 중이거나 제작을 검토 중인 소련 관련 영화는 9편 이상이나 됐고, <모스크바 특명(Mission to Moscow)>, <북극성(North Stat)>, <러시아의 노래(Song of Russia)>, <러시아 소녀 삼총사(Three Russian Girls)>, <영광의 나날(Days of Glory)> 5편의 주요 작품이 나왔다.

 

미국내에서는 소련에 대한 지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행보가 이어졌지만, 1941년부터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토록 원했던 제2전선을 형성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전선은 19446월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면서 형성됐다. 즉 이 말은 제2전선을 형성하기 거의 3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소련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는 얘기가 된다. 책에서는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4466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제2전선이 마침내 열렸다. 원래 약속보다 1년 반이나 늦었지만 10만 명이 넘는 연합군 병력과 각종 차량 3만 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것이다. 상륙 과정에서 9,000명이 전사했다. 그 시점에 소련은 재앙적인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부유럽 상당 부분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이제 연합군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독일로 밀고 들어가게 된다. 승리가 코앞이었다.

 

그 시점까지 소련은 거의 단독으로 독일군과 싸워왔다. 노르망디상륙작전 개시까지 소련군은 대개 200개 사단 이상의 적과 전투를 한 반면 미군과 영국군은 둘 다 합쳐도 10개 사단 이상과 교전한 경우가 드물었다. 처칠은 독일 군사력의 내장을 뽑아낸 것은 러시아군이라고 인정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600만 이상, 서부전선과 지중해 일대에서는 100만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209

 

1945년 나치독일이 패망하는 시점까지 2,600만 명 이상의 소련사람이 사망했다. 그 중 1,000만 명이 소련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나치독일군의 무차별 학살로 죽은 민간인이었다. 소련군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아우슈비츠(Auschwitz)나 트레블링카(Treblinka)같은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수용소도 같이 해방시켰다. 즉 나치 독일의 광적인 유대인 학살을 끝낸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고, 그런 나치독일을 무찌른 것도 소련이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가 바로 소련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이유를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원자폭탄 자체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 보단 소련군의 만주 진격이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우선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이 원자폭탄 1,2발을 도시에 사용하는 것과 B-29 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한 융단폭격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의 지도부는 미국의 상륙에 맞선 결전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58월 소련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러한 일본 지도부의 계획은 무산 됐다. 거기다 4년간 유럽전선에서 단련된 소련군은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인 관동군을 붕괴시켰다. 그 붕괴속도도 빨라서 소련군의 작전은 불과 1주일 만에 성공적으로 종결되었을 정도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소련은 몽골과 만주, 중국, 한반도 이북 그리고 쿠릴열도와 사할린까지 진격했다. 소련군의 진격에 일본이 절망에 빠졌던 것은 바로 일본의 산업기반이 만주에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더라도 식민지 조선과 만주로부터 지원받음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희망을 소련군이 말 그대로 붕괴시켰다. 따라서 일본은 항복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소련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외면하고자 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이다.

 

6. 미국 민중사와 차이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출판된 비슷한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1980년대 출판되어 100만 권 이상이나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그의 베스트셀러다. 그 책은 국내에도 1980년대에 번역된 적이 있고, 2000년대 개정판이 다시 번역되기도 했었다. 필자 또한 그 책을 몇 년 전에 읽었고,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특히나 억압받던 계급이나 피지배계층의 시각에서 서술한 아래로부터 역사쓰기는 참으로 훌륭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아주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미국 민중사>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역사부터 2003년 이라크 전쟁 이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고, 국내에 번역된 개정판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를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 따라서 현대관련 부분은 좀 미약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첫 판은 1980년대에 나온 것이고 개정판도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온 것이라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다. 만약 콜럼버스 시대부터 시작한 미국의 추악한 범죄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미국 민중사>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미국 민중사>에서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한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보다 깊이 다루고 있다. 특히나 <미국 민중사>에서 짧게 언급하는 9.11 테러 이후의 역사를 이 책은 아주 깊이 다루고 있다. 적어도 오바마 재선 이전까지 말이다. 확실히 이 부분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해 좀 더 추천하는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읽고 난 다음에 이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미국 민중사>는 위에서 언급한 그런 한계가 있고, 또 소련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접근한 측면이 있는 반면, 이 책은 소련에 대해 비판은 하더라도 적어도 소련의 업적에 대해 나름 균형 있게 평가하려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미국 민중사>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미국 민중사>를 읽지 않았다면, <미국 민중사>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또 다른 이면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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