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혁명을 두 개의 역사적 단계로 구분해보면, 제1단계는 신민주주의 혁명이다. 이것은 중국혁명의 새로운 역사적 특성이다. 이 새로운 특성이 중국 내부의 정치적 관계 및 경제적 관계에 있어서는 또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아래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하자. 1919년 5·4운동 이전(5·4운동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및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후에 일어났다)에 있어서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정치지도자는 중국의 소자산계급 및 자산계급(지식계층)이었다. 당시 중국 무산계급은 아직 각성한, 독립적인 계급적 역량으로서 정치무대에 진출하지 못하고 소자산계급 및 자산계급의 추종자로서 혁명에 참가하였다. 예를 들면 신해혁명 때의 무산계급이 바로 이러한 계층에 속하는 것이다.


5·4운동 이후에 있어서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이 계속 혁명에 참가하기는 하였지만, 중구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의 정치지도자는 중국 자산계급인 것이 아니라 중국 무산계급이었다. 이때 중국 무산계급은 벌써 그자신의 성장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각성한 독립적인 정치역량으로 신속히 전환되었다.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와 전반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의 철저한 강령은 중국 공산당이 제기한 것이며 토지혁명은 중국 공산당이 단독으로 수행한 것이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식민지, 반식민지적 국가의 자산계급이며 제국주의의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비록 제국주의시대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일정한 시기 및 일정한 정도에서는 의연히 외래 제국주의 및 자국의 관료군벌정부를 반대하는(후자는 예를 들면 신해혁명시기 및 북벌전쟁시기에 있어서) 혁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산계급, 소자산계급과 연합하여 자기들이 반대하려는 적을 반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자산계급이 제정 러시아의 자산계급과 다른 점이다. 제정 러시아는 벌써 군사봉건적 제국주의로서 남을 침략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자산계급에게는 아무런 혁명성도 없었다. 제정러시아에 있어서 무산계급의 임무는 자산계급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식민지, 반식민지로서 남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일정한 시기와 일정한 정도에서 혁명성도 가지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 무산계급의 임무는 민족자산계급의 이러한 혁명성을 경시하지 말고 그들과 더불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관료군벌정부를 반대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식민지, 반식민지의 자산계급이고 경제적 및 정치적으로 매우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한 가지 성질, 즉 혁명의 적에 대한 타협성도 가지고 있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혁명할 때에도 제국주의와 완전히 결렬하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농촌에서의 소작료 착취와도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철저히 전복하려 하지도 않거니와 철저히 진복시킬 수도 없으며, 봉건세력에 대하여서는 더구나 철저히 전복시키려 하지도 않거니와 철저히 전복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민족자산계급으로서는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의 두 개의 기본문제, 즉 두 개의 큰 기본임무를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당을 대표자로 하는 중국 대자산계급을 본다면 그들은 1927년부터 1937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줄곧 제국주의의 품안에 안겨 있었으며, 봉건세력과 동맹을 맺고 혁명적 인민을 반대해왔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도 1927년 및 그후의 한 시기 동안은 반혁명을 따르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항일전쟁 과정에서 왕정위를 대표자로 하는 대자산계급의 일부는 또 적에게 투항하여 대자산계급의 새로운 배반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도 중국 자산계급이 역사상의 구미 각국의 자산계급, 특히 프랑스의 자산계급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구미 각국에 있어서,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그들이 혁명적 시대에 처해 있을 당시에 자산계급에게는 비교적 철저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자산계급에게는 이 정도의 철저성 조차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혁명에 참가할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적에 대한 타협성이 있는, 이것이 바로 중국 자산계급의 양면성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역사상의 구미 자산계급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있었다. 큰 적이 앞에 닥치면 그들은 노동자, 농민과 연합하여 적을 반대하고 노동자, 농민이 각성하면 그들은 또 적과 연합하여 노동자, 농민이 각성하면 그들은 또 적과 연합하여 노동자, 농민을 반대한다. 이 점은 세계 각국 자산계급들의 일반적인 법칙이다. 다만 중국 자산계급에게 있어서는 이 특성이 더욱 돋보일 따름이다.


중국에서는 인민을 영도하여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자가 인민의 신임을 얻게 된다는 것이 아주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민들의 철저한 원수가 제국주의와 봉건세력, 특히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인민을 영도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민주정치를 실시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인민의 구성원이다. 역사가 실증하는 바와 같이 중국 자산계급은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책임은 무산계급의 어깨에 지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 무산계급, 농민, 지식인 및 기타의 소자산계급은 여하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본적 세력이다. 이미 각성한 자도 있고 지금 각성중에 있는 자도 있는 이 계급들은 필연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구성 및 정권 구성의 기본적 부분이 될 것이며 무산 계급은 영도적 역량이 될 것이다. 지금 창건하려는 중화민주공화국은 오직 무산계급 영도하에서의 반제, 반봉건적인 모든 사람들의 연합독재의 민주공화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즉 신민주주의공화국이며 또한 진정한 혁명적인 3대 정책을 실시하는 신삼민주의공화국이다.


이러한 신민주주의공화국은 한편으론 구민주주의공화국과 같은 낡은 형태의, 구미식의,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공화국과는 다르다. 그러한 공화국은 이미 때가 지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그것은 소련식의, 무산계급의 사회주의공화국과도 다르다. 이러한 사회주의공화국은 이미 소련에서 강대해지고 있고 또 각 자본주의국가들에서도 수립될 것이며 장차 틀림없이 공업이 발달한 모든 국가들의 국가 구성 및 정권 구성에 있어서의 지배적인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화국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이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취할 국가형태는 오직 세 번째 형태, 즉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형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형태이고 따라서 과도기 적인 형태기는 하지만 또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필요한 형태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여러 가지 국가체제를 그 정권의 계급적 성격에 의하여 구분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자산계급 독재 공화국, 무산계급 독재 공화국, 몇 개 혁명적 계급의 연합독재 공화국이다.


첫째 형태는 구민주주의 국가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된 오늘에 있어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 냄새조차 없어지고 자산계급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적 독재로 이미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고 있다. 지주계급 및 자산계급이 연합하여 독재하는 일부 국가들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다.


둘째 형태는 현재 소련에서만이 실현되어 있고, 그 외에는 현재 자본주의 제 국가에서 준비하고 있다. 장차 그것은 일정한 기간 동안은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형태가 될 것이다.


셋째 형태는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이 취하는 과도적인 국가형태다. 각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약간의 각각 다른 특성들을 가지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대동소이한 성격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 혁명이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의 혁명이라면 그 국가 구성 및 정권 구성은 기본상 필연적으로 같게 될 것이다. 즉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몇 개의 계급들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독재하는 신민주주의국가가 될 것이다. 오늘의 중국에 있어서 이러한 신민주주의적 국가형태는 다름 아닌 항일통일전선의 형태다. 그것은 항일하는 것이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며 또한 몇 개의 혁명적 계급이 연합하는 것이고 통일전선적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항전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민주 근거지를 제외한 기타의 대부분 지역들에서는 아직도 기본적으로 국가의 민주주의화에 관한 사업이 착수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 제국주의는 바로 가장 근본적인 이 약점을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침입하고 있다. 만일 과거의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운명은 매우 위험하게 됐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체(國體)’ 문제다. 이 국체문제는 청조 말년부터 수십 년 동안이나 논쟁해왔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확실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인즉 그것은 단 한 가지 문제, 즉 국가에 있어서 사회 각 계급들이 차지하는 지위를 말하는 것이다. 자산계급은 언제나 이러한 계급적 지위를 은폐하고 ‘국민’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여 실지로는 자기들 한 계급의 독재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은폐는 혁명적 인민들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니 그들에게 확실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국민’이라는 명사는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반혁명분자, 민족반역자들은 국민 속에 들지 않는다. 반혁명분자, 민족반역자에 대한 모든 혁명적 계급들의 독재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국가다.


“근세 각국의 소위 민권제도는 왕왕 자산계급에게는 독점되어 평민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당의 민권주의는 일반평민이 공유로 하는 것이고 소수인이 사유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1924년 국공합작에 의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에서 선포한 장엄한 성명이다. 지난 16년 동안 국민당 자신이 이 성명을 위반하였으므로 오날과 같이 국난이 심각한 상황으로 조성되었다. 이것은 국민당이 저지른 극히 큰 오류 때문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항일이라는 세례를 받아서 이 오류를 시정하기 바란다.


이밖에 또 ‘정체(政體)’ 문제라는 것이 잇는데, 그것은 정권 구성의 형태문제를 말하는 것이며 일정한 사회적 계급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여 적을 반대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정권기관을 조직하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당한 형태의 정권기관이 없이는 국가를 대표할 수 없다. 현재 중국에 있어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성(省)인민대표대회, 향(鄕)인민대표대회에 이르기까지의 체계를 취할 수 있으며, 각급 대표대회를 통하여 정부를 선거할 수 있다. 그러나 성별, 신앙, 재산, 지식정도 등의 차별이 없는, 진정으로 일반적으로 평등적인 선거제를 실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 내에서의 각 혁명적 계급들의 지위에 적응할 수 있고, 인민의 의사를 표시하고, 혁명투쟁을 지휘하는 데 적응할 수 있으며 신민주주의정신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제도가 곧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다. 오직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를 실시하는 정부라야만 모두 혁명적 인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으며 혁명의 원수들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할 수 있다. “소수인이 사유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정신은 정부와 군대의 구성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민일 진정한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면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인데 이런 것을 가리켜 정체와 국체가 서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국체는 각 혁명적 계급들의 연합독재이고 정체는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이다. 이것이 신민주주의의 정치며 신민주주의공화국이며 항일통일전선공화국이며 3대 정책을 실시하는 신삼민주의공화국이며 명실이 부합되는 중화민국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중화민국이란 명칭은 있으나 아직 중화민국다운 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 명칭에 부합되게 내용을 충실히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업이다.


이것이 혁명의 중국, 항일의 중국이 수립해야 할 일이며 또 결정적으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될 내부적 정치관계다. 이것이 ‘건국’ 사업에서의 유일하게 정확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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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 퐁넛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 퐁니 퐁넛 학살 당시 8살이었던 그는 이 학살에서 가족을 잃었고, 본인 또한 총에 맞았다.)


1968년 원숭이의 해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약 120개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격했고, 남베트남 전역에 있는 성과 부의 중심지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라는 명칭을 가진 이 공격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 전환점이었다. 이 한 번의 대공세로 1달 동안 베트콩 37,000명이 전사했지만, 미군 또한 2,500명이 전사했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린든 B.존슨 대통령은 미국 내의 반전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남베트남에 주둔한 54만 9,000명의 미군은 충격에 휩싸이는 1968년의 해였다.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 휴양지 다낭에서 12km 떨어진 곳에는 퐁니 퐁넛 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아는 한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1968년의 해는 베트남 전쟁에서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1968년 3월 16일 손미(Son My) 지역에 착륙한 찰리 중대(Charlie Company) 소속 병사들은 마을로 들어가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성, 노약자, 아이가 학살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했고, 학살당한 이중 1/10은 유아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 현(Điện Bàn)에서도 있었다. 그게 바로 한국군 청룡 부대가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Phong Nhi Phong Nhat Massacre)이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1968년 구정 공세는 미군과 그 동맹국 군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한 박정희 정권은 전쟁 기간 연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했었다. 1968년 남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숫자는 총 4만 9,869명이었다. 이들 또한 구정 공세 이후 반격에 나섰고, 이러한 작전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디엔반 현에 있는 퐁니와 퐁넛 촌에서도 한국군 청룡부대가 반격에 나섰다. 대략 청룡 부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이 반격 작전인 괴룡 1호 작전을 벌여 베트콩 수색 및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68년 2월 12일 소탕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미군 본 상병이 찍은 사진, 그는 퐁니 퐁넛 학살의 현장을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 베트콩이 게릴라전을 하고,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게릴라전을 하는 이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학살이 일어나는 지역들을 보면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소위 자유 사격 지대(Free Fire Zone)으로 설정한 곳이 많았고, 그 지역에서는 보이는 건 무조건 쏴 죽여도 됐다. 그러나 퐁니 퐁넛 마을은 달랐다. 퐁니 퐁넛의 경우 미구니 ‘발포제한 구역(Control Fire Zone)’으로 설정해놓은 곳이었다. 거기다 인근 1번 국도의 끼엠루(Kiem Lu) 초소엔 남베트남군이 적지 않았으며, 그들의 일가친척이 퐁니 퐁넛에 살았다. 그러나 이런 지역 근처에서 작전을 벌이던 한국군은 퐁니 퐁넛 마을에 진입하여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학살 당한 어린 아이, 이 어린아이는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나이가 6~7살 정도 되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1968년 2월 12일 청룡부대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 병사 150명이 수색정찰에 나갔었다. 그날 오전 한국군은 퐁니와 퐁넛 마을 측면을 동에서 서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한 병사가 지뢰를 밟았고, 1소대원 한 명이 저격당했다. 여기서 청룡부대 중대장은 마을 진입을 지시했다. 1소대가 진입했고, 그 뒤를 2,3소대가 따랐다. 즉 여기서부터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은 8살이었다. 응우옌티탄은 퐁니 퐁넛 학살 당시 언니 응우옌티쫑(Nguyen Thi Trong), 남동생 응우옌득쯔엉(Nguyen Duc Truong), 이모 판티응우(Phan Thi Ngu), 엄마 판티찌(Phan Thi Tri)를 포함하여 전 가족을 잃었다. 응우옌티탄 또한 학살의 현장에서 한국군이 쏜 총을 맞았다. 학살 당시 그는 엄마를 찾아다녔지만, 엄마 또한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5살짜리 그의 동생 응우옌득쯔엉은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죽었다. 그것도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 8살의 응우옌티탄 또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당했으며, 동네의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미군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 1년 동안 입원한 뒤에 퇴원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학살 당시 희생된 응우옌티탄, 퐁니 퐁넛 학살 당시 학살 당한 응우옌티탄 중에는 19살 짜리 소녀도 있었다.)


1968년 구정 공세 기간에 일어난 퐁니 퐁넛 학살에서 총 74명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17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 심지어 19살의 소녀 응우옌티탄(동명이인)은 유방이 잘렸고, 무차별 폭력에 희생된지 2일 후에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이들 중에는 어린아이와 영유아도 있었다. 그 아이는 엄마와 같이 장보러 가다가 한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나이는 6살이었다. 현재 베트남에 있는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에는 1,2살짜리 아이의 이름도 3~4명 정도 있다. 

(퐁니 퐁넛 학살 자료를 기록한 미국의 공식 문서)


이 참혹한 학살의 현장은 미국의 한 군인인 본 상병은 퐁니 마을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은 이후 오후 쯤에 마을에 들어가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가 사진으로 담은 자료들은 주월미군사령부와 대사관을 거쳐 미 국무부와 국방부에까지 올라갔고, 주월한국군 사령부를 포함한 한국의 군 당국에까지 건너갔다. 이렇게 되자 퐁니 퐁넛 학살은 한국과 베트남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미국이 한국에 강하게 항의했다. 당시 주월미군총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채명신은 “한국군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어떠한 책임 있는 사건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는 회신을 보냈다.

(참전용사의 양심고백, 2000년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는 학살에 가담했던 일에 대해 고백증언을 남겼다.)


퐁니 퐁넛 학살 1년 뒤 한국 정부는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건을 조사 하게 했다. 물론 이 사건은 한국 언론에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한 한국군 최영언 중위 등 3명을 조사한 뒤 작성한 문건 목록을 남겼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반공선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민간인 학살을 절대로 공론화하지 않았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이야기는 설사 박정희 시기 한국 언론에 보도 된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정권 입장에 맞게 편집되고 왜곡되어 보도됐다. 

(고경태 기자, 고경태 기자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인 퐁니 퐁넛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부터였다. 특히나 1990년대부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공론화에 압장섰던 구수정 박사의 노력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를 최초로 연구하고 현장을 직접 조사한 구수정 박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80여 개 마을에서 9,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2000년 한국군이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가 양심고백을 했다. 김석현을 비롯한 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장교 출신들은 “모두 그날 그곳에 갔다.”고 인정했고, 이 1중대 장교들에 대한 인터뷰는 《한겨레21》을 통해 기사화 됐다. 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이 학살 사건은 양심적인 참전용사의 고백증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2018년 당시 한국군의 범죄를 묻는 피해자 응우옌티탄씨, 한명은 퐁니 퐁넛 생존자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물었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알리는데 주력해온 구수정 박사와 한베평화재단은 2018년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 모의법정을 열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고, 그는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선고하였다. 원고로서 참여한 두 명의 응우옌 티 탄(한 명은 퐁니 퐁넛 피해자이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다.)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있었던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를 방문하여 제주 4·3 항쟁의 생존자와 만나기도 했다.

(구수정 박사,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공론화 시킨 구수정 박사는 현재 한베평화재단 이사로 지금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8년 2월 12일, 이 책은 고경태 기자가 집필한 책이다.)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중 제법 공론화 된 사건이다. 또한 사진자료와 미국의 공식문서 그리고 학살 가담자의 증언 고백 등이 있다. 이 때문에 모의법정까지 열어 그 사건의 국가적 폭력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돈을 번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흐름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한국의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마치 이것을 베트남 전쟁에 빗대어 경제성장의 기회라는 말이 안되는 논리로 파병을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마치 돈을 번 전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퐁니 퐁넛 학살과 같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한겨레출판, 2015


『한마을 이야기 퐁니·퐁넛』, 고경태, 보림, 2016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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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냉전이 한참이던 1950년대 두 진영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했던 국가들이 있었다. 당시 이런 국가들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3세계(The Third World)였다. 제3세계 국가들 중에 아랍 국가들을 상징하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된 인물로 1950년대 이스라엘의 견제를 받고 있던 아랍 국가들에게 있어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جمال عبد الناصر)다.


나세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등과 더불어 제3세계 진영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1960년대 아랍 사회주의(Arab Socialism)라는 이데올로기를 중동 지역에 전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아랍 사회주의는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등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쉽게 말해 나세르는 중동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제3세계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인 이집트의 근현대사는 3세기 동안의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제국주의 국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였다.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19세기부터 산업 혁명으로 제국주의 국가가 된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답게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인 이집트를 무력으로 식민지 지배를 했었다. 영국의 지배에 놓인 19세기 이집트에선 독립운동이 일어났었고, 영국의 폭압적인 통치에 많은 이집트인들이 반영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로부터 4년 뒤인 191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세르였다.


1937년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나세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독립 국가의 탄생을 목표로 했고, ‘자유 장교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나세르는 1946년 육군 참모 대학에 들어가 2년 과정을 마쳤고, 1948년 이스라엘의 탄생 과정에서 일어난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끝난 이후 이집트에는 군주제가 유지된 국가가 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왕이던 파루크는 부정부패와 더불어 말도 못하는 사치를 부리는 인물이었고, 그로인한 이집트의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것이 결국 나세르가 자신의 조직인 자유 장교단을 이끌고 혁명을 계획하게 되는 이유였다.


1952년 7월 나세르는 자유 장교단을 동원하여 혁명을 실행했고, 궁극적으로 혁명에 성공했다. 이후 정권을 잡게 된 나세르는 초반에 나기브라는 인물에게 명목상 지도자 자리를 맡겼지만, 이후에 자기 자신이 대통령직을 맡으며 명실상부 이집트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나세르가 집권한 이집트는 과거하고 달랐다. 물론 초기의 나세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둘다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후 서방과 갈등하면서 소련의 흐루쇼프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으며 친소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토지개혁과 더불어 각종 개혁을 실시했고, 1960년대에는 이집트의 산업체와 기업들을 국유화 했다. 또한 반동적 자본가들을 체포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은행, 보험회사, 기타 많은 기업들이 국유화 됐다.


이처럼 나세르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많이 실행했다. 나세르가 이집트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1956년에 단행한 수에즈 운하를 완벽히 이집트 소유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19세기에 완공된 수에즈 운하는 당시 영국 프랑스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영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나세르에게 수에즈 운하는 당연히 식민지 지배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는 대다수의 이집트인들이 가지고 있던 감정이었다. 따라서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의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그곳을 이집트 소유로 만들었다.


물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48년에 무력으로 남의 나라 땅을 강탈하고 탄생한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 군대를 공격하여 수에즈 운하를 접수했다. 당시 혼자서 싸우던 나세르는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연합군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영국을 반대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행위를 지지했다. 그러나 수에즈 사태에서 국제적인 여론은 이집트의 나세르 편이었고, 외교와 정치적인 부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수에즈 운하를 다시 되찾았다. 이에 따라 나세르에 대한 민중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나세르의 가장 큰 업적을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이집트를 자주적인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1967년에 일어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인해 개전 초기에 300대 이상의 항공기(전투기, 폭격기, 수송기를 포함해서)를 잃고, 이집트의 영토 또한 이스라엘에게 빼앗기면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세르에 대한 민중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패전의 책임을 묻고 사퇴하려고 하자 민중들은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왜쳤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이웃국가인 이스라엘이 제국주의적이고 매우 폭력적인 전쟁을 중동 지역에서 저질렀고, 나세르는 이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 이집트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개혁들이 민중에게 성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혹은 욤 키푸르 전쟁)에서 나세르 사후 정권을 계승한 사다트(Sadat)가 되찾았다.


이집트의 초대 대통령 나세르는 죽기 직전 미국의 평화 협상안을 받아들였고, 이집트 입장에서 성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70년 9월 28일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52세였다. 나세르가 사망하자 이집트는 추모의 물결로 휩싸였다. 많은 이집트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수많은 아랍 국가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나세르가 남긴 유산은 분명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이집트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책에 나온 그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나세르는 국가 독립의 건설자였으며, 다른 아랍인들에게는 아랍의 역사적 유산에 자긍심을 가지고, 아랍의 영향력을 드높이기 위해 함께 협력할 것을 주장하면서 아랍 민족주의를 소리 높이 외친 선지자였다.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그 결과로 야기된 서구의 압력(이를테면 영불 연합군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굽힐 줄 모르던 그의 용기는, 아랍인들이 식민 종주국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여설히 보여준 쾌거였다. 1950년대 이래 중동 정치 역학의 최전선에서 활약해 온 투쟁적 아랍 민족주의는 그가 남긴 유산이다.”


출처 : 인물로 읽는 세계사 30 나세르 p.156


나세르는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평생을 바쳤다.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혁명을 통해 봉건왕조를 타도했으며 자주적인 국가 이집트를 탄생시켰다. 1950년대 당시 그는 영국을 몰아내려 했고,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었다. 거기서 NATO의 가입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영국과의 동맹은 있을 수 없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더 나아가 그는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1960년대 아랍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내지는 정치 체제를 탄생시켰다. 나 또한 나세르의 이런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한 시대를 살다간 자주적인 지도자였다. 앞으로도 나세르는 이스라엘과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를 지킨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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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8월 말에 완독했던 존 톨랜드의 저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을 읽은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 책을 읽고 난 이후 썼던 서평에서 2부도 리뷰 하겠다는 말을 언급했는데, 생각보다 늦어진 것 같다. 휴학생이라 집에만 주로 머물고 있는 신세라 다시 한 번 존 톨랜드가 집필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을 다시 펼치게 되었다. 1부를 읽던 여름 나는 이 두꺼운 책을 빨리 일겠다는 마음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는데, 1권을 다 읽고 나서 2권을 대출하고자 하던 시기에 태극기 집회로 인해 코로나가 갑자기 창궐하면서 도서관에서의 대출이 불가능해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그래서 난 여름에 알바해서 탄 월급으로 이 책의 2부를 구매했다.

 

2부를 펼치기 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필자 자신이 늦장을 부린 것도 있지만, 이 책 외에도 읽고 싶었던 책이 꽤나 많았기에 결국 2부를 읽는 것이 생각보다 늦어진 감이 있다. 아무튼 내가 이 책을 펼치게 된 건 202012월이었다. 지난여름에 읽었던 1부가 1889년 그의 출생부터 1938년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시점까지 다뤘다면, 이번에 읽은 2부는 소위 1938년 수정의 밤(Kristallnacht)부터 1945430일 그가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2부는 아돌프 히틀러가 일으켰던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책이 아돌프 히틀러의 전기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황과 전투 자체를 깊이 다룬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히틀러와 그의 나치 지도층이 어떤 식으로 독일 영토를 팽창해 나가고 세계대전을 어떻게 계획하는지 그리고 각자의 입장과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다룬다.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사령과 헤르만 괴링이나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알베르트 슈페어, 빌헬름 카이텔, 루돌프 헤스 등 당시 나치 지도층이나 히틀러 측근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이 나온다.

 

그 외에 많이 언급된 인물 중에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을 뽑자면 2004년에 나온 독일 영화 몰락(Der Untergang)에 사실상 주인공으로 나왔던 히틀러의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Traudl Junge)와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 트라우들 융에의 경우 아돌프 히틀러가 그를 비서로 채용하는 과정부터 히틀러와의 인과관계 그리고 영화 몰락에서 나온 장면들이 매우 상세하게 책에서 나온다. 영화 몰락에서 보면 히틀러가 비서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면접을 보러 온 이들에게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상냥하고 정많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톨랜드의 책 또한 이것이 사실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영화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지만, 융에는 1943년에 SS 친위대 장교였던 한스 융에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남편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전사해버렸다. 책의 마지막 챕터인 자정은 5분 후, 선장은 배와 함께 침몰한다는 영화 몰락에서 나왔던 부분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상당히 트라우들 융에의 시각이 책에 반영되기도 한다. 영화 몰락을 본 독자라면 이런 거 읽는 재미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SS에 편재된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던 오토 슈코르체니의 경우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상당히 총애했던 인물로 책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1943년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면서 체포되어 감옥에 간 무솔리니를 구출했다는 내용부터, 그가 전개했던 여러 특수 작전들이 책에서 나온다. 참고로 오토 슈코르체니의 경우 그의 자서전이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슈코르체니 관련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그가 지휘했던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재밌게 읽었다. 사실 그가 무솔리니를 구출하면서 이탈리아 북부에는 여전히 독일의 지원을 받는 파시스트 이탈리아 체제가 남아있게 됐는데, 그 가교역할을 슈코르체니가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에 리뷰했던 1부에서도 한번 언급했던 것이지만, 저자 존 톨랜드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 인물을 최대한 과거의 인물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 속에서 크게 주관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보는 인물처럼 집필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것이 아돌프 히틀러의 반인륜적 범죄인 유대인 학살을 옹호한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책의 구성을 위해서 톨랜드는 히틀러를 따랐던 사람부터 반대했던 사람들까지를 포괄해서 인터뷰했고, 그 자료들을 토대로 책을 썼다.

 

사실 히틀러가 처음부터 유대인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작은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제한이었지만,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집단 거주지와 같은 강제 이주를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도면서 유대인이라는 종족을 계획적으로 학살하는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것이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있던 일이었다. 책에서도 600만 명의 유대인이 이렇게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600만이라는 수치는 단순히 과장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나치 지도부가 본인들 스스로 주장했던 학살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유대인의 절멸을 목표로 삼았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히틀러는 여전히 자신의 최종 임무에 구속받고 있었다. 아이히만은 8월 세상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임무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힘러에게 400만 명은 학살 센터에서, 나머지는 기동 작전에서 제거하는 등 600만 명의 유대인을 없앴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붉은 군대의 빠른 진격과 가차 없는 콘라트 모르겐의 계속적인 조사에 자극받아 힘러에게 아우슈비츠를 제외한 모든 학살 시설의 해체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모르겐도 약 60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아직 헝가리, 우치, 슬로바키아,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잡혀온 유대인들은 가스실에 보내기 위해 남겨놓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회스는 동부 유럽 부대가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경우 남은 일을 끝내기 위한 시설을 남겨두고 있었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547~548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은 히틀러가 시작한 폴란드 침공과 1940년의 서부 침공 작전, 덩케르크 철수, 프랑스의 항복, 영국의 본토 항공전과 1941년 그리스와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침공 과정을 잘 다루고 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의 내용은 생각보다 빈약하다. 1941년 히틀러가 감행한 바르바로사 작전과 그 과정에서의 거침없는 독일군의 진격은 생각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이후부터는 동부전선에서의 전황에 대한 내용은 보통 1~2페이지 아주 길어야 3페이지를 할애하는 수준이다. 대표적으로 1943년 세계 최대의 전차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내용은 말 그대로 한 페이지 정도다.

 

그에 반해 서부 전선에서의 전황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나 194412월부터 19451월까지 있던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의 경우 책 한 권에 한 챕터를 할애하는 분량이다. 물론 벌지 전투 챕터가 말 그대로 벌지 전투만 깊게 다룬 것은 아니지만, 그 전투 과정에서 미군들이 어떻게 싸웠고, 또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알기는 충분할 것이다. 물론 벌지 전투를 많이 할애했기에 그 전투에 대해 생각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벌지 전투가 책의 챕터 하나를 차지하는 분량이라 생각보다 자세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도 오토 슈코르체니가 미군복을 입고 교란작전에서 활약했던 내용과 더불어 미군 맥컬리프 준장이 만토이펠 장군으로부터 받은 항복 메시지를 대놓고 무시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이야기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거기다 2001년 미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하고도 내용이 겹치기에 개인적으로 흥미가 가는 챕터이긴 했다. 벌지 전투는 히틀러의 마지막 도발이라고 불릴 정도로 제2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는 그 상징성이 높은 전투인데, 독일군은 여기서 상당히 많은 전력을 투입했다. 독일측이 투입한 전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은 책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5만의 병사와 수천의 기갑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3개 군이 비밀리에 공격 개시 지점으로 이동했다. 독일군은 비행기를 낮은 고도로 비행시켜 반궤도 차량의 이동 소음을 잠재웠다. 부대들은 15일 자정 공격 시점에 집결했다. 병사들은 추위에 떨었지만 장교들이 야전원수 룬트슈테트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갈 때쯤에는 진정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출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570

 

그 외에도 2부에선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여러 가지 자잘한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히틀러의 2인자로도 선택될 정도로 명성을 떨치다가 1941년 영국으로 가서 명성이 완벽히 무너진 헤스의 이야기나 히틀러의 주치의 관련 이야기 등등은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즐거움을 느겼던 것 같다. 학술적인 서적은 아니기에 문체 자체도 술술 읽히는 편이다. 마치 일반적인 문학 작품이나 소설 읽히듯이 말이다. 논픽션 역사책의 장점인 것 같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한계 등도 있다. 대표적으로 동부전선의 전황과 그에 대한 얘기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1976년에 출간된 책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미소냉전이 끝나지 않은 시기인과 동시에 동구권 문서가 공개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2부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분명히 앞에서 서술한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을 다체적으로 알기 위해선 분명히 읽어볼 가치가 높다. 물론 국내에 이미 출판된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 1,2’이나 이언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I,II’에 비하면 학술적인 가치는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히틀러라는 인물을 다방면에서 쉽고 흥미롭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선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책인 건 확실하다.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많은 내용들을 어렵지 않게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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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TV에서 다룬 <디엔비엔푸 전투> 8부작 총합본으로 봤다. 반공적 접근을 한게 약간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내용은 아주 좋다. 그 또한 디엔비엔푸 전투가 명분은 베트민에게 있었고, 프랑스가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프랑스의 절차를 결국 미국이 밟게 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외에도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사실들도 이 시리즈가 알려줘서 많이 놀랐다. 앙리 나바르가 만들고 드 카스트리가 지휘한 디엔비엔푸 요새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정말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외에 베트민군을 돕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수십만의 베트남 민간인들의 각고한 노력으로 얻은 준비는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이걸 보며 디엔비엔푸 전투가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시한번 느낀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총 지휘한 위대한 명장 보 응으옌 잡 장군의 천재적인 전략전술과 철저한 준비도 정말 대단하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말 그대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의 명석한 두뇌에서 나온 작전대로 아주 쳬계적으로 진행됐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프랑스의 항공기 정찰을 피하기 위해 대규모의 베트민 군대를 위장전술로 속이고, 프랑스군이 주둔한 디엔비엔푸 요새 전방 200m까지 베트민의 참호를 만들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건 진짜 대단하다.

 

나 또한 베트남 현대사를 공부하고 호치민을 공부하면서 항상 느낀거지만, 베트민과 베트남 민중이 이렇게 까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엇던 건, 역시 호치민 주석이 항상 목표로 삼던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가 그만큼 소중했고, 그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베트남이 세계최강의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와 미국을 무찌른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디엔비엔푸 전투는 정말 세계 역사에 있어서 앞으로도 기리남을 업적이다. 1930년대 국민당군에 맞서 대장정을 했던 마오쩌둥의 홍군만큼 혹은 그 이상의 정신력과 지구력 그리고 전략전술로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든다. 프랑스가 오리엔탈리즘과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 베트민을 너무 무시했던 것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이 그정도로 준비했을 줄은 몰랐을거다.

 

거기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투입했던 군대는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였다. 최정예 부대 16,200명을 투입했다. 앙리 나바르가 195311월 디엔비엔푸를 습격할 당시, 프랑스는 이 지역에 그 모든것을 걸고 최고전력을 몰빵했다. 그렇지만 위대한 명장인 보 응우옌 잡 장군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최정예 특수부대를 아주 체계적으로 무너뜨렸다. 그 결과 19545711,000명의 프랑스 최정예 부대가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힌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보다보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침략자 프랑스가 대대적으로 비판받는 것에 반해, 그 프랑스를 물적으로 지원하고 디엔비엔푸 전투에 자신들의 병력을 파견하려 했던 미국에 대해선 비판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 본 샤를TV의 영상도 그 부분에 대한 비판은 좀 미약했다. 하지만 미국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어떠한 짓을 하려 했는지는 최소한 언급하고 있어서 만족하는 편이다.

 

영상 보는 내내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베트민군 그리고 이들을 돕던 베트남 민중과 최고 지도자인 호치민 주석까지 정말이지 감동하게 된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고 위대한 영웅들이며, 위대한 승리다. 디엔비엔푸는 앞으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이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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