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amGiKim > [100자평]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전쟁사 입문으로 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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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년 전에 올린 글을 좀더 보강한 것입니다.)


(1940년 본토 항공전 당시 보초를 선 경비대원, 중간에 세인트 폴 대성당도 보인다.)

 

2차 세계대전의 초반전은 독일군의 승승장구였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정복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940년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단순에 점령했다그해 5월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룩셈부르크프랑스까지 진격에 나섰으며결국 영국과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캐나다군 그리고 자유 폴란드군까지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서 철수를 해야 했다철수라는 목적에선 분명히 성공적인 철수였고총 33만 8,226명의 연합군이 소형 선박을 타고 영국으로 철수했다그러나 독일은 서유럽을 장악해버렸다그 결과 1940년 6월 22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함락됐고, 6월 25일에는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1940년 당시 독일의 영토, 전격전이라는 작전을 구사하던 독일군은 단기간에 유럽 전역을 접수했다.)

 

독일군의 서부 진격 당시 활약했던 군대에는 독일공군도 포함되어 있었다헤르만 괴링이 총 사령관으로 있던 루프트 바페(Luftwaffe)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에서 진가를 발휘했다특히나 슈튜가(Ju 87) 전투기는 독일군 3호 전차보다 강한 프랑스군 전차를 괴멸시키는 것에 능수능란했다또한 항공기를 이용한 독일의 공수부대원들의 활약도 막강했다글라이더 부대의 침투 또한 획기적이었다덩케르크 철수 작전 당시에도 영국의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들의 활약 덕분에 철수할 시간을 벌었지만독일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원스턴 처칠,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맞서 저항했다. 그는 루스벨트 스탈린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영국 침략을 계획했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후 독일은 고립된 영국과 협상하고자 했다프랑스까지 점령한 나치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요구했다그러나 덩케르크 철수작전때부터 결사항전을 주장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히틀러가 요구하는 것을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그걸 알게 된 히틀러는 1940년 7월 4일 영국을 공격한다.”고 선언했다이렇게 해서 1940년 7월 10일부터 독일의 영국 공습이 시작됐다.

(영국 전투기 스핏 파이어, 덩케르크 철수작전에서도 활약했던 종으로 본토 항공전에서도 활약했다. 특히나 독일 공군에겐 공포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인켈 폭격기,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당시 주로 사용한 중폭격기다.)


(메서슈미트 전투기, 독일 공군의 전형적인 전투기다. 이들도 영국을 공습할 때 많이 사용됐다.)

 

서유럽 침공 이후 나치 독일은 군사를 재정비했다독일 공군은 2개의 항공함대를 새로 얻은 공군 기지로 이동 배치해야 했고이 과정에서 3,000대 이상의 항공기와 그 운용에 필요한 모든 인원장비보급품 등을 재정비했다영국도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했다영국의 마을에선 많은 이들이 군사훈련을 했고아이들 또한 시골로 피난가기도 했다경우에 따라선 대서양을 건거기도 했다또한 해외출신의 병사도 많았다. 1940년 6월 말경 다우딩 예하의 전투조종사는 1,300명이 남짓했는데이중 다우딩 예하 전투조종사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인 21뉴질랜드인 102캐나다인 90남아프리카인 21로디지아인(백인) 2자메이카인(백인) 1아일랜드인 9미국인 7폴란드인 141체코인 86벨기에인 29프랑스인 13명 그리고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 1명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상공을 날고 있는 전투기들)

 

1940년 7월부터 시작된 항공전은 해협 인근에서의 전투를 넘어 8월에는 말 그대로 본토 항공전으로 규모가 확장됐다. 1940년 8월 10일부터 독일 공군은 이른바 독수리 작전을 실행하여 영국의 공군기지를 공격했다최초 독일공군의 폭격은 제공권 장악을 위한 전술폭격즉 비행장레이더기지항공운수 관련 공장 폭격이었다이로 인해 영국 공군은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영국의 수많은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이때 길을 잃은 독일의 독일군 폭격기가 이전까지 목표가 아니었던 런던을 오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물론 이것은 히틀러의 명령에 반하는 행위였다이에 분노한 처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같은 날 밤 81대의 폭격기를 보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공격했다.

(나니아연대기에 나온 장면, 영화 나니아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보면 독일군이 런던을 공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아이들은 시골로 떠나게 되어, 그 시골에 있는 어느 한 교수님 집에서 지내면서 옷장으로 들어가 나니아에 도달한다. 영화 나니아연대기에 나왔듯이 당시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은 시골로 갔다. 왜냐하면 독일 공군이 시골은 폭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하철로 숨은 런던 시민들)


이렇게 되자 분노한 히틀러는 폭격의 목표를 영국의 군사기지에서 런던과 같은 대도시들 까지 확장했고영국의 함대와 군사기지를 폭격하던 독일 공군은 영국의 대도시를 폭격하는 것으로 바꿨다그것이 1940년 9월 6일의 일이었다영국 정부는 아이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도시에 살던 어린 아이들을 시골로 보내어 우선적으로 보호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해졌다이런 이야기는 2005년에 개봉한 영화 <나니아 연대기 사자마녀 그리고 옷장>에서도 묘사되기도 했다당시 독일은 영국을 폭격하기 위해 2500대 이상의 항공기들을 동원했었다이는 영국이 동원한 것 보다 600대 이상 더 많았다거기다 독일 공군들의 경우 1930년대 스페인 내전과 2차세계대전 초반기에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던 데에 비해 영국측 공군은 실전 경험이 독일보다 부족했다.

(런던 상공에 있는 조색기구들)


(런던 대공습 당시 불타는 런던)

 

그러나 영국은 이점에 있어서 독일에 비해 유리했다바로 레이더(radar)라는 기술을 활용한 조기 경보 시스템과 독일의 기존 전투기 보다 성능이 우수한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를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0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의 항공전에서 독일군의 항공기 손실은 286:380의 비율로 영국군보다 더 컸다. 1940년 9월 14일 괴링은 공군 3개 군을 모두 출격시켰다이때까지 거의 500회에 가까운 출격이 있었지만주로 레이더와 암호 해독기 울트라 때문에 영국의 피해는 경미했고 독일의 손해는 막심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과 불타는 런던, 영국 드라마 닥터후 시즌 1에 나온 장면으로 1941년 1~2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45대의 독일 비행기가 격추된 반면 영국 비행기는 고작 13대만 격추되는 수준이었다. 9월 14일 날 출격한 항공전에서도 독일군 비행기는 75대가 격추되었지만영국군 비행기는 34대만 격추되었다. 1940년 9월 15일 영국과 독일 양국의 공군은 런던 상공에서 항공전을 벌이는데독일은 이날 런던에서 벌어진 공중전에 투입했던 1100대 중 10%가 넘는 165대의 항공기를 잃었던 데에 비해영국의 손실은 독일이 입은 손실에 1/5인 30대 안팎이었다. 9월 17일의 전적은 70대 27로 그 격차가 늘어났다물론 이 과정에서 842명의 런던 시민들이 독일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런던을 폭격하는 독일 항공기들, 마찬가지로 닥터후에서 나온 장면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독일 공군의 손실이 영국 공군보다 더 많았던 것일까그 이유는 바로 독일 공군의 전략에 있었다독일이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을 점령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술은 전격전이라 하는 것인데독일 공군은 지상군을 지원하는 형식이었다즉 독일의 공군기들은 전략적으로 항공전과는 맞지 않았다거기다 영국의 스핏파이어라 불리는 전투기는 독일의 매서슈미트 보다 성능이 더 좋았다따라서 독일 공군이 손실이 영국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당시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목표로한 이른바 바다사자 작전을 준비했었다그러나 항공전에서의 손실이 많아지면서 이 작전을 연기했고히틀러가 영국 침공을 연기한다고 결정 하면서 본토 항공전은 1940년 10월 31일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0년 10월 31일 본토 항공전은 공식적으로 끝났지만독일군의 산발적인 야간 공습은 지속됐다해가 넘어 1941년 초에도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은 수도 런던을 중심으로 대도시에 감행되었다즉 1940년 9월부터 1941년 5월까지는 영국 도시에 대한 독일의 공습이 일상적이었다고 보면 된다. 1941년 5월 10일 독일공군은 대략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을 런던에 감행했다그러나 5월 10일 이후 갑자기 런던에 대한 폭격울 중지하기에 이르렀다왜냐하면 대다수의 독일 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거기다 1941년부터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등의 동유럽과 남유럽을 점령하는데도 신경을 썼다따라서 독일군의 전력분산이 있었던 것이다이 때까지 독일은 총 1977대 이상의 전투기를 잃었던 데에 반해 영국은 1542대의 항공기를 잃었다고 한다독일은 1941년 5월까지 런던코번트리버밍엄리버풀맨체스터 등의 도시에 약 5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고총 4만 2000명의 영국 민간인이 사망했다.

(B-17 폭격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공군이 사용한 폭격기로 유럽 전선에서 독일의 산업시설과 군사시설을 초토화 했다. 별명은 하늘을 나는 요새였고, 폭격기 내부에는 전투기를 방어하기 위한 기관총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늘을 나는 B-17 폭격기)

 

독일군의 마지막 런던 대공습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뒤바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그러면서 독일군은 영국과의 항공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또한 1941년 11월 13일 영국 또한 폭격작전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다거기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미국도 영국의 항공 작전에 같이 협력하게 되었고동부전선에서의 고전과 더불어 독일은 1942년부터 영국과 미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에 휩싸여야 했다특히나 미국의 B-17 폭격기 그러니까 이 하늘을 나는 요새라는 별명을 가진 폭격기는 독일과 그 주변 점령지역의 군사시설들과 보급시설을 타격했다이처럼 1942년부터는 독일이 본토 항공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바데커 공습, 1942년 4월과 5월에 독일은 영국의 몇몇 도시를 상대로 폭격을 한 적이 있다.)


(스타인복 작전,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독일 공군은 영국을 공습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나기 1달 전까지 말이다.)

 

물론 독일도 이를 인식했는지 1942년 4월과 5월에 바데커 공습(Baedeker Blitz)이라 하여 엑세터와 바스노리치요크 등 영국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이 작전에서 총 1,637명의 영국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총 5만 채 이상의 집이 불에 탔다그 외에도 독일 공군이 영국을 타겟으로 한 대규모 폭격은 1944년에 있었다그게 바로 스타인복 작전(Operation Steinbock)이다.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전개된 작전으로 총 500대 이상의 독일군 항공기가 동원되었다수도 런던과 브리스톨헐 그리고 카디프에 총 14번의 공습이 있었다당시 런던 사람들은 이를 작은 공습이라 불렀는데총 1,5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3,00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스타인복 작전 당시 격추당한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잔해, 영국 에식스 주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V-1 로켓 미사일)


(V-2 로켓 미사일, 1944년 9월에 발사된 독일제 로켓 미사일로 1969년 미국 아폴로 달 착륙에 기여를 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 과학자 시절에 만들어 냈다.)

 

하지만 독일은 이미 1942년부터 공습을 당했고, 1943년과 1944년에는 그 공습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서 수도 베를린을 포함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여기서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또 다른 공습을 시도 했는데그게 바로 미사일을 이용한 공습이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은 V-1 로켓 미사일을 수도 런던에 발사했다. 1944년 6월과 8월 사이에 대략 1만 개의 V-1 미사일이 영국에 발사되었다효율성은 그리 좋지 않았다발사된 1만 발 중에 2,500발만 명중했다. 1944년 9월부터 독일은 V-1 대신 새로운 로켓 미사일을 발사했는데그 미사일이 바로 V-2 로켓 미사일이었다. 1944년 9월 8일부터 1945년 3월 27일까지 총 1,400개의 V-2 로켓 미사일이 수도 런던과 노리치에 발사되었고총 3,000명이 사망했으며 6,500명이 부상당했다.

(런던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환호하는 런던 시민들)


(성조기와 유니온 잭 깃발을 같이 흔드는 영국인,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공습을 얘기하면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있던 영국에 대한 대공습을 떠올린다이 사례들이 대중매체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이 등장하는 것도 영향력이 클 것이다앞에서 언급한 나니아연대기나 피터팬 등등그러나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습은 항공기를 동원한 경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1달 전인 1944년 5월까지였고그 공습의 범위를 V-1과 V-2 미사일까지 포함시키면 1945년 3월 27일까지로 확장된다즉 이 얘기는 독일이 1942년부터 연합군의 공습을 받으면서도 폭격을 계속했으며전쟁에서 패배하기 두 달 전까지 공습을 가했던 것이 된다물론 독일은 그 이후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참고자료

 

전쟁영화로 마스터하는 2차세계대전(유럽전선), 이동훈가람기획, 2007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가람기획, 2010

 

폭격김태우창비, 2013

 

영국 전투마이클 코다이동훈열린책들, 2014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II, 존 톨랜드민국홍페이퍼로드, 2019

 

London: The Baby Blitz and V-Weapons, 19411945, Historic England(인터넷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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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11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을 개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실한 자들에 맞서 방자하게 개인적인 전쟁을 발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여! 이교됴들을 향해 진격하자... 오랫동안 약탈자였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게 하자. 한때 형제들과 친지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을 이제 당당하게 야만인과 맞서 싸우게 하자. 몇 푼의 은 조각 때문에 용병이 됐던 사람들에게 이제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하자.”

 

교회는 서유럽 전역에 영지를 보유한 거대한 봉건 기업이었다. 교회는 권력과 부를 놓고 속세의 봉건 군주와 경쟁했다. 봉건 지배자와 마찬가지로 주교들은 해외에 폭력을 수출함으로써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십자군 원정을 요청하자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수천 명이 즉각 부름에 응했다. 엄청난 봉건 군대가 1097년 시리아로 들어갔고 1098년 안티오크를 함락했으며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십자군은 어딜 가든 살육과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함락된 도시의 거리에서 학살됐다. 포로들은 수시로 처형당했다. 십자군은 이슬람 사원, 유대교 회당, ‘이단교회를 샅샅이 뒤졌다. 수레는 강탈한 물품들로 가득 찼다. 네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봉건시대의 중강기갑부대가 전술적으로 투입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작은 규모의 군사 엘리트로 유지됐다. 500명의 기사들이 안티오크 공국을 지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에 투자해야만 했다. 그만큼 집중적인 잉여 축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랍 소작농을 극단적으로 착취했고 무역 대상들을 약탈했으며 이웃한 이슬람 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십자군은 중동에 아주 쉽게 침입했다. 그곳은 민중의 신망을 잃은 왕궁의 독재자들이 지배하는 몇몇 개의 라이벌 국가로 이미 뿔뿔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민사회와는 결별한 상태였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대부분 십자군들과 합의하려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평화는 불가능했다. 두 가지 모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첫째, 봉건 정착민 국가들의 체제는 취약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합병되길 원했다. 더 많은 기사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됐다. 둘째, 십자군 국가 내부에서 군사적 축적이 더 필요해지자 원주민들에게 더 무거운 세금, 임대료, 노동 부역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십자군들은 무슬림 속국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전쟁에서 자신들을 방어해 줄 원주민 군대를 키워낼 수 없었다.

 

첫 번째 십자군의 충격과 공포는 한 세대 동안 이슬람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 통치자에 대한 십자군의 위협이 다가오자 이슬람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 과정을 밟았다. 북시리아와 북이라크는 1128년에 통합되었다. 그 후 근처의 십자군이 지배하던 에데사 카운티를 탈환, 1144년에 합병했다.

 

2차 십자군 전쟁(1146~1148)은 이슬람의 부활에 맞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엄청난 실패로 끝났다. 무적의 십자군 신화는 무너졌다. 다마스쿠스와 남시리아는 이슬람 국가로 편입되었고 안티오크 십자군 공국의 영토는 작은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마침내 1183년 살라딘의 영도 아래 이집트가 시리아와 합쳐졌다. 이슬람의 저항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라딘은 봉건 십자군에 대항해 인민의 성전 지하드를 소집했다. 바야흐로 이슬람 세력은 선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18774일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3만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의 군대 전원을 무찔렀다. 곧 이어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함락됐다. 몇 차례 원정이 더 있었지만 십자군 국가는 되찾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세기가 넘도록 이어졋지만 그들의 성과 영토는 하나둘씩 줄어가기만 했다.

 

심바군 왕국들은 중동 지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힘과 공포에 의존하는 잔인한 착취자였을 뿐이다. 이슬람 통치계급이 분열하고 타락했던 시기에만 십자군 왕국들은 그곳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폭압적인 침략은 오히려 이슬람인들에게 투쟁을 위한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웠고 정체성을 확립시켜줬으며 이슬람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또한 서구 봉건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기사와 성을 유지하는 비요ᅟᅧᆼ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만큼 엄청난 착취가 필요했다. 전사 계급의 폭력은 민중의 재산과 안전에 영구적인 위협이 됐다. 봉건제의 폭력으로 이런 모순들을 억누를 수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봉건주의는 합의가 바탕이 되는 안정적인 사회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체제였다.

 

본국에서는 이런 모순을 틈타 새로운 사회세력이 구질서 안에서 생겨났다. 왕들은 봉건 영주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섰다. 각 계층별 세력들 역시 위세를 더 키워갔다. 젠트리(Gentry), 요먼(Yeoman, 자작농)은 귀족들의 무정부 상태에 맞설 왕실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 새로운 사회세력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을 도입했다. 창과 활, 총으로 무장한 보통 남자들은 봉건시대 기사가 누린 전쟁터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출처: 좌파세계사 p.20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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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 중소논쟁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북한은 처음에는 중국 측으로 기울었다. 1962년 10월의 중인(중국과 인도)분쟁에서는 네루정부를 ‘침략자’로 비난했다.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하려 했다가 이를 알게 된 미국이 최후통첩을 던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는 북한은 흐루쇼프의 미사일 철거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962년 12월 북한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대의 현대화, 전군인의 간부화 등 4대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3년 6월 최용건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류샤오치(유소기)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정책을 평화공존정책에 가둬놓으려는 소련의 처사에 대해 비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월 25일에는 미영소 공동으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조인했는데 북한은 중국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 가장 공공연한 소련 비판은 가을에 나왔다. 김석형 등 3인의 역사가가 소련 과학아카데미판 『세계사』의 조선사 기술에 대해 비난하는 소책자를 제작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맑스-레닌주의 사학의 기본적 요구에 배치되는 중대한 오류’ ‘조선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오는 왜곡, 위조와 날조’ 등의 표현이 실렸다. 1964년이 되자 북한은 더욱 공공연히 소련을 비난했다. 『로동신문』의 1월 27일자 사설은 ‘현대 수정주의자’와 ‘모종의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인민에게 반제투쟁을 그만두게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6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경제 세미나는 소련을 비난하는 장이 되었고, 자력갱생의 자주경제 건설과 평등호혜, 주권존중의 경제협력 등을 주창하는 평양선언이 채택되었다. 7월 27일자 『로동신문』은 일본공산당의 내부분열을 기도하는 소련 당의 행위가 ‘대외배외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소련과 대립함으로써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삭감 되었고 그 때문에 1961년부터 개시된 7개년 계획 수행이 난항을 겪었다. 1964년에 흐루쇼프를 대신해서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권이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자, 북한은 이에 즉각 응했다. 1965년 2월에는 코시긴과 셸레핀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3월에는 북한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석유를 제공받기 위한 교섭을 벌였다.


출처: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p.15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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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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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에 앞장서고 있고, 내 페친이기도 한 김이경 선생의 <우리는 통일 세대>를 읽었다. 내가 북에 대해 좀 더 북의 관점이나 반공에서 벗어난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애초에 대학교 1학년을 시작하던 2014년은 박근혜 정권 1년차라 시대적 분위기가 극우세력들의 힘을 얻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점부터 갑자기 뉴라이트에서 마구잡이로 집필한 이승만 미화물이 줄줄이 출간했고, ‘국제시장’, ‘태양의 후예’,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등과 같은 반공정신을 고취시키는 영화나 드라마가 대대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나는 박근혜와 뉴라이트를 싫어하면서도 북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그나마 북한을 보다 이성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군복무 말기인 2018년이었다. 그때 읽은 신은미 선생의 책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쓴 책 그리고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을 읽으면서 보다 북한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회담이 개최되던 2019년 초 당시 나는 북미정상회담이 잘 마무리 되면 종전협정과 남북 자주 왕래가 꿈만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쉽게도 협상의 결과는 결렬이었다.

 

비록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과는 결렬이었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부터 시작된 남북화해무드는 이명박근혜 시절 대립과 적대주의로 포장되었던 한반도 정세에 평화라는 한 줌의 희망을 가지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북한을 새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였다. 이런 정세를 거치고 변화를 보면서 나 또한 북한이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싶었고, 실제로 자기검열이라는 차원에서 반북주의를 최대한 배척하고자 많이 노력해왔다. 2년 전 사회학 교수인 김귀옥 교수님의 수업도 북에 대한 그런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전 세계는 이 전무후무한 질병에 발목이 묶인 상태다. 해외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시대다. 북한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초기인 20201월 국경을 원천 봉쇄했다. 따라서 북한을 공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는 죄다 막힌 셈이다. 물론 1월부터 국경을 원천 봉쇄했기에, 북한은 현재도 2021년 새해에 평양에 모여 신년축하행사를 그것도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만약에 북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했다면 구호물자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북한은 현재 내부 시스템 안에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를 일반적인 한국인들에게 거리낌 없이 하면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거나 주장을 한 이를 친북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의심하고 본다. 즉 북한이라는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나빠야 하고 불행해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기원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그 이전부터 반공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민주화를 거치면서 예전만큼의 반공주의는 보편적으로 희석되긴 했지만, 북에대한 인식은 여전히 객관적이지 못하다. 쉽게 말해 우편향적이다. 이러한 영향에는 저자가 주장하듯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에서 퍼뜨린 거짓뉴스의 영향이 크다. 책에 나온 저자의 주장을 인용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회이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상적인 사회도, 절대 나쁜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북녘을 뿌연 잿빛의 나라, 가난함과 절망이 흐르는 땅으로 알고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인 북이 살아가는 방식과 문화가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차이를 극단적인 이분법, 빨갱이라는 잣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나라에서 살아온 우리는 사회주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분단 체제에 편승해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온 수구적폐 세력은 온갖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북을 악마로 만들어왔다. 북 고위층 인사가 처형되었다는 남녘의 언론 보도 후 다시 그들의 건재가 확인되어도 오보를 낸 언론은 반성하기는커녕 정정한 적이 없다.”

 

출처: 우리는 통일 세대 p.7~8

 

저자가 주장처럼 우리가 언론을 통해 받아들이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서구편향적 혹은 반공적으로 가공되는 정보가 많다. 또한 우리는 북한이라는 대상을 인식할 때, 독재나 굶주림과 같이 미국 부르주아지들이 타국가를 침략할 때 사용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구실들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북한이라고 해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사악한 경제제재의 합리화 논리로 사용된다는 점을 적어도 인지해야 한다 생각한다. 특히나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책의 제목 우리는 통일 세대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미래의 통일 세대와 현재 통일을 준비하는 세대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한 북한을 알려주고자 책을 쓴 것 같다. 책은 북한 청소년들의 교육과정이나 성장기, 북한 인민들의 일반적인 삶, 북한의 종교활동, 북한의 의료 정책, 북한의 경제 활동 등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북한의 근현대사와 더불어 북한의 문화예술 그리고 부록으로 수도 평양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처음 알기도 했다. 얘를 들면 북한의 김일성 대학 교수들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매주 한 번씩 금요노동을 자발적으로 나간다는 내용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이 점에선 쿠바 혁명 이후 체게바라가 쿠바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자발적으로 노동을 했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다. 심지어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2005년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공학부에 항생제 제작 공장 시설 건설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저자와 한국의 기술자들이 런닝 바람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던 분들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책을 읽은 나 또한 이 부분에서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그리고 무상주택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틀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에는 토착 자본가가 없다. 물론 북한에도 빈부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빈부의 차이가 있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돈을 자본의 형태로 투자하여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즉 자본가가 없다는 것은 땅, 건물, 공장과 같은 사회의 공공재들이 개인 소유가 아니며, ‘자산소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별 초과이익은 기업소 노동자들에게 배분된다. 또한 북한의 회사나 사회 시스템은 상명하복식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불편함을 겪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기도 하다.

 

북한은 쿠바와 더불어 무상의료 시스템을 사회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 비하면 기술이나 설비부분에서 부족함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틀은 무상의료다. 일례로 의도치않게 탈북하여 한국에 온 김련희씨의 경우 한국 생활 초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그냥 나왔다가 길거리까지 간호사가 달려와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무상의료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1947년부터 사회보험법을 제정하여 일단 노동자와 사무원, 임산부와 3세 미만 아동까지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1월 무상의료의 범위를 개인상공업자와 개인농을 제외한 전 인민으로 확대했으며, 전후복구를 완수한 1958년에는 개인병원이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북한은 무상의료제도를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지했다. 여기서 얘기하는 무상의료는 진단, 검사, 치료, 수술, 입원 등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 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부담을 국가가 부담한다는 뜻이다. 책 저자에 따르면 북한은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에 무상의료 체제를 다른 나라의 일반의료 수준으로 올려놓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주제를 얘기하자면 북한의 군대 관련한 얘기다. 대한민국에 사는 남성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최소한 면제를 받지 않으면 말이다. 우리는 군복무 2년만 해도 사회의 불만이 많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북한은 군복무를 10년씩이나 해도 내부의 불만이 생각보다 없다. 이런 궁금증은 개인적으로 항상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궁금증이 풀렸다. 책에 따르면 북한이 완벽한 징병제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일단 북한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일단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 후 모집 대상으로 검토되고 직장에 취업한 지 3년이 넘으면 모집 대상에서 제외된다. 신체검사 불합격자, 적대계층 자녀, 과학기술산업 관련자, 예술교육 종사자, 특수 영재학교 학생, 부모가 고령인 독자 등은 처음부터 제외된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당 간부의 자녀일수록 군 복무가 필수사항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부모가 군 복무를 반대하면 입대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이런 점에서 우리하고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북한인민들이 군대를 인식하는 것도 우리하고는 다르다. 북한에서는 군대가 주민들에게 선망 받는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 근본적인 이유는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1932년 만주에서 시작된 항일 유격대에 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인민들은 자신들의 군대가 역사적으로 항일투쟁을 했고, 소련, 중국과 더불어 조국해방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이 강하다. 이런 점은 현재 중국인민해방군이나 베트남의 베트민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북한에 대해 정말 다방면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쉽고 재밌게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의 그런 점이 좋았다. 하지만 일부 내용들은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 부분들은 솔직히 학계의 교차검증과 더불어 팩트체크가 필요하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였다.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보다 앞서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얘기나, 평양의 단군릉 혹은 북측 학계에서 주장하는 대동강 문명 등은 솔직히 역사학을 공부한 나로썬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렇다 해서 책 자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굳이 책의 내용에 대해 내가 얼마만큼 공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80%는 공감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아까 전에 지적한 그런 부분은 나머지 20%에 해당한다.

 

부록에서 평양 설명하며 다룬 릉라도의 곱등어관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하자면, 책에는 곱등어란 돌고래의 일종이라고 나온다. 사실 돌고래를 얘기했을 때 떠올리는 대부분의 돌고래는 큰돌고래(혹은 병코 돌고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국내에 많이 서식하는 돌고래는 남방큰돌고래인데, 책에 첨부된 사진을 봐서는 남방큰돌고래보단 큰돌고래 그러니까 병코 돌고래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추측으론 아마 북에서 얘기하는 곱등어는 병코 돌고래를 뜻하는 것 같다.(어디까지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게 나을 것이다.) 한가지 사실을 더 붙이자면 물개쇼에 등장한 물개는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바다사자(강치)가 분명하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책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북에 있는 느낌도 살짝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남북교류가 형성되면 나 또한 공식적으로 북을 방문해보고 싶다. 그것이 평양이 됐던 개성공단이 됐든 금강산이 됐든 말이다. 아무튼 책 내용이 대체로 좋다. 저자가 한국의 극단적 반공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상당히 공감된다. 나 또한 평양에 놀러 가보고 싶다. 물론 합법적인 선에서 말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양의 동물원과 곱등어관도 방문하고 싶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항일 유적지도 답사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에 대한 얘기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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