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 12 7일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를 기습 공격했다이른바 진주만 기습 공격이었다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일본의 동맹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미국은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태평양 전쟁 초기의 전황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했다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키고 있던 필리핀과 영국의 식민지 버마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미국령 괌과 웨이크 섬까지 일본군에 의해 단번에 점령됐다.

(조선건국동맹, 1944년 8월 10일 현우혁의 집에서 만들어 졌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보복 공습을 계획했다이 보복 공습이 바로 두리틀 공습이다. 1942년 4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는 대략 16대의 미국 항공기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미군 항공기의 공습을 받은 일본 도쿄는 순식간에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이 공습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그가 바로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이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상했던 여운형은 미군의 일본 공습을 목격하자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1943년 여운형은 친구 오건영에게 자신이 목격한 미군 공습에 대해 얘기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건국동맹 서울 조직의 현재 위치)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은 미국에서 이승만이 하고 있던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들었었고몇몇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방송 내용을 주변 인사들에게 전달했다그 결과 일제가 그토록 은폐하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의 전황과 해외 독립운동의 상황이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조선건국동맹 깃발)

 

1942년 12월 일본은 여운형을 치안유지법을 포함한 4가지 죄목을 씌워 감옥에 수감했다일본이 여운형에게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들의 침략전쟁에 대해 협력하지 않은 보복적 차원이기도 했지만여운형이 일제의 패망에 대해 비밀리에 알렸기 때문이기도 했다이렇게 구속된 여운형은 대략 7개월 동안 유치장에 구치되어 각가지 고문을 당했으며, 1943년 여름이 돼서야 풀려났다.

(서울 1945에서 나왔던 조선건국동맹)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1943년 8월 10일 조동호·이상도·이상백 등과 같은 인물과 만나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아우르는 조직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의했다그리고 이와 함께 조직의 하부를 구성하기 위해 각지에 연락원을 배치했으며조직을 넓혀 나갔다이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 1년 뒤인 1944년 8월에 새로운 단체로 확장 그리고 탄생했다그 조직이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었다여운형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정병준 교수는 1995년에 쓴 저서 <여운형 평전>에서 조선건국동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지금까지는 건국동맹이 1944년에 전격 결성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그러나 건국동맹은 실상 여운형의 형무소 생활시기(1942년 12~43년 9)에 구상되었고,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잠정명칭으로 1년여의 숨 가쁜 준비 작업을 거쳐 조직된 결과물이다즉 1944년 8월에 선포된 건국동맹은 1년 이상이 걸린 결과였던 것이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서울에 있는 현우혁의 집에서 건설됐다건국동맹은 ‘3불맹서라는 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했고두달 뒤인 10월 8일 자신의 고향인 양평군 용문산으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여기서 여운형은 또 다른 단체를 조직하는데그게 바로 농민동맹이었다농민동맹 또한 조선건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고징병 및 징용자들을 도피시키고 그들을 반일운동을 전개하게끔 활동하고자 했다또한 여기서 여운형은 청년학생들을 조직했고여운형이 이런 과정속에서 만난 대표적인 청년이 바로 독립운동가이자통일운동가 그리고 시인이자 <여운형 평전>의 저자인 이기형 선생이다.

(배우 신구가 연기한 여운형, 신구는 서울 1945에서 여운형을 연기했었다.)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국내의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제외하고 조직 가능한 모든 세력의 힘을 결집시키고자 했다사회주의자민족주의자노동자농민 그리고 학생과 부녀자 까지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결집했다비록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중요한 건 그런 감시와 억압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미리 대비했다는 사실이다또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1945년 4월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회담과 관련하여 연안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했으며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도 연락망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렇듯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일제 통치 말기에 이런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고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하고자 했으며좌우를 총 망라했다여운형의 이러한 노력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남과 북을 아우르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으로 확산되었고해방정국 초기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해나갔다안타깝게도 여운형은 이러한 업적에 비해 매우 저평가 당해왔다이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이기도 하다앞으로는 그의 이러한 독립투쟁사가 재조명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몽양 여운형 평전김삼웅채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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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파리 코뮌 - 민중의 함성
자크 타르디 지음, 홍세화 옮김, 장 보트랭 / 서해문집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51일 노동절이 되면 집회에서 항상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시작은 일어나라!’로 시작하여 끝은 인터내셔널로 끝난다. 바로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 이 노래는 대다수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불린 대중음악으로 지금도 각종 시위 현장에서 불리고 있다. 이 곡이 대중적으로 불리게 된건 1888년이었지만, 처음으로 작사된 것은 1871년이었다. 1871! 이 해의 프랑스 파리는 역사가 새로 쓰였다. 바로 2개월간 지속되었던 파리코뮌(La Commune de Paris)이다.

 

1870년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잘 훈련되고 규율 있던 프로이센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어야만 했고, 비스마르크의 군대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1871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른바 통일된 독일 제2제국을 선포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프랑스 정규군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의 모습을 본 파리의 시민들은 이들에게 맞서 스스로 무장하여 봉기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코뮌이었다.

 

2개월간 지속되었던 파리코뮌에서 봉기한 시민과 노동계급은 선거를 통해 시 전역을 통괄하는 민중 주도의 새로운 입법, 행정 정부를 구성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개혁들을 실시해나갔다. 비스마르크 군대로부터 대포와 탄약을 지원받은 프랑스 정규군의 고립 속에서도 코뮌속의 민중은 민주주의와 평등사회 그리고 진보사회를 위해 싸웠다.

 

파리코뮌이 전 세계에 보여준 엄청난 변화였다. 19177월 봉기 이후 핀란드로 망명했을 당시 레닌이 쓴 저서 국가와 혁명을 읽어보면 칼 마르크스가 1871년의 봉기를 지지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혁명운동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시도이자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에서 일정한 진보이며, 수백의 강령과 논의보다 더 중요한 실천적 일보라고 보았다.

 

사회주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파리코뮌은 사회주의 역사 그리고 인류 역사에 있어 진보적 전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코뮌은 프랑스 정규군의 잔혹한 학살극으로 마무리가 됐다. 자주적이고 진보적이었던 노동계급의 코뮌은 권력과 침략군에 굴복한 프랑스 정규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프랑스 정규 군대의 진압에는 최신식 대포가 동원되었다. 또한 7만 명 이상의 진압군대가 동원되었다. 그 결과 코뮌에서 시민과 노동계급 최소 2만 명이 학살당했다.

 

서해문집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설국열차(Snow piercer)의 원작자인 자크 타르디가 쓴 만화책이다. 책에서 중심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한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와 한 개인의 복수를 향한 여정일 수도 있다. 물론 책은 그 과정 속에서의 코뮌과 그 코뮌속의 개개인들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또한 코뮌이 어떠한 열정에 차 있었는지도 생생히 느끼게 해준다. 부패한 관리들,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코뮌의 민중들, 비참한 사회에서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하지만 총을 들고 코뮌에서 싸웠던 파리의 매춘부들 그리고 진압군이었지만 항복하여 코뮌에 합류한 군인들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개된다.

 

1871년의 파리코뮌을 얘기하면 우리에게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박정희가 살해된 뒤, 잠시나마 있던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대학생들을 광주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면서 다시 군사독재라는 지적 사상적 암흑의 터널로 들어갔던 역사가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비록 파리코뮌보다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980518일부터 27일까지 대략 10일간 광주 시민들은 무차별 학살과 폭력을 휘두르는 계엄군에 맞서 카빈 소총을 들고 싸웠다.

 

광주항쟁에서 계엄군의 총과 탱크에 맞서 싸웠던 이들 대부분이 민주주의를 원했던 학생들과 노동계급 그리고 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1871년 프랑스의 파리코뮌의 혁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1871년 프랑스 시민들의 투쟁이 1980년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총을 들고 저항을 했던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민중들을 떠올렸다. 이랬기에 책의 내용이 더 와 닿을 수 있었다. 1871년의 프랑스 파리 그리고 1980년의 대한민국 광주. 이 투쟁이 연결되어 보이는 것은 아마 앞에서 설명한 그 유사성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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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유행했을때 나온 만화에요. 즐겁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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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에서 패배했지만 적(프랑스군)은 여전히 상황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그들은 디엔비엔푸를 쉽게 점령한 나머지우리가 그곳을 공격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여겼다집단전술기지가 매우 강력하게 구축된 데다디엔비엔푸와 아군의 후방지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베트남 콘툼성, 콘툼성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다. 이 지역은 이후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과 미군이 결전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된다.)

 

적은 우리가 여러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중이므로디엔비엔푸에 대한 공격을 주저할 것이고보급의 어려움을 안고 있으므로 조만간 북서지방으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우리가 일련의 문제를 감수하고 그들을 공격하더라도우리 정규군의 일부를 격멸하고 뚜언자오(Tuần Giáo)와 손라(Son La)를 점령하여 최종적으로 나산(Nà Sản)에 복귀하는 기존의 계획을 이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안케 전투 당시 베트민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프랑스군과 장갑차)

 

적이 15개 대대를 동원해 1954년 1월 20일부터 제5연합구역 내에 위치한 푸옌(Phú Yên) 남부에 공세를 전개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다아틀랑트 작전으로 명명된 이공세는 나바르 계획의 전략적 공세로중부의 남쪽지역에 있는 모든 해방구의 점령이 목적이었다적이 우리 해방구를 공격했음에도불구하고5연합구역의 우리 군대는 가장 결연하게 그들의 계획을 이행했다적에 대항하고 우리 후방지역을 엄호하기 위해 후방에 극소수의 부대만 남겨놓고주력은 적이 상대적으로 노출된 전략적 요충지역인 떠이응우옌(Tây Nguyên)을 점령했다.

(전투에서 손실된 프랑스군 탱크, 손실된 탱크가 M4 셔먼인걸로 봐선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보인다.)

 

공세는 1954년 1월 26일에 시작되었다다음날우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지방인 망덴(Măng Đen)구역을 확보했다뒤이어 닥또(Dacto) 초소를 무너뜨리고콘툼성의 모든 북부지역을 해방시켰다. 2월 5우리는 콘툼시를 해방시키고 적을 떠이응우옌 북부에서 밀어내어 9번 국도까지 전진했으며한편으로는 플레이쿠(Pleiku)시를 공격했다적은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제5연합구역에 대한 공세를 멈춰야 했다그리고 떠이응우옌의 남부에 위치한 일련의 요새와 플레이쿠시에 병력을 증원하여 우리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프랑스 부대들이 중부 라오스와 빙찌티엔에서 철수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되었던 베트민군)


콘툼의 승리는 동춘 전역에서 거둔 우리 인민과 군의 또 다른 위대한 성공이었다우리는 제5연합구역에서 적의 꽝남성꽝응아이성에 대한 위협을 불식시켰으며떠이응우옌 북부에 16에 달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해방시켰다우리 해방구는 꽝남과 꽝응아이 해변에서 베트남-라오스 국경선까지 확장되어해방된 라오스의 볼라벤 고원지대와 연결되었다이번 승리는 당중앙위원회 지도 원칙의 가치를 전적으로 입증시켜주었다적은 점점 더 수세로 몰려갔다적은 중부 라오스 중원을 위해 북부 삼각주의 병력을 전환시키고이후에도 라오스 방면과 빙찌티엔에서 떠이응우옌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안케 전투 승전 기념 행사, 2015년 베트남에서 열린 행사 같다.)

 

적은 제5연합구역을 공격점령할 목적으로 전투력을 집중시켰으나이제 우리 공세에 맞서기 위해 계획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적은 병력을 집중시키기를 원했으나계속 분산을 강요받았다플레이쿠와 떠이응우옌 남부에 있는 일련의 요새들은 프랑스 부대들이 몰려드는 4번째 지역이 되었다떠이응우옌에 대한 아군의 공격은 승세를 타고 1954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우리의 대성공 중에는 한국에서 막 돌아온 제100기동연대를 각개격파한 안케의 승리도 포함되었다우리는 안케를 해방시키고 많은 차량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출처 디엔비엔푸 p.43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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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킹만 사건 직후, 미국 전투기들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만 20만 명이 넘는 미군 병사가 남베트남으로 파병됐고, 1966년에는 20만 명이 추가로 파병됐다. 1968년 초에 이르러 남베트남에는 50만 명 이상의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 공군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로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이런 폭격으로 야기된 대규모 재난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몇 가지 사건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196565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사이공발 급보가 실렸다.

 

공산주의자들이 꽝응아이(Quang Ngai)에서 철수하던 지난 월요일, 미군 제트폭격기들은 그들이 퇴각하는 언덕에 맹포격을 가했다. 이 공습으로 많은 베트남인들이 사망했다. 혹자는 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은 그들이 베트콩 병사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폭격이 이루어진 뒤 네이팜탄, 즉 젤리형 가솔린으로 인한 화상을 입고 베트남의 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온 사람들 4명 가운데 3명은 마을 부녀자들이었다.”

 

96일에는 또 다른 급보가 사이공발로 도착했다.

 

“815, 사이공 남쪽[동북쪽의 오기] 비엔호아(Bien Hoa) 지방에서 미군 항공기가 불교 사원과 가톨릭교회를 오폭하는 사고가 있었다. 1965년에만 세 번째로 불교 사원이 폭격을 당한 것이다. 같은 지역에 있는 까오다이교 사원 한 곳도 올해에만 두 번의 폭격을 당했다. 또 다른 [동나이 강] 삼각주 지역에는 네이팜탄으로 화상을 입어 두 팔이 떨어져 나가고 눈꺼풀에도 심한 화상을 입어 눈을 감을 수조차 없게 된 여성이 있다. 잘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여자의 머리를 담요로 덮어 준다. 이 여성은 자신을 불구호 만든 공습으로 두 아이를 잃었다. 미국인들은 자기 나라의 공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남베트남에서는 매일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베트남의 많은 지역이 무차별 포격지대로 포고됐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민간인, 노인, 어린이)은 적으로 간주하며 마음대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베트콩을 숨기고 있다고 추정되는 촌락은 수색 섬멸작전의 대상이 됐다. 군대 갈 나이의 남자들은 살해하고, 가옥은 불태웠으며,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은 난민수용소로 보내버린 것이다. 저너선 셸(Jonathan Schell)벤숙 마을(The Village of Ben Suc)에서 수색 섬멸 작전을 묘사했다. 한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남자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 강변에 소풍을 나온 3명이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가옥이 파괴되고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뒤로 한 채 돼지처럼 떼를 지어 이동했다.

 

중앙정보국은 불사조 작전(Operation Phoenix)’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하 공산당원이라는 혐의가 있는 남베트남인을 적어도 2만 명이나 비밀리에 재판도 없이 처형했다. 19751월에 한 친정부 분석가는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이렇게 썼다. “불사조 작전으로 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 투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 하부구조의 많은 당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공개된 국제적십자사의 자료를 보면, 전쟁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65,000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구금되어 종종 구타와 고문을 당했던 남베트남 포로수용소에서 미국 측 고문단이 이를 감시하고 때로는 직접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십자 참관인들은 베트남의 두 주요 포로수용소-푸콕(Phu Quoc)과 퀴논(Qui Nhon)에 있으며 미국 고문단이 머물고 있었다-에서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야만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700만 톤의 폭탄이 베트남에 투하됐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투하된 폭탄 전체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베트남의 모든 국민에게 거의 200kg짜리 폭탄 하나씩을 안긴 셈이었다. 이 나라에는 거의 2,000만 개의 폭탄 구멍이 생긴 것으로 추산됐다. 게다가 나무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생물을 파괴하기 위해 비행기로 독성 액체를 살포했다. 매사추세츠 주 크기의 지역이 독극물로 뒤덮인 것이다. 베트남 여성들은 기형아를 낳았다고 신고했다. 쥐를 대상으로 동일한 독극물(2,4,5,T[제초제의 일종으로 지방족 산제 중 하나이며 보통 2,4,5-T로 표기한다])을 실험한 예일 대학 생물학자들은 기형 쥐가 태어났다고 보고하면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를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1968316, 미군의 한 중대가 꽝응아이 성의 미라이[My Lai 4 숫자 4는 미라이1, 미라이2 식으로 미군이 작전 편의상 붙인 것이다] 마을에 진입했다. 병사들은 노인과 아이를 안고 있는 부녀자들을 비롯한 주민들을 전부 한 곳으로 집합시켰다.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라고 명령한 병사들은 구덩이가 완성되자 주민들을 구덩이로 몰아넣고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훗날 열린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에 대한 재판에서 소총수 제임스 더시(James Dursi)가 증언한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캘리 중위와 눈물을 흘리는 폴 D. 메들로(Paul D. Meadlo)라는 소총수-아이들을 쏘기 전에 사탕을 먹인 바로 그 병사이다-가 포로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캘리 중위가 사격 명령을 내렸는데,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격 개시같은 말이었습니다.

 

메들로가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 왜 안쏘냐?’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말했지요. ‘쏠 수가 없어, 난 안 할 거야.’

 

그러자 캘리 중위와 메들로가 구덩이를 향해 총부리를 돌리고 사격을 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차곡차곡 쓰러졌고, 어머니들은 애들을 감싸 안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미라이4(My Lai 4)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 내의 미라이 사건 조사와 관련해 196911월에 그 황폐한 지역에 도착한 육군 조사단은 세 곳의 집단무덤과 시체로 가득한 구덩이 한 곳을 발견했다. 450에서 500명 정도가 살해되어 그곳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육군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라이 학살에 관해 들은 론 라이더나워(Ron Ridenhour)라는 병사가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라는 육군 사진사가 찍은 학살 장면 사진도 퍼졌다. 당시 급보통신(Dispatch New Servic)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반전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던 시모어 허시는 이를 기사화했다. 19685월 프랑스의 두 간행물에 미라이 학살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하나는 투쟁중인 남베트남(Sud Vietnam en Lutte)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리 평화회담에 참석한 북베트남 대표단이 출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라이 학살로 몇몇 장교가 재판에 회부됐지만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유죄를 판결받았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다. 캘리 중위는 결국 3년을 복역한 뒤-닉슨은 정규 교도소가 아니라 가택연금에 처할 것을 주문했다-사면됐다.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그를 옹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수많은 잔학행위가 벌어지는 전쟁에서 유독 캘리만 부당하게 본보기로 찍혔다는 느낌 때문에 그를 옹호했던 것 같다. 미라이 학살을 은폐한 총책임자였던 오런 헨더슨(Oran Henderson) 대령은 1971년 초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단 규모의 부대라면 어떤 부대든 미라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어딘가에 감추고 있든 법입니다.” 사실 미라이 학살은 세부적인 사항에서만 독특한 사건이었다. 허시는 한 병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어느 지방 신문에 실었다.

 

어머니 아버지께

 

오늘 저희는 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저는 제 자신이나 친구들, 아니 제 조국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대로 족족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곳은 서로 연결된 조그만 농촌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그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이곳의 오두막들은 야자나무 앞으로 지붕을 잇습니다. 집집마다 마른 진흙으로 만든 구덩이가 있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죠. 일종의 방공호 같은 거에요.

 

그런데 저희 부대 지휘관들은 이 구덩이가 공격용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구덩이가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는 즉시 완전히 태워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는 거에요.

 

오늘 아침 이 오두막집들 한가운데 헬리콥터 10대가 착륙하면서 잠자리(chooper)’ 한 대당 여섯 명씩 뛰어내렸고, 우리는 땅에 내리자마자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족족 총으로 갈겨 버렸지요.

 

그리고 나서 오두막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지릅니다. 자기들을 갈라놓지 말라고, 남편과 아버지, 아들과 할아버지를 데려가지 말라고 너나할 것 없이 울고 사장하고 싹싹 빕니다. 여자들은 울부짓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고는 우리가 자기들의 집과 개인 소지품, 식량 등을 불태우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바라보지요. 맞아요. 우리는 쌀을 전부 태우고 가축도 모조리 쏴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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