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존 웨인의 ‘그린베레’나 실베스트 스텔론의 ‘람보’ 같은 미국이 백전백승한다는 돈키호테 같은 얼빠진 영화도 있지만, 명화의 반열에 오른 걸작들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을 처절하게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뼈저린 반성을 촉구한다. 다시 말해 광기 서린 전쟁 때문에 인간이 참혹하게 파괴당하는 모습을 드러내어 반전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 영화다. <디어 헌터>,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야곱의 사다리>와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명화의 반열에 1987년 상영한 <풀 메탈 자켓>도 빠지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을 구실로 평범한 인간을 ‘살인 기계’로 만드는 악랄한 군대 조직을 우리 인간이 만들어냈음을 고발한 <풀 메탈 자켓>을 비평가들은 전쟁 영화의 진정한 걸작이라 평한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인민이 구현하려고 한 시대정신의 상징이다. 그런 호찌민이 인민에게 아무리 존경을 받더라도 미국의 눈에는 한낱 공산주의자이기에 비속하고 잔인하게 경멸해야 할 대상이다. 미군은 호찌민을 따르는 인민을 내키는 대로 없애도 거리낄 게 없었다. 그래서 "뛰는 놈은 베트콩이고, 안 뛰는 놈은 잘 훈련된 베트콩이지." 라는 어처구니없는 구호를 만들었다.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베트남에서 미군의 전쟁 방식이었다. 영화계에서 천재라 불리는 스텐리 큐브릭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보인 잔인한 전쟁광의 모습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 P31

매카시즘은 공산주의 타도를 의미했다. 워싱턴은 자신의 괴뢰인 남베트남 정권에 저항하며 호찌민을 따르는 인민들을 ‘모스크바의 앞잡이’로 보는 치졸한 생각을 했다. 호찌민이란 사람의 인간성은 아무리 좋더라도 기업이 극도로 싫어하는 공산주의자인 이상 워싱턴으로서는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처참하게 겪고도 냉전의 긴장과 대립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의 현대사가 모든 경험, 모든 사건, 모든 사실, 모든 낱말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개의 렌즈를 통해 굴절된 채 세계의 다른 어떤 국가에서보다 더 가혹하고 더 오래 지속된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타격을 입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반공을 외치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상식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매카시즘의 망령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지금도 집요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종소리 들으면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매카시의 극우들은 호찌민 하면 곧바로 빨갱이를 연상한다. - P36

프랑스의 배후 세력인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세계적인 반공 이데올로기 십자군 전쟁으로 몰고 갔지만, 베트남 인민들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민족의 독립과 자유‘란 이데올로기보다는 감정이고,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베트남인들의 민족 자존심은 아주 깊고 무거운 감정이다. 인민들은 한순간도 민족의 비극 앞에서 비겁하게 시선을 돌리거나 눈감지 않았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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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초기에 일어난 농민 폭동의 원인은 농민들이 계몽사상에 감염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사회경제적 불만과 1775년이래의 경제 불황의 격화에 따른 갖가지 모양의 사회적 대립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계몽사상의 선전은 도시의 울타리를 넘지못하고 있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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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1권에 나온 내용입니다.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은 구절이라 올려봅니다. 같이 올린 한 장의 사진은 우리는 몸을 깨끗하게 지켜 독일군을 물리쳤다. 이제 기준을 높이자. 깨끗한 미국으로! 성병 근절이라는 구호의 미군 포스터)

 

오랫동안 열망했던 변화를 실현할 기회를 잡은 사람들 중에는 도덕주의적 개혁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특히 전쟁을 성적 타락과 싸우는 기회로 삼았다. 이들은 병사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척하면서 매춘과 성병에 대해 공격적인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전국의 홍등가가 철퇴를 맞았다. 그 결과 창녀들은 지하로 들어가 포주를 비롯한 착취자들의 손에 장악됐다. 미춘 단속은 1918체임벌린 칸 법(Chambelain-Kahn Act)’ 통과 이후 극심해졌다. 이 법에 따르면 군기지 주변을 혼자 돌아다니는 여성은 체포, 감금할 수 있고, 강제로 성병 검사를 시킬 수도 있었다. 강제 검사에 대해 개혁가들은 검사용 반사경을 강제로 들이댄다고 해서 반사경 강간이라고 비난했다. 성병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여성들은 연방 시설에 격리 수용됐다.

 

전쟁부도 산하 기관으로 병영활동감독위원회(Commission on Training Camp Activities)를 신설해 성병에 걸린 병사들의 애국심을 문제 삼는 방식의 절제 촉구 캠페인으로 성적 활동을 제어하려고 애썼다. 병영활동감독위원회(CTCA)는 훈련소에 독일군의 총탄이 창녀보다 깨끗하다”, “성병 걸린 병사는 반역자다같은 문구를 적은 포스터를 붙였다. 위원회에서 발행한 한 팸플릿은 임질에 걸린 더러운 몸으로 어떻게 국기를 마주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병사들의 성병 감염률은 일부 인사들이 우려한 것처럼 급속히 높아지지는 않은 반면, 군기지 인근 거주 여고생의 임신율은 급속히 높아졌다.

 

1차 대전 때 유럽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s/AEF) 사령관을 맡은 존퍼싱 장군은 프랑스에 도착하자 장병들에 대한 감시의 끈을 조였다. 이는 알고 보니 전쟁터에서 독일군을 무찌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병영활동감독위원장 레이먼드 포스딕은 프랑스와 미국의 성에 대한 태도 차이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는 군대란 성적 쾌락이 없으면 잘 굴러가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성적 쾌락을 용인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도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자칫 사기와 건강 수준이 저하되거나 항명 사태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는 미군에게 당국이 허가한 창녀촌을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군에는 이미 그런 시설이 있었다. 그런 제안을 담은 클레망소의 서한을 받은 전쟁장관 뉴턴 베이커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맙소사.····· 이거 대통령한테는 보여주지 말게. 안 그러면 참전을 중단하실 거야.”

 

성병에 걸리지 말라는 온갖 경고도 소용이 없었다. 병에 걸린 병사들은 격리됐다. 도덕적 개혁가들은 참전 군인들이 고향에 돌아와 미국 여성들에게 병을 퍼뜨리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우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개혁가들은 흔히 프랑스식이라고 하는 오럴섹스의 맛을 본 군인들이 순진한 미국 처녀들에게 그런 문화를 퍼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전쟁부 소속 비뇨기과 군의관 조지 워커 대령은 당시의 고민을 이렇게 토로했다. “수만, 수십만 젊은이들이 퇴폐적인 사상에 물들어 미국에 돌아온다. 본인들의 자존감이 저하되는 것은 물론 도덕적 저항력조차 약해질 것은 뻔하다. 그런 상황은 당연히 걱정스럽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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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생각하는 한국의 독립운동 무장투쟁사는 지나치게 단순화 되어 있다. 한국 교과서에서 독립운동 무장투쟁사로서 나오는 전투들은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다. 물론 이 전투들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저평가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봉오동과 청산리만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을 침략했지만, 독립운동 세력들은 전투를 끊이질 않았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가 심해지면서 일제에 충성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숫자가 늘어났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은 193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대 에도 지속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선 이 부분이 상당히 생략되고 나오는데, 그것은 당시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사회주의 성향이 있던 좌파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중국 혁명에 가담하여 항일투쟁과 반국민당 투쟁도 같이 전개했었다.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민족계열 독립운동가 지청천이 지휘하는 군대가 전투를 일본군에 맞서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고,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투쟁에 참가한 김일성 또한 만주지역에서 여러 번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특히나 김일성의 경우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그가 지휘했던 잔존 동북항일연군은 1942년까지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점에서 조선민중의 무장 독립투쟁은 일제 중기와 말기에 가서 사회주의 세력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시기 연안을 포함한 중국 대륙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또 다른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그 조직이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 맡았던 조선의용대였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중국 관내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측과 본격적으로 연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1936년 중반부터 좌파계열 독립운동 세력들도 세력을 결집하였는데, 19371112일 이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단체가 모여 만든 연합체였다. 이들은 노동자·농민 외에 중소 자산계급까지도 조선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고, 군대를 창설했다. 이렇게 하여 창설된 것이 19381010일에 결성된 조선의용대였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이후 창설된 한인 부대로써 최고 대장은 약산 김원봉이었고, 창설시기 총 대원수는 97명이었다. 193811월과 19391월에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를 두 사람의 연합을 요구하면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전개된 제2차 국공합작의 연장선상이었다.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항일전을 치르는 전방에서 대적선전공작과 유격전을 전개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러한 선전적 그리고 군사적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으며,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다.

 

1943년부터는 중국 팔로군의 지휘를 받았던 조선의용군은 경성 당시 약 140명이었던 병력이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던 19458월에는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해방 후에는 마오쩌둥 휘하의 중국인민해방군에 편입되었고,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부대에 맞서 맹활약을 펼쳤다. 국공내전이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이후 이들은 1948년에 수립된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으로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시대의 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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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일본의 천황은 항복 선언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한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자 한반도 전역에선 기쁨의 함성이 울렸다. 이런 기쁨의 함성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다. 1944년부터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천황의 항복 선언 1일전 조선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회담하여,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 받아 해방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그 시기 여운형이 조직한 것은 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보통 건국준비위원회라고 부른다)였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해방 조선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는 막대했다. 여운형 평전의 저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이기형 선생은 해방 60주년에 만들어진 여운형 다큐에서 몽양 여운형이 가장 인기가 많은 지도자였음을 인정했다. 한국의 대통령인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이 조직에 잠시나마 가담했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마찬가지로 소련군이 주둔한 한반도 이북에서 소련군과 함께 친일파 청산과 새 조국 건설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소련군이 주둔하지 않았던 한반도 이남의 경우 진보적인 인물 여운형이 건준을 이끌어 나갔고, 광주에서 벽돌공으로 숨어 지내던 박헌영은 이른바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여 세력을 키웠다. 쉽게 말해 좌익에 대한 민중의 지지율은 매우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공포에 떨었던 세력들은 바로 민족을 팔아먹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단계적으로 청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한반도 이남에 좌익정권이 들어서면 본인들 또한 역사의 심판대에 설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자 했다. 그러던 과정에서 이들이 생각한 것은 바로 좌익에 맞서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연합국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19452월 소련의 얄타에서 모인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은 한반도 분단을 결정했고, 5개월 뒤인 포츠담 회담에서도 이를 확인했다. 따라서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는 바로 38도선을 기점으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그리고 한반도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갈 계획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대일선전포고 이후 치스차코프 휘하의 제1극동전선군이 한반도 이북을 단기간에 해방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19456월에 끝난 오키나와에서 상륙이 멈춰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군의 상륙은 상대적으로 늦을 수밖에 없었다.

 

194598일 첫 미군부대가 인천항에 상륙했다. 남한 땅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다음날인 9일에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미 제7사단에 있던 총지휘관은 바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의 패튼이라 불렸던 존 리드 하지였다.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을 갖고,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일장기를 내린 뒤 성조기를 올렸다. 이로써 미군정이 실시된 것이다.

 

미군정은 제1단계로 서울과 경기지역을 점령하고 912일부터 23일까지 개성과 수원 그리고 춘천 등을 점령했으며, 2단계에서는 제40사단이 경남북지역을 점령하고 7사단의 점령지역을 확대시켜 1010일까지 경기도와 강원도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제3단계에서 6사단을 동원하여 전남과 전북까지 접수하며 남한의 전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이 입성할 당시 민중은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이는 여운형이나 박헌영 등의 좌익계열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히 점령군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의 포고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이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의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이러한 포고문은 조선인민의 해방을 언급했던 소련군의 포고령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이남에서 이른바 미군정이 실시됐다. 포고령에서 밝힌 것과 같이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가장 먼저 공포에 떨고 있던 친일 세력들과 손을 잡았다. 총독부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유지했고, 그 인사들의 대다수를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로 채워나갔다. 경찰의 경우는 민중들의 반발을 샀던 친일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과정에서 자주적으로 건설된 인민위원회 그리고 여운형과 좌우인사들이 합쳐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이것은 우리역사에 있어 엄청난 실수였다. 서방에서 최초의 마오쩌둥 전기를 쓴 에드가 스노는 미군정이 건준을 해산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국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결국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나타난 이런 모순적인 구조는 1946년 모스크바삼상회의 이후 대구에서 10.1 항쟁이라는 민중투쟁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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