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생각하는 한국의 독립운동 무장투쟁사는 지나치게 단순화 되어 있다. 한국 교과서에서 독립운동 무장투쟁사로서 나오는 전투들은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다. 물론 이 전투들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저평가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봉오동과 청산리만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을 침략했지만, 독립운동 세력들은 전투를 끊이질 않았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가 심해지면서 일제에 충성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숫자가 늘어났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군들의 무장투쟁은 193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대 에도 지속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선 이 부분이 상당히 생략되고 나오는데, 그것은 당시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사회주의 성향이 있던 좌파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중국 혁명에 가담하여 항일투쟁과 반국민당 투쟁도 같이 전개했었다.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민족계열 독립운동가 지청천이 지휘하는 군대가 전투를 일본군에 맞서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고,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투쟁에 참가한 김일성 또한 만주지역에서 여러 번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특히나 김일성의 경우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그가 지휘했던 잔존 동북항일연군은 1942년까지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점에서 조선민중의 무장 독립투쟁은 일제 중기와 말기에 가서 사회주의 세력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시기 연안을 포함한 중국 대륙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또 다른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그 조직이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 맡았던 조선의용대였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중국 관내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측과 본격적으로 연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1936년 중반부터 좌파계열 독립운동 세력들도 세력을 결집하였는데, 19371112일 이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단체가 모여 만든 연합체였다. 이들은 노동자·농민 외에 중소 자산계급까지도 조선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고, 군대를 창설했다. 이렇게 하여 창설된 것이 19381010일에 결성된 조선의용대였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이후 창설된 한인 부대로써 최고 대장은 약산 김원봉이었고, 창설시기 총 대원수는 97명이었다. 193811월과 19391월에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와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를 두 사람의 연합을 요구하면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전개된 제2차 국공합작의 연장선상이었다.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항일전을 치르는 전방에서 대적선전공작과 유격전을 전개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러한 선전적 그리고 군사적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으며,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다.

 

1943년부터는 중국 팔로군의 지휘를 받았던 조선의용군은 경성 당시 약 140명이었던 병력이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던 19458월에는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해방 후에는 마오쩌둥 휘하의 중국인민해방군에 편입되었고,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부대에 맞서 맹활약을 펼쳤다. 국공내전이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이후 이들은 1948년에 수립된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으로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시대의 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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