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만에 연재하는 글이네요이것저것 하다 보니 많이 늦네요.)

 

1991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까지를 통틀어 우리의 현대사를 잘 조명한 역작이다채시라와 최재성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적잖은 시청자들에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탄탄한 스토리 라인시대적 혼란 속에서 꽃피는 남녀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여명의 눈동자는 비슷한 시기 방영했던 머나먼 쏭바강과 모래시계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봐야할 드라마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다. 여기서 채시라가 맡은 역인 윤여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배우 채시라가 맡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인 윤여옥은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과 해방정국에서의 좌우갈등 및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주인공 윤여옥의 비극은 드라마 1화부터 시작이 된다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여옥은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끌려간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일본군 장교를 접대해야 했고일본군 장교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여옥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그녀는 알 수 없는 곳에 배치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무수히 많은 일본군과 성관계를 맺어야 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왜 드라마 상에서 여옥은 이런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는 신세가 된 걸까그것은 바로 그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였기 때문이었다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는 그 시기 정신대(挺身隊)’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이번에는 한일 역사문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법 이슈가 됐다. 국내를 포함하여 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빈번이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 강간 등이 일어났었다. 1894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1918년 적백내전기 시베리아 출병과 1920년 간도 출병 등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한 일본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이들은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를 강간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이러한 일본의 폭압 통치는 중국인들이 항일의지를 부추겼다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 있으면서 스노가 본 붉은 연극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당시 만주의 일본군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만극은 제목이 <침략>이었다막이 오르면 1931년 만주의 어느 마을이 나타나고이곳에 일본군이 밀려와서 무저항의 중국군을 몰아낸다. 2장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어느 농가에서 잔치를 벌이는데중국인 남자들은 두 팔과 무릎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이들의 의자 구실을 하고 술에 취한 장교들은 이 농민들의 아내를 겁탈한다.”

 

출처중국의 붉은 별 p.145

 

이처럼 일본군의 약탈과 강간은 빈번히 일어났다그런 만행이 극을 찍었던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벌어진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에서였다. 6주 동안 20~3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중국인 아녀자들을 겁탈했다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고 강간당했다그 숫자는 최소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난징 대학살이 종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38년 1월 일본군은 소위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고여기에는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다만 이들의 경우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했지만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을 띄지 않았다고 한다다만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중국 전역으로 전선이 더 확대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일본 군부는 소위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위안부를 경영하는 상인인 오쿠다 진자부로와 후쿠다 요네자부로는 기업의 거액 융자를 획득한 후에동년 5월 17일 대척회사공사에 같은 방식으로 하타마 도모시치에게 18천엔을 대출해주었고이 세 명의 상인은 바로 1939년 4월 28일과 5월 24일에 각각 위안부를 소집하여 총독부의 어용선 금령환 호에 탔다위안부 징발책의 운영은 이와 같은 민간인 업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한편 2001년 한국의 위안부 증언집 조사 결과 한국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일본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

(1944년에 찍은 일본군 위안부 사진, 사진 속에 임신한 여성은 바로 박영심 할머니로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써 일본을 규탄하는 행동에 착수했으며, 2006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위안소에서 줄을 서 있는 일본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루에 20명 이상의 남성을 상대했다고 한다. 생리를 포함하여 몸이 아파도 봐주지 않았으며, 사실상 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반항하면 일본군은 이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 지역은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만주지역필리핀인도차이나 반도버마인도네시아 등이었고이것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들이었다중국에는 상하이부터 항저우난징한코우수조우우후난창한코우잉샨 등의 도시만 합쳐도 13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물론 중국 대륙 전역에 있던 위안소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필리핀에는 30개소 버마에는 50개소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는 40개소 이상의 위안소가 있었고이걸 합치면 120개소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심지어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호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솔로몬 군도만 하더라도 20개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2년 9월 3일 일본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서에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이 400개소 정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난징에 있던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 위안소 위치 지도, 지도에 나온 바와 같이 일본이 지배하던 곳 대부분 지역에 위안소가 존재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현지 여성의 조달유괴와 납치가난 및 가족의 빚 청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일종에 취업 사기 형식으로도 존재했으며군을 동원한 비혼 여성에 대한 납치 및 협박을 동원한 경우도 많았다소위 일부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러한 일인 것을 알고서 지원하는 것이 아닌돈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위안부일을 하게 된 일종에 취업사기 형식이었다그리고 소위 정신대로 모았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차출하기도 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귀향)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영화 허스토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어찌됐든 일본 제국주의가 군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목적으로 강제성을 동원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다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가 20만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다만 이 정도의 숫자가 다소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과장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추산에 대한 의심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가려주는 것도 아니다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피해자가 된 사례를 증언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많이 있고그것이 바로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두 명의 여성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물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제법 많고 다양하다그러나 이 글에서 그것을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기에 대표적으로 정서운 할머니와 박영심 할머니만 언급하고자 한다.

(박영심 할머니, 1998년 북한에서 인터뷰한 영상이다. 할머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인생을 다룬 단편 애니매이션, 정서운 할머니는 1992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힌 인물로,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여러 증언을 남겼다.)

 

1992년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을 확산시켰던 정서운 할머니는 경남 하동 악양 입석리에서 태어나 1938년 14살의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15살 때부터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태국-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했으며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본인 증언에 따르면태평양 전쟁 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에 의해 다른 위안부들과 더불어 집단 학살 당할 뻔했지만미군이 일본군 기지를 공습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1년간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46년에 부산으로 귀국했다고 한다이후 그는 1992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했으며,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 대회에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했으며, 1996년에는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그러던 2004년 진해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난징 대학살의 현장인 중국 난징에도 위안소가 있었다위안소의 이름은 리지샹 위안소로 면적이 6700나 된다이 위안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현재까지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이 위안소로 끌려온 피해자 중에는 박영심 할머니도 있었다평남 출신의 박영심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에 난징 위안소로 끌려와 대략 3년 동안 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박영심 할머니이며해방 이후 1946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그렇게 북한에서 살다가 2006년에 85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박영심 할머니에 대한 자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보고서로도 확인이 되며, 1944년 9월 8일 생산된 중국 원정군 Y군의 G-3(작전작전 일지에는 쑹산 포로 중에는 한국인 여성 6명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즉 이 중 한 명이 박영심 할머니다.

(와패니즈인 토니 마라노, 토니 마라노는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극우와의 커넥션이 깊은 인물이다. 몇 년전 그는 미국에 있는 소녀상에 가서 이런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박정희와 박근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도 탄핵되기 1년전 비슷한 짓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문제이다그리고 현재도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근처에서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일본군 위안부는 분명한 전쟁범죄다소위 일반 성매매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라는 점에서 규탄 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때문이기도 하지만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막중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강제 징용 문제 그리고 사할린 한인 문제 등을 졸속으로 끝내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이는 결국 일본에게 한국은 합의했다.”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따라서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일본 제국주의는 위안부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1938년부터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전선에 보내야 했고결국 식민지 지역에서 인력을 차출했다대대적인 징용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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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를 보았을 것이다. 1985년 6월 1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관객 92만 5천 명이 보았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물론 이 영화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 운동권들의 저항을 억누르고반공의식과 반북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상영된 것이었다즉 캄보디아 폴포트 공산정권의 이런 만행을 보라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전두환 정부의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다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관점들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먹혀들어 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영화 킬링필드는 1975년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Pol Pot, Salot Sar)와 크메르 루주(Khmer Rouge)의 학살과 만행을 다루고 있다영화는 미국의 반전기자 시드니 스켄버그(Sydney Schanberg)와 캄보디아의 디스 프란(Dith Pran)의 우정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따라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감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영화의 본질은 분명했다캄보디아의 만행을 폭로함으로써반공주의적 의식을 고취시키려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킬링필드의 희생자 유골, 캄보디아는 폴포트 집권 시기 수많은 인명이 학살로 희생됐다.)

 

캄보디아의 대량 학살자 폴포트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했다그의 정권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통치기간 4년 동안 학살을 자행했다이 학살로 최소 200만에서 300만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도 있다즉 크메르 루주 정권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학살로 그만큼의 인명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다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기도 한다실제로 폴포트 집권 시기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는 80만에서 150만 사이이며사망자 대부분은 기아와 질병 및 수용소 생활 중 사망했다는 것이다이 중 실제 즉결 처형으로 사망한 자의 수치는 7만 5,000명에서 15만 명으로 되며나머지 학살굶주림질병과로로 숨진 사람들이 100만 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폴포트 집권 시기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도시에 살던 캄보디아인들이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당했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서적의 80%가 혁명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폐기됐다그리고 S-21로 알려진 비밀 심문 시설인 뚜옹슬랭에서 고문과 조작이 있었고그 시설에서만 1만 4,000명이 거쳐 갔으며 이 중 절반이 사형당했다뿐만 아니라 폴포트는 크메르 루주의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의 국경지대을 의도적으로 침공했으며적잖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살던 베트남인들을 학살했다캄보디아 내의 베트남인들도 그저 베트남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크메르 루주는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그러나 많은 이들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은 알아도 그 이전의 학살은 모른다그 이전의 학살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미국의 닉슨(Nixon) 행정부가 저지른 캄보디아의 제1차 킬링필드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형식적으로 독립을 얻은 캄보디아는 다시 베트남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 초반 이후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되는 베트콩 물자를 차단할 목적으로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더 증가했다실제로 1967년 2월 24일 미군남베트남군한국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가 캄보디아 영토를 침입해 크락 크란의 크메르족 마을에 집중 포격을 가한 적이 있었으며미국의 항공기들은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었다.

(B-52 폭격기, 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

 

1969년 3월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이른바 비밀 폭격을 시작했고, B-52를 포함한 미군의 폭격기가 거의 매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 폭탄을 투하했다거기다 당시 시아누크는 제3세계 블록에 가담하였고캄보디아 국경지대 내에 베트콩 주둔을 허용했다따라서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를 폭격했다. 1970년 미국은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론놀(Ron Nol)을 동원해서 캄보디아에서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고베트콩 소탕을 명분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대규모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이에 따라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는데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미군의 폭격과 공군력에 의해 발생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폭격한 캄보디아 지역을 나타낸 지도,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을 폭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1월 캄보디아 정부가 공식 백서를 통해 사진과 날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세부 사항들을 덧붙여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수천 건의 사건들을 공개했다여기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과 지상공격에 관한 것을 담고 있었다그러나 놀랍게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나 지상공격 이후에 발견된 시체 중 베트콩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즉 이들의 공격이나 폭격으로 죽은 이들은 다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침공을 설명하고 있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은 결국 미군의 철수로 끝났다그러나 강도 높은 폭격은 지속됐다. 1971년 말 회계감사원(General Accounting Office)의 조사낟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 난민과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킨 매우 중요한 원인이라고 결론 내리고 난민의 수를 인구 700만 명 중 약 1/3로 추정했다심지어 미국의 정보기관은 마을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중폭격의 가능성이라고 보고했다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파괴행위는 역효과를 만들어 냈다그것은 바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던 크메르 루주의 급부상이었다크메르 루주는 미군의 폭격이 격화됨에 따라캄보디아 내부의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게 됐고이는 결국 론놀 정부군과 크메르 루주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미군의 폭격을 목격한 미국의 통신원 리처드 더드먼(Richard Dudma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폭격과 사격은 캄보디아 농촌 사람들을 급진적으로 변하게 만들었으며농촌을 대규모의 헌신적이고 효율적인 혁명 기지로 변모시켰다.”

 

출처여론조작 p.439

 

1973년 초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핀란드조사위원회가 사용한 대량학살(Mass Genocide)’라는 말에 걸맞는 규모로 증가했다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가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한 이후 5개월 동안에도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은 지속됐으며, 8월이 되어서야 폭격이 중단됐다즉 1969년 3월부터 1973년 8월까지 미국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그 결과 캄보디아의 농촌은 폐허로 변했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공포의 장소가 된 프놈펜으로 탈출했다많게는 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도 추정하며,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핀란드 조사위원회는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으로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했으며최소 30만에서 많게는 8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서 이에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노엄 촘스키의 주장)

 

공산계 반정부 무장조직 크메르루주는 급속히 세를 불렸다젊은 크메르루주 조직원들의 광신적인 행태에 대한 무시무시한 보도가 꼬리를 이었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장악했다그들은 곧바로 국민들을 상대로 다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그 결과 1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미국의 폭격으로 이미 50만 명이 죽음을 당한 터였다미국은 캄보디아의 주요 우방인 중국과 화해 무드 상태에서 폴 포트가 이끄는 잔학한 크메르루즈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03

 

이처럼 우리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대해 편향적으로 알고 있다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은 기억하고 있지만정작 폴포트의 킬링필드 못지 않게 캄보디아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미국 닉슨 정부의 대량 학살 프로그램은 완벽히 잊혀졌다또한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이유가 미국 때문이라는 사실도 가려졌다왜 그런 것일까그것은 바로 서방 사회가 편향되고 조작된 여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따라서 캄보디아 대량학살을 논할 때미국의 제1차 킬링필드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주제며비판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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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과학적인계산

 

더쉬닉은 기근대학살" 기간의 사망자 수를 계산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메이스도 더쉬닉의 방법을 사용했다:

 

‘1926년 인구조사와 ... 1939117일의 인구조사의 자료에 따르면 ... 그리고 집산화 이전의 평균 증가율... (2.36%), 우끄라이나에서 두 번의 인구조사 사이에 750만 명이 사망했다고 계산할 수 있다.’19)

 

이러한 계산의 무의미하다.

 

세계 대전, 내전 그리고 1920년부터 1922년 사이의 대기근 모두가 출산율의 저하를 야기했다. 그 시기에 태어난 신세대는 16세인 1930년 무렵에 육체적 성숙을 이루었다. 인구 구조는 필연적으로 1930년대의 출산율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자유로운 낙태 또한 1930년대의 출산율을 극적으로 감소시켰고, 1936년에 정부가 인구증가를 위해 자유로운 낙태를 금지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다.

 

1929년에서 1933년은 농촌에서 기근이 동반된, 거대하고 맹렬한 투쟁이 특징적인 시기였다. 이러한 종류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으로 출산율이 감소하였다.

 

우끄라이나인으로 등록된 인민들 수는, 민족 간의 결혼, 신고한 국적의 변화 그리고 이민에 의해 변화하였다.

 

우끄라이나 국경조차도 1926년과 1939년에 같지 않았다. 200만에서 300만의 쿠반 코사크(Kuban Cossaks) 사람들은 1926년 우끄라이나인으로 등록되었으나, 1920년대 말에는 러시아인으로 재분류되었다. 이 새로운 분류만으로도 더쉬닉과 메이스가 계산한 기근대학살의 희생자들25%에서 40%를 설명해 준다.20)

 

공식적인 수치에 의거해서, 우끄라이나의 인구가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3339000명이 증가한 것을 더해보자 (300+3,339,000=6,339,000 역자). 나찌에 의한, 실제로 대학살이 진행되는 환경에서 유대인의 인구증가와 이 수치들을 비교해 보라.21)

 

더쉬닉 계산법의 타당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더글라스 토틀은 캐나다의 서스캐처원(Saskatchewan) 주의 인구 수치를 한 예로 잡아보았는데, 이 지역에서는 1930년대에 농민들의 거대한 투쟁이 있었다. 억압은 종종 폭력적이었다. 토틀은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과 서부 캐나다의 가뭄에 의해 야기되고, 캐나다 우익 정부의 정책과 폭력이 뒤얽힌, ‘불황대학살의 통계학적인 희생자들의 수치를 계산하려고 했다:

 

1931년 서스캐처원 인구

 

921785

 

1921부터 1931년까지 서스캐처원 인구 증가율

 

22%

 

1941년 서스캐처원 인구 예상치

 

(1931인구 더하기 22%)

 

1124578

 

실제 1941년의 서스캐처원 인구

 

895992

 

불황대학살의 희생자들

 

228586

 

“1931년 인구를 기준으로 한 희생자 비율

 

25%

 

제 정신을 가진 사람 누구라도 캐나다에 대한 기괴한 어릿광대극이라고 불렀을, 과학적인 방법은 우익 출판물들에서 스딸린 테러증거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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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끄라이나의 나찌를 구제하는 두 명의 교수들

 

신 반공성전을 도와주고, 그들의 광기어린 군비증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미국의 우익들은 1983년에 우끄라이나 기근대학살 50주년 기념일이라는 대대적인 추도식을 추진했다. (공산주의가 역자) 서방에 대한 끔찍한 위협임을 확실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란 대량학살을 의미한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나찌와 그 협력자들이 이 증거를 제공했다. 두 명의 미국 교수가 그들의 학문적 신임을 이용해 그 증거를 마련했다: 그들은 쏘비에뜨 우끄라이나 기근의 공동저자인 제임스 E. 메이스(James E. Mace), 50년 전: 우끄라이나 기근 대학살 쏘비에뜨 러시아 제국주의 도구로서의 테러와 참화를 쓴 월터 더쉬닉(Walter Dushnyck)이었으며, 다나 댈림플이 그 책의 서문을 썼다. 하버드에서 낸 책에는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의 기근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마흔 네 장의 사진을 포함한다. 그 중 스물네 장은 라우벤하이머(Laubenheimer)가 쓴 두 권의 나찌 문서에서 가져온 것으로, 라우벤하이머는 대부분의 사진을 디트로프에게 의존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라는 책의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책을 시작하였다:

 

만약, 그의 맑스주의 신념의 도움으로, 유대인이 세상 다른 사람들에게 승리한다면, 그의 영광은 인간성의 장례식 화환이 될 것이고, 그리고 이 행성은 수 백 만 년 전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부재한 상태로 나아갈 것이다.’17)

 

디트로프-라우벤하이머의 사진들 대부분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직후와 1921년부터 1922년 사이 기근의 시기에서 가져온 완전히 위조된 사진이거나, 아니면 기근대학살이라는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 허위이고 증명되지 않는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다.18)

 

두 번째 교수인 더쉬닉은 1930년대 말에 활성화된, 파시스트 단체인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에 간부로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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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2022년 새해가 밝았다. 2020년과 2021년의 COVID-19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고지금도 우리는 고통받고 있다그런 와중에 중남미에선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났다그것은 바로 칠레 좌파 후보인 가브리엘 보리치(Gabriel Boric)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가브리엘 보리치는 35살의 젊은 나이에 56%의 득표율로 칠레 대통령이 됐다. 2019년부터 전개된 칠레의 반정부 투쟁은 사회주의와 진보를 향해 전진했고, 2020년에는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했으며, 2021년에 좌파연합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그리고 2022년 새해가 밝았다.

(피델 카스트로와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서로 협력하고 지지하는 관계였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것을 들어사회주의가 완벽히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편향적인 관점이라 생각한다물론 소련과 동유럽은 붕괴했다그러나 그것이 사회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즉 우리 인류가 추구하는 사회주의의 고귀한 정신(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본가에게 착취 받지 않고노동자가 생산을 주도하고돈이 없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는 것 등)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중국이나 소련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권이 내부적 요인 및 모순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내부적 요인만으로 붕괴한 것은 아니다미국의 경제적 봉쇄도 한 몫 한다.

 

현재 쿠바나 북한과 같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유를 상세히 들어다보면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이 크다대표적으로 카다피의 리비아만 봐도 그렇다리비아의 경우 핵 포기 선언 이후 미국이 경제제재를 해제함에 따라, 2009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17,000불까지 상승했을 정도였다거기다 전기도 병원도 교육 무상이었고자동차 구입 시 정부가 자동차 가격의 절반을 부담했다실감이 안 된다면 당시 한국 경제를 예로 들 수 있다당시 경제대국 11위던 한국의 GDP는 2만 불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다그러니까쿠바나 북한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도 결과적으로 미국의 경제제재가 한 몫 한다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보지않은 채 그들의 경제사정을 미국 프로파간다에 따라 욕한다면그것은 그저 미국 지배계급식 가치관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동상, 그는 오늘날 칠레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에서는 미국의 신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유나이티드 푸르트 검퍼니(United Fruit Company)를 포함한 미국의 기업들은 중남미의 경제를 약탈하고 있었고이러한 폭압에 맞서 여러 곳에서 좌파 정권이 등장하고 혁명이 발발했다대표적으로 1959년에 성공한 쿠바 혁명(Cuban Revolution)은 60년간 지속된 미국의 쿠바 식민지 통치를 종식시킨 사건이었다물론 미국은 이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지금도 쿠바에게 각종 경제제재와 억압을 가하고 있다그 때문에 지난 2021년 7월 쿠바에서는 미국이 사주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물론 쿠바는 인민의 단결력과 쿠바식 민주주의를 통해 이 반혁명을 진압했다.

 

신자유주의를 중남미에서 최초로 실현한 칠레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대략 3년간 사회주의 국가였다. 1970년 칠레의 좌파 정치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는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아옌데는 부의 재분배와 통신회사 ITT를 포함한 미국 기업들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9월에 있던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4번의 대통령 선거 도전 끝에 아옌데는 칠레의 대통령이 됐고총 36.6%의 득표율을 받았다반면 그의 경쟁자였던 우파 후보인 호르헤 알렉산드리는 34.9%의 득표율을 받았다아옌데는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해 개혁을 실행했다.

(영화 칠레 전투,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1부 부르주아지의 반란, 2부 쿠데타, 3부 민중의 힘으로 구성됐다. 칠레에서 사회주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첫해에 입법 차원에서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당시 폭등했던 칠레의 물가는 제법 안정적으로 잡혀 30%대였던 물가인상률이 15% 이하로 하락했다국내총생산 성장률은 전 정권은 3%였지만아옌데 정부는 8%까지 올렸다산업 생산과 광산·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으며이 덕분에 1971년 4월 지방선거 결과 아옌데 측의 인민연합은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칠레의 근본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여기에는 남녀 동일임금제전국민 생활임금제사회보장제도 확대전 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 등이 포함됐다대규모 신규 주택 건설 사업도 계획했으며민간은 물론 민관 합작회사도 건설에 참여하도록 했다차별 당해온 여성과 혼외 자식에게도 평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로 했으며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국가 차원의 공교육 제도가 입안됐으며성인 문맹을 뿌리 뽑기 위한 문해교육에 박차를 가했다또한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의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중소기업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으며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고자 했다.

 

칠레의 모든 지역 및 동네에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다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더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1971년 7월 아옌데 정부는 케니코트와 아나콘다 구리세로광업(Cerro Mining)을 국유화하고 ITT 경영권을 접수했다토지개혁과 국유와 복지정책을 통해 아옌데 정부는 사회주의로 향해 전진했다그리고 대다수의 칠레 민중은 이를 따랐다그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미국에 빌붙어 자신들의 이익을 채웠던 기득권 세력들뿐이었다아옌데는 민중과 소통했다집권 당시 그가 했던 연설을 발췌하겠다.

 

나는 사회주의 전사로서그리고 칠레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걸고 국민의 충정에 답하겠습니다나는 인민연합의 계획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수행하겠습니다우리는 생산물 유통에 있어 보다 더 발전된 그리고 보다 큰 통제가 필요합니다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내가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우리는 민중의 권력을 강화시켜야 합니다어머니들을 위한 센터지역단체공급과 가격조절위원회 그리고 지역 민병대 등이 강화되어야 합니다산업연대도 강화되어야 합니다산업부문은 정부와 평행선을 달리는 그런 세력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인 민중들과 결합한 인민정부의 힘으로써 존재해야 합니다.”

 

아옌데의 진보정치와 개혁은 대대적으로 인민의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미국이 경제제재였다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시점부터 좌파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온갖 공작에 착수했다또한 미국의 기업들도 이런 방해공작에 협력했다수출입은행국제개발처미주개발은행 그리고 로버트 맥나마라가 총재로 있는 세계은행 등이 칠레에 대한 경제원조와 차관을 끊었으며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 정부를 빈곤으로 내몰아 좌파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이들이 먹는 분유를 경제제재했다이에 따라 칠레의 경제는 궁핍해졌다. 1972년에는 아옌데 정권의 국민적 지지율을 하락시키기 위해 도시간 물류수송을 트럭에 의존했던 칠레의 운송회사에 스파이를 위장취업 시켜 어용단체를 통해 파업을 선동하고 주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아옌데 정권은 민중의 지지만 받았을 뿐 무너지지 않았다그렇게 해서 미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2019년에 다시 전개된 칠레 전투,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이 2019년 칠레에서 일어났다.)

 

1973년 9월 11일 미국은 피노체트를 동원하여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고친미정부를 세웠다사실 닉슨이나 헨리 키신저에게 칠레의 민주주의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아옌데를 제거하고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반대파 3,200명을 정권 초기에 학살하고수만 명을 구금했으며집권 기간 동안 총 3만 명에서 6만 명의 시민을 학살했다피노체트 정부가 만든 칠레의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로 도망친 나치 인사들이 개발한 수용소들이 있었으며수많은 인민들은 그런 공포와 억압 속에서 피노체트 독재 17년을 경험했다.

 

피노체트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의 망령은 칠레가 민주화를 이룩하고 난 이후에도 지속됐으며오늘날 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2019년에 시작된 칠레 전투는 좌파 정치인을 당선시킴으로써현재로서는 큰 성과를 달성했다가브리엘 보리치의 발언대로 2022년의 칠레는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되길 바란다신자유주의를 완벽히 타파한 칠레에서 사회주의의 바람이 불어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가 실현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미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선 인민들의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나는 칠레가 쿠바 베네수엘라와 더불어 성공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전적으로 지지한다.

(칠레의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 2021년 12월 좌파인 그가 당선되면서 칠레는 또 다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쿠바-베네수엘라-칠레로 이어지는 21세기 사회주의의 꿈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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