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버 다이빙 시작하기 - 다이버로 살아가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
Arnold J. Kim 지음 / psdc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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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버 다이빙 입문격으로 읽기 괜찮은 책이다. 물 안무서워하는 다이버초보들은 읽어보길 바란다. 참고로 내 외삼촌이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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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문제적 인간 12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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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025(러시아 구력은 현재 달력보다 13일 느림) 2월 혁명으로 탄생했던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들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이로써 반민중적이던 케렌스키 정권은 무너지고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았다. 10월 혁명 성공이 선언된 다음날인 1026일 레닌은 군중들이 모인 여성귀족학교인 스몰리학교 건물에서 연설을 했다.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왔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024,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MBC, 러시아 혁명 1, 2006)

 

이어서 레닌은 평화에 대한 포고령토지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레닌의 연설 이후 군중들 사이에 서있던 어느 병사가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를 부르자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콜론타이도 백발의 늙은 노인도 거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당시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 전쟁으로 지쳐있었다. 그로 인한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스몰리학교에 모인 군중들과 볼셰비키 지도부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10월 혁명 성공의 성취를 만끽했다. 거기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사회주의가 실현됐으리라는 생각에 빠졌다.

 

19183월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왔다. 이로써 러시아는 4년간 지속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러시아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인다. 적백내전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적백내전은 혁명 러시아 경제를 피폐화시켰고, 결국 1921년 내전 시기 레닌이 고집했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신경제정책(NEP)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경제정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24121일 레닌은 사망했다.

 

이 책은 러시아 혁명사와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대표적으로 연구한 영국인 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 평전이다. 8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이 책은 주로 레닌의 전반 생애와 레닌의 사적인 이야기에 매우 초점을 두었다. 특히 91년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를 토대로 썼다는 점은 주목받을 만하다.

 

분명 이 책은 1870년 레닌이 태어났던 시점부터 191710월 혁명을 성공시키는 과정까지의 일대기와 당시 혁명가적인 레닌의 생애는 잘 조명했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도 서술했다는 점에선 나름 칭찬받을 만 하다. 그러나 책에 나온 10월 혁명 이후의 레닌의 일대기는 지나치게 우익적이고 서비스의 편향된 관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 부분에서 레닌에 대한 필요이상의 비판을 보는 것 같았다.

 

1. 적백내전의 책임은 레닌에게 있을까?

 

191710월 혁명이 성공하기가 무섭게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혁명 러시아를 분쇄하기 위해서 백군을 도와 적백내전을 일으켰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백군은 구 황제체제를 복원하고자 했다. 혁명 직후 볼셰비키가 이끄는 러시아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이런 상황은 트로츠키가 군대를 지휘하게 됨에 따라 군대의 규모와 군사력이 차츰 막강해졌고, 1920년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204월에서 5월쯤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사실상 승리했지만,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쳤다. 바로 극심한 대기근과 인플레이션이었다. 러시아의 경제는 원래부터 열악했다. 1914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가 참전하게 됨에 따라 가뜩이나 열악했던 경제는 더더욱 열악해졌다. 그 결과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가 무섭게 적백내전이 일어났다. 쉽게 말해 러시아 경제는 전쟁으로 인한 직격타를 2번이나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의 경제는 상당히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기후가 안 좋아 농사짓기 힘들고 식량생산 자체가 매우 힘든 러시아는 결국 기근이 닥쳤다. 그 결과 수백만이 굶어 죽거나 굶주림에 허덕였다.

 

책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러한 책임을 전적으로 레닌에게 묻는다. 서비스의 이러한 관점은 분명 올바른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적백내전을 일으킨 건 황제체제 복원을 원했던 백군 세력과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따라서 적백내전과 대기근의 책임은 전적으로 백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있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미국과 서방의 고립으로 100만 명이 아사했던 이라크 사태를 이라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듯이, 전쟁과 굶주림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레닌과 볼셰비키들에게 전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2. 레닌과 볼셰비키의 폭력은 무자비 했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적백내전 시기 적군과 볼셰비키들이 보였던 폭력성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은 일부분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단순히 레닌과 볼셰비키들에 대한 폭력만 강조한다. 그렇다면 적백내전 시기 볼셰비키가 가장 폭력적이었을까?

 

폭력은 그 자체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적백내전 시기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체카라는 정치경찰 조직을 만들었다. 체카의 임무는 반혁명세력과 테러예방 그리고 적백내전에서의 승리기여였다. 적백내전 시기 체카는 적잖은 무자비함을 보여줬고, 체카가 공식적으로 처형한 인원은 5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1918년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을 몰살시킨 것도 체카였다. 그렇다면 왜 체카는 적잖은 무자비함과 잔인함을 보였던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는 전시였고, 백군을 비롯한 반동세력들의 백색테러가 끊임없었다. 적백내전 승리에 기여했던 트로츠키는 타려던 마차가 폭발해 죽을 뻔한 적이 있었고, 레닌 또한 백색테러를 숱하게 당했다. 백색테러의 잔인함은 정말 엄청났다. 백군이 저지른 테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얘기로 돌려 니콜라이 2세의 일가족 몰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첨언하자면, 니콜라이 2세는 죗값을 물어 루이16세처럼 당연히 죽었어야할 암군이었다. 물론 백군 옹호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니콜라이 2세가 황제로 있으면서 그가 인민과 사회주의자들에게 행한 반혁명 반동적인 그의 행적을 생각해봤을 때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체카 창설은 백색테러에 맞서기 위한 안티테제로서의 역할이었다. 볼셰비키의 적색테러는 분명 잔인했고, 그들이 만든 체카라는 경찰조직 또한 테러를 일삼았으며, 레닌 또한 그러한 행위를 옹호했다. 그러나 테러와 학살 그리고 무자비함에 있어서 적백내전을 일으킨 백군이 적군보다 훨씬 심했고, 방법 또한 적군보다 더 잔인했다. 백군 쪽에 있던 운 게른 슈테른베르크만 보더라도 백군의 광기와 잔인함은 적군의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된다. 백군의 잔인함과 테러는 전혀 얘기치 않으면서 적군의 무자비함만 강조하는 로버트 서비스의 서술은 우익적이고 편향된 관점이다.

 

3. 3인터내셔녈에 대하여

 

3인터내셔널의 창설은 혁명 러시아 시기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업적중 하나다. 19141차 세계대전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은 레닌에게 매우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10월 혁명에 성공시킨 레닌과 볼셰비키는 1919년 제3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1919년 창설된 제3 인터내셔널은 국제혁명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특히 1918년 독일 11월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독일사민당의 배신과 독일의 자유군단 같은 우익 반동 군대에 의해 봉기는 진압되고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망함에 따라 실패로 끝났다. 헝가리에서는 벨라 쿤이 이끄는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했다가 6개월 만에 체제전복 되는 일도 있었다.

 

유럽에서의 국제 사회주의 혁명은 참담했지만, 레닌은 포기하지 않고 국제혁명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 레닌과 볼셰비키의 영향은 아시아에도 끼쳤다. 당시 아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착취당했다. 중국, 조선, 베트남, 인도 그 외의 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식민 지배를 당하는 나라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비록 레닌 사후 스탈린이 소련이 지배자가 되며 일국사회주의로 변질되었지만, 당시 지배받던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게 혁명에 대한 희망과 사상을 전파했다.

 

비록 레닌 생전에 다른 나라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는 일은 없었지만, 수많은 나라들이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섰고, 불합리한 식민지 체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이게 바로 제3인터내셔널의 최대 업적일 것이다.

 

4. 결론

 

이 책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생각했던 것 보다 다소 실망스러웠다. 특히 10월 혁명 이후 레닌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은 레닌의 개인사적인 얘기를 주로 초점을 두다보니 제3인터내셔널에 대한 서술이 매우 적었다.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은 독일혁명에 대한 언급도 매우 짧게 했고, 3인터내셔널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 점이 가장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며 적잖은 분노를 느꼈던 파트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폭력성에 대한 서술이다. 그보다 더 잔인하고 민중의 지지도 받지 못한 백군 반동분자들의 만행은 전혀 언급치 않고, 오직 레닌과 볼셰비키의 잔인성만을 강조하는 서비스의 서술이 불편했다.

 

이러한 서술은 전형적인 우익들의 문제점이자 한계다. 그래도 이 책은 맹목적으로 레닌을 비판만 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10월 혁명 이전 레닌의 전반 생애를 잘 조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선 이준구라는 이상한 수꼴이 쓴 레닌을 이겨야 나라가 산다나 네오콘 이론 창시자인 루돌프 럼멜의 레닌에 대한 서술에 비해선 보다 레닌에 대해 긍정적이고, 그나름 바람직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이 책을 무조건 불쏘시개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이 책보단 다른 책들을 추천해주고 싶다. 인물전기로는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 평전이나 박종철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을 회상하며를 추천하고, 같이 읽을 책으로선 레닌이 쓴 국가와 혁명과 아고라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 전집시리즈를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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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섬 전투 (Battle of Attu)

2016년 윤동주를 다룬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정친 송몽규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송몽규는 “1943년 5월 미군이 알류산 열도 아치 섬(에투 섬)을 점령하고 미군 잠수함 부대가 진격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그냥 넘겼을 것이다. 영화의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송몽규가 아치 섬을 언급하며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지도의 위치는 미국 알래스카 근처에 있는 어느 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투이기 때문에 오늘은 에투 섬 전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태평양 일대의 섬들을 점령해나갔다. 일본의 팽창 야욕은 알래스카 일대까지 퍼졌다. 일본이 알래스카 령의 에투 섬을 점령한 것은 1942년 6월이었다. 이 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알류트인 42명을 훗카이도로 강제 이주 시켰다. 일본군이 이리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주둔하는 미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이 섬을 점령한 것은 아무래도 미국의 알래스카를 압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과 1943년 2월 과다카날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43년 5월 11일 태평양 전선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에투 섬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1943년 5월 21~22일에는 에투섬에 상륙한 미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일본군 함대가 도쿄만에 모여 에투 섬 쪽으로 출발했지만,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1943년 5월 25일에는 에투 섬 수비대 대부분의 일본군 주력부대가 항복했다. 1943년 5월 29일 잔존부대를 이끌던 야마사키 대령은 부상병들에게 청산가리를 먹게하여 죽인 뒤 잔존병력 140명에게 반자이 돌격(덴노 헤이카 반자이 하며 착검한 총을 들고 돌격하는 자살 공격)을 명령했고, 나머지 140명은 미군을 향해 반자이 돌격을 하다가 전멸당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1943년 5월 30일 에투 섬 전투는 끝이났다.

19일간 지속되었던 에투 섬 전투에서 미군 55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 2350명이 전사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알래스카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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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라비 페친님께서 쓰신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라는 책이 나왔을때 이 책을 읽어야 할까 고민했었습니다. 지난번 오세라비님이 방송에서 인터뷰한거 보고 이 책 사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오늘 주문했습니다. 솔직히 이런 책도 나와야 한다 생각하고, 충분히 그러한 부분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있고, 또 이런 비판도 수용해야한다 봅니다. 사실 전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잘 얘기를 하지도 않지만, 현재 급진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는 메갈리아나 워마드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봅니다. 물론 전 성재기 같은 답없은 여혐론자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일베를 싫어하고, 일베에서 쓰는 수준이하의 여혐단어를 굉장히 혐오합니다. 그러나 지난 혜화역 시위때 워마드와 일부 페미니스트(그게 페미니스트 전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들의 시위는 분명 도가 지났쳤죠. 그리고 이 책의 핵심은 혐오를 넘어 연대입니다. 전 이 책의 부제목에 매우 공감하는 바입니다. 이런말 한다고 해서 날 여혐론자로 모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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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

20세기 전쟁사에 있어 지배받던 식민지 세력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빛나는 승리와 독립을 쟁취한 전투가 있다. 그게 바로 1954년 프랑스군이 대패한 디엔비엔푸 전투다.

1.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날과 맞추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강대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베트남에는 중국 국민당군을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중국 국민당군은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베트남을 다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1946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하여 그 나름 베트남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협상은 쉽지 않았고 1946년 11월 북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에 있는 베트민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호치민을 체포할 뻔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프랑스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군에게도 매우 든든한 우군이 생긴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고 있던 베트민에게 식량과 무기 그리고 탄약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1950년 9월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에 희망을 얻은 베트민군은 1951년 프랑스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온갖 물자를 지원받은 프랑스군은 네이팜 폭탄으로 이에 맞섰고 1951년 베트민의 총 공세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

비록 1951년 베트민의 공세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군의 상황이 진전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자체가 정글전과 게릴라전 위주였고 따라서 프랑스군의 전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1953년 베트민군은 북부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고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뒤, 라오스까지 진격 하고자 했다. 이에 고심하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 베트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유인하여 싸우고자 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프랑스군의 준비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 병력은 물론 본국에서 지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 장비,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숫자를 다 합치면 투입병력만 16,000명, 지원 병력까지 합치면 2만 명에 육박했다. 당장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포병도 105mm 견인곡사포를 28문이나 확보했고, 심지어 전차도 경전차지만 M24 채피를 분해해서 수송기로 실어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으로 10대를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지원할 항공전력도 프랑스 공군의 F8F 베어캣을 중심으로 한 270여대를 배치했으며, 수송기도 100대를 확보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2개 대대규모의 공수부대(제6식민지공수대대(6 BPC),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현지공수강하에 성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순식간에 전체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데 성공했으며, 즉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지킬 요새를 건축했고,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3. 디엔비엔푸 전투 시작과 승리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가,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민군의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프랑스는 병력의 열세와 보급의 문제를 압도적 화력과 항공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베트민군은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모아놓고 있었다.

베트민의 보 웅우옌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은 이미 프랑스가 결전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고 전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투입을 파악하자 3개 사단을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다수의 병력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 병력들은 중기관총, 대공포, 야포 등을 손수 인력으로 옮기거나 혹은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정상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설치를 하는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줬다. 당시 베트민 육군은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의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는데 산악이동중에 타이어가 손상되면 헝겊을 말아 타이어대신 사용했다.

프랑스군이 투입된 지 약 2개월이 지나고 1954년 1월말이 되자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의 배치를 파악할 목적으로 간헐적으로 포병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프랑스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민군은 약 5만 명의 대군을 집결하는 동안 섣부른 공격을 삼갔고, 마침내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의 상황을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의 4배에 달하는 포병과 방공 전력을 투입하였다.

1954년 3월 13일부터 베트민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압도적 포병 화력에 의해 프랑스군의 북동쪽 전초진지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다음날에도 압도적인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의 파상공세가 정예 제7알제리 척후병 연대 5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북쪽 진지에 가해졌고, 이 진지는 이틀만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북쪽의 고지대를 장악한 베트민군은 비행장에 정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비행장이 폐쇄되자 이제 프랑스군의 항공지원은 낙하산을 통해서만 가능해졌다. 한편 이렇게 프랑스군의 진지 2군데가 차례로 함락되자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베트남인들로 이뤄진 징병군이 다음날 자욱한 안개를 틈타 항복해 왔고, 이들이 지키고 있던 옆 진지마저 베트민에게 넘어갔다.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 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그러나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많아서 요새의 화력으로 대응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

전투 개시 며칠 만에 북쪽의 3개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갔고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진지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 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본진 주변의 개활지에서 공세를 퍼붓느라 1주일간 많은 인명피해를 본 베트민군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참호를 파면서 접근해 왔고, 이후 약 1개월간의 전투는 제 1차 세계대전 시대의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베트민 측은 뚜렷한 성과 없이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 역시 보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참호전에 익숙하지 못한 지휘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 말 베트민은 서북쪽 진지 일부를 점거하고 비행장 영역 대부분에 화력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낙하산 공수조차도 착륙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5월로 넘어가자 베트민은 카츄샤 다연장로켓마저 구해와서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TOT 사격을 통해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면서 저항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막바지인 5월 6일에는 베트민이 맹랑한 심리전까지 벌였다.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래였다. 결국 5월 7일 저녁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에게 항복했다.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로써 끝이 났다.

4.결론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8년간의 전쟁에서 약 7만 명이 전사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난 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함으로써 8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이 났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지 지배를 받던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전투이자 식민지 지배를 받는 나라가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투였다. 이런 저항정신을 가진 베트남이었기에 미국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 문헌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2010)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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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알아두어야합니다 2018-08-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엔비엔푸는 마오쩌둥이 사단급에 해당하는 최신무기를
공짜로 제공해주어서 가능한것이었지
그 이전에는 숫제 나무몽둥이로 프랑스 몰아내잔 꼴밖에 안되었음

NamGiKim 2018-08-2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후에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될넘들은 그 당시 프랑스에 부역했죠. 호치민과 지압같은 사람들은 프랑스에 맞서 싸울때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하도록 전비 70%를 댄 것도 미국이었고, 어쨌든 이겨서 몰아낸거니 대단한거지. 난 적어도 그렇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