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이승만 별장에 있는 이승만 흉상)

 

지난 2015년 박근혜 정권은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역사관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국정 교과서를 추진했었다. 국정 교과서를 추진한 박근혜 정권은 소위 좌파 역사관따위를 운운하며,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를 산업화와 근대화의 아버지로 떠받드는 동시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을 소위 건국의 아버지나 국부로 칭송했다. 박근혜 정권이 이승만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2014년과 2015년 사이에는 이승만을 찬양하는 서적들이 마구잡이로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라는 이름을 단 백년동안 출판사의 시리즈 책들은 이승만을 애국작 혹은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웠고, 미국사 전공자이자 이승만 찬양론자인 이주영 교수는 이승만 평전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렸다. 그외에도 저자 안병훈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김용삼 저자의 이승만의 네이션 빌딩’, 권혁철 외 다수저자의 이승만 깨기등의 이승만 찬양론적 서적들이 서점에 나돌았다.

(2020년 이화장을 방문한 황교안)

 

더 나아가 2016년에는 저질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이 어용매체들의 홍보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고, 이런 반공영화가 인기를 끌게 됨에 따라 소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재조명 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났었다. 심지어 자신의 와이프를 폭행했던 인물인 서세원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재조명한 독립영화까지 제작했었다. 이러한 이승만 띄우기 움직임은 독재자 박정희를 띄우려는 움직임과 맥을 같이 했다. 이것은 박근혜 정권 이전인 기업 대통령이 통치하던 이명박 때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수구세력들은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렸었다.

 

어떤 자치단체장은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을 했었고, 한 이승만 광신도 단체는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또한 친미적인 이명박 정권은 광화문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만들어 이승만과 박정희 찬양 및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며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다. 이런 움직임들은 국가적이진 않더라도 정권이 교체된 현재도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올해 2월 전 자유한국당 총리이자 미래통합당 출신의 국회의원 후보인 황교안은 과거 이승만이 살던 이화장을 찾아가 이승만의 연설 구호인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인용하면서 대통합을 이뤄내겠다라고 말을 했다. 또한 그들은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세력과 인물들에게 좌파 용공, 공산주의,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혀 수준낮은 이념공격을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이 이승만의 민낯을 폭로하는 단체는 좌파로 간주되고, 이승만에 대해 독재자라 욕하는 사람들은 종북 혹은 공산주의자가 된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 찬양은 현재 미래통합당과 같은 수구 세력들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라는 인물은 과연 존경받을 만할까?

(12회 이승만애국상 시상식, 엄마부대 주옥순도 보인다.)

 

우리들에게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이승만은 사실 독립운동가였지만, 그의 미주망명시절의 행적은 독립운동보다는 오히려 친일적인 언행이 적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일본이 낡은 조선을 바꾸었다며 현재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친일파이자 미제국주의자인 스티븐슨을 암살했을 때, 기독교 신자를 핑계로 변호를 거부했던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1932년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가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단행했을 때, 이것을 테러행위라고 하며 주제넘게 비난했었다. 또한 대힌민국 임시정부 초대 총령을 지냈던 그는 독립운동 진영을 분열시켰고, 그 결과 탄핵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에도 그의 악행은 끊이지 않아,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분단 정부를 수립했고, 제주4.3 항쟁과 여순 항쟁을 진압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최소 30만에서 많게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무차별 학살당했고, 방산비리로 자국 군인 10만 명을 아사시키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는 노욕에 찌들어 독재 권력을 확립했고,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을 사법살인 했으며 3.15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시민학생에게 발포하여 200명을 죽이고 6천 명 이상을 부상케 만든 독재자였다.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2015년 소위 대한민국 정체성을 찾겠다고 하며 일각에서는 이런 극우반공주의적 서적들을 대량으로 출판했었다.)

 

이승만은 사회의 정의를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짓밟았다. 1949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장경근 휘하의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해체했고, 고문왕으로 유명한 친일파 노덕술과 같은 악질들을 반공애국투사로 치하하며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애국자로 둔갑시켰다. 그 결과 대한민국 사회는 친일파를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한 사회가 됐다. 이렇게 무수히 악행을 저지른 이승만을 소위 수구세력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묘사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들의 뿌리가 바로 친일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치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아니 바로 이런 소리와 주장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원론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임시정부가 창설되던 해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명시되어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과 이승만을 홍보하는 어떤 유튜브 영상)

 

설사 1948년 건국설을 빈말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민중의 염원이 아니었다. 해방 후 민중의 대다수는 미국식 자유주의가 아닌 사회주의나 적어도 자유주의보다 나은 체제를 원했다. 즉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런 민중의 염원과 미군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동원하여 노동자 농민들을 패죽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했다. 몽양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남북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했었고, 비록 늦은 선택이었지만 임시정부의 주석인 백범 김구도 남북협상에 참가했었다. 따라서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1948년 건국은 민중의 염원도, 민중을 생각하는 체제도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과오가 있는 인물임에도 한국에서는 이승만을 찬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2020년인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나 미래통합당과 같은 수구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승만의 악행에 대해 교육에서 깊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의 무수한 악행들을 보다 정확히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이승만 악행사라는 이름으로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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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 3판 노동자 교양문고 1
비만 아자드 지음, 채만수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19911225일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사건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미국과 더불어 냉전 시대를 장식하던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 연방이 15개의 국가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련이 내세운 사회주의가 끝나는 것으로 민중들에게 인식되었다. 네오콘적 사고를 가진 일본계 미국인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다가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 진영의 주도로 큰 전쟁이나 대립 없이 평화를 이어나가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서 더 이상의 체제 발달 없이 사회가 유지될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폭력성이 들어나는 망언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소련 연방의 해체는 사회주의가 실패 혹은 패배하고, 자본주의 미국이 성공 혹은 승리한 사건 내지는 역사로 간주됐다. 이것은 대한민국 386 운동권에게도 해당이 되는 얘기였고, 소련 연방이 해체되는 모습을 본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방향으로 수정하는 쪽을 택했었다. 아주 극단적으로는 사회주의에서 반공주의로 복귀하는 반동의 길을 걷는 이들도 분명 적잖게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트로츠키주의를 일부 수정한 영국의 토니 클리프식 이데올로기를 추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소련의 해체는 많은 이들에게 사상적 변화를 주었고, 그런 변화는 아주 나쁜 의미에선 반동주의나 수정주의로 회귀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는 소련의 해체를 직접 보지 못하거나, 해체 과정을 겪던 당시에는 그걸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을 젊은 세대들에게도 그저 막연히 사회주의 그 자체를 실패의 역사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미제국주의의 교만한 정치사회 공작의 영향도 분명히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선전을 통해 주장하고 세뇌시키는 것과는 달리 소련은 쉽게 해체될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냉전시기의 소련은 미국 다음으로 강한 군사력을 유지했고,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기도 했으며,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 바만 아자드가 집필한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Heroic Struggle! Bitter Defeat)’는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서방측 자료와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증명한다.

 

소련의 흥망과 해체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소련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천재적인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과 볼셰비키당의 지도아래 1917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했다. 이 혁명은 러시아 제국이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일어났고,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과 볼셰비키는 각종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다. 레닌의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는 191814개의 제국주의 연합군과 차르 체제를 복원하려는 반혁명 군대의 군사적 공격으로 내전에 직면하게 됐고,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혁명 지도부는 신경제정책으로 경기를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영향으로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 상황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당내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게 된다. 스탈린은 기존의 신경제정책을 포기하고, 급진적 공업화 노선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공업화 노선으로 소련은 경제 규모로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됐고, 군현대화를 통해 군사강국이 되었으며, 1941년 나치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투쟁을 통해 파시즘을 무찌르고 전 세계를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치른 피해를 전후복구를 통해 회복하고 1950년대에는 미제국주의와 견줄 수 있는 힘을 길렀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정권을 잡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하며, 일종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 했지만, 스탈린에 대한 감성적인 비판에만 치중했던 나머지 중공업 정책에서 지나치게 경공업과 소비를 중시하는 노선으로 갔다. 정치와 경제적으로 수정하는 방향인 수정주의를 택한 흐루쇼프의 노선은 결과적으로 소련 내의 빈부격차와 낮은 경제 성장률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그래도 흐루쇼프의 시대는 전후복구의 혜택을 받아서 1957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를 탄생시켰고,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탄생시키는 고무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했었다.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적 노선은 결과적으로 미국과의 경쟁에서 해오던 군사경쟁의 문제점을 해결치 못했다. 그리고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 지도부는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포하고,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포기하거나 유보하려는 쪽으로 노선을 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가지고 있던 내부의 문제점은 사라지지 않았고, 외부적으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그 시기 소련은 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구조에 필요한 변화를 가하고 그 객관적 조건에 조응하는 사회경제적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그 성장과 발전에 의해서 야기되는 주기적인 위기를 또한 어떻게든 극복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의 소련은 아니었다. 1980년대 브레즈네프 이후 안드로포프가 소련 내부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소위 인간의 얼굴을 했다고 알려진 고르바초프는 그런 내부 문제 해결을 얘기하며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행한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이 추구해오던 사회주의 그 자체에 대한 포기를 뜻했다. 이것은 결국 사회주의 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정과 일탈이 결과적으로는 보리스 옐친이라는 반혁명적 반동주의로 이어졌고, 1991년에 이르러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해체를 불러온 것이다.

 

소련 해체 원인에는 분명 내부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런 내부적인 해체원인은 흐루쇼프 때부터 점차 생기기 시작했고, 브레즈네프 지도부에서도 생겨났으며, 1980년대 고르바초프에 와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는 결국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옐친의 반동주의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책 저자 바만 아자드는 이러한 내부적인 문제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며, 이것은 소련 지도부가 정책의 방향만 잘 잡았다면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자드의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게 필자에게 다가왔다. 그는 소련 사회주의의 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회주의의 위기는 성장의 위기였지 실패의 위기가 아니었다. 그 발전의 각 단계에서 사회주의는 계속적인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서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사회적·경제적 생산관계를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성장의 위기를 사회적·정치적인 위기의 객관적인 장으로 바꾼 것은 쏘련공산당의 주체적인 오류와, 사회주의 내부에서 새롭게 발전한 생산력에 맞추어 생산관계를 재조정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행동의 결여였다.”

 

출처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173

 

소련 해체 원인은 비단 내부적인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문제도 분명히 작용했다. 저자 바만 아자드는 냉전시기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해체시키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냉전 기간 중에 미국 정부는 수만 명의 스파이를 고용하여 스파이 활동과 기타 대소련 파괴활동을 벌이는 데에 연간 150억 달러나 사용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 미국은 소련의 경제성장의 감속을 틈타 제국주의의 반사회주의 선전 공세 및 파괴공작과 더불어, 위기를 심화시키고 그 위기를 정치적 수준으로까지 부상시키는 물질적인 기초를 창출했다.

 

소련은 분명히 내부적인 문제와 내부적인 문제의 충돌로 인하여 해체됐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사회주의의 실패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항상 무시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소련 인민이 소련 해체를 바라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19913월 소련 연방 존속에 관한 국민 투표를 전국적으로 실시했었다. 물론 아르메니아와 발트3(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몰도바는 참여를 거부했기에 그곳에선 투표가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소련에서 있던 이 전국적인 투표의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득표율 80%를 보였던 이 투표에서 77.4%가 소련 연방의 유지를 찬성했다. 그리고 연방 해체 이후인 현 러시아에서도 70% 이상의 러시아 인민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소련 연방의 해체를 아쉬워 한다는 점은 소련 연방 해체가 결코 민중의 염원에 의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이 책을 통해 소련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바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제시한 복지와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개념이다. 소련이라는 나라 자체가 아래서 부터의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소련 체제는 민중에게 높은 복지 제도를 제공했다. 이러한 복지 제도는 스탈린이 서방의 기준으로 연 12~14%의 성장을 보일시기 부터 제공된 것이었다. 1928년에서 1956년까지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연평균 12.7%나 성장하여 1928년의 770%나 되는 수준에 도달했다. 국민총생산은 연률 15% 이상이나 성장했고, 문맹은 일소되었으며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또한 파괴적인 파시스트와의 전쟁 이후에도 소련은 소비재의 생산을 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연 5.8%의 비율로 소비재 생산이 확대되었으며, 1947년엔 전시에 실행하던 배급제를 폐지하는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에서 소위 수정주의로 불리던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도 평균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이것은 미국의 연 경제 성장률 보다 두 배나 높은 수치였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일어났던 독소전쟁에서 소련은 4년간의 투쟁 끝에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때 소련이 치른 과정은 참으로 끔찍했다. 2700만이나 되는 소련 사람이 전쟁으로 죽었고, 소련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의 1710개 도시와 7만 곳 이상의 농촌마을이 나치 독일군에게 약탈당하고 불탔다. 32천 곳의 공업설비와 65천 킬로미터와 철도가 파괴되고, 98천 개의 협동조합과 5천 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나 농업기계 창고가 약탈당했으며, 수만 개의 병원, 학교, 예술학교 고등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의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6천억 루블이나 됐다. 즉 이런 상태에서 소련은 위에 상술했듯이 전후복구를 했고, 1972년까지 평균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으며, 이런 상황에서도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인 필수품을 공급한다고 하는 중대한 책임 즉 자본주의 국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책임을 소련은 항상 책임지고 있었다. 즉 이러한 상황에서도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책임을 수행하며 군비확산을 통해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해나갔다. 이것만 보더라도 소련이라는 국가가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날 정도로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만 아자드의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를 통해 필자는 소련이라는 국가의 강력함과 그들이 추구하고 또는 실천했던 너무나 소중한 인간적 가치를 감동적으로 알 수 있었다. 1991년의 소련 해체를 보고 사회주의 그 자체를 실패한 사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지금도 너무나 많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사회주의 그 자체를 실패로 보는 사람들 중엔 오로지 반공주의라는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틀에 갇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수준 낮은 반공주의자들이 분명 많지만, 소위 진보를 추구하는 이들 중에도 적잖게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사회주의는 실패하지도 않았고, 분명히 존재했으며, 소련 사회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많이 실현했다라고 말이다.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자유주의자 및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 분자를 포함한 많은 선의의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는 이론상으로는 대단히 좋지만, 현실에서 실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이러한 주장은 ‘80년간의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라는 명제로부터 겨우 한 걸음 논리적으로 전진하는 것인데, 그것도 이 명제의 제안자들은 결코 내딛으려 하지 않을지 모르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패배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내딛으려고 하는 그러한 한 걸음이다. 이야말로 그러한 주장의 뒤에 잠복해 있는 궁극적인 위험인 것이다.

 

그러나 ‘80년간의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라는 명제를 열렬히 신봉하는 계급적 적들은 결코 공상가들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현실을 아주 명료하게 파악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환멸에 빠진 새로운 공상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과거에 사회주의가 존재했음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회주의가 미래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저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과게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을 근로인민이 믿고, 그리고 다름 아니라 현실에서의 그 존재 자체가 사회주의의 피할 수 없는 고유한 결함즉 자본주의 자체보다 훨씬 더 나쁘고, 그리하여 어떠한 미래도 없는 결함을 증명해왔다고 믿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다.”

 

출처 :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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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친일로 변절하게 되는 이들이 많아졌다. 1930년대 중후반부부터 한반도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물적수탈에 이어 이때부터는 지원병제ㆍ국민정신총동원령 등 인적 수탈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4월 일본이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24살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혼과 연령이 초과되어 입학이 어렵게 되자 ‘일본인으로써 부끄럽지 않게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습니다!’라는 혈서를 써 입학했다. 그가 바로 소위 국내 수구세력들이 황제나 신을 다루듯이 모시는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다.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30년대 교사생활을 하다가 일본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형 박상희는 동아일보 선산지국장 등을 지낸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성향의 지역 엘리트였지만, 자신의 형과는 다르게 박정희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 당시 일본 육사는 침략전쟁의 기간장교를 육성하는 기관이었고, 박정희가 지원한 만주군관학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이 학교에 지원하면서 쓴 혈서의 내용은 친일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조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출처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p.60~61

1940년 박정희가 입교한 만주군관학교는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든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 교외 라라툰에 있었다. 당시 제2기생은 만계와 일계가 각각 240명씩 도합 480명이었고, 이중 조선인은 박정희를 포함하여 모두 11명이었다. 그리고 이 만주군관학교 출신 중 이주일ㆍ김동하ㆍ윤태일ㆍ박임항ㆍ방원철 등 5명이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신진군관학교 예과과정에 들어간 박정희는 제3련 제3구대에 소속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3월에 졸업했다. 당시 만선일보에 실렸던 기사를 보면 다카키 마사오라고 불리는 인물이 240명의 졸업생 중에서 수석졸업의 우수성을 보였던 것으로 나온다. 그 다카키 마사오가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있으면서 1936년 2.26 사건에 가담했다가 만주군으로 밀려난 일본인 장교 간노 히로시 소령과 만났었다. 2.26 사건이란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황도파인 노나카 시로 대위와 청년 장교들이 14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상관저와 경시청 등 주요 관청을 습격하여 점거했던 사건이었다. 즉 박정희는 이런 2.26 사건의 주모자랑 만나 큰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나중에 1961년 5.16 쿠데타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튼 당시 만주군관학교 우등생이었던 박정희는 그 특전으로 1942년 10월 도쿄 교외에 자리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의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꾸었다. 두 번이나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 도쿄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본과 2년 과정을 수료하면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그가 졸업할 때는 3등이란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이로 인해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육군대신상을 수상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견습사관으로 임관되어 소만 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됨으로써, 2개월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7월에서 8월까지 박정희가 속해 있던 부대는 일본군과 합동으로 중국 팔로군을 토벌하는 일에 나섰고, 박정희도 그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중국의 팔로군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중국공산등 주력군이었고, 이들 중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팔로군에 합류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분명한건 중국의 팔로군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항일군이었고, 조선 청년들 또한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팔로군에서 활약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정희는 그들을 토벌하는 일본군이었다. 심지어 국제언론인 문명자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을 인터뷰 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라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 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출처 : 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 p.71

 

당시 일본군으로 글려간 조선인 학병이나 징용군 가운데에는 탈주하여 항일군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항일군대를 토벌하는데 열정을 다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하더라도, 그는 명백히 친일 행위를 한 것이나 다름 없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4년 중국 팔로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박정희는 승승장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7월 그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보병 8단 예하 부대와 둬룬으로 진출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0일부터 이동을 개시항려 8월 17일 싱룽에 집결했다. 그러나 독소전쟁에서 단련이 된 소련군은 8월 9일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공격한 이래로 1주일 만에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를 궤멸시켰고, 박정희의 군대는 소련군과 교전을 치르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박정희는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이래로부터 1945년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서의 삶을 보냈다. 그는 혈서를 써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걸 성취해냈다. 또한 1944년부터는 중국 항일군대인 팔로군을 토벌함으로써, 친일행각을 보였다. 따라서 박정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 낸 친일 인명 사전에 나오듯이 명백한 친일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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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2019년 남미에서 가장 긴 영토를 자랑하는 국가 칠레는 대규모 항의시위에 휩싸였다. 수많은 칠레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였고, 그 시위는 2020년인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며 계속되고 있다. 칠레는 부의 불평등이 극심한 나라다. 유엔 중남미ㆍ카리브경제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가 전체 국가 부의 26.5%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가 차지하는 부는 전체의 2.1%에 불과할 정도로 칠레의 빈부격차 문제는 심각하다. 현재 칠레의 최저임금이 한국 돈으로 49만원 정도이지만, 민중의 53%62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있고 231만원 이상을 버는 샐러리맨은 칠레 인구 전체의 6.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다 대학 등록금은 비싸고 의료보험과 약값도 비싸기에 일반 민중의 부담은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칠레의 상류 계급들과 기업들은 엄청난 이윤축적을 하고 있기에, 칠레 민중들은 이에 분노하여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빈부격차와 기업의 착취적 이윤창출로 인하여 민중의 불만이 극심한 칠레에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사회주의자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적이 있다. 그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이 된 이후 칠레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가 바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세계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살바도르 아옌데는 참으로 매력적인 생애를 가진 인물이다. 1908년 칠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쿠바 혁명가 체게바라처럼 의대에 입학했고, 군복무와 의대시절의 경험 그리고 각종 반정부 시위를 통해 사회 비판적 의식을 길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칠레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쳤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부터는 칠레의 상원의원을 지냈다. 칠레 사회당에서 정치경력을 쌓은 그는 3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지만, 1952년과 1964년 대선에선 칠레 좌파계열의 분열과 보수진영의 방해공작으로 패배했었다. 1970년 그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칠레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그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칠레에서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을 실행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폭등하던 물가인상률을 30%대에서 15% 이하로 감소시켰다. 전 정부에서 3%도 이루지 못했던 국내총생산 성장률을 약 8% 이상까지 치솟게 했고,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다.

 

초기 아옌데의 정책으로 칠레 경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호황을 누렸고, 수많은 이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정책이었다. 따라서 아옌데는 많은 부분에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진보적인 조치들을 단행해 나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바로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반공의식을 가진 미국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 그리고 사회주의에 불만을 품은 우익 세력들이었다.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되자 CIA를 이용하여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들에게 부역하는 세력은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증권거래소, TV 방송국과 철도, 공항 유류 저장 시설로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러 행위를 일삼는 이들에게 자금을 댄 것은 역시 미국과 CIA였다.

 

결국 미국은 1973년 우익 출신 군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이용하여 군사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국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도왔고, 수도 산티아고는 피바다가 되었다. 피노체트 휘하의 반혁명 세력들은 아옌데가 있던 대통령궁을 비행기로 폭격하고 탱크를 앞세운 군대를 보내 아옌데 측 군대를 진압했다. 아옌데 또한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AK-47 소총을 들고 반혁명 군대와 총격전을 벌였지만,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됐다. 197391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아옌데는 반혁명 군대와의 대치속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중 일부를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겁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긑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선 안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검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36에서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일부 발췌

 

아옌데가 죽고 난 이후 칠레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피노체트와 그의 주구들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새 수십만 명이 체포, 구금됐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병사들은 총살되었으며,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은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살해됐다. 칠레 좌파 정당의 평당원이나 노동조합 조합원도 탄압의 대상이 됐다. 많은 이들이 살해됐고, 이들 중 어린이 수십 명도 고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살해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 보복을 가했다. 군부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더 나은 미래와 이상적 사회를 꿈꾸던 수천 명의 이름 없는 이들도 삶을 마감했다. 피노체트가 아옌데의 유산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이 축출됐다. 또한, 그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이렇게 피노체트는 친미주의를 유지하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피노체트부터 시작된 칠레의 정부는 무능했고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칠레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초과이윤을 위한 소수 자본가들의 극심한 민중 착취 체제다.

 

칠레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극심한 불만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피노체트 정권은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남긴 유산을 지우려 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칠레 사회에 폭발적으로 나타나면서 아옌데는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칠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존재는 미국이라는 악랄한 제국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정권을 어떻게 파멸 시킬 수 있는지도 보여주기도 한다. 아옌데의 비극적 죽음과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악랄함과 사악함이 칠레를 어떤 비극으로 몰고 갖는지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옌데의 존재는 사회주의자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비록 아옌데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로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지만, 사회주의자가 민중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았을 때 가지고 올 변화가 무엇인지 집권 기간 3년을 통해 보여줬다. 그는 칠레 인민들에게 안정적인 노후연금과 질높은 교육, 외세의 기업적 착취 및 인권유린 종결,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질높은 소비재 보급을 추구했고, 실제로 짧은 기간에 그걸 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와 칠레 우익 부르주아 계층의 도움 없이 이룩한 아옌데의 업적이었다. 아옌데가 추구했던 정신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누려야할 당연한 인권이기도 하다.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가 집필한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는 혁명가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민중의 인권과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명저다.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사회주의적 열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 글 앞부분에서 상술했듯이 현재 칠레는 1973년 피노체트가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적 내부 모순이 극대화된 사회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아옌데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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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월간 미제국주의 역사를 연재하며 참고한 참고문헌들 올립니다.  

미국사, 이주영, 대한교과서, 1997
미국사(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09),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있는책, 2015
미국사 산책 시리즈,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0...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I II III, 앨런 브링클리, 황혜성, 휴머니스트, 2011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 손세호, 랜덤하우스코리아, 2011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II, 올리버 스톤, 이광일, 들녘, 2015
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유종선, 가람기획, 2012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상), 황성환, 민플러스, 2018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임승수 문경환 (외), 시대의창, 2008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C. 데이비스, 이순호, 책과함께, 2004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노엄 촘스키, 김보경, 한울(한울아카데미), 2007
하워드 진의 만화로 보는 미국사, 하워드 진, 송민경, 다른, 2013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래리 고닉, 노승영, 궁리, 2018
전쟁 국가의 탄생, 레이첼 매도, 박중서, 갈라파고스, 2019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 정소영, 2018
미국 민중사 I II, 하워드 진, 유강은, 이후, 2008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 김영진, 추수밭, 2008
전쟁과 기독교, 김상구, 책과나무, 2013
현대 미국의 이해, Russell Duncan, Joseph Goddard, 민병오, 명인문화사, 2015
이현상 평전, 안재성, 실천문학사, 2013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2017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정병선, 책갈피, 2004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 2010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사, 황재연, 군사연구, 2017
아프가니스탄 왜?, 권희석, 청아출판사, 2017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천경록, 책갈피, 2004
좌파세계사, 닐 포크너, 이윤정, 엑스오북스, 2016
미국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역사, 조성일, 소이연, 2013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 유강은, 이후, 2016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한겨레출판, 2015
진실이 밝혀지다, 마리오소사, 노사과연 편집부, 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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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96 2020-04-01 0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NamGiKim 2020-07-20 13:54   좋아요 0 | URL
잘 참고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