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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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 정몽준 중앙선대위위원장의 유세말씀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계룡시민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그동안 보고 싶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계룡시는 작은 도시이지만 대한민국 전체를 지키는 튼튼한 안보도시입니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튼튼히 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정당은 한나라당이 최고인 것을 알고계십니까. 제가 20여년 전에 이 계룡시가 처음 됐을 때 13, 14대 국회의원으로서 제가 국방위원회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계룡시를 자주 왔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와서 계룡시민 여러분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까 아주 반갑습니다. 계룡시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그저께 저녁에 우리나라 대표축구팀이 일본과 축구시합을 한 것을 보셨습니까. 우리 선수들이 그날 참 잘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박지성, 박주영 선수가 잘했지 않습니까. 우리 계룡시 발전을 위한 박지성과 박주영은 이기원 시장, 박해춘 도지사가 아니겠습니까. 박지성, 박주영, 박해춘 다 박씨인 것을 꼭 기억하세요. 무조건 박씨에 꽉꽉 누르면 됩니다. 우리 박해춘 도지사 후보님을 자세히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믿음직합니까. 별명도 코뿔소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추진력에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LG카드, 국민연금, 우리은행 등 문제가 있는 곳에 가서 그 문제를 코뿔소처럼 전부 해결해서 붙은 별명인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박해춘 후보님은 경제를 튼튼히 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정당인 우리 한나라당이 자랑스럽게 충남도민 여러분들에게 제시한 후보입니다. 우리 박해춘 후보와 경쟁하는 다른 후보는 어떻습니까. 이곳에서 나온 민주당의 안희정 후보는 우리 한나라당 같았으면 공천신청할 자격도 없는 후보가 아니겠습니까. 그다음 선진당에서 나온 박상돈 후보는 지난 17대 때 열린우리당에 있다가 지금 선진당으로 갔습니다. 정당을 옮기는 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그것까지는 봐준다고 해도 열린우리당과 선진당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당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관한 인식이라든지 정당의 정책, 정당의 주요정책의 목표가 전혀 다른 정당인데 열린우리당에 갔다가 이번에 선진당으로 간 것은 정말 이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이 지금 대전에서 왔는데 대전에서 선진당의 시장후보로 나온 후보가 염홍철 후보입니다. 그 염후보라는 분이 선진당의 후보인데 불과 2년 전에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자유선진당을 심판하자고 했던 사람입니다. 심판 받아야할 정당이 선진당이라면 이런 정당의 후보로 나온 사람을 찍으면 안 됩니다. 제가 대전, 충남에 와서 들은 얘기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얘기를 가족분들에게도 꼭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우리나라 영화배우들이 있습니다. 송강호, 이병헌, 또 키 크고 잘생긴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셋이 모여서 만든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데 제목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입니다. 대전도 그렇고 이곳 충남에 와보니까 중요한 후보가 세 명이 있는데 우리들이 볼 때는 ‘좋은 후보, 나쁜 후보, 이상한 후보’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이제 며칠 후면 여러분들의 소중한 한 표를 투표하시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인정에 끌려서 동정에 끌려서 투표하시면 계룡과 충남의 발전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값싼 인정과 동정에 이끌려 투표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으로 4년 동안 계룡 시민, 충남 도민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받고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왕 살면서 남을 도와주면서 살아야지 우리 충남 도민 여러분들이 남의 동정이나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보니까 선진당은 ‘충남의 자존심’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충남의 망신살’이라고 이야기해야 되질 않겠습니까. 우리 이기원 시장님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 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기원 우리 시장 후보께서 어떤 길을 걸어오셨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곳 계룡 역에 KTX를 이기원 시장 후보께서 벌써 정차하도록 만든 것을 아십니까. 이곳 계룡시는 경찰청, 세무서, 교육청 이런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조금 전에 축구 선수 박지성, 박주영이 잘 한다고 했습니다. 박지성, 박주영이 어떻게 골을 넣었습니까. 그래도 수비수, 미드필더가 패스를 해주니까 골을 넣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과 박해춘 도지사 후보께서 패스를 해주면 이기원 후보가 골을 확실히 넣지 않겠습니까. 중국의 관영언론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서 ‘북한이 정말 천안함 사태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사과해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좀 늦었지만 중국이 잘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국회에서 북한이 잘못했다고 하는 결의안을 아직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앞으로 이런 것을 못하게 하는 확실한 방법은 우리 계룡시민, 충남도민,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확실히 단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계룡시민, 충남도민 여러분, 오랜만에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투표할 때 투표의 기준을 계룡시와 충남도의 미래의 발전을 보고서 투표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기원 시장, 박해춘 도지사 후보와 함께 우리 한나라당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고맙습니다. 좋은 후보, 나쁜 후보, 이상한 후보, 좋은 후보에 확실하게 투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ㅇ 한편, 박해춘 충남도지사 후보는 “저는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전문가이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경제 하나는 자신이 있다. 서울보다 잘 사는 서민충남, 일등충남을 만들겠다. 이완구 지사가 추진해 오던 일을 차질 없이 중단 없이 추진하겠다.”라고 지지를 호소하였다. 

 

2010.  5.   27
한  나  라  당   대  변  인  실 


  조금 짜증나고 길지만 인용해 봤다. 출처는 알다시피 한나라당 대변인실이니 나중에 딴 말 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기초 단체장 선거때 한나라당의 공략은 위에서 보듯이 "여러분, 잘 살게 해 드리겠습니다."였다. 도지사 후보가 한말은 더 가관이다. “저는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전문가이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경제 하나는 자신이 있다. 서울보다 잘 사는 서민충남, 일등충남을 만들겠다. 이완구 지사가 추진해 오던 일을 차질 없이 중단 없이 추진하겠다.” 지금 정치를 할 기초 단체장을 뽑자는 것인데 스스로 자기는 정치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한다. 경제 하나는 자신있다고 한다. 서울보다 잘사는 충남을 만들 자신이 있다고 한다. 이런걸 일컬어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박" 

 

  정몽준 의원이 한 말은 이것뿐 아니다. 정확하게 잘 기억이 안나지만 아마 검색해 보면 나올 것이다.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대강 옮겨보자면 이런 것이다. "여러분, 물류 창고 필요하시죠?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대형 냉장고 필요하시죠?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공략을 가지고 자기들을 뽑아달라는 것인지 모르겠고, 어덯게 이런 말을 듣고 지방 자치단체장을 뽑는지 모르겠다. 내용의 요지는 너무 간단하지 않는가? "잘 먹고 잘 살게 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찍어주세요." 

 

  비단 기초 단체장 선거만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 외신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한민국의 대선은 정치문제는 모조리 외면하고 오직 경제 문제만을 가지고 대통령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경제적인 부유를 의미하는가?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부유하게 산다는 것이라면 뭔가 대단히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이러한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돌을 던지는 책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벌어졌던 인문학 코스를 소개하는 책이다.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 하루하루 벌어 먹기도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대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편견이다. 그렇지만 얼 쇼리스는 이러한 편견에 당당히 짱돌을 던진다.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면 행복할 수 있는가? 한국 정치인들은 Yes라고 하는 말에 쇼리스는 No라고 말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인간을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끌어 올리는 것은 자기가 정치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쇼리스의 기본 생각이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나에게 소개시켜 준 것은  지식 e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빈곤층에게 소크라테스의 말, 프라톤의 말,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은 정말 깜깜한 밤에 아랫도리 벗은 사람들에게 건전지 떨어진 플래쉬하나 주고 저기가 너희들의 목적지라고 가르쳐 주는 삭구라에 가깝다. 빈곤의 포위망에 사로잡혀,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도덕적으로도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이해되는 이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상기시켜주는 인문학이란 어찌 보면 말도 안되는 조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라가 아니다. 오히려 구라같기에 더 진실에 가깝다.  

 

  쇼리스의 실험은 이 진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직장도 없고, 패배감에 사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우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간다.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자각한다. 그리고 미래를 꿈꾼다.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의 제목은 바로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 신화에 보면 사람을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희망이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희망을 고문이라고도 말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 사람들이 미래는 무슨 미래며, 꿈은 무슨 꿈이냐, 헛소리 말아라 말한다. 그나마 있던 희망도 꺾는다. 경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잘 먹고 잘 살면 장땡이라 말한다. 그러나 정말 장땡일까?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그런 말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경제적인 부유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지난 2년간 경험했다. 

 

  한국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실시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서 이 책을 번역했다고도 들었다. 궁금하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과정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그리고 얼마나 국내 실정에 맞게 변형 시켰는지? 

 

  학생때의 일이다. 써클 후배들을 앉혀놓고 공산당 선언을 읽혔다. 써클 자체가 노동 운동을 하는 PD 계열인지라 내 생각에 공산당 선언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왜 이런 것을 읽느냐고 불만들이 많았다. 사유, 변유를 가르치고 사구체를 읽혀도 마찬가지다. 간신히 1~2명 읽어 올 뿐이다. T(우리는 써클 세미나를 이렇게 불렀다.)도 간신히 간신히 유지하다가 2년 뒤에 사라졌다. 내가 여러가지 일로 써클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포기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마지막가지 견뎠던 사람들을 아직도 만나고 있으며, 그들을 만나면 치열한 토론의 자리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은 목숨걸고 투표를 한다. 물론 날당을 찍는 사람은 없다. 

 

  당시에는 쓸데없다고 투덜거리던 인문학이지만, 그것들이 오늘날 우리의 정신과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요즘 너무 쓸모 있는 것들만 찾는다. 여기서 말하는 쓸모는 돈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들이기 쉽다. 인문학의 위기와 맞물려 사회의 위기, 도덕과 가치관의 붕괴가 일어났음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도 인문학 책을 읽는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칭찬하고 싶다. 지금은 비록 티가 나지 않지만 그것이 희망의 불씨가 되어서 머지않아 내 인생과 생각을 풍요롭게 할 것이며, 나를 더 인간답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잘 살게 해드리겠습니다." 흥, 엿이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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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타 2020-03-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희정같은 위선자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신지?

saint236 2020-03-19 20:25   좋아요 0 | URL
그냥 그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패스합니다
 
정치를 말하다 -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6
가라타니 고진 지음, 고아라시 구하치로 들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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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이다. 대담집이기 때문에 읽기가 수월하지만 일본의 현대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전공투가 무엇인지, 일본의 사회주의 노선이 어떻게 되는지, 68 혁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1부는 읽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한번 읽어볼만한 책인 것 같다.  

  몇년 전 한미 FTA협상 중에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뛰쳐나왔다. 촛불을 손에 들고 정부의 한미 FTA 협상안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자녀들의 건강을 걱정하며 유모차를 밀고 나온 어머니, 야자를 땡땡이 치고 거리로 나온 학생들, 등록금이 너무 과하다고 대안을 요구하는 대학생들,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하는 일반 시민들을 빨갱이의 사주를 받아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불순분자로 몰아붙이면서 떼를쓰는 떼쟁이라고 비하했다. 천민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뻘소리를 해대시는 쭈모의원을 바라보면서 정치인들의 밑바닥을 보면서 좌절했었다. 비난 나뿐만 아닐 것이다. 알라딘에서 놀고 계시는 알라디너들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좌절감에 열심히 읽기 시작했던 책이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행동"이다. 아직도 다 읽지 못해서 뭐라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이 책도 직접행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가 필요하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발칙한 빨갱이적 사고이다. 그렇지만 직접 실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기득권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확고불변한 진리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하여 이렇게 고찰한다. 

  내가 말하는 반복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자본주의에는 반복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경기순환이 그렇습니다. 공황, 불황, 호황, 공황 -. 왜 이런 순환이 존재하느냐 하면, 자본주의 경제는 발전하면서 공황과 불황을 통해 폭력적인 도태와 정리를 할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반복은 반복강박적인 것입니다.(117p)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이 주인이 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자본의 지속 가능을 위해서라면 다른 무엇도 희생할 수 있는 체제이다. 이런 체제와 사람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가 미묘하게 결합된 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체제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특성을 여러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나는 평등과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과 사유 재산 보호를, 민주주의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분배와 평등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라고 하는 서구에서도 경쟁과 분배라는 두 가지 가치관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자본주의, 시장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등 모든 정치체제는 두 가치관 사이에서 중심을 어느 정도에서 잡는가에 따라 그 형태와 추구하는 점이 달라진다. 쉽게 말해 좌냐 우냐가 여기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부분을 분명히 깨닫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가치관에서 좀더 좌측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좌측으로 옮기는 동력은 데모이다. 

  고진은 일본에 데모가 없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너무나 빠른 시기에 정체가 바뀌어 시민이 시민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국가에 흡수되어 네이션이라는 모습을 갖춘 것이 일본에서 데모가 없어진 이유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몰락을 전공투보더 더 앞에 있었던 1960년에서 찾고 있다. 안보세대든, 전공투 세대든, 이유가 어디에 있든 간에 시민의 직접행동을 막은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고진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 고진이 주목한 것은 단독자이다. 고진의 단독자 개념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존재가 아니다. 고진은 단독자를 이렇게 규정한다. 

  단독자란 홀로 있는 개인도 아니며 원자적인 상태의 개인도 아닌, 타인과 연대가 가능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다.(150p) 

  데모란 무엇인가? 데모란 단순하게 국가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데모란 단독자가 원자적 상태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다른 단독자와 연대하는 것이다. 단독자의 연대는 민의를 만들어 내고 사회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모가 없는 사회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살벌한 공간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가 아닌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하고, 친구나 동료라는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전력 투구하는 진흙밭이 우리 사회이며, 우리 교육의 현주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학생들이 촛불집회에 나선 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성숙한 시민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민주주의는 데모가 필요하다.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이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ps.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데모 없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4.19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민주화 운동을 지적한다. 일본의 지식인의 부러움을 사는 그 모습이 정작 한국에서는 빨갱이들의 선동을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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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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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사는 세상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신념이다. 그의 정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던 간에 그가 꿈구었던 것이 사람사는 세상이며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민주주의가 무엇일까?" 우연인지 몰라도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회과학 서적들이 예전에 비하여 잘 팔리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 비하면 불티나게 팔린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어떤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입소문만으로 10만부 이상을 팔아치운 책이다. 마치 80년대 선배들에게 말로만 들었던 금서를 몰래 구해 읽고 고민했다는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한동안 듬했던 사회과학의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일까?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자신들의 본분을 자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정치인들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내용을 헌법에서 밝히고 있지만 집권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 사실을 국민들이 깨닫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선거철만 다가오면 잘 살게 해주겠다, 부자 만들어 주겠다는 온갖 공략이 넘쳐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재개발이 아닌가? 우석훈씨가 이 책에서 밝히듯이 한나라당의 부동산 정책과 우경화 교육은 그들에게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인가? 아니다. 그들이 분명히 놓쳤던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에는 더 고차원적인 문제에 관심을 돌린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이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잘났다는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가? 알면서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그래도 자칭 엘리트들이라고 말하는 그들이라면 후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이 책의 핵심이다. "당신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십니까?"라는 책의 표제가 눈에 확들어 온다. 묘하게도 요즘 함게 읽고 있는 책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이다. 이 책의 원제가 "당신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십니까?"이다. 지젝, 낭시, 아감벤 등등 많은 석학들의 사상을 짧은 소논문으로 엮어 놓은 책이라 읽기에는 쉽지 않다. 너무 복잡한 부분은 건너뛰고, 이해할 만한 것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읽지만 쉽지만은 않다. 오히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다가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잠깐 곁길로 빠지자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자들이 아니라 과두정을 선호한다고 할 수가 있겠다. 소수에 의하여 사회가 지배되는, 그것도 대물림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귀족정에 가깝다고 할까?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나 정체가 어떻든간에 사람이 중심이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곳이 사람사는 세상임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집권자들은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지만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는 없다. 시장이 살아가고, 기업이 살아가고, 권력이 살아가는 자리일 뿐이다. 사람은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사회의 부속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나마 투표의 권리를 주고 있다. 그렇지만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를 두려워 하지는 않는다. 유권자는 그거 거수기 정도일뿐이다. 북한이 공격하니 1번을 찍어야 한다, 1번을 찍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이게 그들의 논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 논리에 넘어가서 무의식적으로 1번을 찍고 있다. 과거 1번을 놓지고 한나라당이 2번이 되었던 시절, 그들의 득표율이 예상에 못미쳤던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1번을 찍는 습관에 젖어서 거수기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내 대답은 아니다. 이 무슨 빨갱이식 사고냐고 비난할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다른 국가들이 피를 흘리고 많은 토론 끝에 얻은 결과를 우리는 너무 쉽게 따먹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의해 강제 이식 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본질은 사라지고, 왜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는가라는 성찰은 사라지고, 투표와 정당이라는 껍데기만 붙잡고 있다. 이러니 투표권의 소중함이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껍데기는 민주주의지만 내용은 귀족정 혹은 왕정인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이다. 지역감정을 감안하면 이상한 형태의 봉건주의는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사람사는 세상이다. 내편만이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곳이 민주주의이다. 사람이 더 철저하게 존재의미를 잃어가고 사회를 구성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해가는 시기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는다면 다른 독재국가에서처럼 우리 나라도 말로는 민주주의지만 실상은 전체주의로 흘러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들이 꼭 한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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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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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촌놈들의 제국주의! 

  이 책을 보는 내내 전혀 생각하지 못하다가 책을 덮고 서평을 스는 순간 왜 이 책이 떠올랐을까? 우석훈씨의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결론은 이거다. 한번도 식민지를 경영해보지도 못했던 한국이,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한국이, 주제 넘게도 북한을 식민지로 삼아 제국주의를 펼쳐보려 한다는 것이다. 우석훈씨는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10년을 촌놈들이 주제 넘게 제국주의를 실행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은 이러한 촌스러운 짓을 거침없이 해내고 있다고 부연한다. 

  한번도 제국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만 뒤쳐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발전의 원동력을 내부에서 찾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것도 말이 통하고 통일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포장할 수 있는 북한을 식민지화해서 찾으려고 한다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의 말 또한 이거다 저거다 구분짓는다는 촌스러움이 폴폴 뭍어나지만 말이다. 

  세계로 떠난 지식인이라는 제목을 보고 개화기에 사신들이 외국에서 문물을 배워오려고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들을 엮어 놓은 것인줄 알았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이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책은 순수하게 세계를 여행하던 조선의 관리들과 지식인들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하여 기행문을 토대로 재구성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의 공간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쌍것들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서방 세계에 대하여 다양한 태도를 취하지만 그 근본은 힘이다. 제국의 대명사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과 같은 서구의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그 감회를 솔직하게 적어 놓았기 때문에 때로는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  

  문명과 야만! 

  서방 세계를 여행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세계를 철저하게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어떤 이들은 조선은 아직 문명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기에 어떻게 하면 문명화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세심하게 살핀다. 어떤 이들은 아직 문명화하지 못한 조국 조선이 창피해서 무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본다. 문명과 야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또 그들이 그렇게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힘이다. 문명화 된다는 것은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말이요, 조선이 문명이 아니라 야만의 세계에 있다함은 조선이 강대국이 아니라 약소국이라는 말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렇게도 조국을 문명화하고 싶고 서방을 본받고 싶었던 이유는 조선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우석훈씨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떠올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정의에서 벗어난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할지라도 우리도 힘을 소유해서 한 세상 떵떵거리면서 살아보자는 것이 서방 세계를 우러러본 근대 조선의 먹물들의 속내이다. 힘을 가진 조선이 불가능해지자 지식인들이 그렇게도 쉽게 일제에 협력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문명은 힘이었던 것이다. 그 힘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편승해서 갈 수만 있다면 대동아 공영이면 어떻하며 동남아 진출이라면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역사는 "제국주의=문명"의 등식이 성립하지 않음을 증언한다. 오히려 "제국주의=야만"이라는 등식이 옳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나보다. 위의 공식을 약간 바꾸어 신봉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정의=문명, 공산주의=야만"이라는 등식을 신조처럼 신봉하고 있지 않은가? 

  "We belive God"이라는 문구가 씌여진 달러를 흔들어 보이면서 이러니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얼토당토한 말을 쏟아내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초창기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We belive God"이라는 말은 "We belive Money"라는 말을 의미한다. 순진한 사람들은 God을 하나님으로 이해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God을 Money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Money를 위해서 전력 투구한다. 얼마나 촌스럽고 천박한 짓인가? 반기독교적인 복음이 장로 대통령 시대에 기독교의 복음으로 둔갑한 것은 기독교가 본질에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미국을 다녀간 수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을 찬양하고, 시청 앞 광장에서 좌파 타도를 외치면서 영어로 기도할 때마다 내 손발은 오그라든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부터 돌아서게 만드는지 깨닫게 될 때마다 속에서 열불이 난다. 답답함을 느낀다. 국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토플과 토익 점수에 목을 매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솔직하게 말해서 쪽팔렸다. 한국 통일에 관한 박사 학위를, 민중신학 박사 학위를 미국에서 따가지고 자랑스럽게 돌아오는 사람을 볼 때마다 미쳤군 한 마디 날렸다. 영어를 잘하기 위하여 어릴 때 혀를 절개하는 수술을 시키는 부모를 볼 때마다, 원정 출산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를 볼 때마다 돌았다고 막말을 했다. 그렇지만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그냥 촌스럽군이라면서 넘어가려고 한다. 이미 많은 말을 하기에는 한국 사회가 신봉하는 "자본주의=정의=문명=남한, 북한=야만"이라는 공식이 우리를 너무 쪽팔리게 하고 촌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온통 촌스럽다. 정부도 촌스럽다. 문화부도 촌스럽다. 이런 젠장이다. 

  함께 읽을만한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우석훈), 정치교회(김지방), 추락하는 한국교회(이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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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즐거움의발견>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 - 우울한 현대인이 되찾아야 할 행복의 조건
스튜어트 브라운 & 크리스토퍼 본 지음, 윤미나 옮김, 황상민 감수 / 흐름출판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신나게 놀았다. 송골매의 노래처럼 아침부터 무여서 놀고, 저녁까지 놀았다. 조금 더 커서 외박을 해도 될 나이가 되었을 때는 밤새도록 놀았다. 시험 기간에는 시험은 쉬엄쉬엄하는 것이라 놀았고,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끝났다고 놀았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녔지만 강의실에 있었던 시간보다는 운동장에서 있었던 시간이 더 많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면 기숙사에서 축구공을 튕기면서 "공차자"그러면 여기저기에서 문이 열리면서 한발이라도 더 앞서 나오기 위해 경쟁했다. 학교 운동장이 작은 관계로 정식 축구는 못하고 6:6 혹은 7:7 정도로 미니 게임을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공을 못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다. 왜 그렇게 노는데 목숨 걸었는지, 공차는 것이 뭐라고 남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가려고 노력했는지. 학점에 그정도로 목숨 걸었으면 누구 말마따나 장학금을 탔을테지만 학점은 관심밖이었다. 그때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이나 논 사람이나 열심히 살기는 매한가지다. 왜 놀았을까? 이유가 무엇일까? 나가서 다치고, 공차다 까지고 들어오면서도 왜 그렇게 발끈하고 미친듯이 뛰었을까? 아무 이유 없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한살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진다. 왜 할까? 왜 해야하지? 이 일의 목적이 무엇이지? 목적이 뚜렷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하기 싫어진다. 그렇지만 목적이 뚜렷한 일은 일을 해야할 동기가 분명하기에 끝까지 그 일을 할 수 있고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지만 재미는 없다. 목적이 분명한 것으니 놀이가 아니라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수단을 통하여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게 일이다. 놀이는? 어떤 수단 자체가 그 일의 목적이다. 무목적성이 놀이의 특징이다. 왜 놉니까? 걍! 이 한마디면 끝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이 놀이의 목적을 찾는다. 

  이 책은 놀이는 무목적성이 그 특징이라고 말하면서도 놀이의 목적성을 찾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말을 가져다 붙인다. 서글프다. 노는 것도 목적이 있어야 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논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움이기 보다는 피해야할 타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요즘 뭐하세요? 놀아요. 청년 실업 백만 시대에 이 말만큼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자기가 왜 노는지 설명한다. 취업준비해요, 유학가려고요, 공부 더 하려고요 등등등. 그러니 놀지 못하는 참 재미없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굳이 나에게 왜 노냐고 묻는다면 사회성을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라다이언갱이라는 영화가 있다.  



  산타모니카의 소년원의 보호캄찰관 포터는 수감자들을 데리고 미식축구팀을 결성한다. 없는 예산에 어렵게 장비를 구입하고, 재소자들을 모아서 팀을 결성하고 연습하지만 연습시합을 받아주는 팀이 없다. 어렵사리 시합을 하지만 실망만을 맛볼 뿐이다. 주변의 시선은 더 싸늘하다. 그렇지만 포터는 이들을 데리고 미식축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들은 고교 미식축구 리그에 참가할 수 있게 되고 좋은 결과를 거둔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실제로 청소년들의 재범율을 낮추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미식축구도 하나의 놀이이다. 이것을 통하여 돈이 생기는 것도, 수감 기한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냥 즐겁게 노는 것이다. 남아 도는 시간과 에너지를 치고 박고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팀을 이뤄 무엇인가를 해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회성을 배운다. 자기를 희생하는 법, 어려움을 이기는 방법,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는 방법을 배운다. 사회 생활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사회성을 배운다. 놀이는 그저 즐거움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바꾼 것이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놀이의 이유이다. 

  요즘 학교마다 스포츠 팀이 하나씩은 있다. 리틀 야구단도 있고, 역도부도, 수영부도 있다. 그런데 학원 스포츠가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비춰지지 않는 것 같다. 폭행, 성폭력, 줄서기 등등 여러가지 부정이 저질러 진다. 스포츠가 놀이가 아니라 돈이요 진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의 사회성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의 순수한 놀이 욕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즐거워야할 놀이가 다른 목적을 위한 과정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즐거운 것도 일이 되어 버린다. 그냥 즐겁게 놀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책이 있다. 하나는 호이징거의 "호모 루덴스"이고 다른 하나는 마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이다. 조금은 방향이 다르치만 루트번스타인 부부의 "생각의 탄생"도 읽어 보면 이 책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송골매의 "모여라"를 들으면서 즐겁게 읽는다면 더 즐겁지 않을까? 

  나에게는 여기에 글을 쓰는게 노는 것이다. 저자가 분류한 놀이의 유형 중에 "창조자 혹은 예술가"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예전에 그렇게도 하기 싫었던 인문학 책을 읽는 것이 이젠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 이것을 통해서 학점을 더 잘받겠다는 목표가 사라지고 그저 읽고 서평을 쓰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즐거워지는 것이다. 이유? 없다. 그냥 한다. 

  놀이는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묻는다. 왜 노세요? 걍! 그저 즐길 수 있는 대상을 찾기 바란다. 창의성이나 생산성이라는 경제적인 말을 들먹이지 않을지라도 삶이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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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슬퍼요, 그쵸?
노는것에서도 목적을 찾다니...
노는게 노는게 아니라는...

저도 이렇게 알라딘에서 노는게 참 즐거워요^^

saint236 2010-06-09 09:50   좋아요 0 | URL
글쎄 말입니다. 놀이에 목적을 찾기 시작하면 놀이가 놀이가 아니라 일이 되는데 왜 그걸 모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