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캐스팅한 사람들
맥스 루케이도 지음, 오현미 옮김 / 두란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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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거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적의 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의 베이스는 성경이다. 20여년을 그렇게 재미없게 의무적으로 읽어왔던 성경을 그렇게 재미있게 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적이 있다. 

  이 책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이 캐스팅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선택했다. 그동안 비판적인 시각의 기독교 서적을 몇권 읽었던지라 이번에는 그냥 편하게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맥스 루케이도라는 이름값도 이 책을 선택하게 만든 원인이다. 책을 다 읽는데 하루 정도 걸린 것 같다. 책 내용 자체가 길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라 길어야 16페이지 정도 되는데 그렇게 22명의 인물을 모아 놓으니 그것도 꽤 분량이 된다.  

  책은 신약에 나오는 사람들과 구약에 나오는 사람들. 이렇게 2부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위하여 택하시고 사용하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택하심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날카롭지만 재미있는 시각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설교도 이만큼 재미있다면, 성경을 이만큼 재미있고 쉽게 가르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성경이 살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맥스 루케이도의 책을 열심히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독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성경을 쉽게 풀어 줄 수가 있을까?  그저 맥스 루케이도가 부럽기만 하다. 

  간만에 재미있게 부담없이 그리고 무엇인가 쭝요한 것을 깨달으면서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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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09-1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현주 목사님의 저책을 재밌게 읽은 사람이라면,저 책도 그렇 수 있다는 얘기죠?
"간만에 재미있게 부담없이 그리고 무엇인가 쭝요한 것을 깨달으면서"읽으셨다는 책,궁금한걸요~^^

saint236 2010-09-11 01:2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일단 부담이 없습니다. 재미있고요.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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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황석영의 이름값이 아깝다는 생각,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생각, 내가 왜 이 책을 샀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혹해서, 황석영이라는 이름에 혹해서 책을 샀고 일찌감치 실망했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마지막까지 독하게 읽었다. 그렇지만 책을 던지고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도대체 소설책에 몰입과 감동이 없다면 어쩌란 말이냐? 

  작가는 우리나라에 성장 소설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개밥바라기를 내 놓았다. 자기의 삶이 그대로 묻어난 자전적인 소설이고, 소설가로서의 자기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책이라 자신하는데 글쎄다. 난 왜 이 책에서 그만한 점을 찾지 못한 것일까?  

  개밥바라기는 금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잘나갈 때는 금성, 샛별이지만 찌그러져 있을 때에는 개밥바라기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밥을 다 먹고 개밥을 줄 때쯤에 밝게 빛나는 별이라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가장 늦게 지는 별,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를 지칭하는 스타가 찌그러지면 개밥바라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말인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이 개밥바라기라는 말일까? 좌충우돌 찌그러지고, 사랑의 달콤함과 이별의 아픔을 겪어보고, 산속에 들어가 자기 속으로 침잠해 보기도 하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약을 먹기도 하며, 월남으로 파병을 가기도 한다. 어찌보면 개밥바라기처럼 찌그러져 있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삶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방황을 딛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 성장 소설의 기본 플롯이요, 목적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개밥바라기라는 이름을 성장 소설이라는 이 책에 붙이는 것은 조금은 엉뚱한 일이 아닐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대위처럼 30대가 아니라 이제 막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진입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너무나 불친절하다. 각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어받아 소설을 진행하는 것이 이 책의 진행방식인데, 그 방식이 너무 산만하다. 그리고 내용도 소설인지, 아니면 사상서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오락가락 하기도 한다. 만약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내용의 1/3은 그냥 버려야 하지 않을까? 

  결정적으로 몰입이 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사람들이 하는 고민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고민이 너무나 다르다. 그 나이에는 그런거야라는 말로 치부헤 버리기에 고민의 형태가 너무 다르다. 그런데 이런 고민에 대한 경청이나, 대답이나 고민이 없다. 그냥 나는 이랬어라는 형태로 끝나는데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할아버지 세대에는 보릿고개가 있어서 밥이 없어 정말 먹고 살기 힘들었어라는 말에 고리타분함을 느끼지 않으면 라면을 먹지 왜 굶어요라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난 후 전혀 공감도 이해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것일까? 아마 황석영이라는 이름값 때문이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 책은 나에게 황석영이라는 이름값을 폭락시킨 책으로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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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단향 2011-06-07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였군요~ 너무 요란해서 읽어봤는데 진짜 별로였는데 다들 평점 만땅 이길래.. 내가 이상한걸까 생각했었는데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님의 글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글을 남기고 갑니다. ^^ 추천이요~ 꾸~욱!! ^^

saint236 2011-06-07 17:32   좋아요 0 | URL
작가의 이름값에 속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사실 별 두개도 조금 아깝기는 합니다. 한개 반 정도?
 
처음 읽는 터키사 -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터키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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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하면 생각 나는 것은? 

  터번, 콧수염, 이스탄불, 2002 월드컵 3위, 갈라타사라이, 그리고 이을용? 맞다. 6.25참전국. 칸카르데시, 코레가지. 이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최근에야 알게 된 것들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터키는 유럽에 속한 팀으로, 아시아에 속한 사우디 아라비아나 이란, 이라크보다 더 먼 나라이다. 알고 있는 것도 거의 없고, 터키를 형제국가라고 부를 때 왜 그렇게 부르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메메드2세, 콘스탄티노플 함락, 슐레이만 대제같은 민족, 인물,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들이 전부 터키 역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사도 선택으로 가르치는 마당이니 세계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드물고, 세계사라고해도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세계사에서 번두리 역사로 취급받는 터키사에 대한 입문 소개서가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간혹 터키사를 소개한다고 해도 딱딱한 학술 서적이나, 이슬람 역사처럼 중동과 이집트, 그리고 터키를 뭉뚱그려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니 터키사라는 말자체가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던 차에 나온 처음 읽는 터키사는 내 시선에 포착되기 딱 좋았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책들을 주문하면서 같이 끼워서 주문했다. 이미 주문한 로마제국 쇠망사와 갈리아 전쟁기, 내전기와 함께 읽으며 로마의 세계에 흠뻑 빠지리라 작정을 했다. 시간상으로는 가장 나중에 읽어야 하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순전히 쉽기 때문이다. "처음 읽는"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정말 쉽게 풀어 쓴 책이다. 혹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터키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터키사에 입문하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중고등학생들이 읽어도 무방하고, 초등학교 5~6학년이 읽어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15000원의 가격으로 출판된 책이지만 일반 교양 도서라는 느낌보다는 교과서같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각 단원을 편성하고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터키사를 풀고 있다. 그렇지만 140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채 300페이지가 안되는(후주와 연표를 제외하고 순수한 내용만을 계산했을 때) 적은 분량에 그것도 그림까지 곁들여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주마간산식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때문에 조금 자세한 교과서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가치는 철저하게 "처음 읽는"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것을 기억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상인들이 터키계 사람이라는 것도, 돌궐이 사실을 투르크라는 그들의 이름을 얕잡아 본 중국식 명칭이라는 것도, 애거서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도 실은 터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위에서도 밝혔듯이 주어진 분량에 비해 너무 긴 세월을 다루기 때문에 설명이 간략하다는 점(물론 교과서에 비하면 엄청나게 자세한 것이겠지만)과 터키사를 너무 미화했다는 점이다. 첫번째 예는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과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이다. 단 몇줄로 표시되어 있지만 예루살렘 정복은 1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이고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은 3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이다. 시간상으로 100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것을 단 몇줄로 표시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장구한 시간을 300페이지에 담으려 하다 보니 발생한 문제이나 연표를 더 자세하게 기록해 주었다면 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서구 중심의 세계사관에서 벗어나 터키를 중심으로 쓰다 보니 그들이 벌인 정복 전쟁의 잔인함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십자군이 터키군에 대하여 한 것만큼 터키군도 십자군에 대하여, 그리고 유럽인에 대하여 잔인한 행동을 취했다. 터키에 대항하던 성요한 기사단의 모토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음을 기억한다면 터키 또한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넓은 포용력을 보였다고 말하지만 이교도에 대하여 특별 인두세를 물렸다는 사실은 포용력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예니체리 군단 또한 마찬가지다. 예니체리 군단이라는 것 자체가 기독교도 소년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내어 개종시킨 것임을 기억한다면 터키사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자칫 오해할 소지가 있음이 이 책을 보면서 느기는 또 다른 아쉬움이다. 

  어찌 되었던 읽기는 재미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혹은 화장실에서, 혹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에, 딱 그 정도의 분량이다.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한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ps. 43페이지 바울에 관한 설명 중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실수이다. 교회사에 의하면(그래봐야 전설이겠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십자가형이 아니라 목이 잘리는 단두형을 받았다. 십자가 형을 받은 것은 또 다른 사도인 베드로라는 것이 교회 전통에 따른 설명이다. 아마도 바울과 베드로를 혼동하여 생긴 실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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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9-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키는 꼭 한번 여행을 가고 싶은 나라입니다만,
치안 상태가 걱정되어서..... ^^

동서양이 교차하는 멋진 나라이고, 바다 색깔도 일곱빛이 나는 나라라면서요?
아.......... 여행가고 시퍼염.

saint236 2010-09-07 15:22   좋아요 0 | URL
저도 가보고 싶네요. 아는 분 중에 터키에 몇년 사셨던 분이 계신데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참 아름다운 곳이 많다네요. 역사 유적지들로만 골라서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언젠가는 갈 수 있겠죠?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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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본다. 

 에피소드1 

  휴가철만 되면 난다긴다하는 인사들의 휴가철 도서 목록이 중요한 이슈로 떠 오른다.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휴가 기간에 저렇게 생색을 내면서 나 책을 읽습니다라고 광고할까 하는 생각도 들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책을 읽으면서 사회를 읽으려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하다. 리스트에 오르는 책들의 면면이 국제 관계나 자기 계발서에 머무르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정치인들이 휴가를 가면서 "불편해도 괜찮아", "시민의 불복종", "또 파? 눈먼 돈, 대한민국 예산", "삼성을 생각한다." 같은 책들을 가져간다면 이 나라가 훨씬 더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 빠져도 본다. 

  올해도 무슨 책들을 가져가나 궁금한 마음에 도서 목록을 쭉 훑어 보던 중 신기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박근혜씨를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이 가져가는 책의 목록에 이 책의 이르이 버젓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행보와 정의라는 말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혼자만의 상념에 다시 한번 빠져들면서 사놓고 아직 읽지 않고 뒤로 미루어 두었던 책을 펼쳤다. 궁금해서였다. 도대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길래 내 기준에서 생각하는 정의와 거리가 먼 행보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던 그들이 휴가를 가면서까지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이 이 책을 읽게 된 첫번재 이유이다. 

  에피소드2 

  알라딘 서재에 올라오는 글들과 내가 즐겨 찾는 이들의 글은 꼼꼼이 읽어 보는 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오는 글들 중 10~20% 정도는 이 책에 관한 글들이었다. 10~20%의 비율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매순간 알라딘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이 10개 중 1~2개는 이 책에 관한 것이라면 무시할만한 숫자가 아니다.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고 꼼꼼이 체크해야 한다. 게다가 이 책에 관련된 글들은 단순히 리뷰 수준이 아니라 이 책을 비판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면서 꽤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알라디너들이 이렇게 열정을 보이는 책이라니..이런 책은 꼭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게 된 두번재 이유이다. 

  에피소드3 

  이 책을 구입해 놓고 한달이 지났다. 절반쯤 읽다가 지루해서 잠시 외도를 했는데, 그 외도가 그렇게 오래 갈 줄이야. 장장 보름을 수호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열권을 쉼 없이 다 읽고 나서 다시 이 책을 읽으려니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중에 도저히 이 책을 볼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한 장소에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그곳이 어디냐? 놀라지 마시라. 영화마을이다. 영화마을은 주로 장르 소설이나 만화책, 그리고 DVD를 대여하는 곳이다. 내가 주로 출몰하는 곳 중에 하나인데 하루는 새로나온 만화책이 없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영화마을에 들렀다가 신간 코너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보았다. 주인 아저씨가 혹 실수로 자기가 보던 책을 꽂아 놓았나 했더니 아니었다. 워낙 베스트셀러다 보니 간혹 찾는 사람이 있어서 일부러 구해다 놓았다고 한다. 우석훈씨가 그랬던가? 사회과학 서적은 2~3만권 팔리면 대박이라고. 그럴 정도로 인기가 없는 분야의 책이 재밋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마음에 꽂혀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큰 흥미거리로 다가왔다. 이게 내가 이 책을 마지막가지 읽게 된 세번째 이유이다. 

  왜 이렇게 긴 부분을 리뷰를 쓰기 전에 할애하는가? 이 책이 얼마나 세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지 말하기 위함이며, 돌풍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나의 소감이자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의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요, 다른 하나는 정의의 가치 중립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째 정의의 주체가 누군인가?

  이 책은 정의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정의를 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존 룰즈, 마이클 월쩌까지 많은 철학자들의 입장과 사상을 소개하지만 결국 샌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정의란 공동체의 영역인가, 아니면 개인의 영역인가? 정의 자체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고민하고 다루어야 하는 주체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한다는 샌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 정의를 다루는 주체가 중요한가? 여기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정의는 정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때문이다. 정의가 이렇게까지 귀걸이가 되고 코걸이가 되는 순간 정의는 정의가 아니요 부정의가 된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의가 자행되지 않는가? 정의와 법치라는 미명하에 사회적이 약자들을 떼쟁이 혹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빨갱이요 적으로 만들어 철저하게 짓밟아 버리지 않았는가? 용산에서, 대추리에서, 상암동에서, 종로에서, 광화문과 시청에서, 그리고 멀리 부엉이 바위에서.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아모스 선지자의 꿈은 그의 후예로 자처하는 한국 기독교에 의하여 철저하게 부정되고, 나만을 위한 혹은 우리만을 위한 정의로 왜곡된지 오래이다.  

  왜 그럴까? 정의를 개인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기 때문이다. 정의를 개인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덕목으로 치부해버리고 한계지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샌델은 분명히 이 부분에 지적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이 도를 지나쳐 공동체의 정의라는 덕목, 공공선이라는 부분을 무시해 버린 것이 이 시대의 문제점이라는 그의 판단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꼭 들어 맞기에 이 책이 그렇게도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분명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공공선을 이야기하고, 공동체의 책임과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샌델은 서사적인 역사를 말한다. 그런데 그 논리가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논리와 흡사하다. 파시즘과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의 논리와 샌델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같이 얽힐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부분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정의의 주체에 관한 논의는 자칫 전체주의로 흐를 수도 있지 않을까? 

  둘째 가치 중립적인 정의는 존재하는가? 

  지금까지 정의에 관한 논의, 법치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것,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 있다. 정의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샌델은 의문을 표한다. 진정으로 가치 중립적인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샌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례로 서구 사회를 만들어 온 기반인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떠나서 내리는 가치판단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샌델은 선언한다. 한 가지 예로 인공유산을 들수 있다. 우리가 흔히 낙태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인공 유산은 기독교 특히 가톨릭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이다. 인공유산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인공유산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이 또한 낙태라는 말로부터의 가치 중립 혹은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낙태라는 용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가치 중립이라는 말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꼭 가치 중립적이어야만 하는가? 절대로 가치 중립적일 수 없고, 가치 중립적이어서도 안된다. 가치 중립적이라는 말은 곧 우리의 정치적인 책임과 견해를 포기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하여 판단을 하고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절대로 가치중립적이어서는 안된다. 가치중립이란 말에 현혹되어서 자기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이득과는 상관없는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고 있는 답답한 대중들이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리지 않았는가?  

  샌델은 확실하게 말한다. 자신의 가치와 입장을 포기하지 말라.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정의는 불의가 되고, 정치는 쇼가 되고 자위의 도구가 된다고. context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text는 존재하지 않는다. context에 맞추어 text를 해석하는 것,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 정의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갖게 된 결론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너무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너무 소모적인 논쟁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너무 때 이른 걱정은 아니함만 못하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건설적인 에너지 소모와 토론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있었는가? 당연한 것은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의 대상이다. 전혀 반론도 없는 만장일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다. 제발 반장선거만도 못한 국회의원 선거는 그만하고 일단 한번 해보자. 더 나아지기 위한 에너지 소모는 낭비가 아니라 투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실천을 다짐한다.  

  여러가지 고민과 논란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정치인들이 이 책을 휴가 때 읽겠다고 가져갔는데 공공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 특히 10장의 주제와 내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앞으로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면 이들이 이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으니 거짓말은 못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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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09-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억만년째 방치중인데...
이런 내용이라니 읽어볼만 하겠는걸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saint236 2010-09-06 13:46   좋아요 0 | URL
한번 읽어 보세요. 읽어 볼만 합니다.

마녀고양이 2010-09-06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엄청난 선전을 저도 봤는데,
저는 선전 너무 하는 책은 읽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성향이.. ㅡㅡ;;
그런데 세인트님의 리뷰에 맘 고쳐먹습니다.

saint236 2010-09-06 23:12   좋아요 0 | URL
선전이 엄청나긴 했죠? 아프님은 강의가지 다녀 오셨다던데. 그나저나 샌델의 생명 윤리도 결국 샀습니다.

책 읽는 아저씨의 회심 2010-09-10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출간되자 마자 구입해놓고서도 아직 읽지 못한 책입니다.
리뷰를 보니 조만간 읽어야 할 거 같네요... ^^

saint236 2010-09-10 10:10   좋아요 0 | URL
책은 읽어야 맛이죠^^ 한번 읽어 보세요. 재미는 있습니다.
 
한국 교회여, 낮은 곳에 서라
한완상 지음 / 포이에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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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한 산에 올라가셨다. 산 꼭대기에서 기도하던 중에 예수님의 용모가 신비롭게 변화하더니 홀연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의 내용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십자가를 지고 죄인의 모습으로 처형된다는 것이다. 대화의 내용을 듣지 못하고 모세와 엘리야를 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가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선생님 여기 터가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상 이렇게 위대한 선지자였던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가 있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집을 짓고 꾹 눌러 앉으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제자들이 이러한 제안을 하던 바로 그 순간 산 밑에서는 귀신들인 아들을 데리고 와서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는 한 아버지가 있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왜 뜬금없는 성경의 내용이냐구?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국 교회가 똑같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고, 고난받는 이들, 병자들, 죄인으로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낮은 자들을 위하여 없는 시간도 쪼개어 돌아다니시는데, 소위 예수님의 수제자요 애제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의 마음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참 미련하다. 세 제자의 미련함을 비판하는 한국 교회도 크게 다를바가 없다. 어느새 한국 교회는 성공이라는 가치관에 혼을 팔아버려서 모세와 엘리야에서 홀린 제자들처럼 변화산 꼭대기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아니 오히려 기를 쓰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한다. 그러한 이들에게 산 밑에서 고통받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눈물이 눈에 들어 올리 없고 한숨소리가 귀에 들릴리 없으며 그 고통을 헤아릴 수도 없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변화산 꼭대기을 대한민국의 상위 1%로, 제자들을 한국 교회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비정규직을 포함한 빈곤층으로 치환하여 생각하면 현재 한국 교회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진보든 보수든, 친MB든 반 MB든 한국 교회가 장로 대통령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이상 그들은 모두 꼭대기를 사랑하며 오르려는 세 제자일뿐이다. 얼마 전 한상렬 목사가 방북하여 MB정권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그의 비판을 듣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사람도 결국은 똑같구나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냐? 다름아닌 "이명박 장로"라는 호칭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 실책을 비판하는 그 자리에서 이명박 장로라는 호칭은 내가 보기에 절대로 불필요한 호칭이다. 목사로 꾸짖고 싶으면 교회에서, 아니면 교계에서 할 노릇이지 정치의 자리에서 할 노릇은 아니다. 차라리 쥐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물론 공적인 자리에서 아무리 맘에 들지 않아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실례를 넘어 무례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이명박 장로라고 부른 것은 실수를 넘어 무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 한상렬 목사의 정치적인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한국 교회의 꼭대기 지향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의 말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비단 이뿐이랴? 몇년전 상암 월드컵 운동장에서 교계의 난다 긴다하는 목사들이 전부 모여 회개집회를 가졌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옥한흠 목사가 대표로 기도하면서 "주여 우리를 살려 주시옵소서.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요지의 설교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설교를 하면서 그는 강남에서 대형 교회를 세우고 목회하면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자기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그리고 함께 모인 모든 성도들에게 1907년의 부흥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도록 회개의 운동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상암 운동장 바로 옆에서는 이랜드 계열의 비정규직원들이 모여서 김성수 회장과 이랜드 운영진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경영정책과 처사를 규탄하고 있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한 목사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다. "과연 하나님은 어느 편의 이야기를 들으셨을까?" 적어도 상암 월드컵 구장 안의 기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그렇게 열렬히, 그리고 철저하게 회개했던 사람들이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저면 그것은 한편의 멋지게 잘 짜여진 종교적인 쇼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꼭대기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나마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리라.

  이 책은 나온지 30년도 더 된 책이다. 그런데 정말 기독교인으로서 쪽팔린 것은 이 책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지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 교회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대도시의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가 돌아가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한부분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배고픈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배불리고 싶어 하시는 예수의 정신을 우리 현실에서 다시 한 번 되살려야 할 때입니다. 가난한 자, 배고픈 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근로자를 외면하고 학대하는 교회와 크리스천이 있다면, 이는 결국 예수를 외면하고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주님이 지극히 작은 우리의 형제와 이웃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P 178) 

  당시에 이랜드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랜드를 비롯하여 기독교 계열의 기업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저자는 비판하고 있다. 아마 당시의 다른 기독교 계열의 기업이 그랬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러한 일이 고쳐지지 않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기독 기업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위한, 크리스천에 의한, 민중의 산업'을 추진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산업은 곧 사회복지와 사회 정의를 위한 사업이고, 크리스천에 의한 사업은 청부의 실현자들이 주관하는 사업이며, 민중의 사업이란 민중을 수탈하지 않고 근로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지 않으며 민중의 이웃이 되는 일에 모범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민중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된다는 뜻입니다.(P 188 ~ 189) 

  기업의 운영진들이 기독 기업인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기업인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기업체에 들어오지 못하고 자본주의 논리로 충만하다. 단지 기독교라는 가면을 쓰고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다. 왜 이런 양면적인 태도를 취하는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많은 이윤을 포기해야 할 것이요, 기독교인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하자면 1/5에 이르는 기독교인이라는 시장을 잃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들도 이곳이 좋사오니 하면서 변화산 꼭대기에 부동산을 사두고 있는 것이다.  

  비단 기업만의 문제일 것인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변화산 꼭대기에 부동산을 사두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그것을 잘못되었다 가르쳐야 할 목사중에도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포장하면서, 비난하는 이들을 마귀새끼로 몰아간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을 외면한다. 암하레츠들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정죄한다. 

  이런 한국 교회를 향하여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게서 말씀하신다. 

  "한국 교회여, 공감의 능력을 회복하라. 변화산 꼭대기에 부동산을 사두지 마라. 그곳이 바벨탑인줄 너희는 정녕 모르느냐?" 

  한국 교회가 이러한 예수님의 꾸지람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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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08-27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여~다섯번째 문단이여...30년이 아니고 3년 아닐까여?

저는 기냥은 읽지 않을 책이지만,이렇게 리뷰로 간접 독서 하게 되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saint236 2010-08-27 12:44   좋아요 0 | URL
30년 맞습니다. 예전에 나왔던 책을 이리저리 손봐서 다시 낸 책이죠.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오늘의 군부독재라는 구절이 나오기도 하죠.^^

yamoo 2010-08-3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십니다~~~아, 한완상 선생이 저런 책도 쓰셨군요..다시 간행 됐다니 얼른 구해봐야 겠습니다~ 세인트님 서재의 기독교 서적 리뷰는 정말 최곱니다..제 맘이 다~ 후련합니다..제가 하고 싶은 말을 책을 읽고 좌~~~악 해주시니...넘넘 고마운거 있죠^^

아, 근데 혹시 아우구스트 프란츠의 <세계교회사>읽어 보셨나요?

saint236 2010-09-01 10:24   좋아요 0 | URL
아뇨.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겠군요. 요즘은 열심이 토저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완상씨의 책이 날카로우면서 진보성향이라면 이어령씨의 책은 보수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표현이 일품이고요, 권정생 선생님의 책은 마음을 따듯하게하면서 커다란 깨달음을 주지요. 위의 책은 예수 없는 예수 교회와 함께 읽으면 좋을거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