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 전 세계 고난의 현장에서 만난 은혜의 이야기들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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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얀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이 책을 열었던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책을 열면서 던진 질문이 꽤나 도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이런 류의 질문을 안 들어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런 고민을 안해 본 것도 아니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했던 그에게, 미국 복음주의 인사의 대명사인 그에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살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자조섞인 질문을 던져 본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아마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본적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심한 우울증과 정신분열 증세로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했을 때도(한번은 7살 때인지라 기억이 잘 안나지만, 그 후 두번은 결혼 직전에, 그리고 둘째가 태어나고 채 백일이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면서도 말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 순간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젊은이의 울부짖음을 엘리위젤의 흑야에서 읽었었는데 그 마음이 절절히 이해가 되던 때이다.  

  살면서 느낀 것은 이러한 질문을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은데 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가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도, 시험에 실패한 학생도, 취업을 못해서 눈치를 보는 젊은이도, 그리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 받은 사람들도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며 원망을 한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가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필립 얀시도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버지니아 공대 학생들에게, 아프리카의 빈곤층에게,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에게 "과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설교의 자리에 서지만 그럴 때마다 놀랍게도 그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은혜가 임하지 않을 것 같은 가장 열악한 자리에 서보지만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체험한다고 한다. 아직 내가 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나마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은혜를 찾는 여정을 마친 후에 그가 내린 결론 또한 도발적이고,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언뜻 보면 그의 질문은 무신론에 도달한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는 질문과 "하나님이 없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우리가 잊어버린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이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찾아 절규하는 그 순간에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신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과거에 큰 위안을 받았던 그림을 다시 한번 떠 올린다.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 순간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보여주었던 그림이다. 

  (지금 이미지가 올라가지 않아서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으면 올립니다.) 

  노숙자들, 병든 사람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면서 마음을 졸이는 장면인데, 예수님은 앞에서 무엇인가 나누어 주는 그런 오만한 사람들의 자리가 아니라 내 차례가 혹시 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는 쪽에 계신다는 그림이다. 그렇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졸이고 있는 우리 옆에 있는 것이다.  

  이제야 자유롭게 아무런 의심없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 없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그 분은 내 곁에 계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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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단편선 1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권희정.김은경 옮김, 이일선 그림 / 인디북(인디아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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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몇 년에 한 번?) 복권을 산다. 재미도 있지만 돈 좀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새로 나온 소형 가전에는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간다. 그래서 2월에는 아이패드도 샀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다.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낀다. 복권은 꽝이고, 소형 가전이 주는 즐거움은 며칠이다. 왠지 허전함을 느낄 때마다 이 책을 만지작 거린다.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리뷰를 써야지 하고 벌써 1년이 지났다. 나중에 읽은 톨스토이 단편선 2권의 리뷰를 먼저 올린 마당에 이제서야 리뷰를 올리는 것이 낯간지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자꾸 리뷰를 미뤄두었던 책들이 눈에 밟히는지라 이제라도 올린다. 

  1달전인가? cyrus님이 주셨던 체호프의 책을 읽고 톨스토이의 단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의 책이 러시아 문학의 전부인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왠지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이 따뜻해지지만 리뷰를 올리는 것은 왠지 어려운 일로 느껴졌다. 톨스토이가 동화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노동의 신성함, 치부의 부적절함, 인생 무상, 그리고 신앙의 숭고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면, 도스트예프스키는 조금은 더 어려운 내용으로, 더 묵직하게 같은 주제를 다룬다. 쉽게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전 연령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도스트예프스키는 성인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달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죄와 벌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당시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 정도였다는 것? 만약 그 당시 내가 체호프를 만났다면 러시아 문학에 대하여 더 관심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체호프의 이야기는 최소한 40 이후에는 읽어야 그 맛이 진하게 느껴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서른 중반인 나에게 지금도 체호프의 소설은 아직도 많이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톨스토이 단편선에서 가장 유명한 글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이다. 다른 것들을 다 읽지 않는다고 해도 이 세가지만 읽는다면 톨스토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깊이 생각해본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살면서 더 많은 돈, 더 많은 연봉, 더 좋은 여건을 추구하면서 대기업 정규직에 목을 거는 20대들에게 톨스토이 단편선은 어떻게 읽힐 것인가? 물론 그 이야기가 재미있을 것이지만 단순히 재미가 있다고 해서 그 글이 목표하는 바는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톨스토이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기억하면서 이 책을 읽어간다면 꽤나 읽기 곤혹스러운 이야기가 아닐까?  

  자본을 최고의 선으로 가르치는 자본주의에서, 그것도 한국식의 역사가 짧고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차포 다 떼고 장기를 두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왜 이 책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는가? 아마도 그의 책은 자본과 물질, 그리고 현실 너머의 현실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권력을 얻어도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한 몸 뉘울 수 있는 땅이 필요한 것은 죽은 사람뿐이라는 체호프의 말처럼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이르기 힘든 경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톨스토이의 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이다. 바보이반처럼 재물도, 권력도, 즐거움도 모두 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다. 게다가 이 시대에는 정말 바보같은 짓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는 그러한 바보같은 이반식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보 이반식의 삶을 흉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이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것이다.  

  내가 지금보다 10살을 더 먹었을 때 최소한 바보 이반을 흉내내는 삶을 살고 싶다. 단 두세평의 땅으로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이 나이지만 바훔처럼 그렇게 목숨 걸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둥바둥대고 싶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톨스토이 단편선 중에 인디북에서 나온 이 책이 가장 맘에 든다.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예쁜 디자인과 삽화는 내 마음에 쏙 든다. 이 책 하나만으로 나는 인디북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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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랍 벨 & 던 골든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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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이 책을 읽기 전에 궁금한 것 한 가지! 

  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이라는 원제가 어떻게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분명히 번역자가 책을 읽고 그 핵심을 가지고 제목을 의역한 것이라고 보지만 직역과 의역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것이 아쉬우면서도 황당할 뿐이다. 과도한 의역이 자칫 저자의 논점을 흐리는 것 같아서 아쉬울 뿐이다. 

  리뷰를 작성하기 전에 먼저 읽은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한번씩 읽어본다. 이 책에 대한 과도한 칭찬도 있고, 적나라한 비판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어떤 분의 공격적인 리뷰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수준의 원색적인 리뷰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한가지 의문이 든다. 이 리뷰를 작성한 분은 과연 이 책을 읽고나 작성한 것일까? 내 판단에는, 그리고 그분의 서재를 검색한 결과(일단 그분의 구입 목록을 검색해 보았으나 없었다.) 이 책을 구입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이 된다. 구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겠으나 이렇게 공공격적인 분이 구입하지도 않은 책을 빌려서 읽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기독교에 관심이 없거나 불만이 있다는 것을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다만 그분이 그 글을 굳이 리뷰로 작성했다는 사실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리뷰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거기에 대한 감상을 적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도 않고, 영화를 보지도 않고 리뷰를 작성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사기라고 생각이 든다. 만약 책을 읽지 않고 이 책에 대한 느낌이나 선입견을 적고 싶다면 페이퍼를 통해서 작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최소한 책을 다 읽고 성실히 리뷰를 작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요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예수의 행적을 출애굽기를 통하여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예수의 행적을 연결시켜 설명한 책이 없지는 않지만 이 책은 여러가지 지엽적인 부분들은 모두 생략하고 시내산 계약의 의미와 예수의 행적의 의미를 연결지어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억압받는 자의 부르짖음. 출애굽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등장하였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러한 왕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들을 억압하였고, 억압당하는 그들은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 탄식을 들으시고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하여 이들을 구원하셨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신분이 변화된 그들은 시내산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계약을 맺는다. 이제 그들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속하던 세상과 힘과 권력과 재물의 논리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논리를 인생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새 힘을 얻게 된 그들은 재물을 축적하고 가지 말라 명한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계약이 파기되었고 다시 억압받고 탄식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예수는 골고다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계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확장된 계약이다. 이 계약에 동의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인가? 새 계약을 맺은 크리스천이 이행해야 하는 계약은 무엇인가?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탄식에 무슨 방식으로든 반응하는 것이다. 이게 새로운 계약을 맺은 우리가 행해야 책임이자 의무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또한 세상과 권력과 힘과 재물을 추구하게 되고,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귀를 막고 눈 막고 쌓아올리기에 몰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큰 교회를 세우고, 전 인구의 1/4~1/5이라는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고, 장로 대통령을 배출했다고 자랑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심판하실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획득한 힘으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기보다는 666달란트의 재물을 쌓고 말과 병거를 얻기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갔던 솔로몬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는가? 교회의 문턱을 한없이 높이고 선별적으로 교회의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는가?  

  너는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렇게 열심히 제국을 형성하고 힘을 모으기에 집중하는 교회들에게, 특히 한국의 교회에게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 앞에서 한국 교회는, 그리고 그 구성원인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교회가 안티들의 말처럼 개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개독(開督)이 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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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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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아름답다. 체호프 식으로! 

  체호프 삼부작을 완성한 긴카스의 평가란다. 책을 다 읽고 뒤부분의 작품 해설을 읽다가 발견한 부분인데, 어쩜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는지? 이 한 문장에 이 책에 대한 평가가 끝나버린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인가? 사족같아서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이 책이 특별히 cyrus님에게 받은 책인지라, 감사한다는 말과 함께 책에 대한 감상이라도 올려 놓는 것이 선물해 주신 분에 대한 예의 같아서 간단하게나마 적어본다. 

  굴이라는 글로 시작하여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으로 끝이 나는 이 책의 지은이는 체호프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러시아 문학이라고는 도스트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작품이 전부인지라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의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두 문호의 작품은 무엇인가 상당히 교훈적이고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얻은 것 같지만 그냥 즐기기에는 무거운 감이 있다. 죄와 벌을 읽고 그냥 재미있다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아니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혹은 톨스토이 단편선을 읽고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것들을 읽는 순간부터 머리를 팽팽 돌기 시작한다. "러시아 문학은 왠지 읽기 난해하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게 만드는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다." 내가 러시아 문학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편견이 이것이다. 그렇지만 체호프의 책은 상당히 다르다. 그냥 읽는 것이 즐겁다. 재미있다. 들고 다니면서 어디에서나 읽어도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천박하지 않다. 가볍지도 않다. 

  체호프의 성장 배경이 그래서인지 이 책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다. 굴이라는 첫 소설부터 시작해서 사회배경이라든지, 경제적인 부분이라든지, 사람들의 생각이라든지 패배주의도 나타나고, 굶주리기도 하고, 돈이라는 천박한 것들에 의하여 휘둘리기도 한다. 부인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장부를 펴서 손해본 돈을 헤아려 볼 정도로 몰인정하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불륜이요, 평생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도 있다. 체호프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이렇게 우울하다. 그렇지만 이 우울함 때문에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그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된다. 긴타스의 말처럼 체호프식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 버리기 연습이다.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갖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묘하게도 바로 다음에 읽은 이 책에서는 마음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보다는 그냥 자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기괴스럽고, 때로는 우습기도 하고, 때로는 벽창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체호프식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 문학이란 굳이 계몽적이지 않아도 좋고, 억지스럽지 않아도 좋다. 그냥 삶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여도 좋다. 상자 속에 갇혀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등장 시켜도 좋다. 자기 욕심에 빠져서 인생을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도 좋다. 그것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이게 바로 체호프식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러시아 문학에 대한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준 cyrus님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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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09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을 여기서 쉐어하셨군요.
새로이 등극하신 러시아 문학 전도사에게 저도 홀라당 넘어가봐야겠는걸요~^^

saint236 2011-04-09 13:04   좋아요 0 | URL
원래는 못받는 것인데(2등이었거든요) 그런데 cyrus님께서 한권을 주문해 주셨더라고요.

cyrus 2011-04-11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서야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의 단편 몇 편이 있어서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저도 이 책 리뷰 써야하는데,,
쓸 시간이 없네요,, -_-;;

saint236 2011-04-11 12:15   좋아요 0 | URL
하하하...리뷰 기다리겠습니다.
 
생각 버리기 연습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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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33살 먹은 녀석이 뜬금없이 묻는다. 나랑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편인지라 그 녀석도 나에게 고민 거리가 있으면 스스럼없이 말하는 편이다. 음악 치료사라는 특이한 직업의 문제로 항상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취업의 문제로, 그리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의 문제로, 거기에다가 교회 청년부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아서 여러가지로 고민거리가 많다. 자연히 생각이 많을 수밖에.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어느날 서점에 갔더니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가 눈에 확 띄더란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생각 버리기 연습" 

  요즘들어 더 생각이 많아져 골치가 아프던 차에 제목에 확 꽂혔다고 한다. 며칠 뒤 교회에서 나를 만난 그녀석이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을 읽어 봤냐고 물었다. 알고는 있지만 보지는 않았다고 했더니 그 책을 사려다가 말았다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사려고 한다. 그런데 그 녀석은 이 책이 불교식 마음 수련 방법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읽어보고 이야기해 주겠다 달랜 후 읽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이런 식으로 읽게 되는 책들이 꽤 있다.  

  역시 종교가 다르다 보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지만 어릴 때부터 기독교라는 배경에서 자라서 불교에 문외한인 나에게 이 책을 깊이 이해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학 다닐 때 세계의 종교라는 과목을 들었을 때 불교에 대하여 약간이란 공부한 풍월, 그리고 동양 철학을 공부하면서 인도 철학과 불교 철학에 대하여 병아리 눈꼽만큼 배운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아주 얇고도 얕은 지식으로 이 책을 읽어가면서 얻은 결론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한마디다. 과거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던 나에게 친구가 보내준 한마디의 문자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이 많은 것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 잡념이 일기 때문이요, 이로 인해 평상심을 잃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저자가 제안한 훈련 방법은 팔정도이다. 말하기, 듣기, 보기, 쓰기와 읽기, 먹기, 버리기, 접촉하기, 기르기라는 항목들도 결국은 팔정도를 기본으로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문외한이 사람이 그 내용을 깊이 깨달아 알이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내 뜻대로 되던가? 아무리 훈련하고 노력하고 연습한다고 해도 내 뜻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 아닌가? 일체유심조라는 말만큼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말이 어디 그렇게 많겠는가?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 명쾌하기 보다는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진 것일 게다.

  현대인은 생각이 너무 많은 생각병에 걸려 있다는 저자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거기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객관화하라는 저자의 말은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불교적인 수행에 맹렬 정진하려는 독실한 불교도가 아니라면 객관화라는 것이 조용한 산사로 떠나 거기에서 며칠 수행하는 템플 스테이 수준에 머무르지 않을까?

 자기의 감정이 움직이는 모든 것을 慢(만)이라는 번뇌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기에 이것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왠지 나에게 강박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선한 욕심이라는 것도 결국 욕심이기에 이것은 치졸한 것이며 버려야 할 것으로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에는 왠지 인간미마저 없어진 것 같아서 갑갑하다. 無를 의식하는 無는 진정한 無일 수 없듯이 잡념을 버리려는 생각 또한 잡념의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분명히 저자는 이 부분을 경고하면서 이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디 그런가? 게다가 기껏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안정시켜 놓은 마음을 자극하는 자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한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또 하나의 생각에 지배되어 살아가지 않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연습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기준은 너무 높은 곳에 잡고 있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김남준 목사님의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끼는 답답함을 느꼈다면 쉽게 이해가 되려나? 

  마지막으로 12,000원이라는 책 값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 먹고 읽으면 2~3시간 내에 읽을 정도로 글씨도 크고 여백도 많은데 이 정도의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폭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비싸게 받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책에 대해 물어 본 녀석이 읽고 싶다면 빌려주겠지만 내가 나서서 권하고 싶지는 않다. 괜히 그 녀석의 마음에 또 다른 잡념만 심어줄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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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07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이랑 겉표지 보고서는 혹 했었는데...
실제로 평점은 다들 박하시네요~^^

saint236 2011-04-08 10:30   좋아요 0 | URL
혹하시면....박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