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지음 / 삼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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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 사회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와 함께 여인이 필히 지켜야 하는 항목들이다. 첫째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둘째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셋째 음탕한 것, 넷째 질투하는 것, 다섯째 나쁜 질명이 있는 것, 여섯째 수다스러운 것, 일곱째 도둑질하는 것으로 일곱가지 항목 가운데 어느 것에 해당될지라도 남자는 합법적으로 여자를 집에서 내쫓을 수가 있었다. 물론 삼불거(三不去)라고 하여 예외 조항을 두기는 했지만 잘 지켜졌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검은 바탕에 하얀글씨로 "한국 교회의 일곱가지 죄악"이라는 글, 그리고 그 밑에 그려져 있는 빨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갑자기 칠거지악이라는 말이 더올랐다. 그리고 십자가가 매우 괴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검은 바탕에 글씨는 악마를 섬기는 블랙 바이블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저자는 이렇게까지 괴기스러우면서도, 음산하고, 그리고 극단적인 제목과 표지를 선정했을까하는 생각에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제목 그대로 7가지 한국 교회의 죄악상(저자의 표현에 의하면)을 담고 있다. 교회의 생명력을 빼앗는 교회의 7가지 커다란 잘못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것들이 교회를 교회가 아니라 도그만의 신전으로, 이념의 전쟁터로 몰고가는 것들이라며 열변을 토한다. 아마 저자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사탄의 짓거리라고 하고 싶지 않았을까?  

  삼인의 책은 교회에 비판적이다. 작심하고 비판한다. 제목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출판사를 보면서도 심상치 않은 책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으며, 이 책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대감을 만족시켜줬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고 토론하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하는 저자 앞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나를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신학서적이 아닌 일반서적 가운데에서 이만큼 교회에 대하여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 책도 드물 것이다. 물론 교회를 비판하는 (정치교회나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같은) 일반서적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제도적인 부분과 종교적인 부분, 그리고 기독교 자체를 놓고 비판한 책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직까지 이만한 책을 본적이 없다. 

  권위주의적이면서도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목사, 반공과 자본주의가 하나님의 뜻으로 변질되어버린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복음, 물건을 고르듯이 원하는 것들을 골라 소비되어지는 설교, 성공을 위해 하나쯤은 걸쳐야 하는 액세서리가 되어버린 기독교인이라는 유니폼,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전도, 이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그러나 힘은 없는 영성, 구원을 위해 면죄부를 사듯이 혹은 직분을 위해서 기꺼이 드려지는 헌금들 도무지 어느 하나 틀린 말은 없다. 물론 너무 확대해석하는 부분들, 너무 삐딱하게 보는 시선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 안에 이런 모습들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발복을 위해, 혹은 직분을 위해 헌금을 바치는 것을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 것에 빗댈 때는 솔직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교회의 잘못이 일곱까지 뿐이겠냐만은 저자가 굳이 일곱가지로 분류한 것은 칠거지악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닐까? 칠거기악에 해당될 때 여자가 쫓겨나듯이, 하나님께서 일곱가지 죄악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어쩌다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말뿐인 기독교, 생명력 없는 기독교,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짐이 되어버린 기독교가 되었을까?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바친, 그리고 앞으로도 인생을 바칠 교회가 왜 이리 공격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왜 자본의 논리와 반공의 공격성이 교회의 복음으로 포장되어 버린 것일까? 왜 미국은 좋은 나라요, 공산주의 국가는 특히 북한은 적그리스도라는 말도 안되는 설교가 한국 교회에서 선포되고 힘을 얻고 있는 것일까? 왜 교회가 세를 과시하면서 그 오만함으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회개할 때이다. 성공과 자본, 권력을 추구하는 모습에서부터 돌이켜 겸손과 공의를 배울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토해내실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이다. 나는 아직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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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이긴 사람들 - 하워드 진 새로운 역사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문강형준 옮김 / 난장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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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87년 6월은 뜨거웠다고 한다. 

  난 국민학교 3학년이었고, 6월 항쟁이 무엇인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매캐한 최루탄 냄새였다. 내가 살던 곳이 워낙 깡촌이라 그랬나? 실제로 최루탄을 그렇게 많이 맡아볼 일도 없었는데. 가끔 시내에 나가면 보던 전경들의 모습, 그리고 도망가는 사람들, 매캐한 향기. 당신에는 그것이 최루탄인지도 몰랐다. 

  어느날 학교를 갔다가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당시 우리는 주머니에 자석을 하나식 넣고 다녔는데, 막대자석은 고가의 물건이었으므로, 버려진 텔레비전이나 오디오에서 뜯어낸 원형 자석 조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없었던 우리는 어디 버려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원형 자석 조각같은 까만 조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그것을 자석으로 믿었고, 그것을 손에 쥐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철이 붙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손이 얼얼하고, 손으로 부빈 눈이 따가워지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것은 최루탄 조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쵤탄이었다는 것도 한참 지나고 난 뒤에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에게 6월은 딱 그정도의 기억이었다. 6월이 뜨거웠다면 손으로 부벼서 눈물이 날 정도로 따끔했던 그 정도였다.  

  나이를 먹고 대학생이 되어 최루탄이 무엇인지 구별할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6월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메이데이가 5월의 축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절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한열을 알게 되었다. 전태일을 알게 되었고, 왜 그때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광장으로 뛰어 나갔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가지 살면서 학교에서 단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국민학교 윤리 책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사진이 있었고, 내 오랜 기억에도 학교 교실 한 구석에 캐극기와 대통령 사진이 나란히 걸렸던 것 같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지게 만드는 서슬 퍼랬던 권력자들이었는데, 어느덧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 사회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민주화를 향해서 전진했던 것이다.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누가 국가를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국민이다. 이름도 없이, 이름 석자 기억됨도 없이 국민이라는 일반 명사로 불려지는 그들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 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들의 존재는 기념되지 않는다. 그저 민중으로, 국민으로, 때로는 폭도 등 정치적인 이익에 따라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을 뿐이다.  

  작년 6월도 뜨거웠다. 광우병을 우려하며 많은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국가의 오만가, 정부의 탈선을 지적하며 나왔다. 그러나 1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폭도로, 시위꾼으로, 때로는 빨갱이, 혹은 사탄의 자식들로 불려질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는 이들 대문에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행동은 분명히 역사를 발전시켰다. 우리가 살아 있음이 그들의 희생 때문이 아니던가?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들을 추모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워드 진이 "A Power Goverments cannot supress." 라고 채긔 우너제를 붙인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이상,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깨어 있는 이들이 있는 이상 역사의 새벽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 이것이 하워드 진이 이 책을 통하여 하고 싶은 말이 아니겠는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이다. 독재 권력을 휘두른다고 할지라도 역사는 퇴보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주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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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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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스무살에 감신대에 들어간 이래 아마도 이분하고는 많은 악연으로 엮였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 책에서 예수회의 신부들과 그 선봉 가브리엘 말라그리다 신부를 접하는 순간 이 분이 떠오른 것은 스무살부터 맺어온 악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인 이분과 300명 정도가 모이는 작은 교회의 한낱 부목사인 내가 비교의 대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싫은 걸 어찌하란 말이냐?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왜 그분을싫어하냐고? 그렇게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왜 싫어하냐고 의문을 달기도 하지만 단언컨대 이분이 단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분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싫은 이유를 어려가지 꼽아보라면 수십가지도 꼽겠지만 내가 가장 싫은 것은 그분의 독선이다. 자신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 그 생각이 싫은 것이다. 물론 목사들은 대체로 이런 성향이 있지만 이분은 도가 너무 지나치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치도 없다.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분을 떠올린 가장 큰 이유는 이분이 쓰나미와 캍리나 참사를 본 후 한 설교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분의 독선이 정확하게 나타난다. 

  "쓰나미 참사는 동남아 지역의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비롯한 불신자들, 그리고 주일을 지키지 않고 놀러가는 그런 불신앙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카트리나 참사는 미국의 동성애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다." 

  위의 내용과 "리스본의 탐욕과 불신, 타락 때문에 하나님이 지진으로 이곳을 심판하셨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놀랍도록 똑같지 않은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놀랍게도 18세기의 사고 방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게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사회는 정신없이 바뀌어 가는데, 종교는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이 해야할 부분마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해하고 있다. 당연히 곳곳에서 기독교에 대한 저항감이 넘쳐나지 않겠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계몽주의를 보고, 독재자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박정희와 개발주의, 재건 대책에 관한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신앙과 맹신, 그리고 광신이라는 세 단어를 떠올려본다. 신앙이란 이성과 믿음이 적절히 균형을 이룬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맹신은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덮어놓고 믿는 것이며, 광신은 이성을 잃고 그냥 믿는 것이다. 리스본 지진을 통해서 사람들은 불신과 신앙, 맹신과 광신의 모든 것들을 보았을 것이다. 카르벨류가 불신의 모습이었다면 교구 신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한 신부들은 신앙을, 신부들의 설교에 재건보다는 회개를 외쳤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맹신이며, 예수회 신부들과 종말론을 설교하는 이들은 광신이 아닐까? 

  과연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당연히 이성이라고 말하다. 종교는 타파하고 깨뜨려야할 미신과 같은 것이며, 리스본 지진을 통하여 드디어 계몽주의가 포루투갈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저자가 하고 싶은 운명의 날이라 함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선 운명의 날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나 기독교 신자인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한 가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맹신과 광신은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보다는 더 위험하며 유해하다는 것이다. 내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은 거꾸로 간다. 기술은 21세기이지만 마인드는 여전히 18세기에 머물고 있다. 자연현상을 도덕적 해이에 대한 심판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을 돕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이론을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과학 만능을 부르짖는 21세기에 과연 이런 식의 설교, 광신과 맹신은 어떻게 이해되 수 있을까?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각설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 당시 포루투갈과 유럽의 사조와 배경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섦여하면서 카르벨류라는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평가는 긍정으로 기울어 있지만 말이다.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 중요한 사건이 왜 그렇게 생소한지, 세계사 가운데 왜 빠져 있는지 궁금하다. 주마간산식으로 배우는 역사공부의 폐해가 아닐런지?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가진 사라은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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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와 목회의 실제 - 큐티에서 설교까지
로렌 커닝햄.이동원.하용조 외 지음 / 두란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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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누리교회에서 행했던 QT에 관한 세미나를 정리하여 엮은 책. 

  신앙인에게 QT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통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조금씩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삶을 돌아 보는 것, 그리고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것, 이것이 QT가 아닐까?  

  이 책은 QT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전해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졌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QT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과 간단한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고, 어떻게 교회 안에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만들었으나 왠지 QT를 목회의 한 기술 정도로 전락시켜버리지 않았는가하는 삐딱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큰 교회, 성장한 교회의 목회자들을 불러 모아 "우리 교회는 QT로 성장했다."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들려 준다면 일반적으로 어떤 생각이들까? "우리도 QT하면 성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내가 너무 삐딱하다고 하지 말라. 책을 읽어보면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니. QT로 성공한 교회 이야기는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QT를 어떻게 나누었는지에 대한, 그리고 실제로 어덯게 인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례는 전혀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남들 다 아는 이야기를 유명한 목회자들을 불러 모아 하게 만들다니 왠지 빛좋은 개살구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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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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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한문으로 人間이라 한다. 사람 人에 사이 間!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리야 없겠지만 이 말의 의미를 정말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인간이란 人보다는 間에 그 의미가 숨어 있음에도 우리는 間보다는 人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아니라 나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정글의 법칙, 약육강식, 무한경쟁, 승자독식사회! 

  우리사회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들이다. 이기면 장땡, 살아 남는 놈이 승자요, 이긴자가 정의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짓밟고 올라서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이런 강요에 우리는 어느샌가 길들여져 이것이 강요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목적은 이기는 것, 살아남는 것, 상대방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을 변해 버린다. 혼자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금과옥조로 삼아 전력을 기울인다. 

  이런 우리에게 전우익 선생이 사자후를 토한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맞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는가? 혼자만 고고하면 무슨 재민가?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면 인간이 아닌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조화를 이루는 삶, 조금씩 덜어내고 아끼는 삶에 대해서 일상을 통해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현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없이 부러우면서도 쓸데 없이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따라가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마지막으로 그의 말 한마디를 다시 읊조려 본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PS. 분량에 비하여 상당히 무거운 내용. 몇번을 씹어도 충분히 맛이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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