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 우리 땅을 선택한 귀화인들의 발자취
박기현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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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를 알고 있는가? 러시아 태생으로 한국에 귀화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그가 러시아에서 자랐기 때문에 맑시즘에 친숙한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이것을 가지고 그의 생각을 좌파적이다 빨갱이다 부르는 것이야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에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보다보면 이것은 상식 이하의 내용이다 싶을 때가 있다. 그의 생각이 아니라 그의 출신 성분을 가지고 그를 깎아내리는 의견들이다. 한국 사람도 아닌데 지가 뭘 안다고 한국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느냐는 요지의 글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박노자가 귀화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면서 박노자를 언급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의식 깊이 뿌리박고 있는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가장 잘보여주는 케이스가 박노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어 보았는가? 그는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보다 더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책 제목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다. 한국의 고대사를 공부하였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한국에서 버티지 못하고 노르웨이로 가면서도 한국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진보신당 당원이기도 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박노자를 외부인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자랑스럽게 배웠던 것이 있다. 우리나라를 거의 천번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침략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며, 흰 옷을 즐겨 입는 백의 민족으로 단일한 혈통을 가지고 있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어떠한 이의라도 제기하는 순간 그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조작된 신화라는 의심이 든다. 조작이라는 말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는 것 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실을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부각시키는 것 또한 일종의 조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침략을 받았지만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기보다는 침략할 힘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며, 흰 옷을 즐겨 입었다는 말은 하얀색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천을 염색해서 입을만큼 공업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예전에 삼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 한 교관이 피를 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군인이 군인답지 못하고, 사람들이 군인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니 군인이 본분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9백 수십번의 침략을 받았지만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이 평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힘이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정확하게 이런 말을 했다. "뭐여? 몇년 내에 천번 채울 것이여?") 단군의 후예요 단일민족이라는 말 또한 조작된 신화일 뿐이다. 앞의 두 가지가 특정한 부분을 부각시킨 것이라면, 후자는 말도 안되는 내용을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씨 가운데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성씨들이 중국에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많은 성씨들이 중국에서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조작된 신화를 고집하는 것일까? 말해봐야 무엇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교육의 힘이 아니던가? 어릴 때부터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머리 속에 주입하니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많은 성씨들이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생각과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우리 생각의 깊은 곳에 공존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리 머리 속에 스위치가 있어서 어느 순간에는 다양만 성씨의 유입을, 어느 순간에는 단일 민족을 고민없이 변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사실은 조작된 것임을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밝히고 있다. 그것도 딱딱한 역사적인 사실만 파는 것이 아니라 각 문중의 족보와 역사적인 사실을 같이 살펴보면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들의 유래에 대해서 역사적인 사료를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도 하고, 혹은 역사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가장 합리적이라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또한 각 왕조 속에서 이루어진 외국인의 귀화에 대해서도 꽤나 흥미로운 시각에서 다루기도 한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삼국 시대의 귀화 인물에 대해서 다루면서 신라의 초기 귀족들의 탄생 설화가 귀화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꽤 신선한 해석이기 때문에 막판까지도 책을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논의의 원점으로 돌아와서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하게 이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내가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겠고,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지나면서가 아닐까 한다. 단일 민족, 즉 순혈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통치를 쉽게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아니던가? 히틀러가 아리안 순혈주의를 주장하면서 유태인을 학살하고, 이를 통하여서 독일 내부의 반발을 무마했던 것은 너무 유명한 일이 아니던가? 아마도 3공화국을 지나면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순혈 주의를 국민들에게 주입했던 것은 아닐까? 이 여파가 오늘날까지 미쳐서 외국인에 대한 배척과 깔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은 이미 다문화 국가이다. 다음 대선에서는 결혼 이민을 왔던 사람들의 자녀들이, 즉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그 어떤 정책적인 배려도 없다. 그냥 무시해도 될만큼 적은 숫자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코시안이라고 불러가면서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우리 민족이 아닌 것으로 따돌리는 오늘날의 현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물론 새누리당에서 이자스민을 의원으로 공천했지만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퍼포먼스라고 느껴진다.)

 

  같은 민족이라는 말은 혈통이 같다는 말이 아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운명 공동체로서 같이 살아간다는 말일 것이다. 혈통이 같다는 말도 웃기는 말이고, 설령 혈통이 같다는 말이 성립이 된다고 해도, 외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에 감사하면서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재외교포들이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운명공동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에 감사하면서 미군에 복무한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한다면 그 사람이 한국의 장관일까 미국의 장관일까, 그 사람이 한국 사람과 운명 공동체로서 자신을 자각할까? 물어 무엇하겠는가?

 

  이제는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폐기해야 하지 않을까? 귀화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에게,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은 혈통이 같은 단일민족이라고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그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지 않겠는가? 지구촌 운운하는 이 시대에 이 만큼 시대 착오적인 말이 어디있겠는가? 이젠 단일민족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붙잡기 보다는 어떻게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다문화 가정을 포용할 것인가, 그들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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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4-2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집단은 오래 갈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그 예외로 보여지지만, 사실 그들의 케이스는 지정학적 특성이 낳은 부분이 많다고 보구요, 또 인종적으로도 '유대인'이 무엇이냐는 논란이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강성했던 제국시대의 국가들을 보면 다문화/다인종을 널리 포용한 경우가 많죠. 개인적으로 아시아에서, 한국의 위상을 볼 때, 이민정책을 잘 쓰면, 적어도 동남아권에서는 고급기술자, 고학력자, 부자 등 소위 '고급'두뇌집단을 빨아들일 수 있다고 봐요. 지금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민법 개혁의 취지에서도 보이지만,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는 인구전쟁의 시대니까요...

saint236 2013-04-25 08:38   좋아요 0 | URL
유대인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뭐 이런저런 논란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요. 유대인을 언급한 것은 히틀러의 아리안 주의의 일차적인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집시도 같은 경우겠지요. 저도 이민 정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정책이 나와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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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난의 역사가 뿌리 깊다는 말일 것이며, 가난을 없애기 위해서 많은 정책들을 내놓았지만 그것들이 어느 것하나 유효하지 않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가난에 대한 더 적절하고 유효한 정책을 찾아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포기해야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 가난이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더라. 이런 것으로 보아 정책의 문제라기 보다는 개인의 문제일 것이다라는 것이 가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반적인 시선이며, 가난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이 아닌가?

 

  그 결과 청년 실업을 외치는 이들에게 "바보야, 그것은 너희들이 제대로 일하지 못해서야, 너희들이 공부해야할 때 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너희들이 게으른 거야."라는 말로 정죄하지 않았던가?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알바를 전전하며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청춘들에게 좀더 열심히 해봐라 실력이 없으니까 그런거야 실력을 키워라는 김미경, 혹은 이지성 식의 호통을 치든지, 아니면 괜찮아 이러다가 나아질거야라는 김난도 식의 위로를 건네면서 우리는 할일을 다했다고 뒤짐을 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청년 실업을 바라보는 모습이 아닌가? 물론 너희들 왜 그렇게 살아 힘들다고 짱돌이라도 집어던지면서 발악이라도 해봐라는 우석훈 식의 훈수도 있지만 모두다 공허한 이야기일뿐이다. 그 어떤 것도 청년들에게 위로도 되지 못하고, 그들의 지친 삶에 조금의 힘도 보태주지 못한다. 비단 청년뿐이겠는가?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다시 재기할 수 있겠지, 쨍하고 해뜰날이 오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일터로 나가지만 그 믿음에 배신당하는 수없이 많은 우리 친구들이 있고, 아버지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를 주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얼마나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노동 유연성이라는 말이 경제계에서 성서가 되어 버렸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노동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 경제가 퇴보되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과 경쟁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산 단가를 낮추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건비를 낮출 수 없다는 주장이 한국 경제의 황금율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황금율 아래에서 복지 혜택도 사라지고, 수당도 깎이고,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노동자들의 의무이자 책임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 결과가 무엇인가? 사상 최대의 무역 흑자를 냈다는 신문 기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의 질은 낮아지지 않았는가? 누구의 말대로 살림살이 좀 나아졌는가? 사회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수천만원의 빚을 지고 시작하는 사회 구조가 올바른 것이기나 한가? 능력도 없으면서 왜 대학가냐고 몰아붙이기 전에 대학을 나오지 않고는 왠만한 일자리조차 찾을 수 없는 사회를 탓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도대체 물건을 생산하는 현장직에서 일할 사람을 찾으면서 토익과 토플 점수를 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 물건을 생산해서 직접 외국에 나가서 팔고 오기라도 하나는 소리인가?

 

  월가를 점령하라는 말을 마치 "김정일 장군 만세"인 것과 동일할 정도로 빨갛게 포장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기본급을 조금만 올려달라는 말이, 복직시켜달라는 말이 빨갱이들의 투정으로 둔갑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외국 사람의 노동의 배신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삐딱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곳곳에서 바겐세일이 성행한다. 1+1이 아니면 물건을 팔기도 힘들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자꾸 싼 것을 살 수밖에 없는 주머니 사정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아무리 싸구려를 사려고 노력하고, 싸구려를 먹고 입을지라도 사람이 싸구려일 수는 없다. 사람은 사람이다.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존재다. 이 사실이 부정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닌 사회요, 시대에 역행하는 사회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가 꼭 이렇다. 사람은 돈으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참 때려놓고 돈으로 무마하는 사람들이나, 법을 위반해 놓고 사회에 재산을 기부하면 정상참작이 되고 용서받을 거라 생각하는 사회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사회일리는 없다.(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인간의 조건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한가지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사람 값이 참 싸다는 것이다. 돼지보다 사람값이 싸고, 오이보다 사람값이 싸고, 편의점 물건보다 사람값이 싸다. 50원 올려주면서 대폭 임금을 인상했다는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일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묘하게도 책 제목이 아렌트의 제목과 일치한다. 나치에게 유대인이 사람일리 없었던 것처럼, 이 사회 속에서 일용직이, 비정규직이 사람일리는 없다. 그러니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나를 사람으로 봐달라고 절규하면서 말이다. 나꼽사리의 노래가 자꾸 떠오른다. 씁쓸한 마음으로 나꼽살 노래 가사를 적으면서 달래본다.

 

  yeah 완벽하신 가카께

  도둑적으로 완벽하신 가카를 위해서

  밤잠까지 설쳐가며 용감한 넷이 뭉쳐

  정치에겐 쫄지마 또 경제에겐 속지마

  세상이 밝아질 때까지 끊임없이 외친다.

  국민에겐 헛소리 다 들켜놓곤 큰소리

  나꼽살이 밝혀내는 권모술수 눈속임

  사람값이 싸구려인 물질만능 사회

  빚더미에 파묻혀버린 희망은 어디에

  당신이 골프장 룸싸롱에서 미소 짓고 있을 때

  우리 아들들은 몇 년 지난 중국쌀로 밥을 져

  세금으로 재테크를, MBC에서는 공화국

  못살겠다 못참겠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강자아들이 약자아들을 가지고 노는 게임

  싸우고 부딪쳐봐도 처절히 정해져 있는 선택

  모두가 원하는건 그저 작은 희망인데

  이미 병든 나라는 우리를 씹어 뱉어 black Korea

  지금은 위급함의 챕터

  90%가 개털되는 미쳐버린 괴물

  인생을 게임으로 바꾼 가카에게 외쳐

  도둑적으로 완벽한 당신이 바로 챔피언 black Korea

  지금은 위급함의 챕터

  90%가 개털되는 미쳐버린 괴물

  인생을 게임으로 바꾼 가카에게 외쳐

  도둑적으로 완벽한 당신이 바로 챔피언 black Korea

  yo ha ha 나는 꼽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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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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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값이 싸구려인 세상에게 우리는 싸구려가 아니라고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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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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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골의사 박경철!

  그리고 그리스 문명!

 

  두 가지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박경철에 대한 이미지야 좋고 나쁠 것이 없다.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그의 책을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 혁명"이라는 책을 이북으로 사서 짬짬이 읽고 있을 따름이다. 나에게 박경철은 작가 박경철이 아니라 안철수의 동료 박경철일 뿐이다. 작가 박경철이라 함은 그저 자기 계발서를 썼다고 생각하는 정도?

 

  그렇지만 그리스에 대해서는 환장한다.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고, 그리스 문명에 대한 책들은 꽤나 찾아서 읽는 편이다. 서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철학을 알아야 하고,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지론 때문이다. 물론 신화가 재미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와 문화에 대해 십덕후는 아니지만 최소한 오덕후, 혹은 삼덕후는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꼽는 그리스에 대한 한국의 대가는 이윤기와 천병희이다. 해석의 이윤기, 번역의 천병희! 편견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책을 읽어 본 후에 갖게된 편견이니 너무 타박하지 않기를 바란다. 언어학자의 시선에서 번역하기 때문에 깔끔한 맛은 있지만 철학서를 읽을 때에는 꽤나 고민하게 만드는 천병희,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그리스의 문명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이야기하면서 그 깊이를 자랑하는 이윤기! 이윤기가 죽었다는 사실에 꽤나 애석해 하면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야금야금 아껴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요즘은 천병희 역의 시학을 읽으면서 역시 번역은 천병희라는 생각에 숲에서 나오는 그의 번역서를 모조리 읽어보겠다는 야심만 품고 있다.

 

  이런 내게 있어서 박경철의 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는다는 것은 꽤나 큰 모험이었다. 그것도 실패할 가능성이 다분한 그런 모험 말이다. 그래서 굳이 읽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덜컥 알라딘 서평단의 도서로 받게 되었다. 그래도 박경철이라는 이름값에 그리스라는 문명이 더해지면 홈런은 아니더라도 평타는 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읽기 시작했다. 일단 시작은 꽤나 괜찮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품고 그리스 여행을 했다는 그의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정말로 감명깊게 보고 영화를 봤던지라 그에 대한 덕후력을 거리낌없이 표방하고 있는 박경철이 부러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내용도 꽤나 재미있었다. 그저 유명한 예술품들만 보고 와서 대충 쓰는 그런 책이 아니라 그리스의 곳곳을 누비면서,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현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글을 읽으면서 이거 꽤나 괜찮겠는 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를 그리스로 이끈 카잔차키스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 내지 못하게 했다. 가끔 글이란 것을 끄적거려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머리에 맴도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그 이야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많을 때 그 때가 글을 쓰기가 가장 어렵다. 그 순간에 가장 먼저 할 일은 과감하게 가지 치기를 하는 것이다. 박경철의 책은 이것이 부족하다. 그리스를 여행하는 곳곳에서 그가 카잔차키스를 만난 것은 그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직접 그 현장에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다. 이야기에 몰입할 만하면 여지없이 카잔차키스가 튀어나온다. 뭔가 분위기가 무르익을만 하면 카잔차키스의 작품이 인용되고 있으니 어찌 글 속으로 몰입할 수가 있겠는가? 마치 여자 친구를 위해 여러가지 책을 읽으면서 이벤트를 준비했던 남자가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여자친구가 감동할 시점에 "감동스럽지, 어느 책에 보니까 이러면 감동받을 거라고 하더군."이라면서 초를 치는 격이랄까?

 

  그냥 카잔스키가 그의 안으로 갈무리 되었으면 좋았겠을 것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굳이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그의 사고의 단편들을 무리하게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책의 절반이 넘어가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인용하는 대목이 오면 과감하게 건너뛰는 것이다. 그러니 한결 책읽기가 수월하다. 그리고 꽤나 흥미진진해 진다. 카잔스키를 품고 그리스로 날아간 박경철은 결국 카잔차키스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독자인 나는 꽤나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물론 내가 글을 쓴다면 이만큼은 못쓰겠지만 말이다. 그저 그리스 오덕후 내지는 삼덕후로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 꽤 재미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값에 비해 아쉬움이 있다. 마치 이대호가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이 아니라 일루타를 친 것을 봤을 때 느끼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같은 것이다. 또 다시 고민이 된다. 후속편이 나오면 또 사야할까라는 고민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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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3-2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는 예전에는 박경철씨의 독서론이 좀 맘에 안들었더랬지요. 실용서 위주로 읽으라는 말을 어디선가 했었어요. 자기도 문학 읽으면서 말이죠.ㅎㅎ 이 책은 좋은데, 앞으로 두고 봐야죠. 전문작가의 글에는 미치지 못하는게 좀 있죠. 근데, typo지요? 박경철이 김경철로 한번, 그리고 카잔차키스가 카잔스키로..-_-:ㅎㅎㅎ typo겠지요??ㅎㅎ 공식리뷰같아서 못보시고 지나가셨음 고치시라구 굳이 썼어요.ㅎㅎ

saint236 2013-03-28 07: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나 많이 적었군요. 김경철은 헷갈렸던 것 같고. 도대체 왜 카잔차키스를 카잔스키로 적었던 것일까요? 그게 참 미스테리합니다.하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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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 대학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하버드와 MIT를 이야기하겠지만 팟캐스트를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약간 다른 대학의 이름이 나온다. 솔직하게 나도 이 대학이름은 팟캐스트를 통해서 들었다. 그 대학의 이름은 "존스홉킨스 대학"이다. 김용민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대묘사를 하면서 이름을 읊어대던 그 대학, 그리고 팟캐스트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초청 강연을 했던 바로 그 대학이다. 그 대학에서 수십년 동안 강의한 교수들이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라는 이름의 묘한 책을 냈다. 이름만 봐도 이 책이 충분히 정치색이 짙겠구나, 한발 더 나아가서 빨간 물이 든 책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책을 한장한장 읽어가면서 미국의 정치 구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미국의 정치제도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꽤 방대한 분량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이 그냥 빨간 책이네하고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이 책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자세하게 제시함으로 자기들이 주장하는 것이 신뢰해도 좋은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게 자세하게 제시해 놓은 근거들 때문에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 여간 피곤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역사적인 상황과 정치적인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본문과 각주를 오가다 보면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조차 까먹기 일쑤이다.

 

  46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민주주의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가 효율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관료조직을 만들어 내면서부터 사람들은 정책에서 자발적으로, 또한 비자발적으로 거세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하고, 그렇게 이끄는 방향으로 정책을 만들어 왔고 그 결과 어떤 사안에 대해서 집단적인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대신에 개별적으로 소송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마저 국민보다는 법원의 판결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국민은 정치적인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기업의 고객으로 전락해 버리고, 본인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정책에 대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그리고 정치인들은 국민의 동원을 최소한 억제하여 예측가능한 범위 안에 두고 싶어한다. 이게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책을 덮으면서 이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지난 총선과 대선을 통하여 이미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십대들의 우발적이고 철없는 치기라는 결론이 내려진 디도스사건, 터널 디도스사건, 투표시간 연장 논란 등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유권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과거 3공이나 5공시절처럼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국민들의 투표율을 올려서 서로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뛰어넘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에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로 나누어서 각자의 지분만큼 가져가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자기들의 기득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누리당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고, 다른 당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처럼 정당이 정치색에 기반하기 보다는 한국처럼 지역색에 기반을 두게 될 때 이러한 현상은 더 두드러지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입니다. 꼭 투표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투표를 방해하기 위한 고난이도의 수법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투표 인증샷을 올리면 그들을 칭찬하고 독려해도 부족할 판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목하게 투표 인증샷을 올리는 것에 대해 심적인 부담감을 갖게 만들어 놓지 않는가? 심적인 부담감은 안할 확률을 높이는 것이며, 이것은 투표율 저하로 이어짐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지 않는가?

 

  한국의 정치인들도 국민을 국민으로, 대화와 소통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동원의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시혜를 베풀어야하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혹은 가끔 자기들이 언론 앞에서 비장한 모습으로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을 할 때 악세사리로 등장할 뿐이다. 선거철마다 시장에 가서 손을 잡아 주면 그저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존재로 남아 있기는 바라는 지도 모른다. 이런 정치 풍토 속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도 다운사이징 되고 있고, 혐오감이 팽배하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꽤나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조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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