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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평점 :
몇년 전이다. 아마도 광우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민들이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왔을 때의 일일 것이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혔다. 엄마들이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미 사라졌던 전대협의 깃발도 다시 올랐다. 지칠 줄 모르고 거세게 타오르는 촛불을 명박산성으로 가로 막고 소통을 이야기하던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겸허히 불렀단다.
그 즈음 한나라당의 주성영 의원은 텔레비전 토론회에 참석하여 촛불집회를 보면서 천박한 천민 민주주의라는 황당한 드립질을 하셨다. 비슷한 색깔을 가지신 다른 의원들은 국민들이 떼를 쓴다고 민주주의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국민들을 계도하기에 바쁘셨다. 경찰청에서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하에 여대생에게 발길질을 하고 시위 진압 특별팀을 신설했다. 물론 온갖 시위 장비를 다 시험하는 실험 정신도 보여주셨다.
국민들도 반대편의 생각을 들어주지 않는 정부에 화가 나서인지 점점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닭장차 투어를 하게 되었다. 내 기억에는 초등학생도 이 투어에 강제로 참여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 혼란스러운 2년 반이었다. 스펙터클하고, 판타지하고, 서프라이징한 시간들이었다.(한국 말로 쓰면 감정 절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코쟁이 말로 슨다.) 이 시간이 그저 답답하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지난 2년 반동안 이명박 정부가 해 놓은 가장 큰 업적은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 때보다 사회과학 서적이 많이 읽혔으며, 정치에 대하여, 정체에 대하여, 헌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한 시간은 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거 번역된 책이 바로 이것이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인데 내겐 원제가 오히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민주주의, 어떤 상태에?"라는 원제를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보다는 "당신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신가?"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감벤, 바디우, 벤사이드, 브라운, 낭시, 랑시에르, 로스, 지젝이라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기록한 짧은 소논문들과 인터뷰문을 모아 놓은 책이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가벼운 분량에 12000원에 육박하는 책값이 부담으로 다가왔는데, 막상 읽어보니 진짜 부담은 책값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마음 잡고 읽으면 이틀이면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내용이 너무 어렵고 딱딱해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몇달을 끌어 간신히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란 대중이 주인이 되는 정체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주인은 대중이라고 배워 왔다. 역사적으로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의 주인은 자격을 갖춘 아테네 시민, 그 중에서도 남자만이다. 그런데 로스는 민주주의의 어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조지아 오버가 지적하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권력을 지칭하는 세 개의 주요 용어(군주제monarchia, 과두제oligarchia, 민주주의demokratia) 중 오직 민주주의만이 숫자에 무관심하다. 군주제의 [어근인] '모노소monos'란 일인 지배를 지칭하며, 과두제의 '호이 올리고이hoi oligoi'는 소수의 권력을 지칭한다. 오직 민주주의만이 "[지배자의 수가] 얼마나 많으냐?"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데모스의 권력은 주민 전체의 권력도, 다수의 권력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나의 권력이다. 아무나는 지배받는 자의 명칭이자 지배하는 자의 명칭이다.(P.150)
민주주의의 주인을 주민 전체의 권력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전체주의로 흐르기 마련이다. 독일의 나치즘도, 이탈리아의 파시즘도, 그리고 북한의 체제도 사실은 독재나 전체주의이면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자신들 앞에 내세우는 것을 보면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명확해 진다. 민주주의 권력의 주인은 아무나 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로 범주화할 수 있는 국민이나 대중도 아니고, 오직 개개인만이 권력의 주인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무나라는 말이 참 묘하다. 불특정한 개개인이 모두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아무나를 잘못 오해하면 주인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아무나 먹는 놈이 임자라는 말도 안되는 똥배짱이 생긴다. 이러한 똥배장을 가진 사람들이 떼법이다, 천만한 천민 민주주의다 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권력의 주인인양 행세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는 아무나 가질 수도 없고, 소수라고 무시할 수도 없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특정인에게 권력이 이양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이유때문에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를 손상시키면서까지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본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개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을 보장해 줘야 한다. 실제로 무늬만 민주주의였던 고대 아테네에도 민회가 있었고, 아크로 폴리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은 공적 공간의 도래와 뗄 수 없게 된다. 이 공적 공간이 말라 죽을 때 정치적 대의는 장난이나 웃음거리가 된다. 아렌트는 정치적 대의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우스꽝스런 가극'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아니면 비극적 코미디이거나.(P.71)
개인의 생각을 자유스럽게 발언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이 말라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 민족주의이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개인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적인 공간이 말라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인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닐까? 만약 국민 스스로 공적인 공간을 만들 요량으로 촛불을 들었다면 그것은 불온한 움직임으로 매도해서도, 폭력 시위로 몰아 강제 진압을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그러한 공적 공간을 말라 죽게 만든 정치인들 스스로 국민에게 석고대죄해야 옳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벤사이드는 영원한 스캔들에서 민주주의의 속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는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으려면 항상 더 멀리 가고, 그것의 제도화된 형태들을 영구하게 위반하며, 보편적인 것의 지평을 뒤흔들고, 평등을 자유의 시험대 위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불확실한 나눔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사적 소유로 인한 피해 그리고 공적 공간과 공공재에 대한 국가의 침해에 필사적으로 항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항구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평등과 시민권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키려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P.81)
민주주의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것, 일상적인 것, 자유와 평등 등 지금까지 사회가 유지해 왔던 가치관들을 끊임없이 흔들고, 기성의 체제에 도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애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살아 있는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안녕한가? 아니다. 절대 안녕하지 못하다. 반대 의견을 철저하게 숫자로 묵살하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기존의 가치 체계를 밀어붙이는 행태는 전혀 민주주의의 속성이 아니다. 스캔들을 일으킬 수 없는 민주주의는 이미 생명력과 매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의 제목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면서 왠지 노무현이 그립다. 최소한 그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반박하려고 했지 누구처럼 싹 무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을 때 햇병아리 검사들의 객기도 "이정도면 막나가자는 거죠?"라는 말로 받아 줄 수 있는 여유는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아량으로 보지 않고 체신머리없다고 보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