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물로 자란다
정강현 지음 / 푸른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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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저자는 눈물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까 제목을 그렇게 지었겠지.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랄 때만해도 남자가 눈물이 많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만큼 인생에 있어 중요한 때를 간과하지 말고 울라는 뜻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좀 바꿔도 되지 않을까? 울고 싶으면 수시로 울되 중요한 세 번은 지나치지 마라. 뭐 그런 뜻으로 말이다.(더구나 여자는 울어도 되고 남자는 울면 안 된다면 그건 사회적으로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사회인가.) 솔직히 어찌 어찌하다 보니 때를 놓치는 때도 많지 않은가.

 

저자는 기자면서 왜 그렇게 눈물에 관심이 많은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하긴, 우리가 세월호를 어찌 있을 수 있을까? 저자는 기자로써 세월호를 취재하기도 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냥 울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소식을 전하는 기자나 앵커는 울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사건을 취재할 땐 아마도 우리 보다 몇 배의 눈물을 흘리고 삼키지 않았을까? 그것을 소회처럼 남겼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김대중이나 김영삼 대통령 때도 국가적으로 세월호만큼 재난이고 슬픈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땐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취급되어 건조하게 보도만하고 지나간 경우가 많았다고. 그래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보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삼풍백화점 붕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로부터 거의 20년 만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물론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을 대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더 이상 그것을 개인적 사고로만 보지 않게 된 것이다.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세월호는 분명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그 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슬퍼했다는 건 내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일에 같이 아파하고 울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 사회는 분명 좋은 사회고, 건강한 사회가 될 확률이 높다고 믿는다.

 

이 책 어딘가 에도 저자가 그런 말을 한다. 눈물방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피시방, 비디오방처럼 눈물방이라는 걸 만들어서 편히 몸을 기댈 수 있는 소파에다 각 티슈 몇 통 갖다놓고, 종업원은 손님의 울고 싶은 심경을 건드리지 않게 최소한의 안내만 한다. “한 시간 동안 우는 데 삼천 원입니다. 필요하시면 함께 울어드리는 서비스도 있습니다.”라고.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그럴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지하철을 타고가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동차 출입구에 기대서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우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게 벌써 10년쯤 된 일이었던 것도 같은데, 그녀는 왜 우는 걸까? 아는 사이라면 어깨라도 빌려줬을 텐데, 오히려 무심한 척 외면하려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도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고, 잔칫집 가기를 바라지 말고 초상집 가기를 더 바라란 말도 있다. 모든 사람이 지하철과 버스만 타면 다 스마트폰만 보고, 졸고 있는 것 같아도, 또 많은 사람이 안구건조증에 시달리는 것 같아도 누군가는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상해 보라. 백만 년 후의 사람들은 눈에 눈물샘이 퇴화되어 웃기는 하는데 우는 것을 모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지.

 

저자는 기자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기자라는 완장을 떼고 온전히 인간으로 돌아가 쓴 저자의 에세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것도 이제 40대에 든 남자의 인생 고백이 들어있다.

 

나도 40대 이전을 생각해 본다. 20대는 좌충우돌이 많았고, 그나마 30대쯤 되니 비로소 세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30대 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자존심이 팽팽했던 시절이었다. 나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세대를 살고 있는 선후배들 역시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니 그 안에서 얼마나 자존심의 싸움이 치열했던가. 그게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면 난 오늘 이렇게 한가하게 이 책의 리뷰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40대는 확실히 꺾였다. 옛날 같이 피터지게 싸울 힘도 자존심도 없다. 뭔지 긍휼에 눈이 뜨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평생 미워할 것만 같은 사람도 (물론 여전히 밉겠지만)너도 사느라 힘들겠구나 조금은 한숨 지어줄 생각이 드는 나이가 40대는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계셔줄 것 같은 부모가 정말 늙으셨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도 40대다. 그래서 저자는 세월호에 대한 단상 못지않게 부모에 관한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저자가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신의 부모가 더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인생은 살아지는 것 같아도 사느라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때로 미친 척이라도 해서 짐을 털어버리고 일탈을 꿈꿔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련만,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힘들게 살지 말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말없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도 40이란 나이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닐까. 40대를 이 책에서 발견하고, 독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잘 건너오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밖에 책이 못지않게 할애한 건 문학과 음악에 대한 단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3분의 1씩을 할애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빙자해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 ()부모와 가장으로서의 이야기/ 취민지 투잡인지 모를 팟캐스트 운영자로서 문학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중간 중간 끼어드는 저자의 단상들로 구성된. 그렇게 되면 4분의 1이 되는 건가? 아무튼.

 

기자가 문학에 관한 글을 쓰면 꽤 흥미롭다. 작가나 기타 문학 종사자들이 문학 작품을 쓰는 것 하고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다. 이 책도 그랬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한때 작가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문학에 관한 애정이 느껴지고 실제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작가는 무엇으로 글을 쓰는가? 나는 오래도록 분노가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 것이라던 나의 사부님의 말씀을 철석 같이 믿었고, 나는 그것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여전히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다. 분노만이 글을 쓰게 만드는 건 아닌 것 같다.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을까? 그중 하나가 분노겠지.

 

저자는 작가를 꿈꾸기 전에, 기자가 되기 전에 오래 전부터 독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설과 시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게 좋은 소설이란 가장 잘 아파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을 잘 느끼는 작가가 등장인물의 아픔 속으로 깊이 들어간 소설이, 나는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 인물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데, 좋은 소설은 그 이해의 공감대가 넓고 깊게 형성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106~107p)

 

이 말을 후에 유안진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뒷받침 해주고 있기도 한데, 유 시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시인은 져야 합니다. 져줘야 이기는 게 시거든요. 지는 건 진실이고 이기는 건 사실이죠. 역사(사실)는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진실)은 패자의 기록이잖아요. 진실을 아름답게 지켜내는 게 문학이죠.” 그리고 저자는 이 말 끝에 이런 말을 남긴다. 진실이 패자의 기록이란 말은, 진실이란 결국 패배한 이들에게서 길어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또한 좋은 소설에는 좋은 대화가 있다고 했다. 좋은 대화는 소설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삶의 진실을 가장 나긋나긋한 방식으로 일러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저자는 베스트셀러는 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온전한 책의 힘이 아니라, 잘 설계된 기획의 산물처럼 여겨져서라고 한다. 출판시장에서, 잘 기획된 책은 잘 쓴 책을 자주 이긴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취향에서, 잘 쓴 책은 잘 기획된 책을 항상 이기고야 만다고 했다. 이게 다 책은 단순한 글 묶음 상품이 아니라, 글 그 자체여야 한다는 편견 때문이며 당분간 그 편견을 고칠 생각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독자를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어도 작가는 글을 쓰는데 힘이 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자신의 글을 쓰기도 전에 세상의 잘 기획되고 편집된 글에 목을 매는지. 또한 독자는 요즘 잘 나가는 책이 뭔지를 알아 스스로의 선택을 유보하거나 불신하는지. 작가도 글을 쓰는데 자기 철학이 있어야하듯, 독자도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자기 철학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면 더 좋은 책 세상이 될 텐데. 너무 우주적인 바람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안진 시인의 말처럼, 기자 역시 승자의 기록이나 쓰는 역사가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약하고, 소외되고, 문제 많은 곳을 건드려주고 보여주는 게 기자 정신에 더 부합되지 않을까? 저자는 그런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아 흐뭇했다. 또한 이곳저곳 밑줄 긋다 나중엔 그것을 포기했다. 공감하고 생각할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세월호로 돌아가서, 마침 오늘 세월호가 똑바로 세워졌다는 뉴스 속보를 보았다. 무려 4년의 일이다. 기울어졌던 세월호를 바로 세우는데 왜 그처럼 많은 세월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앞서 같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좋은 사회, 건강한 공동체로 나가는 징조라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그 사건으로 인해 이미 너무 많은 가족들이 상처를 받았다. 국가가 국민과 가족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함께 흘리는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난 4년 동안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난 아무런 답도 달지 못했다. 사실은 그런 불행한 일에 함께 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나눌 좋은 일이 더 많아 함께 웃을 수 있으면 그게 더 좋은 일 아닌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 글제목은 줄리아하트 밴드가 부른 <당신은 울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제목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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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10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물만큼, 아픈 만큼 사유가 깊어질 것이라 해도 역시 우린 행복의 길을 지향하죠.
더 이상 슬픈 사고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민이 흘린 눈물 중 세월호로 흘린 눈물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stella.K 2018-05-11 15: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
유독 세월호는 쉬 잊히지 않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미처 다 피워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서 일까요?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ㅠ

hnine 2018-05-10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인용한 유안진 시인의 말이 명언이네요.

stella.K 2018-05-11 15:48   좋아요 0 | URL
h님 좀 생뚱맞지만 나중에 기회되시면
<미스티>라는 드라마 한 번 보세요.
거기서도 보면 사실과 진실이 뭐냐는 사유가
미스터리하게 펼쳐지는데 정말 잘 만든 드라마예요. 흐흐
 

 

이책을 읽고 뜻이 있어서(읭?) 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미 밝힌 바도 있지만 블로그 활동을 하고 리뷰를 비롯해 이런 저런 낙서 같은 잡글을 많이 쓰다보니 굳이 일기를 따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이책을 읽고부터는 꼬박꼬박 읽기를 쓰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일기 쓰기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내가 오래동안 일기를 쓰지 않은 이유중 하나는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서다.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때 누구더러 내 일기장을 치워 달라고 부탁을 하겠는가? 나의 흔적을 가급적 남기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면 최대한 적게 남겨야 할 것 같고 그렇다면 일기장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볼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진짜 사춘기 때부터 모아 온 일기장이 못해도 내 허리춤 정도까지 올라와 있는데 거의 보지 않고 옷장 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볼 일이 생겼다. 사실 난 지금 자의반, 타의반해서 뭔가를 쓰고 있는 중인데(이거 정말 지겹게 진도가 안 나간다.ㅠ) 갑자기 어제 글이 막힌 것이다. 온전히 기억에 의지해서 쓰려니 글이 자꾸만 꼬이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몇번의 고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마다 일기를 꺼내 볼까 하다가 그냥 넘기곤 했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잘못 기억하는 나도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는 왠지 그러면 안될 것만 같았다. 그 부분은 뭔가 정확한 근거가 필요한듯 해서 결국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보았다. 무려 19년 전. 그러니까 밀레니엄 한 해 전에 썼던 일기장이다.

 

그런데 진짜 낯설다. 내가 정말 이랬었단 말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나는 이 무렵 <발자크 평전>을 읽고 있었나, 본데 나름 꽤 흥미롭게 읽고 있었나 보다. 

 

"츠바이크의 발자크에 대한 애정이 그가 쓴 평전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츠바이크)는 참 섬세한 사람이겠구나란 생각이든다. 그리고 발자크를 읽으면, 작가는 모름지기 이래야하지 않나란 생각과. 누가 과연 사람들로부터 역사로부터 사랑을 받을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난 이렇게 천천히 읽어낼 수 있는 책을 얼마나 좋아하게 됐는지?

벌써 이 책을 손에 쥔지가 3주가 지나간다.

아직 반도 못 읽었는데..."           

                                                     -10월 13일-

 

"...... <발자크 평전>을 너무 오래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까지 꼭 한 달이 됐는데, 이제 겨우 반 조금 더 읽었다. 빨리 읽어야겠다.

                                                    -10월 30일-

부지런히 읽으면 이번 주 안에 <발자크 평전>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지만 게으름 때문이라면 재고해 볼 일이다. 너무 오래 읽으면 오히려 그 흐름을 자칫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이 그랬다.

                                                   -11월 10일-

 

푸하하~ 난 과연 내가 내 책에 무슨 짓을했던 걸까? 지금 하나 기억하는 건 난 그때 <츠바이크 평전>을 무지 지루하게 읽었다는 거다. 우연히 그가 쓴 단편소설 <체스>가 좋아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몇 권인가의 책을 읽었고, 그중 하나가 이 책이다. 너무 꼼꼼히 써서 지루했던 책.

 

일기장을 아직 다 읽지는 않았만 그때 나는 온통 흙탕물을 뒤집어 쓰면서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그랬지. 사람과 그림은 한 발 떨어져서 보는 것이 좋다고.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교회라고 해서 다니기 시작했데 그 안을 들어가 보니 부조리한 것들 뿐이고, 온통 분노만이 가득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한 목사에 의해 교회 조직에서 퇴출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니까. 분노와 회의로 점철된 일기가 이 한 권의 일기장에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는지 모르겠다.

 

그때를 견딜 수 있었던 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던 것 같다. 분노가 글을 쓰게 할 거라는 나의 사부의 말은 결코 빚나가지 않았다. 물론 난 교회에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건 그저 내게 주어진 일 뿐이었고, 내가 교회에서 겪고 보았던 모든 부조리들을 글로 쓰겠다고 간간히 그 착상과 구성을 적어 두기도 했다. 하지만 난 지금 그 작품 중 하나도 글로 쓰지 못했다. 쓰다가 포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예배와 성경 공부 외엔 교회에서 특별히 하는 것이 없다. 그건 곧 내가 분노할 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글쎄... 내가 지금 또 어딘가에 소속이 되서 봉사를 하게 된다면 예전 같은 분노가 되살아날까? 하지만 난 이제 분노로 나 자신을 소모시키지 않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는 분노하라고 했지만 난 할 수만 있으면 분노하고 싶지 않고, 그것을 할 상황이라면 외면하고 피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 시절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고 싶고, 해결하고 싶다. 그래서 난 그것을 위해 이 일기장을 펼친 것이기도 하고.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겠는가.

 

요즘 난 <우리는 눈물로 자란다>란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정말 다 읽기가 아까울 정도로 좋은 책이다. 처음엔 무슨 젊은 아빠의 육아 일기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모 방송국 기자의 에세이다. 처음엔 뭐 젊은 사람이 글을 이렇게 잘 써? 시샘이 났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 밖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기는 또 얼마만인가? 새삼 헤아려보게도 된다.

 

 

 

읽다보면 거의 말미에 오은 시인의 '분더킴머'란 시를 만날 수 있다. 잠시 소개를 해 보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쳐질 때

      (...) 

     눈을 감아도 내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참고로 분더킴머는 독일어로 '놀라운 것들의 방'이라는 뜻이란다. 즉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에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려고 자신들의 방에 물건을 수집했는데, 그런 방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오은 시인은 1984년 생으로 지금 한창 치열한 30대를 살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녀가 실제로 지금 치열한 삶을 사는 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시가 실린 시집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그것을 뒷바침 해 주는 것도 같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제목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입니다. 이걸 오은 식으로 읽어볼까요. 분위기를 분(憤) 위기(危機)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읽어 본다면, 위기를 괴로워하다는 뜻이 되겠죠. 위기를 괴로워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청춘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서른 즈음의 우리는 위기를 괴로워하기를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메시지로 읽으면 어떨까요.  (253~254p)

 

그래. 밀레니엄 한 해 전의 나도 분(憤)위기(危機)를 사랑했던 30대였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그때를 참 잘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고, 위의 글이 선물 같이 읽혀지기도 한다.      

 

결국 난 글을 쓰려면 이 일기장을 토대로 내 빈약한 기억력을 더듬어 쓸 수 밖에 없다. 이 일기장엔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타계 소식도 씌여있고, 고 신해철에 관한 기사를 읽고 쓴 글도 보인다. 내가 그렇게 꼼꼼한 사람이 못 되는데 이런 것도 썼나 신기방기 할뿐이다.  

 

이 일기장이 그나마 내 빈약한 기억력에 힘을 불어 넣어 준다. 다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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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5-0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는 앞으로도 일기장에 쓰시는 건가요, 아니면 서재에 쓰셔서 저도 읽어볼 수 있게 되는 건가요? ㅎㅎㅎㅎㅎ

아참, 그리고 오은 시인은 남자입니다^-^ 웹툰 마음의 소리 조석 작가님이랑 비슷하게 생기신ㅎㅎㅎ

stella.K 2018-05-09 14:56   좋아요 0 | URL
스요님 100점!
잘 하셨습니다. 이래야 소통하는 맛이나죠.ㅎㅎㅎㅎ

와, 근데 오은이 남자였어요? 전 여잔 줄 알았어요.
안 알려주셨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ㅋ
이 사람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요?
이 책 보고 알았습니다.^^

cyrus 2018-05-08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뷰도 일기라고 생각하면서 써요. 책 읽으면서 생각하고 느낀 감정을 기록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있거든요. 물론 완전히 기억하진 못해요. ^^;;

stella.K 2018-05-09 14:58   좋아요 0 | URL
그래. 좋아. 그런데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봐봐.
또 다른 너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프레이야 2018-05-0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눈물로 자란다, 담아갑니다.
지난 일기장을 읽어보는 기분, 알지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저는.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나 봅니다.^^

stella.K 2018-05-09 15:04   좋아요 0 | URL
띠지에 젊은 남자 사진이 있어서
꼭 직장팜의 유아분투기, 뭐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근데 진짜 글 잘 써요. 부럽더라구요.ㅠ

맞아요. 우선 그때의 글씨체와 지금의 글씨체가
변한 게 없어서 놀랐고, 그때 고민하던 걸
지금은 고민하지 않지만 해결이 되서 고민을 안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되더라구요.
처음엔 19년 전 나를 보는 것이 놀랍긴 하지만 이내 익숙하더라구요.
역시 나는 나 같습니다.ㅎㅎ

2018-05-08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5-09 15:06   좋아요 1 | URL
전 가끔 궁금했습니다. 일기는 잘 쓰고 계시는지...?
잘 쓰고 계시죠?ㅎ

그렇게 짜내는데 그렇게 잘 쓰신단 말씀입니까? 췟!ㅋㅋ

hnine 2018-05-0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강현 기자는 JTBC 정치부회의라는 뉴스에서 반장을 맡고 있어요. 저는 이분이 팟캐스트 진행할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종료되어서 아쉽지요) 소설도 낸 경력이 있고, 글솜씨가 없을리 없는 경력을 이미 갖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stella.K 2018-05-09 15:09   좋아요 0 | URL
제가 뉴스는 KBS만 보는지라 종편은 잘 몰라요.
그럴 줄 알았으면 정말 볼 걸 그랬습니다.
이 사람 정말 맘에 들어요.
그렇지 않아도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이 책 h님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페크pek0501 2018-05-08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내가 이런 글을 썼네, 하면서 저도 제 일기장을 보고 놀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낯설지요.
흔한 말로,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 가 되겠습니다.
스텔라 님은 일기를 많이 보관해 놓으셨군요. 잘하신 것 같습니다.

stella.K 2018-05-09 15:16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잘 못 버리는 스타일이라 그래요.
다시 볼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기억이란 게 참 빈약하더군요.
그러면서 기억력 좋다고 자랑하면 안 되겠어요.ㅎㅎ
하지만 기억과 추억 또는 회상은 다른 것이고
설혹 다르게 기억하더라도 그것도 나라고 생각해요.
언니도 일기 많이 쓰셨죠?^^

blanca 2018-05-09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기장에 대한 소회가 스텔라님과 같아 안쓴 지 꽤 되었어요. 그런데 좀 아쉽기도 하고... 아직은 일기에 대한 제 마음이 잘 정리가 안 된 것 같아요.

stella.K 2018-05-09 15:19   좋아요 0 | URL
ㅎㅎ 언제고 다시 쓰세요.
일기는 원래 쓰고 있는 동안은 잘 정리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어느 날 문득 잊고 있었던 나를 꺼내 보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그런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랄지도 몰라요.ㅎㅎ
 

                

아무래도 고 김주혁의 마지막 유작 중 하나라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을 재해석 했다고 해서일까? 살짝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평점은 생각 보다 그리 높지는 않았다. 결국 감안해서 봐야했다. 

 

얼핏 <왕의 남자>가 생각나는 영화다. 그건 아마도 정진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보단 남사당패가 임금 앞에서 연회를 한다는 설정이 같아서가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는 백성이 곧 나라의 근간임을 바탕에 깔고 있기도 하다. 그런 비슷함 때문에 혹시 감독이 같은가 했더니 아니다. <왕의 남자>는 이준익 감독임을 잊고 있었다.

 

시도는 좋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의 재해석이다. 이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

더구나 '글로 세상을 바꾼 자'란 부제가 있다. 정말 그럴까?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헌종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시절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게 뭐 그리 많았겠는가? 글을 깨친 사람도 그리 많지도 았았을 때이니. 그러므로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도 같다.

 

난 특히 흥부(정우 분)가 비록 청탁 글이긴 하지만 어떤 영감을 받아 미친 듯이 써 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부럽지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작가는 누군가가 자신을 몰아치는 듯한 느낌으로 글을 썼다고도 하던데, 왜 그 놈의 영감은 나에겐 없는지 모르겠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대로 흥부전에선 자기 형수가 휘두른 밥주걱에 흥부가 얼굴에 붙은 밥풀을 먹지만, 이 영화에선 당대 간신 조항리(정진영 분)의 동생 조혁(김주혁 분)이 그것을 대신하고, 그것을 흥부가 자신이 쓴 <흥부뎐>에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 그 얼마나 참신한 발상인가.  

 

누군가 성령을 받을래? 잡스럽지만 영감을 받을래? 하면 난 어떤 영을 선택할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선택이 불가하다. 성령을 받으면 이 세상에선 그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다 천국으로 가지만, 영감을 받으면 우리나라의 6백 년된 소나무처럼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산다면 글쎄.. 그래도 후자를 택하게 되지 않을까? 글이야 쓰니까 먹고는 살겠지. 까이 꺼 600년..? 눈 깜짝할 새다.ㅋ 그래도 이 나이 먹도록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보면 헛된 공상이지 뭐냐? 그냥 성령 받고 죽어 천국 가는 게 맞을 듯 싶다.ㅠ

 

이 영화는 완급조절에도 실패한 영화다. 조금 더 디테일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뭔가 시간에 쫓기는 듯도 하고, 전반적으로도 앞에서 말했던 것을 제외하면 이야기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사실 난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체로 긍정하는 쪽이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는 더 이상 존재치 말아야 하는지. 또한 글로 세상을 바꾸는 건 주로 필화 사건으로다. 이것을 통해 역사에 묻힐뻔한 사건들이 수면 위로 부각이 되기도 했다. 문득 보고 있는데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생각나기도 했다. 80년 대 민주화 운동 때 <오적>에 필적할만한 글을 쓰다 감옥에 들어 간 작가도 많고. 저항할 것이 아니라면 작가들이 뭐 때문에 글을 쓰겠는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더니 그나마 이 영화는 고 김주혁이 살린 영화라고나 할까? 그가 죽지 않았다면 범작에 그쳤겠지. 난 아직도 이 배우가 고인이 된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영화를 찍고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리도 짧은 생을 살다가 말도 없이 세상을 훌쩍 떠나간 건지. 또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 보다 늦게 세상에 와서 일찍 세상을 떠나 갔을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왜 또 오늘을 살고 있을까 싶다. 

 

그나마 마지막 엔딩이 그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흥부가 모든 것을 종결하고 세상을 주유할 때 이미 세상을 떠난 조혁에게(그는 형 조항리의 칼에 맞아 죽는다) 어르신, 그곳은 행복하시오? 할 때 조혁이 행복은 무슨...하며, 행복할 것도 불행할 것도 없으니 꿈을 꾸라고 말한다. 김주혁의 말이기도 했을까?

 

이 영화엔 요즘 대세 국민 남동생 정해인이 헌종으로 나온다. 그는 아무래도 난 놈(?)임엔 틀림없는 것 같긴하다. 관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귀골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특이한 건 가수 김완선이 대비 역으로 나왔는 게 좀 놀라웠다. 별로 대비스럽진 않지만 연기를 못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맞는 역할을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성희롱 사건에 휘말렸나 본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몸 가짐, 마음 가짐 잘해야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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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03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식을 전해 듣고 젊은 분의 죽음이 참 안타깝다고 생각했어요.

글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 : 당연히 변화시켜야 하죠. 그렇게 믿어요.

좋은 글은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글인데. (남들이 못한 것을) 제대로 해석하기만 해도 좋은 글이고, (남들이 놓친 것을) 문제 제기만 해도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선 무엇에 대해 제대로 해석해야 하고
거기서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 제기를 해야 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저는 칼럼 한 편을 읽고 인식의 변화를 가진 경험이 있습니다.
미투 운동에 대해 쓴 글도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깨우침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을 소설로, 또는 영화로 만들어도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8-05-03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3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3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8-05-05 0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는 사람이 적은 세상이라서 오히려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 참 역설적이면서도 탁월합니다. 한번도 생각 못했던 관점이네요. 글읽는 사람이 많아도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하니 결국 ‘글로 세상을 바꾸는‘건 가능하네요.ㅎㅎ 저도 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600년은 모르겠지만 대량 30-40대의 나이에 머물면서 highlander처럼 600년 정도 살면서 다가올 미래를 보면 즐거울 것 같습니다. 아무렴 똥밭을 굴러도 이승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ㅎㅎㅎ

stella.K 2018-05-05 18:48   좋아요 0 | URL
그러시면서 좋아요는 없으시다니. 섭섭한데요?ㅠㅎㅎㅎ

저 자신으론 80년 살면 잘 사는 거겠지 하다가도
작가라면 나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궁금하거든면
600년 살면서 그 변해가는 세상을 글로 남기고 싶더라구요.^^

서니데이 2018-05-08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드라마와 영화에서 정해인씨가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요. 이 영화에서도 나오는 모양이네요.
언제 처음 봤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드라마였던 것 같기도 하고, 영화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stella.K님, 연휴 즐겁게 보내셨나요.
오늘은 따뜻하고(조금 덥고), 바람불면 시원하고(조금 춥고) 구름도 많이 지나가는 날이예요.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8-05-08 19:22   좋아요 1 | URL
아, 서니님! 잘 지내죠?
정해인 탄탄한 조연 시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봤어요.
누구하고 좀 닮아서 헷갈렸는데 그게
샤이니의 이준호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비교해 보면 이준호가 훨씬 빠지더군요.ㅎㅎ

cf도 점령했잖아요. 한동안 자주 볼 것 같아요.
옛날에 이승기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할듯.
인기있을 때 바짝 조이겠죠.ㅋ

오늘은 날씨가 좀 꾸물꾸물했네요.^^
 

 

 

 

난 노희경 빠다. 그런 내가 이 드라마를 안 볼 리가 없다. 물론 노희경 말고도 잘 쓰는 작가들은 많다. 하지만 작품은 항상 좋은 건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보다가 다른 데로 채널을 돌리거나 영화를 본다. 하지만 노희경 작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난 이 작가가 김수현 작가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오래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

 

노희경 작가는 이번엔 경찰 지구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썼다. 이 작가는 또 언제 거친 경찰 지구대를 조사를 했을까? 놀랍기도 하다.

 

드라마의 기능중 하나는 사회적 기능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어쩌면 그녀가 쓴 작품중 가장 사회성이 짙은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요즘  한창 이슈인 미투 운동에 부응이라도 하듯 성폭력을 다루기도 한다. 물론 지금까지 드라마가 직간접적으로 여성의 성폭력을 다뤄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투 운동 때문일까? 노 작가가 성폭력을 다뤘다는 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지구대 시보인 한정오(정유미 분)는 고등학교 때 성폭력을 당한 전력이 있다. 단순히 스펙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경찰 시험을 통과했을 때만해도 성폭력 사건은 그녀가 수시로 접해야 할 사건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사건을 다룰 때마다 옛 상처가 건드려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그녀가 경찰로서 일하려면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경찰로 거듭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난 13회였던가? 어느 학교에서 성폭행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을 지구대에서 초동대처를 잘해 무사히 잘 넘어갔다. 그로인해 그 학교 학부모들은 지구대 경찰관들이 치하를 받는 자리를 마련했고, 그 자리에 한정오도 함께한다. 그때 한 학부모였던가? 아이들이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지구대 사람들에게 형식적인 조언을 부탁한다. 그러자 그들 역시 형식적인 답변을 하거나 그냥 넘겨버릴 뿐인데 유독 한정오는 심각한 어조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오히려 학부모들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는다.

 

한정오는 좀 더 적극적인 성교육을 통해 성폭력에 취약한 학생들을 보호하자는 취지였는데, 오히려 듣는 학부모는 마치 한정오가 자신의 아이가 잠재적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아 반발을 한 것이다.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 징계를 받도록하겠다고 들고 일어나는 정도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한정오의 입장에선 경험(?)에서 나온 실질적인 조언이었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성폭행이 날로 심해져 가는 것은 알겠는데 설마 내 아이가 성폭행 가해자나 또는 피해자가 될 거라고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성폭행은 가해든 피해든 다 남의 일인 것이다. 

 

한정오의 조언 중에 남자 아이들도 이젠 콘돔 사용법을 익혀야 하고, 학교에서도 이를 적극 가르쳐 줘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된다면 사후 피임약을 사용할 것을 홍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언을 들을 준비가 안 돼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나라 성교육의 실태는 어디까지 왔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난 얼마 전에 읽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이 생각이 났다.

 

부모가 내 아이를 붙들고 성교육을 가르칠 수 없으니 학교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차 제대로 가르칠 리 만무하다. 결국 아이들은 야동을 통해 배운다. 그러나 야동은 야동일뿐 그건 성교육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내 아이는 야동도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대다수다.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해도 적극적이 아닌 소극적인 대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성폭행을 어디서부터 줄여 나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 부모들이 이 책에서 소개한 뉴질랜드의 진보적인 성교육 방법을 소개 받는다면 어떨 것인지 일견 궁금하기도 하다.

 

네덜란드 정부는 22세 모든 여성이 부모의 동의 없이도 무료로 골반 검사, 피임, 낙태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중략)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친밀한 신체 접촉을 할 때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자위와 오럴 섹스, 동성애, 오르가슴을 공개적인 토론 주제로 삼았다. (중략) 네덜란드 정부는 성교육 커리큘럼에 상호작용기술을 추가하여 어떻게 하면 기분 좋은지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하는법과 분명하게 경계선을 긋는 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 2005년에는 네덜란드 청소년 다섯 명중 네 명이 첫 번째 성경험은 자신이 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즐거웠다고 답하게 되었다.(351~352p)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노 작가가 그 부분을 다룰 때 혹시 이 책을 참조하여 쓰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이 책 생각이 많이 났다. 사실 이 책은 성교육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교육을 성교육에서부터 담아내자는 취지가 더 강하다. 그리고 꼭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의 성교육 방법을 따라가자는 것도 아니다. 분명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에 맞는 성교육이 있을 것이다. 그게 좀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정말 우리의 아이들이 콘돔 사용법을 알게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더 빈번한 성행위가 이루어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 누구는 원치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후 피임약이 있다는 것을 알면 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과 의지가 있다면 성폭력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은 그냥 기분 더럽다. 엿 같다.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디어에서도 성폭력을 다루면 사건에만 치중해서 보도하지 그 당사자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간과하거나 소극적으로만 다루고 만다. 물론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실수로 뒤통수를 맞아도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인데, 왜 성폭력을 당하고도 말할 수 없고, 그에 합당한 사과를 받을 수 없느냐는 것이다.

 

나는 요즘 김형경의 <세월>을 읽고 있다. 알다시피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녀 역시 과거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이 책 1권 거의 말미에 보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 단번에 쓰지 않았다. 그 부분을 고백해야 할 부분에서 작가는 일단 팬을 놓을 수 밖에 없었고, 몇번인가의 쉼호흡 끝에 그 부분을 써 내려갔다. 

 

그녀가 성폭력을 당했던 것은 역시 모르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대학 때 연극 서클의 선배로부터 당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도 술이 취해 여관방에서.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게 술은 왜 마시냐고. 그러니까 당하는 것 아니냐고. 여자에게 고의성의 혐의를 두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여자의 음주가 성폭력을 은폐하거나 축소시킬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을까? 여자가 의지적으로 마셨던 것이 아니라, 가해자쪽에서 의도적으로 마시게 한 것이라면 어떻게될 것인가? 그리고 책은 다분히 그런 의도가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 순간을 묘사한 장면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그 남자가 이제부터 자신에게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한꺼번에 알아차린다. 그 여자는 몸을 비틀며 소리 지른다. 그 남자는 여자의 두 손을더 힘껏 누르며, 제 입으로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입을 막는다. 여자는 고개를 뒤튼다. 입에 와 닿는 그의 입을 견딜 수 없다. 그는 점점 더 난폭해지고, 그 여자는 점점 더 필사적이 된다. 이런 일을 당하려고, 이런 모욕을 당하려고, 넉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어머니의 돈으로 등록을 한 것이 아니다.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건 전투다. 삼십 분, 혹은 한 시간쯤 지속되는 전투.

그 여자는 손이 묶이고 몸이 짓눌리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몸을 비틀어 달아난다.

                              (중략)

여자는 다시 잠을 깬다. 그 남자가 또 그 여자 위에 있다. 그제야 그 여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감지하는 기능이 잘못된 그 대책 없음을 깨닫는다. 그가 포기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저 잠깐 휴식이었던 모양이구나. 공포는 두 배쯤 되고 절망은 세 배쯤 된다. 그래도 그 여자는 최선을 다해 피한다. 다시 손이 머리 위로 묶이고 몸이 짓눌리고 입으로 입이 틀어막힌다. 고개를 저으며, 몸을 비틀며, 다리로 허공을 차며......

                                                                    (429~430p)

 

 

이책의 주인공 그 여자는 한 날 한 방안에서 같은 남자로부터 두 번의 성폭행을 당한다. 말 그대로 여자는 어리석은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싫을 것 같으면 1차 성폭행이 있고 당장 자리를 피하지 왜 2차까지 갔느냐. 두 번 해 주길 기다린 것 아니냐고 자기식의 왜곡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성폭행 가해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상대가 소극적이니까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망상. 그러나 나중에 주인공이 어떤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지 보자.

 

그때부터 그 여자에게 성이란 다만 부정적이고 불길한 무엇이 아니라 전투이고 치욕이다. 전투중에도 패전군의 부대에서 치르는 전투다. 내내 수세에 몰리다가 온몸에 상처를 입고 탈진하여, 두 팔을 들고 투항하거나, 힘들게 모욕을 참아내거나, 혹은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싶은, 그런 전투다. 하늘을 향해 배를 들어내고 자빠지면,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패배가 되는 거북이나 말똥구리나 풍뎅이같은, 그런 전투다. 그렇게 성은 부정적이고 왜곡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그 후로도 오래도록.    

                                                                         (431p)  

 

이렇게 성폭행으로인한 상처가 깊은데 여자가 겉으로 반응하는 건 굉장히 소극적이다. 훗날 그 여자가 남자에게 했던 말이 뭔줄 아는가?

"그 일은 없었던 걸로 생각할게요. 그러니 내게 부담 갖지 말아요." (445p) 

 

그러면 남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그 말을 믿거나, 내가 그렇게 별것 아니었나? 오히려 더 자신을 증명하려 들거나 둘중 하나일 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소극적인 반응만 가지고는 이 여성 성폭력 피해는 해결할 수 없다.

 

이 소설이 처음 나온 건 1995년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넘어서야 미투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미투 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운동이 아니다. 그동안 성폭력 사건은 많이 있어왔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 문제는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인식될뿐 인식의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했다. 김형경 작가는 요즘의 미투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작가는 그것을 고백하면서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이 얼마나 남성주의적 사고로 쓰였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남자의 나뭇꾼의 시각에서 쓰였지 옷을 잃어버린 선녀의 입장을 하나도 대변하지 못하며, 오히려 최초의 성폭행 문학이며, 아름답고 슬프지만라고까지 냉혹하고 잔인한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나는 그것과 더불어 뻑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녀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여관이나 모텔에서 다음 날 침대에서 벌거벗은 채 잠에서 깨는 그렇고 그런 클리셰도 없어졌으면 좋겠다. 클리셰가 없을 수 없겠지만 이건 단순한 클리셰가 아니다.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남성주의적 연출 방식이며 여자들이 은근  성폭력을 원하고 있다고 조장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다. 남자는 여자가 원치 않으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말아야 하다. 하지만 부부끼리의 성폭행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서, 사실 한정오는 옳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아니 적어도 성교육에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에 학부모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좀 꺼림한 건, 드라마에서 학부모로 설정된 대부분은 엄마들이라는 것.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아버지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성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다. 또한 그로인해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한정오는 학부모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정말 엿같은 경찰 세상이다.

 

그런데 경찰은 그들만의 위로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사수인 오양촌(배성우 분.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좀 깡패스럽다)이 한정오를 나무라는듯 하지만 현실적인 충고를 한다. 그런 식으로 학부모를 흥분시킬 것이 아니라 정하고 싶다면 교육청 홈페이지에 얘기하고, 너는 하나라도 범죄에 대해 연구하라고. 하지만 난 너의 뾰족함이 좋다고. 배성우를 아주 좋아하지 않지만 이 드라마에선 그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낸다. 이 드라마를 통해 경찰의 애환을 드러내주니 요즘 경찰들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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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5-01 14:57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전 남자들이 자기 할 거 다해놓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자기 합리화하고
왜곡하는 거 그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남자는 할 말없느니까 나중엔 나 좋아하냐고
그러던데 말인지 막걸린지 질리겠더군요.
남자도 성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의 아픔이 어떤 건지 똑바로 봐야하구요.
남자적 사고 방식의 이야기 구조도 좀 발라내야 하구요. 흐~

서니데이 2018-04-3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드라마 이제 끝난건가요. 한번도 못봤네요.;;
오늘까지 4월인데,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어요.
오늘은 바람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는데, 어제보다 기온이 조금 더 올라갔더라구요.
stella.K님, 4월에는 좋은 시간 보내셨나요.
5월에는 기다렸던 기쁜 일들이 자주 찾아오는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편안한 밤 되세요.^^

stella.K 2018-05-01 14:49   좋아요 0 | URL
아뇨. 아마 이번 주에 종영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런 드라마는 드라마 잘 안 보시는 서니님이라도
한 번 봐 줄만하죠.
나중에 tv다시보기로라도 함 챙겨보세요.

고마워요. 서니님도 멋진 5월 되세요.^^

페크pek0501 2018-04-3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라서 여자로 태어나서 슬픈 일, 괴로운 일은 정말 싫은데 현실은 그렇더군요.
미투 운동을 관심 있게 보면서 너무 많은 폭로에, 너무 많은 상처에 충격을 받았어요.
어떻게 여자라고 해서 늘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까요? 남자들은 2차, 3차 가서 술을 마셔도 되고 여자는 그렇게 하면 욕 먹고... 이 불공평함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남자들을 단체로 교육시켜야 할까요?

stella.K 2018-05-01 14:53   좋아요 0 | URL
<세월>이란 소설 읽으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남성주의 편향의 이야기가 뭔지 싹 속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끔찍한 세상을 만든 건 남자면서
여자들에게만 조심해라 그러는 거 옳지않다고 봐요.
성교육은 남자들이 더 많이 구체적으로 받아야 할 텐데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어요.ㅠ

cyrus 2018-05-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 사건을 바라볼 때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편견의 문제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줘야 해요. 이렇게 알려줘도 일부 부모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stella.K 2018-05-01 19:03   좋아요 0 | URL
맞아. 이 드라마 보면서 없는 얘기 썼을 리는 없고
의식의 변화가 이렇게 어려운 걸까 싶기도 하더군.ㅠ

transient-guest 2018-05-05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현재의 사회구조와 왜곡된 힘의 논리라면 ‘남자라서‘ 더더욱 성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섹스와 임신을 다루는 차원이 아닌 보다 더 감성적으로 다뤄져야 하는데 문제는 그걸 제대로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거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관념에 치우친 성교육도 큰 문제라고 봐요.

stella.K 2018-05-05 19:00   좋아요 0 | URL
이렇게 말하면 좀 외람되긴 한데
남자들은 아랫도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서
그것으로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몇 명을 평정했노라고 자랑하잖아요.ㅋ

혹시 기회되시면 저 소설 읽어보세요.
작가가 되게 잘 썼구요,
남자들이 여자를 쟁취하는 방식이 이런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자는 좀 더 인격적이고 잰틀하길 바라는데.
근데 일견 작가가 말하는 그 남자가 나름 순수하기도 해요.
제가 알기론 영화평론가 하재봉으로 알고 있는데,
문제는 그 순수가 남자가 생각하는 것과 여자가 생각하는 게
다르다는 거죠.
여자가 볼 땐 독선, 독점이런 것으로 보이거든요.
 
시, 현대사를 관통하다 - 19세기 말 이후 한국 현대사와 시의 만남
이성혁 외 지음 / 문화다북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지금까지 역사와 문학을 같은 프레임에 넣고 보려고 했던 시도는 여럿 있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적 사건 즉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설이나 평전이 채택하는 방식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시로 역사를, 그것도 근현대사를 돌아보려고 했다는 건 이전에도 있어왔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꽤 신선한 시도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 이병주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와 달리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는 게 문학(22p, 이병주, <변명> 296)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문학 그것도 시라는 장르는 어떠한가?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시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가장 넓은 범위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시가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모든 제약에서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다. 정해진 스토리 라인이나 구조를 따를 필요도 없고, 아예 플롯이 없어도 되는 시는 상상력의 정점과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며, 제한 없이 폭넓게 세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23p).

 

나는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역사 그것도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시의 콜라보레이션쯤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즉 역사도 알고, 시도 알고 일석이조의 학습효과 뭐 그런 거 말이다. 물론 약간의 그런 느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서 시인들은 어떻게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는가를 다시 한 번 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나름 좋았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시가 있다. 우린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무수히 많이 물어보았을 당대의 시인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윤동주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 전후해서 많은 시인들이 시대를 노래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김소월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다. 임화도 있었고, 이육사도 있다. 또한 친일파로 알려진 서정주도 있고, 이광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서정주와 이광수 같은 친일 문학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단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하상일 문학평론가의 글을 읽다가였는데, 그는 친일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판단 기준은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일제 강점기 일본어로 쓴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친일이라는 편협한 언어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일본어냐 조선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일본어라고 해도 반일 정신을 드러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조선어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협력을 드러낸 작품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제 말 일본에 의해서 조직된 친일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규정하는 태도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국보국회를 만들어 작가들을 강제로 소속시켰는데, 그 단체 내부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과 당시 발표한 작품의 내용을 기준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해야지, 단지 이런 단체의 소속 여부를 갖고 무조건 친일 협력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창씨개명 역시 친일의 지표로 삼는 것도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창씨개명은 친일적 요소가 아주 많았고,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친일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광수 같은 경우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철폐하는 의미에서 창씨개명을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무조건 친일로 볼 수 없는 건 그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를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윤동주의 일본식 이름은 히라누마 도쥬다. 그것은 그가 연희 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지 일주일 전 <참회록>에서 자신의 과오를 깊히 성찰한다(131~132p).

 

사실 우리는 대대로 윤동주는 사랑하면서, 미당이나 춘원에 대해선 석연치 않은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왜 윤동주는 되면서 미당이나 춘원은 안 되는 것일까? 이제 우린 미당이나 춘원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필요도 있지 않을까? 불평등과 차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당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것이 철폐된다면 창씨개명 아니야 그 보다 더한 일을 했더라도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우리는 뭐라고 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정체성 보다 앞서는 건 차별 철폐라는 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구를 좀 더 활발하게 진행시켜도 좋지 않을까? 그들은 당대 지식인이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자신과 나라를 팔아 먹었을 거라곤 나 역시 쉽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당대 시인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러니만큼 지금까지 난 시인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반성도 해 보게 된다. 솔직히 옛날에 험악한 시절을 살았을 땐 문인들도 결코 가만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다. 지난 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문인들이 시국선언도 하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늘 날 같이 부요하고 평화로운 시대에 저항할 이유나 필요를 모르는 시인들은 어디서 그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언어의 유희를 즐겨보겠다고 시를 쓰지 않는가? 괜히 시 한 편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건 김지하 같은 시인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 날의 시인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함민복 시인은 그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시 한 편의 가치는 몇 백 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오늘 날의 시인의 쓸모는 뭘까? 어느 시대고 시인과 고독. 또는 시인과 가난은 자웅동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가난과 고독이 있기 전에 저항이 먼저 있었음을 또한 상기하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언젠가 이승만이 처음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자유경제원이라는 곳에서 그의 체제를 찬양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백일장을 개최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때 장민호라는 사람이 1등에 뽑혔는데 그 후 바로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시가 가로로 읽으면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이 되지만 세로로 읽으면 그를 비판하는 글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살아있는 저항정신이요 풍자가 아니겠는가? 과연 오늘 날의 세대에도 이런 시인을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시인은 있어야 한다. 그들만의 청정한 언어로 세대를 정화시키고 그들로부터 깨어있기를 촉구 받아야 한다. 시인들에게 부단한 응원과 애정을 보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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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4-28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로 읽기와 세로 읽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다니... 묘하군요.

2018-04-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8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