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을 읽고 뜻이 있어서(읭?) 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미 밝힌 바도 있지만 블로그 활동을 하고 리뷰를 비롯해 이런 저런 낙서 같은 잡글을 많이 쓰다보니 굳이 일기를 따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이책을 읽고부터는 꼬박꼬박 읽기를 쓰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일기 쓰기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내가 오래동안 일기를 쓰지 않은 이유중 하나는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서다.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때 누구더러 내 일기장을 치워 달라고 부탁을 하겠는가? 나의 흔적을 가급적 남기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면 최대한 적게 남겨야 할 것 같고 그렇다면 일기장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볼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진짜 사춘기 때부터 모아 온 일기장이 못해도 내 허리춤 정도까지 올라와 있는데 거의 보지 않고 옷장 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볼 일이 생겼다. 사실 난 지금 자의반, 타의반해서 뭔가를 쓰고 있는 중인데(이거 정말 지겹게 진도가 안 나간다.ㅠ) 갑자기 어제 글이 막힌 것이다. 온전히 기억에 의지해서 쓰려니 글이 자꾸만 꼬이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몇번의 고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마다 일기를 꺼내 볼까 하다가 그냥 넘기곤 했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잘못 기억하는 나도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는 왠지 그러면 안될 것만 같았다. 그 부분은 뭔가 정확한 근거가 필요한듯 해서 결국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보았다. 무려 19년 전. 그러니까 밀레니엄 한 해 전에 썼던 일기장이다.
그런데 진짜 낯설다. 내가 정말 이랬었단 말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나는 이 무렵 <발자크 평전>을 읽고 있었나, 본데 나름 꽤 흥미롭게 읽고 있었나 보다.
"츠바이크의 발자크에 대한 애정이 그가 쓴 평전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츠바이크)는 참 섬세한 사람이겠구나란 생각이든다. 그리고 발자크를 읽으면, 작가는 모름지기 이래야하지 않나란 생각과. 누가 과연 사람들로부터 역사로부터 사랑을 받을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난 이렇게 천천히 읽어낼 수 있는 책을 얼마나 좋아하게 됐는지?
벌써 이 책을 손에 쥔지가 3주가 지나간다.
아직 반도 못 읽었는데..."
-10월 13일-
"...... <발자크 평전>을 너무 오래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까지 꼭 한 달이 됐는데, 이제 겨우 반 조금 더 읽었다. 빨리 읽어야겠다.
-10월 30일-
부지런히 읽으면 이번 주 안에 <발자크 평전>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지만 게으름 때문이라면 재고해 볼 일이다. 너무 오래 읽으면 오히려 그 흐름을 자칫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이 그랬다.
-11월 10일-
푸하하~ 난 과연 내가 내 책에 무슨 짓을했던 걸까? 지금 하나 기억하는 건 난 그때 <츠바이크 평전>을 무지 지루하게 읽었다는 거다. 우연히 그가 쓴 단편소설 <체스>가 좋아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몇 권인가의 책을 읽었고, 그중 하나가 이 책이다. 너무 꼼꼼히 써서 지루했던 책.
일기장을 아직 다 읽지는 않았만 그때 나는 온통 흙탕물을 뒤집어 쓰면서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그랬지. 사람과 그림은 한 발 떨어져서 보는 것이 좋다고.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교회라고 해서 다니기 시작했데 그 안을 들어가 보니 부조리한 것들 뿐이고, 온통 분노만이 가득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한 목사에 의해 교회 조직에서 퇴출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니까. 분노와 회의로 점철된 일기가 이 한 권의 일기장에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는지 모르겠다.
그때를 견딜 수 있었던 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던 것 같다. 분노가 글을 쓰게 할 거라는 나의 사부의 말은 결코 빚나가지 않았다. 물론 난 교회에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건 그저 내게 주어진 일 뿐이었고, 내가 교회에서 겪고 보았던 모든 부조리들을 글로 쓰겠다고 간간히 그 착상과 구성을 적어 두기도 했다. 하지만 난 지금 그 작품 중 하나도 글로 쓰지 못했다. 쓰다가 포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예배와 성경 공부 외엔 교회에서 특별히 하는 것이 없다. 그건 곧 내가 분노할 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글쎄... 내가 지금 또 어딘가에 소속이 되서 봉사를 하게 된다면 예전 같은 분노가 되살아날까? 하지만 난 이제 분노로 나 자신을 소모시키지 않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는 분노하라고 했지만 난 할 수만 있으면 분노하고 싶지 않고, 그것을 할 상황이라면 외면하고 피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 시절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고 싶고, 해결하고 싶다. 그래서 난 그것을 위해 이 일기장을 펼친 것이기도 하고.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겠는가.
요즘 난 <우리는 눈물로 자란다>란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정말 다 읽기가 아까울 정도로 좋은 책이다. 처음엔 무슨 젊은 아빠의 육아 일기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모 방송국 기자의 에세이다. 처음엔 뭐 젊은 사람이 글을 이렇게 잘 써? 시샘이 났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 밖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기는 또 얼마만인가? 새삼 헤아려보게도 된다.
읽다보면 거의 말미에 오은 시인의 '분더킴머'란 시를 만날 수 있다. 잠시 소개를 해 보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쳐질 때
(...)
눈을 감아도 내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참고로 분더킴머는 독일어로 '놀라운 것들의 방'이라는 뜻이란다. 즉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에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려고 자신들의 방에 물건을 수집했는데, 그런 방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오은 시인은 1984년 생으로 지금 한창 치열한 30대를 살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녀가 실제로 지금 치열한 삶을 사는 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시가 실린 시집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그것을 뒷바침 해 주는 것도 같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제목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입니다. 이걸 오은 식으로 읽어볼까요. 분위기를 분(憤) 위기(危機)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읽어 본다면, 위기를 괴로워하다는 뜻이 되겠죠. 위기를 괴로워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청춘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서른 즈음의 우리는 위기를 괴로워하기를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메시지로 읽으면 어떨까요. (253~254p)
그래. 밀레니엄 한 해 전의 나도 분(憤)위기(危機)를 사랑했던 30대였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그때를 참 잘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고, 위의 글이 선물 같이 읽혀지기도 한다.
결국 난 글을 쓰려면 이 일기장을 토대로 내 빈약한 기억력을 더듬어 쓸 수 밖에 없다. 이 일기장엔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타계 소식도 씌여있고, 고 신해철에 관한 기사를 읽고 쓴 글도 보인다. 내가 그렇게 꼼꼼한 사람이 못 되는데 이런 것도 썼나 신기방기 할뿐이다.
이 일기장이 그나마 내 빈약한 기억력에 힘을 불어 넣어 준다. 다시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