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래도 고 김주혁의 마지막 유작 중 하나라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을 재해석 했다고 해서일까? 살짝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평점은 생각 보다 그리 높지는 않았다. 결국 감안해서 봐야했다.
얼핏 <왕의 남자>가 생각나는 영화다. 그건 아마도 정진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보단 남사당패가 임금 앞에서 연회를 한다는 설정이 같아서가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는 백성이 곧 나라의 근간임을 바탕에 깔고 있기도 하다. 그런 비슷함 때문에 혹시 감독이 같은가 했더니 아니다. <왕의 남자>는 이준익 감독임을 잊고 있었다.
시도는 좋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의 재해석이다. 이 얼마나 신선한 발상인가?
더구나 '글로 세상을 바꾼 자'란 부제가 있다. 정말 그럴까?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헌종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시절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게 뭐 그리 많았겠는가? 글을 깨친 사람도 그리 많지도 았았을 때이니. 그러므로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도 같다.
난 특히 흥부(정우 분)가 비록 청탁 글이긴 하지만 어떤 영감을 받아 미친 듯이 써 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부럽지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작가는 누군가가 자신을 몰아치는 듯한 느낌으로 글을 썼다고도 하던데, 왜 그 놈의 영감은 나에겐 없는지 모르겠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대로 흥부전에선 자기 형수가 휘두른 밥주걱에 흥부가 얼굴에 붙은 밥풀을 먹지만, 이 영화에선 당대 간신 조항리(정진영 분)의 동생 조혁(김주혁 분)이 그것을 대신하고, 그것을 흥부가 자신이 쓴 <흥부뎐>에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 그 얼마나 참신한 발상인가.
누군가 성령을 받을래? 잡스럽지만 영감을 받을래? 하면 난 어떤 영을 선택할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선택이 불가하다. 성령을 받으면 이 세상에선 그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다 천국으로 가지만, 영감을 받으면 우리나라의 6백 년된 소나무처럼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산다면 글쎄.. 그래도 후자를 택하게 되지 않을까? 글이야 쓰니까 먹고는 살겠지. 까이 꺼 600년..? 눈 깜짝할 새다.ㅋ 그래도 이 나이 먹도록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보면 헛된 공상이지 뭐냐? 그냥 성령 받고 죽어 천국 가는 게 맞을 듯 싶다.ㅠ
이 영화는 완급조절에도 실패한 영화다. 조금 더 디테일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뭔가 시간에 쫓기는 듯도 하고, 전반적으로도 앞에서 말했던 것을 제외하면 이야기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사실 난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체로 긍정하는 쪽이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는 더 이상 존재치 말아야 하는지. 또한 글로 세상을 바꾸는 건 주로 필화 사건으로다. 이것을 통해 역사에 묻힐뻔한 사건들이 수면 위로 부각이 되기도 했다. 문득 보고 있는데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생각나기도 했다. 80년 대 민주화 운동 때 <오적>에 필적할만한 글을 쓰다 감옥에 들어 간 작가도 많고. 저항할 것이 아니라면 작가들이 뭐 때문에 글을 쓰겠는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더니 그나마 이 영화는 고 김주혁이 살린 영화라고나 할까? 그가 죽지 않았다면 범작에 그쳤겠지. 난 아직도 이 배우가 고인이 된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영화를 찍고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리도 짧은 생을 살다가 말도 없이 세상을 훌쩍 떠나간 건지. 또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 보다 늦게 세상에 와서 일찍 세상을 떠나 갔을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왜 또 오늘을 살고 있을까 싶다.
그나마 마지막 엔딩이 그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흥부가 모든 것을 종결하고 세상을 주유할 때 이미 세상을 떠난 조혁에게(그는 형 조항리의 칼에 맞아 죽는다) 어르신, 그곳은 행복하시오? 할 때 조혁이 행복은 무슨...하며, 행복할 것도 불행할 것도 없으니 꿈을 꾸라고 말한다. 김주혁의 말이기도 했을까?
이 영화엔 요즘 대세 국민 남동생 정해인이 헌종으로 나온다. 그는 아무래도 난 놈(?)임엔 틀림없는 것 같긴하다. 관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귀골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특이한 건 가수 김완선이 대비 역으로 나왔는 게 좀 놀라웠다. 별로 대비스럽진 않지만 연기를 못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맞는 역할을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성희롱 사건에 휘말렸나 본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몸 가짐, 마음 가짐 잘해야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