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현대사를 관통하다 - 19세기 말 이후 한국 현대사와 시의 만남
이성혁 외 지음 / 문화다북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지금까지 역사와 문학을 같은 프레임에 넣고 보려고 했던 시도는 여럿 있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적 사건 즉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설이나 평전이 채택하는 방식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시로 역사를, 그것도 근현대사를 돌아보려고 했다는 건 이전에도 있어왔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꽤 신선한 시도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 이병주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와 달리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는 게 문학(22p, 이병주, <변명> 296)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문학 그것도 시라는 장르는 어떠한가?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시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가장 넓은 범위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시가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모든 제약에서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다. 정해진 스토리 라인이나 구조를 따를 필요도 없고, 아예 플롯이 없어도 되는 시는 상상력의 정점과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며, 제한 없이 폭넓게 세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23p).

 

나는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역사 그것도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시의 콜라보레이션쯤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즉 역사도 알고, 시도 알고 일석이조의 학습효과 뭐 그런 거 말이다. 물론 약간의 그런 느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서 시인들은 어떻게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는가를 다시 한 번 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나름 좋았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시가 있다. 우린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무수히 많이 물어보았을 당대의 시인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윤동주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 전후해서 많은 시인들이 시대를 노래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김소월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다. 임화도 있었고, 이육사도 있다. 또한 친일파로 알려진 서정주도 있고, 이광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서정주와 이광수 같은 친일 문학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단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하상일 문학평론가의 글을 읽다가였는데, 그는 친일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판단 기준은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일제 강점기 일본어로 쓴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친일이라는 편협한 언어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일본어냐 조선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일본어라고 해도 반일 정신을 드러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조선어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협력을 드러낸 작품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제 말 일본에 의해서 조직된 친일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규정하는 태도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국보국회를 만들어 작가들을 강제로 소속시켰는데, 그 단체 내부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과 당시 발표한 작품의 내용을 기준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해야지, 단지 이런 단체의 소속 여부를 갖고 무조건 친일 협력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창씨개명 역시 친일의 지표로 삼는 것도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창씨개명은 친일적 요소가 아주 많았고,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친일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광수 같은 경우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철폐하는 의미에서 창씨개명을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무조건 친일로 볼 수 없는 건 그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를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윤동주의 일본식 이름은 히라누마 도쥬다. 그것은 그가 연희 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지 일주일 전 <참회록>에서 자신의 과오를 깊히 성찰한다(131~132p).

 

사실 우리는 대대로 윤동주는 사랑하면서, 미당이나 춘원에 대해선 석연치 않은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왜 윤동주는 되면서 미당이나 춘원은 안 되는 것일까? 이제 우린 미당이나 춘원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필요도 있지 않을까? 불평등과 차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당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것이 철폐된다면 창씨개명 아니야 그 보다 더한 일을 했더라도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우리는 뭐라고 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정체성 보다 앞서는 건 차별 철폐라는 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구를 좀 더 활발하게 진행시켜도 좋지 않을까? 그들은 당대 지식인이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자신과 나라를 팔아 먹었을 거라곤 나 역시 쉽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당대 시인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러니만큼 지금까지 난 시인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반성도 해 보게 된다. 솔직히 옛날에 험악한 시절을 살았을 땐 문인들도 결코 가만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다. 지난 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문인들이 시국선언도 하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늘 날 같이 부요하고 평화로운 시대에 저항할 이유나 필요를 모르는 시인들은 어디서 그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언어의 유희를 즐겨보겠다고 시를 쓰지 않는가? 괜히 시 한 편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건 김지하 같은 시인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 날의 시인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함민복 시인은 그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시 한 편의 가치는 몇 백 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오늘 날의 시인의 쓸모는 뭘까? 어느 시대고 시인과 고독. 또는 시인과 가난은 자웅동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가난과 고독이 있기 전에 저항이 먼저 있었음을 또한 상기하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언젠가 이승만이 처음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자유경제원이라는 곳에서 그의 체제를 찬양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백일장을 개최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때 장민호라는 사람이 1등에 뽑혔는데 그 후 바로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시가 가로로 읽으면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이 되지만 세로로 읽으면 그를 비판하는 글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살아있는 저항정신이요 풍자가 아니겠는가? 과연 오늘 날의 세대에도 이런 시인을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시인은 있어야 한다. 그들만의 청정한 언어로 세대를 정화시키고 그들로부터 깨어있기를 촉구 받아야 한다. 시인들에게 부단한 응원과 애정을 보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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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4-28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로 읽기와 세로 읽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다니... 묘하군요.

2018-04-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8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