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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윅의 마녀들 - The Witches Of Eastwick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의 정확한 제작년도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우리나라 개봉관에선 개봉을 안했던 것 같다. 왜 이런 명작을 개봉을 안했던 걸까? 인터넷을 뒤지고 뒤진 끝에 저기 구석진 곳에서 결국 알아냈다. 1987년 작이다.
오래 전, 지금은 절판된 <시네마 클래식>이란 책을 산적이 있는데 부록으로 CD가 한 장 끼어 있었다. 그중 첫번째 트랙에 바로 이 영화에 삽입되었던,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나온다. 책 보다는 CD가 좋아 한동안 줄창 들었던 적이 있다. 역시 클래식은 클래식 자체로 듣기 보다 이렇게 영화의 삽입곡으로 들으면 더 관심이 간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볼 수 없으니, 어떤 장면에서 이 음악이 사용됐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주일, 드디어 그것을 확인해 볼 수가 있었다. 영화에서 '다산의 여왕'이라 할 만한 여자가 나오는데(그 역은 미셸 파이퍼가 맡았다), 그녀의 아이들이 풍선에 파묻혀 놀 때 이 음악이 나온다. 다소 실망이다. 누가 뭐래도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이루고'는 구애를 할 때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고작 애들이 놀 때 이 음악이 나오다니... 그래도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용서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어느 크림치즈 CF에도 사용했는데 뭐.
감독이 조지 밀러다. 조지 밀러라면 전에 재밌게 본 <해피 피트>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오호! 이제야 이 감독의 취향을 알 것도 같다. 이 영화는 다분히 판타지 요소가 강하며, 동화적이기도 하다. 어딘가 이 영화에 대한 정보에 범죄, 호러물이라고 하던데 이건 전혀 맞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어린 아이도 생각외로 많이 나오고 조지 밀러는 모르긴 해도, 피터팬 취향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해피 피트>와는 좀 달라서 너무 어린 아이가 보는 건 조금은 조심스럽다.
그런데 영화가 동화적이긴 해도 다분히 페미니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자 셋이 모이면 뭐가 어떻다고 하지만, 영화를 보면 확실히 여자 셋은 강한 연대의식과 놀라운 파워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여자들이 당대 유명한 수잔 서랜든과 미셸 파이퍼와 셰어이고 보면, 그 이름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도 영화에서 묵직한 균형미를 잡아주는 건 역시 잭 니콜슨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눈매며 눈빛을 보면 그다지 성한 사람은 아니겠다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럴까? 젊었을 때 그는 정상적인 배역을 맡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특히 <샤이닝> 같은 영화를 보면 섬뜩하지 않는가? 그나마 나이들고 인간미있는 노장역을 맡아 다행이긴 하지만 확실히 악역을 맡는다는 건 배우에게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이 사람만큼 악역을 잘 소화해낼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지금은 그 계보를 잇는 배우가 누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나마 내가 그를 좋게 보기 시작한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부터인데, 이 영화가 90년대 초에 만들어지고, <이스트윅의 마녀들>은 87년에 만들어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때 그는 아직도 악역이 좋았나 보다.
사실 이 영화가 조금 놀라운 건, 보통 책이나 영화는 악마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이례적으로 남성으로 그리고 있으며 그것을 바로 잭 니콜슨이 맞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얼마나 소외되고 비하되어 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테고, 악한 남자는 그릴 수는 있어도, 악마에게 직접적으로 남성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죽했으면 '마녀'는 있지만 '마남'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금기를 깼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잭 니콜슨은 백만장자를 가장한 악마다. 남자에게도 여성에 대한 로망이 있겠지만, 여자 또한 그런 로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백마 탄 왕자와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는 것. 하지만 이미 결혼은 했으나 이혼을 하거나 과부인 인생에 이런 일은 더 멀게만 느껴지지만 한편 그래서 더 간절해지기도 한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점을 공략해 도입을 삼았다.
그렇지만 감독은 마녀란 말을 빼고 싶지 않았나 보다. 제목 조차 그렇게 붙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마녀'는 그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고, 오히려 착한 이미지며, 어찌보면 등장한 세 여자(셰어와 수잔 서랜든, 미셸 파이퍼)들은 여성성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여성의 고상함과 열정과 자유, 모성애 등. 그런데 이것이 다릴 벤혼이란 남자(잭 니콜슨)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이런 점이 있다는 걸 몰랐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에게 마법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가 유혹을 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는 것은 확실히 사랑의 힘이며, 혼자나 동성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연애를 해야하는 줄도 모른다. 사랑해야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면을 보게도 되니고, 자신을 긍정도 하게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성을 만났다고 해서 자신의 잠자던 좋은 면만 일깨워지는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한 남자를 두고 세 여자가 동시에 좋아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질투도 함께 일어나는 법. 그래도 나중에는 세 여자가 한 남자를 똑같이 공유한다는 것은 글쎄, 영화니까 봐 줄 만한 설정이지 그다지 바람직한 현실은 못 된다.
그런데 이성의 구애를 받을 때 이런 상대는 주의하자. 상대의 약점을 잡아 나를 사랑하게 되면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될 거라는 망상을 심어주는 약장사 같은 구애. 그것은 어찌보면 상대로 하여금 나의 약점을 사랑해 줄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의 또 다른 방법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 주는 사람이 좋다. 그것은 영화에서 다릴이 어떻게 여자를 유혹하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이 세 여자가 강한 연대의식을 발휘하게 되는 건, 사고로 계단에서 구른 마을의 여자가 영이 밝아져 다릴의 악마성과 여자들의 죄를 폭로하고 심판하려 할 때다. 여자가 자꾸 다릴을 방해를 하니 죽여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런데 이 남자 얼마나 똑똑한지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고 세 여자를 통해 죽게 만든다. 영화는 다분히 주술적이기도 한데, 여자 셋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 여자가 그대로 화를 입는다는 설정이다. 예를들면, 남자의 저택에서 여자 셋이 체리를 먹는데 그것을 먹을 때마다 마을의 여자는 토악질을 하는데 그것이 체리를 먹은 토사물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남편에 의해 살해 된다. 그녀들은 이 모든 것이 다릴의 짓이라는 걸 알고 복수극이 펼쳐지는데 그것은 확실히 통쾌하기도 하지만 웃기기도 하다. 영화에선 여자가 체리를 먹은 토사물을 내뱉았던 것처럼, 세 여자는 그대로 다릴에게 그 방법을 쓴다. 솔직히 남이 토악질을 하는 걸 보는 건 보통 괴롭고 역겨운 일이 아닌데, 여기선 다릴이 너무 심하게 정신없이 토를하니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무엇보다 이 이스트윅의 세 마녀들은 자신의 동족이 남자의 교활한 수법에 의해 죽었다는 것에 복수를 감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여자를 우습게 보는 처사에 대한 응징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한꺼번에 여자 셋을 자기 휘하에 두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것은 못 된다. 그 후한은 몇 배다. 더구나 양초를 녹여 다릴을 의미하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송곳으로 찔러대고 때문에 다릴이 괴로워 하는 장면은 동서양이 참 똑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도 사극에서 보면 그 비슷한 장면을 가끔 보게되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 여자를 우습게 여기는 자, 저주를 받을지어다!다.
사실 이 영화는 유쾌하게 볼만하지만, 남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만큼 여자는 혼자 살아도 남자는 혼자살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고. 다릴은 그렇게 여자들에게 혼쭐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그녀들은 각각 다릴의 아기를 낳아 잘 사니 말이다. 여자는 그럴 수 있는 것 같다. 즉 자신 안에 뭔가의 능력이 발견되면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존재. 그런데 그것이 남자에 의해 발견되어진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리고 발견되어지면 남자는 버림을 받는다는 설정은 확실히 진화론적이기도 하다. 그래도 다릴을 닮은 아이 셋이 여자의 품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건 뭔가 시사하는 바는 있는 것 같다. 다릴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악마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도 이채롭고. 뭐 꼭 이런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영화는 그 자체로도 지루하지 않게 볼만하다.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