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 속의 댄서 - Dancer In The dark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
| 주연 : 비욕, 카트린느 드뇌브(2001) |
어렸을 때 유럽 영화를 본다는 건 대단히 낮선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유럽 영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건 내가 이제까지 봐온 허리우드 영화 아니면 허리우드 영화 문법에 충실한 (상업)영화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유럽 영화는 다른 문법과 정서를 가지고 보게끔 만드는 뭔가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으로 와닿다가도 가끔 어느 부분, 나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과 맞닥트리기도 한다. 그런 순간이 오면 '억지스럽다'라는 것 외에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분히 나의 정서를 가지고 보기 때문일텐데, 저게 유럽의 정서란 말인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예를들면 이 영화에서는, 세를 들어사는 셀마가 집주인이자 경찰관인 빌을 죽이는 장면이 그렇다. 물론 셀마는 빌이 자신의 돈을 훔쳐갔기 때문에 그 돈을 돌려받기 위해 빌의 집에 들어갔다가 뜻하지 않게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런데 솔직히 안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는 죽인다면 극도의 분노나 증오가 뒷받침이 되야한다. 하지만 죽여 달라는 빌의 말에 선량하기 그지 없는 셀마는 흐느끼며 그를 죽인다. 이해가 가는가? 난 그 부분이 참 어색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빌은 셀마에게 불리한 누명을 씌웠고, 총부리까지 겨눈데다가, 거기에 더해 살인까지 부추겼으니 더없이 위험한 상황이다. 물론 이해 못할 건 없다. 셀마가 실명 직전의 상황이고, 자신을 방어하다 죽인거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둘의 대화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인정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살인이라니? 억지스럽지 않나? 사실 그런 것만 빼면 이 영화는 꽤 괜찮은 한편의 뮤지컬 영화다.
라스 폰 트리에. 영국의 영화감독을 제외한다면 유럽의 영화 감독치고 그래도 꽤 부지런히 우리에게 그 존재를 알려 온 감독은 아닐까 싶다. 니콜 키드만의 <도그빌>이나 <브레이킹 더 웨이브>같은 영화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가 그렇듯, 영화는 뮤지컬인데 비해 그다지 밝고 경쾌한 영화는 아니다. 대신, 그의 영화는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다.
이 영화 같은 경우, 모르긴 해도 감독은 인간의 '성악설'을 믿는 사람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 꼭 그게 아니어도 그 놈의 '돈'에 놀아나는 인간의 영혼을 생각하면, 인간은 참 어처구니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원래 셀마나 빌이나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돈 때문에 셀마는 살인을 저지르고, 빌은 빚을 청산하고자 셀마의 돈을 훔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쓴 삶의 굴레를 셀마를 통해 벗으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셀마가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과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녀의 아들에게 만큼은 그 운명을 대물림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모은 것인데, 빌은 셀마의 처해진 운명을 이기적으로 악용한다는 것에 있다.
그랬을 때 우리가 이 영화에서 원하는 건, 셀마가 어떻게 이 위기를 풀어갈 것인가?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해피엔딩이란 감동을 선사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은 채, 셀마로 하여금 억울한 누명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들며 사형대까지 몰아간다. 게다가 영화는 잔인하기까지해서, 셀마에게 어떤 선택까지 요구하게 만든다. 즉, 선택하기 따라선 사형을 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형 유예를 신청하고, 아들의 눈을 수술시켜주기 위해 모은 돈을 변호사 비용으로 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셀마는 차마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예정대로사형대에 서기로 한다. 그건 역시 모성 때문이다. 이것을 관객으로서 이해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영화가 슬프고 우울한 건, 누명을 쓰고 죽는 셀마의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아들 때문에 죽어야 하는 모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는 거의 절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모성 그 자체로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 앞두고 고뇌하는 인간적인 셀마가 있었기에, 모성으로서의 가치가 더 강하게 인식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많은 오해와 누명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와도 오버랩이 된다. 셀마가 사형대에서 죽기까지의 연기가 사실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모성은 원래 눈이 먼 것이며, 외눈박이'라고 말하고 싶게도 만든다.
하지만 내가 보는 건, 모성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것이다. 우린 너무 모성을 이념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성은 좀 더 다양하고, 다채로울 수 있는 것을 죽음과 맞물려 위대하고 거룩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아마도 성모 마리아의 신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좀 '그럴 것 같은'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가 아쉬운 건, 셀마의 아들의 입장이나 생각을 충분히 대변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는, 셀마가 자신의 누명을 벗으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더라도, 과연 그 아들이 엄마없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해서 그것을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낄 것이냐는 것이다. 때론 아무리 눈 먼 어머니라도 자신 곁에 있어주는 것이 모성일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맹인들이 자신이 맹인이라고 해서 인생을 다 불행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약자로 살 수는 있어도 그것 자체가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을 보게되길 원해 눈을 떴지만 세상에 모순과 죄악된 모습 때문에 더 불행하게 되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아주 오래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그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소아마비 지체장애자다. 그런데 그녀의 딸 역시 같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비장애인이 보면 안 됐다고 동정할지 모르지만, 참 묘하게도 나는 그 모녀를 보면서 오히려 같은 운명이기에 저 모녀는 일체감을 더 많이 느끼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것처럼 셀마의 아들은 오히려 엄마가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졌기에 좀 더 세상을 안정감있게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비장애자만이 사는 세상에서 혼자 장애자로 살아간다는 건 또 얼마나 외롭고 용기가 필요한 것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셀마의 아들이 엄마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좀 궁금했다. 엄마 없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과 비록 불편하게 살겠지만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어떤 것이 더 현명할까? 셀마가 사형을 면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모성은 무조건적이라기 보단 현명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줘야한다고 본다. 하지만 셀마의 입장에선 시간이 없다는 점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그래서 영화는 동시에 사람에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영화에서 셀마를 좋아하는 제프가 묻는다. 왜 아이를 낳았냐고. 그러자 셀마가 대답했다. 아이를 품안에 안아보고 싶었다고. (셀마의) 모성은 그렇게 한 가지 이유만을 단순하게 말할 뿐이다.
이 영화는 카메라 워크가 참 독특하다. 영화를 본다기 보다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노래를 할 땐 카메라 각도가 정교하다. 배우가 대사를 할 땐 혼란과 갈등 등을 보여 주지만, 노래를 보여줄 땐 행복과 희망을 보여주는 교차가 참 이채로운 영화란 생각이 든다. 특히 셀마 역의 비욕의 연기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