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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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은교>를 알아? 

종이로 만든 책이 아직도 건재한가 보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작가 박범신 선생께서 언제부턴가 당신의 불로그에 '살인 당나귀'란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하신 것을.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을 뿐 이게 뭐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한다는 작가들이 그렇듯 일단 자기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그것을 책으로 내는 것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으니 이 작품도 곧 책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꼭 봐야한다면 책으로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연재물을 꼼꼼히 챙겨 볼만큼 부지런 하지도 않으며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도 그다지 편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종이로 만든 책은 언제나 건재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원래의 제목 '살인 당나귀'가 아닌 <은교>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난 예전의 제목 보다 지금의 제목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되었다.  

솔직히 박범신 작가는(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의 작품은) 그동안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적잖이 많이 들어왔던 이름이지만 여간해서 선생의 작품은 나의 손에 들려지기를 한사코 거부해 왔었다. 왜 그랬을까? 건방지게도 사춘기 그 어린 마음에 선생은 그냥 사랑 이야기나 쓰는 통속 작가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 시절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나도 한때는 글 써서 돈 버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지망생이라면 문학을 대하는 편견없이 진지하게 남의 작품을 대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은가? 난 그래서 지금까지 그 죄를 속하느라 작가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때 동문수학했던 사람들을 모처럼 만났다. 그때는 내가 <은교>를 읽고 있었던 중이라 입이 간질거려 도저히 이것을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야, 늬들 <은교> 꼭 읽어라. 그거 읽으면 우리 싸부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 발전시켜 나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러자 같이 동문 중의 하나가 "거 내용이 뭡니까?" 한다. "노인이 소녀를 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러자 그는 콧방귀끼듯 "그런 사람 파고다 공원가면 많습니다." 그러면서 냉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무식한 넘. 탑골 공원이지 파고다 공원이 뭐냐? 그래. 넌 그러고 살다가 죽어라. 니가 <은교>를 알아?' 좀 아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세상을 달관한 건지 아니면 열등감과 우월감을 교차시키는 건지 매사 아는 척,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하는 주의라 만나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작가가 될 사람이라면 사회 현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문학에 대해 말했으니 말이다. 그래놓고 작가가 되겠다니 혀가 절로 차졌다.(참고로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단다.)  

그런데 돌아켜 보면 그나 나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은교>를 몰랐을 때 그 보다 나은 태도를 보였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솔직히 이 작품의 프롤로그를 읽을 때까지도 탑골 공원의 어느 변태 노인에 관한 연상을 쉬 지워버리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 보단 인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자세가 더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랑 그 야성과 이성에 관하여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였다. 즉 이적요 시인의 또 다른 분신이 결국 서지우 작가라는 것이다. 이적요 시인에게도 서지우 같은 동물적 본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지우를 향한 불타는 증오는 기실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커져갔고 결국 파멸로 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적요 시인이 은교에게 보이는 태도나 행동은 이성적이고 문화적인 측면(페미니즘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한)까지 포용하고 있는 반면, 서지우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동물적이며 권위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람 하나에 다 들어있을진대 그것을 인정하고 융합하고 화해시키기 보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두 개의 측면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이렇게 대립하고 융화하면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적요는 왜 자신 안의 동물적 본능을 죽여 가면서까지 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가 인용했던 대로,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으며(파스칼) 분별없는 광기(셰익스피어)일 뿐인가?

이적요 VS 서지우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사랑의 방식이 서지우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서지우가 이적요의 적대자로서 이적요와 대립하면 대립할수록 더 옳게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지우는 이적요를 힘도 없으면서 음욕으로만 가득찬 노인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당위를 위해 은교에게 설득하려 하려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은교의 눈엔 오히려 이적요가 더 옳고 건강하며 그에 비해 서지우가 오히려 변태적이며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남자에 대한 평가는 같은 남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하는 것이 더 옳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지우는 은교의 평가를 무효화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다 덫에 걸리고 만다. 또한 서지우가 결정적인 잘못은 인간의 정욕과 사랑을 한 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육체가 노화되면 정력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기엔 서지우는 아직도 미숙했다.  노인에게 정욕이 없을 거라는 건 이 이야기의 방식으로 보자면 덮어 씌우기의 원죄일 뿐이다. 서지우도 그렇게 죽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적요처럼 노인이 될 것인데 그땐 자신을 어떤 식으로 증명할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에 대한 황금률 중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거기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것은 도통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이적요 노인은 피그말리온의 원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고 그 조각상과 실제 사랑을 나누다가 죽어버리고만 피그말리온. 그것이 오늘 날 교육 이론이나 정신분석학 이론에 적용이 되곤 하지만 그 보단 이 사랑의 공식을 정의할 때 쓰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은교는 모든 사람이 다 사랑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그늘진 평범한 아이로 보인다. 다만 그녀가 가진 특수한 무엇이 이적요의 뇌관을 건드렸을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사랑한 건 은교 자신이라기 보단 은교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더 사랑한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지 않은가? 과학적으로 보자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을 넘지 못한다는데(이런 정의는 또 얼마나 삭막한가?) 그것의 유무는 대상 그 자체에 있기 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콩깍지에 있고 보면 말이다. 또한 콩깍지 하나의 무게는 과학적으로 얼마나 나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무한대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얼마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얼마나 큰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런데 그런 말도 있다. 정말 너무 사랑하면 대상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 즉 말하자면 이적요가 은교를 갖지 않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랬을 때 은교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보호해 줬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내고 끌어 당기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서지우에 의해 짓밟혔다. 내가 가진 꽃이 꺾여지고 짓밟혔다면 누군들 분노하지 않고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더구나 이적요도 남자일진데 말이다. 여자 하나로 인해 어제까지 아군이 오늘은 적군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은교가 없었더라면 이적요와 서지우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알 속에서 잘 살았겠지? 결국 인간의 평화는 어떤 상황 또 누군가에 의해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멘토 모리, 소멸 또는 불멸            

가끔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다. 보통은 사랑 때문에 살 생각을 하지 죽을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티격태격하는 것도 다 살아있는 증거고 사랑하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만 드물게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말이다.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일려고 작심했을 때 그는 저 말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서지우를 죽이고 자신이 어떻게 될지? 은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실행했고 서지우는 죽었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건 꼭 이적요가 서지우를 죽인 건 아니지만 결국 그의 증오가 서지우를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자신도 죽어갔다.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자신의 뜻을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서지우의 죽음은 이적요의 육체성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소멸되지만 그의 사랑과 원죄는 불멸로 남은 것이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생기를 주지만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으면 사랑이 옆에 있어도 그것이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적요는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만한 사랑을 했다면 글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끝내 울어버린 소설 '은교'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책을 읽다 울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내 작가가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만을 내심 열심히 쫓다 결국 한방  맞았다. 서지우는 자기 눈에 서린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사고로 죽었지만, 나는 죽어가는 이적요가 은교를 그리워 하는 그 장면에서 시야가 흐려져 계속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나에겐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나의 독서란 무지한 지성을 깨우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읽어왔을 뿐인데 그래서 책이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것에 쉬 동의하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책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생의 자작시로 보이는 '빈들'이란 시를 대했을 때다. 

사랑을 믿지 않으면 누가 아침 이슬에게 경배하겠는가

고꾸라지고 베이고 허물어져도 청노루 눈빛

그 아침빛이 너를 통과해와 세계의 구석방

내 안에 꽃초롱으로 둥지를 튼다 새는 날마다

저녁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직 모른다

저기 자갈투성이 해안선 끝나는 곳에

어떤 아우성들이 또 물레를 돌리고 앉아 있는지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중에서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난 갑자기 오늘 날 왜 변태 노인이 그렇게도 문제가 되는 걸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몸은 늙어가는데 그에 따라 정신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불균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사랑의 능력을 섹스의 능력과 동일시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정력은 조금도 소진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 하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재대로된 사랑은 없거나 사랑은 다 변태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고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인지 그것을 말하려 했던 적이 있었는가? 플라토닉. 사랑은 성교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적요는 말해주는 듯도 하다. 문제는 사랑을 허리 아랫쪽으로만 몰고 갔던 이 사회가 더 변태적인 것이 아닌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본 은교       

책의 말미를 향할수록 내가 만약 Q 변호사였다면 과연 은교에게 이적요의 노트를 읽어 보라고 허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첫번 째 드는 생각은 나는 은교가 그 노트를 읽지 않게되길 바랬다. 왜냐하면 은교가 이적요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다른 사랑을 못하고 평생 갇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우리 시대 사랑이란 다 고만고만한 물물교환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발화시킨 사랑이 어디 흔하냐 말이다. 나를 위해 그가 그렇게 해 줬다면 어찌 다른 상대와의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은교는 그 한 사랑만 보기엔 너무 젊다. 필시 그 노트는 은교에겐 판도라의 상자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나중에 드는 생각은 우리의 세대가 사랑을 믿을 수 있는 세대라고 보는가? 하지만 은교만큼은 진짜 사랑이 있었다는 걸 알지 않겠는가? 사랑도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줄 안다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은교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그녀 몫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적요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학대했다기 보단 육체에 갇히는 것이 싫어 그 나름의 발화 의식으로 자신을 혹사시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이 시대의 사랑을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적요와 박범신       

소설은 어느 만큼의 진실과 허구를 잘 융합시킨 문화상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정말 17세의 소녀와 사랑을 하고 이 작품을 썼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선생의 첫 작품을 읽은 것에 불과하지만 많은 부분 이적요에게서 선생의 데자뷰를 느꼈다. 특히 이적요를 빌어 우리나라 문단을 비판한 것과 그리고 이적요를 시인으로 등장시킬 만큼 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적요의 대쪽 같은 캐릭터도 어느만큼은 선생의 이미지는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그만큼 문체는 시적이면서도 탐미적이다.  

사족으로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한다면, 이 책을 읽고나니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몇 안 되는 소설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그나마 썼던 나의 글들이 허접하다 못해 쓰레기 같이 느껴져 한숨만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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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교를 알게 해 주셔서.

stella.K 2010-05-14 16:56   좋아요 0 | URL
부디 블랑카님께도 감동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