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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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 여섯되던 해,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을 안지 한달하고도 반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전까지 내가 사람들의 죽음을 몰랐을까? 모르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안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난 그 전까지 그 어느 누구의 죽음도 목도해 본적이 없으니까. 다 간접적으로만 접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그 나이 되도록 남의 결혼식에는 간적은 있어도, 초상 난 집에 애도하러 가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과연 누가 곁에 있다가 없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막연하게 생각은 해 봤지만 그것을 알기엔 나의 삶은 완벽했다. 왜냐하면 누구를 잃은 것만큼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슬픔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때까지 난 구김없이 살아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또,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 살았다는 건 그만큼 철없이 살았다는 뜻도 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서야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막 숨을 거두셨을 때 유감스럽게도 난 그 자리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 새벽 먼동이 터오기 시작할 때 나는 아직 잠을 자고 있었고, 그 시간 전화를 받고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았다. 돌아가실 것을 예견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간은 더 버텨주시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 뿐, 난 그때까지 아버지의 임종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의 이렇다 할 유언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후두쪽에 이상을 보였기 때문에 이미 말로 뭔가를 표현한다는 것이 어려워 필담으로 의사표현을 하셨는데, 내용은 그냥 그때 그때의 불편한 사항을 말씀하셨을 뿐이었다. 마치 소설속에 나오는 마키노 고타로의 아버지처럼. 

게다가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 생각만 가지고 계셨지 죽음은 생각지 않으셨다. 아버지 당신도 받아들이지 않는 죽음을 누구더러 받아들이란 말인가? 죽음을 예견했다면 죽을 준비도 하였으리라. 이책의 애도하는 사람의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처럼.  

내가 어떻게 죽고 싶은가?란 질문에, 10명 중 8,9명 또는 10명 다 고통없이 어느 날 잠자듯 홀연히 죽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은 성숙한 죽음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얼마나 놀래키는 방법인가? 그 사람들은 아직 보낼 준비가 안돼 있는데 그렇게 가다니. 적어도 인사는 하고 가야하지 않은가? 그래서 자살이 가장 안 좋은 죽음의 방법인 줄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다가 죽는 것이나, 사고로 죽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다. 하지만 자살은 자살할 수 밖에 없는 이유야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불가항력적이라고만 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에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씼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했던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성숙한 죽음의 방법은 내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죽음을 알아 그것을 중비하며, 남아 있을 사람을 위로를 하며 죽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 시즈토 보단 사카스키 준코에게 무한한 애정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가 과연 죽음을 예견하지 못하셨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 아버지는 죽는 이유 보단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사업을 더 이끄셔야 했고, 성인으로 자랐다고는 하지만 슬하의 네 자녀들의 앞길도 어떻게든 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때 우린 아직 살만한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까. 더구나 아버진 충분히 더 사셔도 되는 나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끈을 끊고 가셔야만 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우리와 어떻게 이별을 해야 하는지 당신도 그 방법을 모르셨던 것 같다. 그저 병상에 누워 살아야 할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가족들을 위로하는 수 밖에. 그리고 연기가 다 했을 때 그 새벽에 홀연히 가셨다. 마치 조그만 어린 아이 오랜만에 찾아 온 이모가 자기가 잠든 사이에 몰래 갈까 봐, "응. 어디 안 가. 꼭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까 자."  그렇게 어린 조카를 재워놓고, 잠든 사이 몰래 조카 곁을 떠나는 이모처럼 또는 삼촌처럼, 나의 아버지도 그렇게 내가 자고 있을 때 나를 떠나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얄궃은 분. 미운 아버지. 

내가 아버지가 입원하고 계셨던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자 어느 틈엔지 아버지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평소 알고 지냈던 지인분들이 수시로 문상을 왔다. 호상이었다. 이렇게 많은 문상객들이 올 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살아생전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가지시면서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사셨나 보다 했다. 그 사이로 나의 지인들과 친구들도 문상을 와 주었다. 슬픈 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힘들 게 만들고 싶지 않아 일부러 태연한 척 했다. 난 그들이 같이 울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이렇게라도 와 줬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잔칫집에 가기보다 초상집에 가기를 더 바라라는 성경 말씀이 뭔지 그때서야 알 것 같았다. 좋은 일에 사람이 온다는 것은 이를 맞는 당사자들로서는 그다지 기쁘지 않을 수 있다. 그야말로 어중이 떠중이 다 오니까. 하지만 남이 돌아 간 자리에 그것을 애도하기 위해 와 준다면 그 사람이 비록 나와 안 좋은 사이라도 고맙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오랜 후배 하나가 조용히 왔다. 다른 사람들이야 삼삼오오 서로 어울려서 왔지만, 그 후배는 홀홀단신으로 온 것이다. 혼자 오기가 어색할 것 같아 그냥 소식만 전했을 뿐 딱히 오란 말도 못했다. 그 후배는 아버지 영정에 헌화를 하고, 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더니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예쁘기도 하고, 싹싹한 성격이라 평소 내가 예뻐라 했던 후배였다. 그런데 그때 그 후배의 모습이 내 가슴에 밖힌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한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나와 연관이 되어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뉘라서 그렇게 눈물을 흘려줄 수 있단 말인가? 그때까지 문상을 온 다른 사람은 다 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인데, 또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할 것도 아닌데 그 후배는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애도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한참 전의 일이다. 아마도 그 후배는 그때 그 모습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책을 읽으니 시즈토와 그 후배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그 친구는 나의 아버지 영정 앞에서 뭐라고 애도를 했을까? 그리고 시즈토라면 내 아버지 장례식에 와 줬을까? 

사실 누구도 애도에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해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그 사람을 기념하지만, 죽은 사람은 막상 어떨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애도를 아주 형식적으로 하게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보면 시즈토가 처음부터 애도를 잘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애도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나오지만, 왜 애도를 하는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의 애도는 제법 적극적이어서 라디오나 신문에서 부고 소식을 접하면 꼭 메모를 했다가 그곳을 직접 찾아가 애도를 한다. 나 역시도 아버지 장례 이후 결혼식 같은 좋은 일엔 더러 빠지는 일이 있어도 남을 위로해야 할 자리엔 가급적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즈토처럼 일부러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까지 쫓아 가지는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문상객으로 가장한 조의금 탈취 사건이 끊이지 않는 판에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고, 아무튼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 받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인데 간혹 어떤 사람은 이타성이 월등히 높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시즈토가 그런 사람에 속하는 사람인 듯 싶다.  

그가 애도하는 방식은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가슴 앞까지 내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고(49p), 마카노 고타로는 말한다.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여느 사람의 그것과 그렇게 크게 다른 방식은 아닌 성 싶기도 하다. (정확히 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애도의 내용은 비교적 구체적이다.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습니까, 어떤 일로 감사받았습니까 이것에 관한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애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한번의 애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메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누구건(살인자건, 살인을 당했건), 어떻게 죽었건(자살했건, 사고사건) 상관없이 똑같이 애도를 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슬픔을 당한 자를 열심히 위로하겠다고 다짐해 보기도 하지만, 남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는 건 아직도 익숙치 않다. 하지만 시즈토는 죽음의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를 찾아 가고, 애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매번 죽음의 소식을 접하면 그것도 굉장한 스트레스일 법도 한데 누가 뭐라던, 어떠한 오해를 받건 그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엔 오해를 받았지만 차츰 알려지기 시작하니 그를 찾는 사람도 생겼고, 왜 우리는 애도해 주지 않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 과정이 참 사실적이다.  

사실 이 작품은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결코 만만치 않은 두께이기도 하지만, 구성 또한 씨줄과 날줄로 엮은 것이 작가는 결코 쉽게 쓰고, 쉽게 읽히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구나 작품을 위해 작가는 하루에도 무수히 많이 쏟아지는 죽음의 소식을 채집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소식은 아니다. 어쩌면 그리도 살인 당하는 사람이 많고, 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고, 동반 자살의 소식이 많은 것인가? 게다가 등장인물 3명의 삶도 하나 같이 그늘져 있고 그래서 읽는 독자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든다. 그런 속에서 시즈토의 활약은 더욱 빛을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어떤 풍파가 어떤 사람을 핥고 지나가도 그것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묵묵히 애도만 한다. 이 세상 어디엔가 시즈토 같은 사람이 정말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있다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시즈토는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애도하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의 엄마가 다 죽어가는데 과연 그 엄마는 자식에게로부터 애도를 받을 수 있을런지 의문인 채 소설은 끝나고 있다. 그래도 준꼬는 죽어가는 나날 동안 아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장면에서 또 다른 진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 준다.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썼을까?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우리가 죽은 사람을 두고 시즈토가 무수히도 많이 묻고 다녔을 그 질문을 해야하는 것은 망자를 잊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내가 잊혀지는 것이라고. 그것은 병든 자나, 악한 자나, 속인이나, 범인이나 하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을 악하게만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작가는 사람의 가장 음습하고, 어두운 것을 통해 서로를 감싸주고, 치료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어차피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데로 밝고 따뜻하지마는 않으니 말이다. 

비록 읽기는 쉽지 않고 어찌보면 결미가 확실치 않은 열린 결말을 보여주고 있지만, 난 이렇게 죽음을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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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보 노무현'은 우리가 있어 행복했을까?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2010-04-01 15:48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인권변호사로 80년대 사회에 나타나 민주화운동에 이어 정치개혁을 하다가 63세의 나이로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노무현, 그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퇴임한지 1년여 만에 자살을 하는 한국, 지금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민을 위하는 ‘바보 노무현’, 그가 펼친 정책들이 때론 반발도 낳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