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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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부턴가 이쪽 분야의 전문가(창작법에 관한 이론가들)가 아닌 현장 작가들이 그들의 글쓰기 노하우를 밝힌 책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나 역시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이니 이런 책에 눈이 안 갈수가 없다. 이 책은 내가 글쓰기 분야에서 본 가장 최근에 발견한 책이 아닌가 한다.    

이런 책 읽는다고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잘 쓰는 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글쓰기에(특별히 소설 쓰기에) 뜻을 뒀다면 이런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글은 쓰지 않으면서 이런 책에만 탐닉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책들을 읽어보면 하나 같이 하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다. 무조건 '써라!'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이 말은 내가 소설가 이승우씨가 쓴 소설론을 읽고 리뷰에 인용한 제목이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stella09/883139) 내가 아는 또는 체험한 이야기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을 글로써 풀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소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도 그것의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책이 좋다. 그래. 구슬을 꿰지도 못하면서도 난 이런 책이 좋은 것이다. 

누구는 이런 나를 두고 그런 책에서 차마 글을 쓸 용기는 없고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오래 전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공부는 못했으면서 참고서만 딥따 산 적이 있다. 참고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내가 오늘도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저자가 이 책에서 아니 에르노를 인용했듯이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누군가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해 줄 때(150p)라고 했듯이, 이 책 또한 나를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길 바라서일 것이다. 즉 다시말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말에 눈을 맞추고 귀를 여는 것을 통해 그의 기쁨에 기꺼이 동참해 주는 것이라고 하면 글을 안 쓰기에 적절한 핑계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소설 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책상 가득 자료들을 모아 놓고 쓰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런 것 하나 없이 오로지 노트북 하나 또는 펜과 종이만을 가지고 자신의 체험과 생각들을 풀어나가는 것. 이 둘중 어느 것이 더 쉬워 보일까? 

전자는 많은 자료들을 모아야 하는 수고로움과 필력이 받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후자는 나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으니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인 것만은 사실이고, 창작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역시 하나 같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고 하니 그것에 부합은 된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동시에 자신의 아품을 들추어내야 하고 때론 부끄러움도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아프다. 나 역시 글을 쓸 때는 대단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매번 여기서 무너지곤 했다.  저자는 이 암초를 너무나 잘 알기에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왜 이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걸까요. 이것은 결코 위로와 평안을 주는 글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있는 상처를 하나하나 집어내어 다시 아파하는 행위지요. 독자가 불편한 것 보다 열 배 백 배 더 작가는 불편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인 겁니다. 글 따로 삶 따로의 나날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사는 바로 일치의 나날인 겁니다.     "......작가는 왜 이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걸까요. 이것은 결코 위로와 평안을 주는 글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있는 상처를 하나하나 집어내어 다시 아파하는 행위지요. 독자가 불편한 것 보다 열 배 백 배 더 작가는 불편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인 겁니다. 글 따로 삶 따로의 나날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사는 바로 일치의 나날인 겁니다.(153p)   

 예전엔 글을 쓰는 목적이 독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야 앞서 인용했던 아니 에르노의 말과 상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신은 내 말을 하고 있군요."라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어줍잖은 생각이었다. 작가가 뭐라고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서 위로와 평안을 준단 말인가? 저자가 말했듯이 글을 쓰는 것은 독자 보다 열 배, 백 배 불편한 것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 오직 그것 뿐인  것이다. 그래야 아니 에르노의 말이 진실로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투쟁적으로 치열하게 글을 쓰지 못했다. 그저 의무감이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몇 줄 끄적여 보는 것뿐 창작의 고통을 (조금은)알기에 그 고통속에 나를 맞기고 희열을 느끼는 것을 감히 감내하지 못하겠다.(아마도 내가 작가가 되지 못했다면 나는 목숨하나 기식할만 하던가 발자크처럼 5만잔의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수도복 한벌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인 줄로 알라.) 

저자는 참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도 짚어낸다. 작가로서의 재능의 문제에 대해, 자세에 대해 또는 무엇을 쓰고 그리고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또한 작가에게 열려진 길에 대해 저자는 하나 하나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고 있다. 또한 나아가서 독자와의 소통에 대해 생각해 보고, 오늘 날 매체의 발달로 인해 근대소설처럼 활자 하나로만 승부할 수 없는 현실과 그것들과 어떻게 조우하며 해결해 나갈 것인가(특히 제7강 매체와 이야기의 변신,<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 기대어나, 제15강 따뜻하게 영화 품기 <복수는 나의 것>과 <집으로>에 기대어 같은)는 상당히 현실적이며 현대의 소설 쓰기에 확실히 좋은 지침이 될만 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어찌보면 내가 지적한 내용들은 작가가 글쓰는 첫번째 조건은 아닌 듯 싶다. 작가에게 있어서 '왜 쓰는가'에 답을 달지 못하면 위의 모든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작은 기적을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의 잠을 앗아간 소설들처럼, 내가 쓴 소설이 새벽까지 읽힐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하리라. <불멸>은 "이 소설을 읽은 후 인생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라는 놀라운 엽서 한 장과 맞바꾸기 위해 쓰여졌을 따름이다.-<불멸>,작가의 말(252p)

이 소박하고 진실한 말에 "나도"라는 대답으로 응수하지 못한다면 이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내가 이 글을 읽는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더불어 그는 또한 오늘날의 소설 쓰기가 너무 테크닉 위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저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인생을 값지게 만드는 인류사적 행위'로 파악합니다. 잔재주가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디지털 기술로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설령 컴퓨터가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것들은 단지 삶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척'할 뿐이겠지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은 그럴 듯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 그 자체입니다.(266~267p) 
 

그렇다. 글쓰기란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만큼 진심이 담겨있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늘 우리가 두려워 하는 건 테크닉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주제가 좋아도 그것을 받혀주는 그릇이 미약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문학계의 관행이 그것을 부추기지 않는가? 특히 여타의 문학상을 타고 나오는 것을 보면 화려한 테크닉과 수사를 무기로 삼은 듯하다. 그리고 아예 그것을 표방한 문학상도 있다. 여기에 얼마나 진심이 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런 화려한 테크닉만을 무장한 작품들은 일찌기 문학계에서 단명했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것은 믿을만한 말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백년학생'이라고 했다. 그만큼 죽을 때까지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뜻이겠지. 그에 비해 김탁환은 글쓰기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천년습작'을 각오하라고 주문한다. 이 말이 던져주는 무게가 묵직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름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느 소설가도 완벽한 작품을 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한 작가도 매번 습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작가에게 따로이 정해진 습작기란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말로도 들린다. 요즘 흔히 잘 나가는 일은 다 그 때가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며 나이들면 들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써라. 이 사대의 작가 김탁환이 맛난 술 익히며 기다리겠다고 하지않는가? 그가 따라 주는 술 한 잔은 마셔봐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여, 책표지가 마음에 든다. 특히 뒷면에 연출된 것이긴 할테지만 맨발에 의자에 앉아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저자의 사진이 참으로 많이 피곤해 보인다. 그게 결국 작가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상적이다.    

 또 하나 덧붙이는 건, 이 책을 읽은 후에 김탁환으로 검색해서 그의 책들이 현재 서점에 얼마나 나와 있는지를 알아 봤다. 그가 그리도 많은 책들을 내놨건만 이중 반 정도는 품절이거나 절판 상태다. 힘 없는 문학작품이 단명하는 거야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아직도 대중에게 많이 읽혀야 하는 책들이 단명하는 거 좀 문제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것의 문제가 출판사에 있다고 해야하는 건지, 독자들에게 있다고 해야하는 건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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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by 북
마이클 더다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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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이 책의 저자가 궁금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책 평론가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책 평론가라면 표정일 씨가 아닐까? 그런데 미국에선 마이클 더다를 쳐 주나 보다.  

책을 펴 보니 앞날개에 그의 사진이 조그맣게 나와있다.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 보는 나는 얼핏보면 저 60년 대 비틀즈가 연상이 되고 마르고 앙다문 입술이 조금은 근엄하게도 보인다. 

이 책은 비교적 얇은 책이다. 240여쪽이라고 해도 뒤에 색인을 빼면 본문은 200쪽이 조금 넘는 정도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식의 글자는 얼마 안 들어가고 페이지 수만 간신히 채우는 그렇고 그런 식의 책은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간략하면서도 위트가 넘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진짜 좋아하는 사람에 비하면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책을 보고만 있는 것으로도 그 무게에 짓눌리는 경우도 있다. 즉 좋은 책은 쏟아지는데 이 책을 언제 다 읽나? 책 읽는 속도가 책 발간 속도를 못 따라 줄 때(이건 아마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책을 내는 인간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거겠지.) 가끔은 내가 책을 몰랐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게도 되는 것이다. 

책은 가리지 말고 읽으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만도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타 분야에 까지 관심을 가질 여력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서 조롱이라도 받는 것 같다. 적어도 그 사람은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젠장, 그래도 안 읽는 것 보단 읽는게 훨씬 더 좋은 것 아냐?' 이렇게 밖에는 자신을 위로할 길이 없다. 

인터넷이 아직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고(우리에게 나우누리나 천리안이 언제 있었던가?) 덩달아 인터넷 서점이나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장이 마련되기 전에는 책에 대한 부담이 이만큼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땐 책이 그다지 많이 출판되지도 않았고 내가 책에 대한 정보를 얻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우리집에서 즐겨보던 일간지 귀퉁이에 난 30자 정도의 서평이 고작이었으니까.  

그러다 이 분야가 전문화 되고 대중화가 됐다. 예전엔 이 분야에 전문가 아니면 자타가 공인하는 지성인들이 서평을 썼지만 인터넷이란 소통의 창구가 생기고부터는 일반 대중들도 여기 저기에 책을 읽고 서평들을 올린다. 우리집이 일간지 구독을 끊은 상태에서 내가 접할 수 있는 책 정보는 매일 시시각각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와 북로거들의 서평이 유일하다. 물론 가끔 유명 인사의 서평을 안 읽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그들의 입소문이 전문가의 그것보다 더 눈길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는 있다. 단편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우리가 책을 평생 읽을 생각이려면 가끔은 책 평론가의 멘토링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간단하다. 이렇게 책에 관한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기회가 좋다면 이런 책을 쓰는 저자가 어디서선가 강연회를 한다면 거기를 쫓아가 보는 것도 좋겠지. 

사실 책은 편식하지 말고 닥치는대로 보라는 말에 이의는 없지만 읽다보면 결국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만 책을 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분명 책을 읽다보면 모든 책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를 사로잡는 책이 있고 읽다보면 이 분야에 관련한 책을 더 읽어보고 싶은 욕구도 생긴다. 그리고 좀 더 자세한 정보나 안내를 받고 싶어한다. 그럴 때 <북by북>은 유용한 것 같다. 

특히 이 책은 책과 인생 다반사를 잘 연결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저자는 어쩌면 그렇게도 간략한 글속에 그처럼 많은 책을 소개하고 있는지 뭐 당연 전문가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그의 간결한 글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읽다보면 내가 놓치고 갈 수 있는 책에 대한 정보가 구미를 당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마이클 더다는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란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을 전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소개를 받고나니 웬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것은 내용 자체가 끌려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용에 관한 소개는 너무나 간략하다. 오히려 마이클 더다는 트루먼 카포티를 소개하고 있는데 취재기자로서의 타고난 기질과 집요한 조사를 지적하고 있다. 솔직히 이건 나에겐 그다지 없는 기질로서 왜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지 그 책을 직접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튼 길게 쓰기 보다 간략하게 쓰기가 더 어려운 법인데 읽으면서 참 매력적이게도 썼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단지 약간의 단점이라고 해야할지 특징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이 책은 지극히 미쿡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미쿡의 정서를 나름 좋아하고 동경한다면 더 없이 좋은 책일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약간은 밋밋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뭐 책은 좋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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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1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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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토르소맨>을 리뷰해주세요.
꿈꾸는 토르소맨 - 팔다리 없는 운명에 맞서 승리한 소년 레슬러 이야기
KBS 스페셜 제작팀 지음, 최석순 감수 / 글담출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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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젊은이가 있었구나. 

TV를 잘 보지 않은 관계로 이런 인간 승리의 이야기가 전파를 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것을 책으로 접한 나는 새삼 행운아란 생각이 들었다. 

읽는 내내 이 책의 주인공 더스틴 카터는 펄펄 뛰는 가슴을 가졌고 남도 뛰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비장애인도 해내기 어렵다는 레슬링을 장애인의 몸으로 비장애인과 당당히 싸워 이긴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런데도 더스틴은 그것을 해내고야 만다.  

그것을 읽는 나로선 더스틴이야 말로 21세기 진정한 헤라클레스는 아닐까 싶었다. 

수막구균혈증이 그토록 무서운 병일 줄은 몰랐다. 보통의 정상인의 몸으로 태어나 하루 아침에 사지를 절단했어야 하는 아픔은 과연 얼마만한 것이었을까?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중요한 것은 현재의 펼쳐진 상황이 아니다. 문제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더스틴에게 있어서 우연히 레슬링을 알게된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을 발견하였을지라도 그것을 기필코 해 내고자 하는 용기가 없다면 아무리 좋아도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비록 힘들고 피나는 게다가 남과는 다른 훈련 과정을 견디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그 쾌감이란 건 온 세상을 가진 기분과 같은 것일 것이다. 

인간에겐 분명 운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세상엔 그것을 이기는 사람과 이기지 못하고 주어진 운명에 평생 매여 사는 사람 둘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더불어 더스틴이 위대해 보였다.  

난 왜 그리도 핑계가 많고 불평이 그토록 많은 것일까? 핑계대서 남는 건 뭐란 말인가?  

내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단련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한곳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을 그저 말로만 듣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뻔한 소리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그것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의 증언은 확실히 가슴 뛰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스틴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한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타고난불행은 없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은 오직 자기일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난 언젠가 더스틴이 자서전을 써 줬으면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난 비장애인이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그다지 마땅치가 않다. 

이 책은 더스틴을 취재한 것을 엮은 책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딘가 모르게 그 마땅치 않음을 고스란히 다 가지고 있다.  즉 말하자면 온통 더스틴을 찬양하는 일색이랄까?  

물론 더스틴은 칭찬 받아 마땅하지만 너무 호들갑스러우니 주인공이 졸지에 지나친 영웅대접을 받고 그것은 또 다른 면에서 동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스틴이 한국말을 몰라 망정이지(아마 십중팔구는 그러지 않겠는가?) 이 책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를 안다면 좀 한심스러워 할 것 같다. 

또한 책 디자인이나 구성 역시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림이야 그렇다고 쳐도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가 몇 자 안돼보여 정말 싼티난다. 

좋은 취지의 내용을 이 정도 밖에 못 만들어내다니... 저 별점 셋이 안타까울 뿐이다. 좀 성의있게 만들어줬으면 한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어떻게 추천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취지나 기획은 좋아보이는데 막상 뭘 가지고 추천을 하란 말인가? 추천 안하고는 견딜 수 없도록 책 좀 잘 만들어라!  미안한 말이지만 나라면 유투브를 보라고 하지 책을 선듯 권하진 않을 것 같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나만 불행하다고 한탄하는 사람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일단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장애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한 사람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하고 그것은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다.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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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그래픽 노블)>를 리뷰해주세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보경 옮김, 케빈 코넬 그림, 눈지오 드필리피스.크리스티나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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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어찌 하다보니 피츠제럴드의 이 작품을 소설로 영화로 그리고 만화로 보는 호사를 누렸다.  

원작을 두고 영화로 만화로 보는 이 작품은 조금씩 달랐고 과연 누가 어떻게 각색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이토록 달라질 수 있구나 새삼 인간의 창조력에 경의를 보낸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 5년 뒤 또는 10년 뒤에 이 작품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소설로 한 번 읽었을 땐 그냥 이런 특이한 이야기도 있구나 싶었다. 그러나 영화로 보고 만화로 보면서 역시 울림이 있는 좋은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성공요인은 무엇보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화적으로 풀어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영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워낙에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배우의 탁월한 연기 또한 볼만했고 무엇보다 가슴 저미는 사랑이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나 싶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특이한 소설이 있었구나 정도에서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영화든 소설이든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다. 소설은 원작의 맛과 함께 상상력을 배가 시키지만 영화는 실사에 충실해 한 번 보고나면 더 이상의 상상을 불허하게 만든다. 그러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로 얘기할 수 있을 뿐 중간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만화는 어찌보면 소설과 영화 사이의 장단점을 중화시켜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만화로 보는 <벤자민 버튼...>은 영화 보단 원작에 제법 충실해 보인다. 특히 러브 라인을 그다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러브 라인은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관점에선 작품전체를 너무 도드라지게도 만들 수 있다. 원작이 뜻하는 바는 인생이지 사랑은 아니지 않는가?

또한 주인공 벤자민 버튼을 처음으로 등장시킬 때 영화와 만화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는 어린 아이 몸에 얼굴은 우굴쭈굴한 노인의 얼굴이었던데 반해 만화는 노인 그대로를 등장 시켰다는 것인데 이건 사실적이지도 않거니와 억지스러워 영화가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내가 만화로 보면서 느끼는 것은, 처음부터 노인인 벤자민 버튼이 그 정신 연령 또한 노인에 맞게 그렸다는 것인데 나는 오히려 몸은 노인이지만 정신 연령은 어린 아이의 그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뇌가 받아들이는 지식과 생각의 깊이는 몸의 변화가 있다고 해서 같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특별히 뇌를 다치거니 치매에 걸리지 않는 이상엔 말이다. 그러므로 몸은 점점 어린 아이가 되가 돼 정신은 노인의 감각을 유지해야 더 실감이 나지않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잊고 갓난 아이의 평화로움인 상태로 죽음을 맞는다고 했을 때 공감하면서 이런 설정도 나쁘진 않겠구나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때론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이루지 못한 꿈과 상처 받은 과거 때문에 전전긍긍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하면 너무 안타깝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한 인물의 특이 인생 역정의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끝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성찰하게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벤자민 버튼은 자신의 특이한 삶을 비관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평범하지 않지만 그 주어진 조건에 굴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 우린 또 그들 때문에 다시한 번 용기를 내며 살지 않는가? 그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비록 우화이긴 해도 독자들에게 많은 용기와 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범상치 않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만화로 각색되었다는 점에서 작품을 보는 새로운 맛을 선사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여전히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책으로 읽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어린아이가 된 벤자민의 꿈에 괴로운 기억은 머물지 않았다.  

용감한 대학시절과 수많은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매력 넘치던 시절의 추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 

잠자리에 들기 직전 나나가 창밖을 가리키며 "해"라고 부르던 커다란 오랜지색 공이 있을 뿐. 해가 사라지면 눈이 스스르 감겼다...... 

어지러운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다.(1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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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를 리뷰해주세요.
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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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장애인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장애인 자녀를 낳고 싶어할까? 하지만 부부가 장애아를 낳을 확률을 로또 맞을 확률에 비유하며 그들을 키우는 애환을 시종 유머러스하게 풀려고 하고 있다.  

나 역시 처음엔 상당히 공감하며 읽어갔다. '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며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았다. 하지만 점점 읽어가면서 느끼는 건 역시 우울한 얘기일 수 밖에 없고 결국 저자도 쓰다가 자기 연민과 신세한탄으로 빠지지 않았나 싶어 편치않은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책 어디에선가 동정 같은 건 받고 싶지 않다고 썼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있는데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톤 역시 조절을 했다고 하는데 글쎄, 내가 볼 땐 그 톤 조절에도 실패했다고 보여진다. 마치 자기 연민이 지나쳐(장애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된다. 아내도 힘들다고 자기를 떠났다. 어찌 자기 연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자조하듯 중절거리는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머도 섞일 수가 있겠지.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글쓰기엔 자기 치유의 목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과유불급은 아닐까?  그것을 하도 하다보니 자신의 장애 아이의 입장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 성 싶기도 하다. 만일 그의 장애 아들이 아버지가 이렇게 뇌까리듯한 이 글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자기를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빠, 이제 그만 하세요. 저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 아니라구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라면 그랬을 것 같다. 

물론 부모도 한 인간이다. 힘들게 낳은 내 아이가 정상아에 한참 뒤진다면  저자 같이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장애가 자신의 탓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은 특별한 신의 섭리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조롱할지라도 그를 낳은 부모는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뇌까리다가 아이를 조롱하는 것 만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언제까지 신세한탄만 할 것인가? 아이를 좀 더 강한 아이로 만들고(물론 강해진다고 그 아이가 정상아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약간의 의문이 드는 건 이런 지극히 소박한 장애아를 가진 아버지의 글에 페미나 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의도에서 그런 상을 줬을까? 물론 나름 기준은 있었겠지. 이런 글에 열광해서 상을 주리만큼 프랑스도 장애자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밝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나? 내 아이에 대한 인식과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 장애아 부모에게 돌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인식을 바꾸지 못하고 안으로 숨어든 장애자 스스로에게 돌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책을 입안하는 복지 담당 책임자에게 돌려야 하는 것일까? 

가끔 보면 비장애인은 장애자들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다. 장애자가 (아직)되 본적이 없는데 장애자에 대해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그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장애인 당사자와 그의 부모들일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큰 걸 가지고 떠들지 말라. 지극히 작고 디테일한 것 가지고 말해 보라. 그러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비장애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식은 작은 것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몰라서 변화될 의지가 없고 생각이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사는 근처에 장애인 복지관을 짓고 학교를 짓는다면 가만히 지켜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이렇게 말은 하지만 나도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지하면 잔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역지사지로 풀어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씌여진 파급 효과를 생각할 때 어느 일정 부분 장애아와 그 부모를 이해하는데 공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상도 부여해 주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류의 책은 좀 더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 울지 않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새는 없다고 여기 저기서 장애아인 내 새끼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떠들어 대야 사람들은 겨우 그들의 소리를 들을 것 같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내 아이가 세상에 불의한 대접을 받고 산다. 그들의 부모는 언젠가 세상을 떠나겠지만 누가 그들의 아이를 돌봐 줄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책은 자기 얘기를 했다는 면에서 의도는 좋았지만 그 행간을 너무 숨기고 너무 감정에만 호소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박한 것이 미덕인가? 좀 더 아이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그 이해한 바들을 공유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난 그다지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었다. 어찌보면 심하게 말해서 페미나 상도 정말 글을 잘 써서 줬다기 보단 동정이 반 이상이 섞인 상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장애자 부모의 애환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들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는 점.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에이프릴 풀스데이> 아버지로서 (장애자라기 보단) 환자인 아들을 돌보며 느꼈던 점들을 썼다는 점에서 일맥상통 한다는 생각을 했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이땅에 많은 특별한 자녀를 돌보고 있는 부모들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장애아의 아빠는 항상 우울한 표정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의 마스크를 써야 한다.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쳐서도 아니된다. 장애아의 아빠는 웃을 자격도 없다. 웃는다는 것은 최고로 눈치 없는 행동일 테니까 말이다. 장애아를 둘이나 가진 아빠는 곱빼기로 슬픈 모습을 보여야 한다. (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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